(제31강) 베드로! '가이사랴'에 가다! (행 10:23-35)
행10장은 로마군대의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를 청하여 가이사랴에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가이사랴는 갈멜산 남쪽 지중해 연안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항구 도시입니다. 오랫동안 로마가 유대를 지배할 때 총독의 거주지로 유명합니다. 예루살렘의 비참한 최후를 가져온 유대전쟁 때에도 로마의 디도 장군의 본영으로 전략상의 요충지입니다.
행21:8-9절을 보면 빌립 집사가 그곳에서 오래 상주하면서 그의 네 딸을 예언자로 훈련시켜 많은 순례자들을 대접한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 가이사랴 도성에 위대한 만남의 광장이 이루어지는 중에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 로마의 장교와 그리스도의 대 사도인 베드로의 만남입니다. 압제자와 피 압제자의 만남입니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만남입니다. 또 그것은 사랑의 만남, 복음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을 통하여 가이사랴에 성령의 불이 떨어집니다. 학자들은 본문을 '가이사랴의 부흥회'라고 합니다.
▶먼저 고넬료의 신앙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①기도의 사람입니다. 고넬료의 기도생활은 두 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와 생활이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2절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이것은 그가 기도생활도 잘 했지만 일반적인 생활도 바르게 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신앙생활은 기도와 삶이 일치하는 것이며 신앙과 생활이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철야하고 산 기도를 다닌다 하더라도 생활이 경건하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고넬료는 경건했고, 집안이 다 하나님을 믿었으며 유대 백성을 구제하였고, 그래서 그는 칭찬을 받았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의 기도생활은 실제 삶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도의 사람은 경건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이 일치해야 합니다. 경건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입니다. 경외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온 인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생명 구원입니다. /믿/
또 하나는 그는 '항상 기도'했습니다. 이 말은 그의 신앙과 삶의 우선순위를 먼저 기도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시인의 고백대로 새벽을 깨우고 주의 제단에 나와 기도로 하루의 첫 시간을 연 자입니다.
②하늘의 환상을 본 사람입니다. 3-5절을 보면 그가 본 환상이 나오는데 이것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본 계시와도 같은 것입니다. 고넬료와 베드로는 이 환상 중에 서로를 알도록 소개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가이사랴에 사는 로마 장교 고넬료가 욥바에 임시로 와서 머물던 베드로를 만나도록 환상을 매체로 역사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사람들의 이름을 소개해 주고 머물고 있는 장소도 알려주고 초청하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또 베드로가 가게끔 마음이 통하도록 환상을 보여주고 고넬교가 보낸 사람들의 말을 듣게도 하고 성령 자신께서 친히 베드로 더러 가이사랴에 내려가라고 지시까지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시간도, 공간도, 사람도, 환경도, 환상도, 여건도' 모두 주장하사 만남의 관장을 주선하신 것입니다.
③고넬료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7-8절에 보면, 베드로를 청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즉시 사람을 욥바로 보냈습니다. 은혜 받는 비결은 간단합니다. 고넬료처럼 '베드로를 청하라'고 말씀하시면 즉시 그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고넬료는 즉시 그대로 순종한 사람입니다. 미루지도 않고 즉시 사람들을 욥바로 보냈습니다. 불순종은 창3에서 시작된 사탄의 역사입니다. 불순종은 은혜를 가로막습니다. 불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정반대로 합니다. 그러나 순종하면 은혜 받고, 축복 받고, 응답 받고, 만사가 형통합니다.
삼상15장을 보면 사울 왕이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은 결정적인 이유가 나오는데 그것은 곧 불순종입니다. 사울은 제멋대로 처신하고 행동하고 거역하다가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불순종에 있습니다. 순종은 제사보다 더 위대한 행위입니다. 고넬료는 즉시 순종하고 사람들을 욥바로 보냈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신앙입니까?
