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일 성직자의 사연 엡3:8
에베소서 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제가 파랗게 젊은 시절에, 독일에 유학을 갔을 때
같은 기숙사에서 함께 묶었던 독일 친구 룸메이트가
어느 날 갑자기 신학교에 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독일 교회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저랑 같이 공부하던 시절, 그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놀던 친구입니다.
평범하기 짝이 없던 그가,
어느 날 신학으로 전공을 바꾼다는 폭탄선언을 해서,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시간이 훌쩍 지나서 어엿한 성직자가 되어
한국을 방문한 그를 만나, 같이 식사를 하고 오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았지만,
'성직자가 되어서 제일 좋은 일이 무엇인가?'가 제일 궁금했습니다.
그 독일 친구의 대답이 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세상에서는 강하고 커 보이려고 애를 써야 하잖아요.
재능이든, 사회적 지위든, 경제력이든. 심지어는 키까지 말입니다.
마치 동물들이 싸울 때, 서로 몸을 부풀리는 것하고 꼭 같지요.
그렇게 애를 쓰는 게 얼마나 힘들겠어요? 있지도 않은 걸 있는 척해야 하니...”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습니다.
“제가 성직자가 되어 세월이 흐르니까, 세상에 이게 제일 쉬운 일이었어요.
난 크고, 세게 보일 필요가 전혀 없었어요.
아니 오히려 낮아지는 게 내 임무라니까요.
잘난 척할 필요도 없고, 많이 아는 척할 일도 아니고...
그러니 삶이 얼마나 쉬운지 모르겠어요.
성경은 온통 작아져라, 낮아져라, 무능력해져라, 사람을 오만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버려라,
하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잖아요.”
제가 듣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 졌습니다.
세상은 온통 적을 만나 목을 잔뜩 부풀린 목도리도마뱀 같은 모습으로 가득합니다.
저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키에는 2센티 붙여 말하고,
여덟을 아는 일은, 꼭 열을 채워 아는 듯 허풍을 떱니다.
지친 사람에게 푼돈 쥐어준 일을 두고는.. 내 주머니를 다 턴 듯 과장합니다.
성경에는 ‘작은 무엇’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더군요.
예를 들면 ‘작은 겨자씨’ 말씀이 있습니다.
키 ‘작은 삭게오’가 회개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장면도 나옵니다.
작디작은 겨자씨가, 새들의 보금자리가 될 만큼 큰 나무로 자랍니다.
작은 말씀이 오셔서 세상을 가득 채울 만큼 퍼져 나가는 것을 묘사한 비유이지요.
작아지고 낮아지는 일이 하늘나라를 얻는 지름길이라는 가르침인 듯합니다.
오늘도 그 ‘쉬운’ 작아지기 놀이에 빠져 있을 친구를 기억해 봅니다.
초기 사막교부 실바누스는
‘가진 재능보다 더 큰 명성을 누리면 너희는 불행하다.’고 경고했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성공지향적이고, 거대지향적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돋보이고/인정받고/찬사를 듣기 위해, 세상에 영합하는 길을 걷게 되고,
‘그저 너 자신이 되라’는 말은 평범한 말, 별 볼일 없는 말처럼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
(반론) 그럼 낮아지고, 작아지라는 게
학생은 공부 꼴찌 해도 된다는 얘기고,
사회에서 돈도 못 버는 찌질이가 더 믿음이 좋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겠네요?
(답변) 일단 인격적/내면적/본질적 차원에서 낮아지고 작아지라 입니다.
왜냐면 외적으로 성공하고 높아지고 커진 후에
인격적으로 낮아짐과 작아짐이 없이는.. 그게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것을 우리는 종종 봅니다.
그 다음, 인격적 차원을 넘어서 실제 피부에 닿는 실생활 차원에서
높아짐, 커짐을 인위적으로/억지로/술수를 써서 추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무조건 '낮아짐, 작아짐'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겨자씨 한 알의 예에서도 보듯이, 처음엔 작은 것이로되 나중에 결국은 큰 나무가 된다고 했습니다.
물론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커진다는 뜻입니다만,
우리 사업과 사역에서도,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주도하셔서, 얼마든지 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커지고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회피하고 거부할 필요는 없죠.
다만 인간적, 인위적으로, 남들 눈에 보이도록 크고 높게 할 필요는 없으며
하나님의 섭리로 높고 크게 되더라도 (물론 섭리로 커지지 못해도 상관 없습니다만,
또한 자기가 나태하고 범죄해서 커지고 높아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만, 다 그런 것은 아니고요)
"본질(내면)적으로는" 언제나 낮아짐과 작아짐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된다는 뜻으로.. 그렇게 이해합니다.
우리나라와 달리, 기독교 2천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서구 교회에서는
4세기 때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이후, 교회가 건물을 크게 짓고, 세력화를 추구하다가
본질을 잃어버리고 타락한 지난 1600년의 역사를..
너무나 생생하고 뼈속 깉이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을 겁니다.
아마 그래서, 위의 독일 성직자처럼
그런 결심을 더욱 굳게 할 것으로.. 상상됩니다.
또한 그게 성경적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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