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마9:1~8
◑1. ‘주변 사람’의 믿음도 매우 중요하다.
본문은,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지붕을 뚫고,
침상채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리는 장면인데,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라고 하셨다.
주변 사람의 믿음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마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주변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죄용서하실 수 있는가?
지금 본문의 상황은, 환자의 믿음이 아니라,
환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 네 친구의 믿음이다.
(성경에 ‘친구’란 말은 없지만, 부르기 쉽게, 네 사람을 ‘친구’라고 가정해서 보자)
물론 환자도 믿음이 있어서, 모든 상황에 동의를 했겠지만,
성경 본문에는, 환자의 믿음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고,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했는데 마9:2
그것은 ‘네 사람의 믿음’이었다.
이 모든 상황에서 ‘주도적인 믿음’을 행사한 사람은
그 네 친구들이었다.
그 네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고, 그의 죄까지 용서(구원)해 주셨다.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게 될 때,
물론 그 사람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만,
그 이전에,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부모든지/친구든지/이웃이든지
다른 사람의 믿음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주님의 은혜가 임하기까지는,
주변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오늘 이 특별새벽기도회에 나와서 기도하는
여러분의 기도와,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여러분의 자녀와/가족과/구역식구들을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다.
누군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는데 있어서,
주변 사람들의 믿음도, 귀중하게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본문이 주는 귀한 통찰력 insight 이다.
▲네 죄가 용서 받았느니라.. 마9:2
이 네 친구들이, 힘들게 지붕을 뜯어가면서, 환자를 내리면서 기대했던 것은
‘네 병이 나을지어다!’ 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일 먼저, 그 중풍병자에게 하신 말씀은
‘네 죄가 용서 받았다!’ 이었다.
어쩌면 기대가 깨어지는 말씀이었다.
4친구와 병자가 절실히 필요로 했던 것은, 병고침이었는데,
예수님은 ‘죄용서’에 관한 말씀을, 제일 먼저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 황당한(지붕 뜯는) 사건을 통하여,
오히려 핵심적 복음 메시지를 전해주고 계시는데...
▲이 환자는, 회개하지도 않았다. (그런 말씀이 성경에 안 나온다.)
단지 병이 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아왔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네 죄가 용서 받았다!’고 하셨다.
회개 안 해도.. 우리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가? ★
우리가 보통 상식적으로 알기는,
사람이 먼저 회개해야 하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용서해 주신다.
그런데 본문은, 그런 우리의 일반 상식과는, 다른 면을 보여준다.
그 중풍병자가, 자기 입술로 죄를 고백하기도 전에, 예수님이 용서해 주신 것이다.
회개에.. 여러 측면도 있으므로, 우리가 다양한 측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회개하기도 전에,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을.. 성경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물론 이들은, 나중에 회개 했을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를 이미 용서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도 함께 고려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조건부 용서’가 아니라, 네가 회개하면 내가 용서해 주겠다.
아예 처음부터 ‘용서로 시작’하신다는 것이다.
십자가 안에서, 이미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가 주어져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 각자가 그 품으로 들어와서 회개해야 하지만.. 회개보다 용서가 먼저이다!
우리 각자가 회개했으니까,
그 대가로 용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의 무대>가 마련되어져 있어서,
우리가 그 품에서 회개하고, 용서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에게 베풀어져 있는 그 용서를
우리가 체험하고, 각자의 은혜로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가 자연적으로 뒤따르게 된다.
①눅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 아직 거리가 먼데도,
아버지가 달려 나가서, 그 아들을 맞이하고, 입을 맞춰 주셨다.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한 것이,
아들이 먼저 회개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돌아오기 이전부터, 회개하기 이전부터,
아버지는 이미 그를 용서하셨다.
용서하고, 그 용서의 장을 미리 다 만들어 놓으시고 (잔치 계획도 다 있으셨다.)
둘째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다.
그래서 거리가 먼 데도.. 달려 나가서, 아들을 껴안고, 아들을 맞이했던 것이다.