고넬료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우리도 고넬료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믿/ 성경의 모든 사건은 오늘 우리들에게 관계가 있는 사건입니다. 좋은 신앙의 인물이 나오면 그 신앙의 인격을 배우라는 교훈이고, 나쁜 인물을 보면 그렇게 살지 말라는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아멘!/ ◀제목소개!▶
▶23절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 새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가니라"
"베드로가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베드로는 22절에서 그들의 말을 듣자마자 당장 들어오게 하고 유숙하도록 했다고 했는데, 우리가 그냥 읽으면 손님이 왔으니 그야 당연히 잠을 재워 주어야지 싶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사람, 특히 로마사람을 불러들여 잠을 재운다는 것은 큰 사건입니다.
뒤에 나옵니다만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가서 하는 말이 '내가 너희 집에 오는 것은 위법인줄을 알고도 왔노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이 일 때문에 베드로가 얼마나 곤욕스런 문책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이방인의 집에서 밥까지 먹었다면서'하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이방인들을 한 형제로 따뜻하게 영접한 것입니다.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 새" 베드로는 그들과 한 밤을 보내고 그 이튿날 가이사랴 고넬료에게 갔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난 것은 4일째 되는 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첫 째 날은 천사가 고넬료에게 나타났고, 다음 날에는 심부름 온 하인들이 욥바에 도착했고, 셋째 날에는 베드로가 그들과 함께 가이사랴로 떠났고, 4일째 되는 날이야 가이사랴에 도착한 것입니다.
여기 두어 형제가 같이 갔다고 했는데 11:12절을 보면 6명의 형제와 함께 갔다고 나와 있습니다. '형제'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시 사도들이 여행할 때 두어 명의 성도들과 함께 가는 것이 일반적인 예였습니다. 여기서 6명이 간 것은 베드로가 혼자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공식 수행원을 데리고 간 덕스러운 행동으로써 그는 여러 형제들과 함께 공적으로 일을 감당한 것입니다.
▶24절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여기서도 고넬료의 신앙심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가이사랴 고넬료집에 도착해 보니 고넬료 혼자 기다린 것이 아니라 일가와 친구들을 모아놓고 기다린 것입니다.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이것은 고넬료가 환상을 굳게 믿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동시에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과 신앙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 것입니다. 고넬료는 자기만 구원받고, 하나님의 귀하신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아는 모든 사람을 청하여 함께 듣기를 바랬습니다. 일가 친척을 모으고, 자기의 아는 사람을 모았습니다. 왜 그렇게 한 것입니까? 주의 사자의 말씀을 어떻게 나만 들을 것인가? 지금 죽어 가는 저 사람들이 들으면 함께 구원을 받는다는 뜨거운 애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
우리는 여기서 고넬료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준비하고 사모하는 자에게 쏟아집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였습니다.
시42:1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벧전2:2절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함이라"
한 사람만 준비하면 한 사람만 은혜를 받게 되지만 가족이 함께 준비하면 함께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그릇대로 물이 고이는 것과 같습니다. 고넬료의 경우는 그릇이 좋았습니다. 자신도 준비된 그릇을 가지고 있었고, 가족들도 그릇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통해 온 가족과 친구들이 은혜를 받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준비하고 기다린 것입니다.
사람은 길어서도 오다가다 만날 수 있지만 기다리고 준비된 만남은 정말 행복한 만남입니다. 마25장의 열 처녀의 비유에서 다섯 처녀만 신랑인 주님을 맞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준비와 기다리는 자세였습니다. 열 사람 모두 처녀였고, 신랑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섯 처녀만 기름을 준비했기 때문에 신랑을 맞을 수가 있었습니다.
▶미국 백화점 왕 '존 워너 메이커'는 자신이 경영하는 뉴욕의 백화점에 큰 대자보를 붙였습니다. 그 내용은 전 사원들에게 알립니다.