아들이 무릎 꿇고, 아버지께 회개하기 전에도.. 벌써 다 용서하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메시지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회개가 중요하고, 회개가 꼭 필요하지만,
그것이 구원과 사죄받음의 조건이기보다는,
주님은
이미 용서하시고, 이미 죄인을 맞이할 준비를 다 해 놓으시고,
죄인들이 주께로 돌아오기 원하신다. (물론 나중에 회개하게 되겠지만..)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도
‘당신이 용서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죄를, 예수 안에서,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를 전하는 것이다.
②막1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다.
그래서 종종 ‘회개’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물론 회개가 중요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것이다.
순서를 보시라. '회개'보다, '하나님 나라'가 먼저이다.
우리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임했기 때문이다.
‘용서의 나라, 사랑의 나라, 화목의 나라’가 임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죄인들이
용서 받고,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 장이 다 마련되어 있으니까,
이제 그 장(stage,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회개를 하는 조건부로,
그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 나라 안에 들어가서, 회개하게 되겠지만...
그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왔기 때문에,
우리에게 회개가 가능하고, 그 나라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회개해서, 내가 더듬어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 용서의 나라’가 내게 임했기 때문에, 내가 ‘죄 용서의 회개’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이며,
바울이 이것을 선포했던 것이다. ☞바울의 복음전파의 동기 의식
◑2. 그들의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인가?
▲1. 장벽을 뚫는 믿음
세상에, ‘장벽을 뚫지 않고, 일을 하겠다’는 사람은..
이론가에 불과하지, 실제로 실무자는 아니다.
실무자로서 일을 추진하다보면.. 반드시 예기치 못한 장벽을 만나게 되어 있고,
어떤 일을 성사시키고, 완수하려면,
그 장벽을 반드시 넘어야 한다는 것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네 친구가, 중풍병자를 메고 왔을 때,
거기에는 장벽이 있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막혀 있었던 것이다.
이때 네 사람들은, 장벽에 가로막혀 포기하기 보다는,
장벽을 뚫고 나가는 길을 택했다.
그것은 지붕을 뚫어서,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리는 일이었다.
사명자(소명자)와 非사명자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사명자는.. 난관이 닥치면.. 그것을 뚫고 나아간다.
비사명자는.. 난관이 닥치면.. 중단하거나, 뒤돌아선다.
그래서 보통 ‘주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신학교에 가려는 사람은,
확실한 사명을 받고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간에 만나는 무수한 난관과 장애물을 돌파할 힘은,
‘사명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아니면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본문의 ‘네 사람’은, 장벽을 만났을 때,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장벽을 뚫고(지붕을 뚫고) 나아갔다.
※당시 팔레스틴의 지붕이나 벽은, 나무로 골조를 세운 뒤에
그 사이를 진흙과 짚으로 채워 넣었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흙집)
지붕이나 벽을 쉽게 뚫을 수 있었다고 한다.
▲2. 네 사람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다.
만일 이들의 마음 속에 의심이 있었다면,
‘이 환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도, 치료가 될지, 안 될지 모른다’는 의심이 있었다면,
그런 지붕을 뚫는 행동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네 사람은,
‘이 환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도, 반드시 고침을 받는다’는 절대적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지붕을 뚫는 모험까지 감행했던 것이다.
오늘날, 예수님 시대처럼 똑같은 신유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물론 신유기적이 똑같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육신의 치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치료요, 영혼의 구원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그의 영혼이 반드시 치료되고, 구원 받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난관을 뚫고서, 계속 전도할 수 있다.
오늘날, 말씀사역자들에게, 종종 이 확신이 흔들릴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겨자씨와 같이 반드시 자라서, 열매를 맺을 것이다’는 확신이다.
이 확신이 흔들리는 이유 중 한 가지는, 그 결과가 너무 더디게 일어나기 때문인데..
그래서 사역자들은,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만, 그 믿음, 그 확신을 가지고서, 계속 씨앗을 뿌리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의 증거는.. 보통 <절박함>을 갖게 된다.
‘저 사람은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돼!’
‘저 사람은 반드시 말씀을 들어야 돼!’
이런 절박함을 가진 사람은.. 믿음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증거다.
‘저 사람은 예수를 믿든지 말든지.. 다음에 믿어도 되지 뭐!’
‘저 사람은 말씀을 듣든지 말든지.. 다음 기회에 들어도 되지!’
이렇게 절박함이 없다면.. 지금 내 믿음이 식어있다는 증거가 된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전도를 하면, 보통 반응은
‘내가 요즘 좀 바쁘거든.. (그러니까 못 간다)’이다.
이때 식어버린 믿음을 가진 신자는
‘할 수 없지 뭐, 언젠가는 돌아올 때가 있겠지..’ 하고 포기해 버린다.
그러나 본문의 ‘네 친구’들처럼, 절박함을 가진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한 발 앞으로 더 다가갈 것이다.
‘너는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영영 구원 받을,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놓칠 것이다.’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성도는
반드시 절박한 믿음을 갖게 되고,
그 절박한 믿음을 가진 성도는, 반드시 난관을 뚫고, 복음의 열매를 맺는다.
▲3.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서.. 기꺼이 대가를 치르는 믿음
지붕을 뚫은 것을, 고쳐주어야 하는 대가를.. 그들은 나중에 치렀을 것이다.
네 사람은, 자기 친구가 예수님을 만나는 데 발생하는 대가를..
그들은 미리 계산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대가를 미리 계산했더라면,
아마 무리하게 지붕을 뚫지 않았을 것이다.
한 생명이 너무나 소중한 것을 아는 사람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대가로 여기지 않는다.
보통 부모는, 자기 자녀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희생한다.
기꺼이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그 자녀가, 자기에게 너무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 생명이 너무나 고귀하고 소중하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거기에 발생하는 비용, 대가, 손실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
대가와 비용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지만,
일차적 고려대상이 아닌 것이다.
일단 일을 먼저 성사시키고 나서.. 대가는 나중에 계산한다.
오늘 우리들 가운데도,
발생 비용과, 치러야 하는 대가 때문에,
전도와 선교사역에.. 멈칫하고, 주춤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에는 ‘믿음 문제’이다.
믿음이 살아있고, 뜨거운 사람은,
한 생명이 너무나 소중한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대가로 여기지 않는다.
본문의 네 친구들이 그랬다는 것이다.
과거에 서울 강남의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잔해물 아래에, 생존자 한 명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잔해를 신속히 치우지 못하고, 아주 살살 걷어내어야 했다.
인근 동네 주민들이나, 관계자들에게는.. 그것이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것이었다.
인근 지역 교통이 다 통제되고, 작업기간이 더 연장되니까..
그러나 <한 생명의 소중함> 때문에
아무도 그 일을 반대할 수 없었다고 한다. ‘빨리 치우자’고 나설 수 없었던 것이다.
▲4. 서로 협력하는 믿음
한 사람이 구원 받기 위해서, 4명이 협력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믿지 않는 남편에게, 아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다.
‘나는 당신이 꼭 예수 믿고, 함께 교회 가서 예배 드렸으면 좋겠어요.’
가족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데, 딸도
‘아버지, 제발 예수 믿고, 온 가족이 함께 구원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가 출근하는 길에 친한 친구에게 전화가 왔는데,
‘자네, 언제 예수 믿을 거야?’
직장에 가서, 상사에게 결재를 받으러 갔는데, 상사가 결재서류를 돌려주면서
‘나는 자네가 꼭 예수를 믿었으면 좋겠어!’
주변의 모든 사람이, 본문의 네 친구처럼, 이렇게 협력해서 권면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비록 내가 독자적으로, 온전히 그를 전도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의 기도와 권면이, 적어도 그가 구원 받는데, 일부 역할을 하게 되고
보탬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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