'⑴주일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회사에 출근하지 말고 교회에 출근할 것. ⑵교회에서 5불 이상의 헌금을 드릴 것. ⑶매주 성경학교에서 성경을 배울 것,'을 부탁했습니다. 우리는 이 한 가지만으로도 '워너 메이커'가 세계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축복은 받을 준비가 된 사람이 받게 됩니다. /아멘!/
▶25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여러분 고넬료를 보십시오, 얼마나 겸손한 자입니까? 하나님의 종 베드로가 그의 집에 들어오자마자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깜짝 놀랄 사건입니다.
▶로마 장교가 발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경우는 다음과 같은 경우 뿐 입니다. '황제에게, 그들의 상사에게 그리고 그들의 신에게'입니다.
베드로는 누구입니까? 황제도, 상사도, 그들의 신도 아닙니다. 그들이 통치하고 있는 유대나라의 종교지도자에 불과합니다. 그뿐입니까? 베드로는 조직적인 교육을 받아본 일도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천민출신, 무식쟁이 어부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고넬료의 인격의 진면목을 보게 됩니다. 아무나 그렇게 못합니다. 얼마나 겸손한 인격자입니까?
여러분 믿음을 가로막고 은혜와 축복을 가로막는 최악의 장애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만입니다. 이 교만이 천사를 사단으로 만들었습니다. 교만은 천사를 하늘에서 땅으로, 지옥으로 떨어뜨렸습니다.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는 갈릴리 어부 베드로, 가난한 전도자 앞에 넓죽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내가 나를 낮출 때, 주님이 나를 높이시고,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기억합시다. /할/
▶26절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베드로가 얼른 고넬료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러면서 '나도 사람이라'고 합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인이라는 점에서 그의 경배행위가 로마 황제 숭배와 관련된 것으로 알고 베드로를 인간에 대한 신적인 숭배는 있을 수 없다는 암시적인 말과 또 로마 황제의 숭배를 부정하는 의도를 가지고 나도 사람이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숭배하면 안 됩니다. 오직 숭배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믿/ 사람은 사랑하고 도와주는 관계입니다. 또 사람은 무시해도 안 됩니다. 사람을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절대로 숭배의 대상은 아닙니다.
계22:8-9절을 보면 요한이 너무 감격한 나머지 천사에게 절하고자 했을 때, 그 천사가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행14:8절을 보면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명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걸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그 성에 사는 사람들이 바울을 보고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고 하면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들의 신당에 쓰는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그들의 제사장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할 때, 바울이 옷을 찢으면서까지 말렸습니다.
행14:14-15절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본문의 베드로는 겸손했고 진실했습니다. '나도 사람이니 이러지 말라'하고 그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나서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겸손한 신앙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전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전의 베드로는 나서기 좋아하고, 남보다 앞서기 좋아하며 명예욕, 경쟁의식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고넬료에게 초청 받은 지금의 베드로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고넬료가 베드로에 무릎을 꿇고 발에 입맞춤을 하니 기겁을 하며 그를 일으키며 '나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전에는 실패했던 베드로가 지금은 굉장히 겸손하고 신실한 종이 되었습니다.
마16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신앙고백을 하고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예수님의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씀하실 때 칭찬으로 흥분되어 있던 베드로는 예수를 가로막고 '그럴 수 없다'고 하자 예수께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칭찬 앞에서 자신이 무너진 것입니다.
또한 세 번 부인 할 것을 말씀하신 예수님 앞에서 너무나 당당했던 베드로는 결국 예수님께서 깨어 기도하고 조심하라는 경고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 번 부인하게 됩니다.
베드로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자신을 남보다 특별하게 여기는 것, 그것은 곳 끝나는 사람입니다. 진실한 사람은 변명하지 않으며, 자기를 아는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힘으로는 진실할 수 없고 겸손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우리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할/
▶27절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의 모인 것을 보고"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라는 말은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상당한 호의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선민의식을 내려놓고 이방인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이니까 이 소리가 별로 실감이 나지 않지만 당시 유대인들과 이방인의 거리는 굉장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방인, 죄인, 세리, 창녀'들이었습니다.
한 때 TV 시청 율이 제일 높다고 하는 '허준'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조시대의 우리 민족의 삶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시대의 양반과 평민과 종의 뚜렷한 신분제도 아래서 '유의태'의원의 아내와 그의 아들 '유도지'라는 인물이 아랫사람을 향하여서 '감히 천한 것들이!'라고 하는 차별의식을 늘 가지고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시대가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의 모인 것을 보고' 고넬료는 먼저 그의 식구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 일가친척들도 불러모았습니다. 가까운 이웃들, 친구들도 부를 만한 사람들은 다 불러모았습니다(24). 이것이 바로 가정교회입니다. 누구든지 얼마든지 쉽게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가정교회입니다.
교회가 해야 될 일 가운데 제일 우선적인 것은 전도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전도를 통하여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는 믿으면 좋고 안 믿어도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천당입니다. 불신은 지옥입니다. 멸망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해야 될 제일 중요한 일은 전도입니다.
고넬료는 전 가족을 총동원했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성경에 총동원에 동참했다가 큰복을 받은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노아의 가정입니다.
창6장 이하에 보면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를 시작할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일부다처가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범죄가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쓸어버린다는 말은 '모두 심판 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엄청난 비를 내리기 전에 노아와 그 가족을 방주에 들어가도록 명령하셨습니다(창7장). 노아 가족이 총동원 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핑계하지 않았습니다. 총동원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핑계하고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들도 홍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다 죽었을 것입니다.
방주는 지금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생명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28-29절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28절을 보면 베드로는 먼저 유대인들의 관습을 설명하고 29절 이후에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왔다고 합니다.
신7:3-12, 레18:24-30절에 보면 이방인들에 관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우상을 섬기는 주변의 이방 사람들과의 접촉이나 결혼은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만들어 낸 물건이나 식품까지도 부정하게 보았습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한 것은 모세의 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위법인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모세의 법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에게 온 것은 모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신 그 명령 때문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유대인인 내가 이방인인 당신 집에 들어와 식사하고 교제하는 것은 다른 유대인들이 알면 큰일이지만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셨기 때문에 온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어떤 제도나 형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 시 했습니다. 얼마나 멋진 신앙의 모습입니까? 우리는 때를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관습에 매여서, 제도에 매여서,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이스라엘이 애굽에 노예가 된 것처럼 우리는 이 많은 것들에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못할 때가 많습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못할 때도 많습니다.
오늘 베드로는 확실하게 고정관념에서 벗어났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 절대 순종하고 벽을 깨뜨려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왔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어디든지 가겠다는 그의 의지를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무슨 일로 불렀느냐?'고 묻습니다.
▶30절 "고넬료가 가로되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배경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나흘 전 이맘때까지' 고넬료가 환상을 체험한 날로부터 나흘이 지났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9절을 보면 고넬료의 하인들이 이틀만에 욥바에 도착하였고, 23절에는 욥바에서 하루를 묵고 욥바에서 가이사랴까지 이틀 길에 도착하였으므로 3박 4일이 지난 셈입니다.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본 구절은 3-4절에서 언급한 천사에 대한 묘사로서 70인역 성경을 인용했습니다. 희고 빛난 옷은 거룩한 천사의 옷으로 자주 묘사됩니다. 1:10절에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나오고, 마28:3절에는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31절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4절과 내용이 같습니다. 다만 4절보다 간략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생들의 기도를 다 들으신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이방인 백부장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믿/
그러니까 참된 기도는 기도하는 첫 시간부터 하나님께 상달이 됩니다. 아니 기도하려고 결정할 때부터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그러니 기도의 응답은 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응답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시142:1절 "내가 소리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 도다." 여기 '기도자, 기도 방법, 기도대상'이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내가 기도해야 하고, 소리내어 기도해야 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소리의 크기는 그 사람의 건강의 힘과 비례합니다. 죽어 가는 사람의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영적 건강도 그 사람의 소리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기도소리, 찬양소리, 고백소리, 전도소리'가 없는 사람은 신앙이 없는 사람입니다.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천사가 고넬료에게 나타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고 하십니다. 성도의 기도와 연보와 구제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빌4:18-19절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할/
다음 32절에서 고넬료는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라'는 주의 음성을 듣고 당신을 청했다고 했습니다.
▶32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느니라 하시기로"
여기 말씀 받는 자세가 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꼭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듣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내 마음대로 듣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 모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또 여기 고넬료는 베드로를 청했지만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 알고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신전의식, 요셉, 다니엘, 지금 이 자리가 하나님 앞입니다. /믿/
▶33절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구도자의 간절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주의 종을 사모하고 기다렸던지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시107:9절에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 여기 '좋은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사 고칠 것을 고치시고, 모든 어려움에서 건져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말씀이 들려 오는 창문을 닫으면 안됩니다. 말씀은 눈으로 듣고, 귀로 듣고, 가슴으로 듣고, 그리고 영혼의 귀로 듣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인적으로 들어야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오늘 고넬료의 말씀을 받는 태도를 보세요!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베드로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그 설교 단이 바로 '하나님의 앞'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신전의식' 이 자세로 우리가 살아야 합니다. 요셉이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고넬료는 예배의 자세가 바로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받는 태도가 참 좋습니다. 우리가 성경 읽는 자세도, 듣는 자세도 바로 되어야 합니다. '칼 바르트'는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고 했습니다.
지금 내가 성경을 읽는 것 같지만 내가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말씀해주시는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나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믿/
그 날 고넬료와 그의 일가는 말씀을 듣다가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44절에 보면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셨다'고 했습니다. 말씀 듣다가 받는 은혜야말로 값진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후 베드로는 그 집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외쳤습니다. 우리 주님을 영접하고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고 설교하였습니다. 그가 설교한 것은 단순한 복음을 제시한 것뿐입니다.
베드로가 말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이 임하여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들에게 세례를 주어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들이 방언을 한 것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하나님의 구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아멘!/
하나님은 구약의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을 사랑하시고 택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요, 택하신 사람들입니다. 옛날 그들에게 나타나서 말씀을 주시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받을 준비된 마음이 절대 필요합니다. /아멘!/
▶34절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베드로의 본격적인 설교입니다. 여기 '외모'는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과 종교적 관습을 가리키는 말이며 형식적인 경건주의를 상징합니다. 또 인간의 겉을 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외모를 보고 감탄할 때 '외모를 보지말고 속마음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새의 말 째 아들 다윗이 올 때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시며 다윗에게 '네 마음이 합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배경이 삼상16:6-7절입니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십니다.
또 하나님이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는다는 뜻은 유대인이라고 더 잘 봐주는 것이 아니고 이방이라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있습니다.
▶35절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인간은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⑴생리학적인 인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식욕과 수면 욕을 가진 즉, 본능을 가진 인간을 말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육체를 가져야 합니다. 본능이라고 해서 무시하거나 경멸해서는 안됩니다. 본능은 하나님의 복입니다.
⑵정신적인 인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성과 양심을 가진 인간을 말합니다. 이성과 양심으로 본능을 절제시키고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⑶영적인 인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영적인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만이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고넬료는 영적인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여기 '각 나라 중'이라고 했는데 유대민족이 아닌 이방나라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고 의롭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심을 베드로가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살다 보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무너지고 비인간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또 우리들 안에 비인간의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물질화입니다. 경제의 논리로 사람과 물건의 가치를 논합니다. 물질의 많고 적음으로 우리는 사람을 평가합니다. 원한다고 다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가졌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두 번째는 동물화를 들 수 있습니다. 동물은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자고 싶은 대로 잡니다. 즉, 본능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인간을 본능을 이성으로 양심으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신격화입니다. 자기를 대단한 존재로 착각하며 삽니다. 교만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임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진실한 사람입니다. '어디에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고, 어디로 가는가'를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고넬료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나라 어떤 민족이나 차별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참된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고넬료의 집에 베드로를 보낸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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