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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목양 단상[1,073]〓/영성 사색단상

기독 의사가 바라보는 죽음!/박상은 원장(안양샘병원)

by 【고동엽】 2022. 2. 25.

박상은 원장(안양샘병원)

첫번 부류의 사람들은 죽음으로부터 몸부림치며 저항하다가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사람들

두번재 부류의 사람들은 오히려 그 죽음을 맞이하러 반갑게 달려 나가는 사람들

하루하루의 삶을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가고 싶다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 하였던 내일이다



의사들이 만나는 대부분의 임종환자는 주로 종합병원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경험하게 되고 그 대부분은 노련한 전문의사가 아닌 병아리 의사(인턴 또는 당직의)들이 죽음을 판정하게 됩니다.

저 역시 수련의 시절, 제가 주치의를 맡고 있던 환자가 한나절에 여섯 명씩이나 임종하는 것을 지켜보며 허탈감에 빠졌던 기억이 납니다. 이토록 많은 환자의 죽음을 대하면서 우리 의사들은 최선을 다하기도 하고, 때론 아쉬움과 미련이 남기도 하며, 모든 것이 기계화된 첨단 의료장비를 조작하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죽음에 대해 무뎌져가고, 임종의 깊은 의미를 망각한 채 다분히 생물학적인 현상으로만 받아들이려하고, '죽음에 관해서는 더 이상 깊이 생각하거나 말하지 말자'는 어떤 불문율 같은 것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앞둔 환자를 다분히 객체화하여 의사의 입장에서 늘 생각하기 쉽습니다. 제가 경험한 임종도 환자 입장에서 보면 환자가 경험한 마지막 의사일 것이며 제 앞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던 많은 환자들에게 결국 저는 그들이 질병과 더불어 만났던 무수한 의료인들 중에서 마지막으로 만나게 된 한 의사였을 것입니다. 의사를 떠나서 그에게 있어서 저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었던 마지막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제 앞에는 임종을 맞이하는 한 환자가 누워있습니다. 마치 한 편의 대하드라마와 같고 출애굽기와도 같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회복될 수 없는 병마에 걸려, 이리저리 시달리며 그 동안 여러 의사를 거쳐 이제 마지막 의사가 될 저에게까지 와, 이렇게 제 앞에 누워있는 이 환자….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가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그가 만나던 수많은 사람들 역시 모두 멀어져가고, 이제 잠시의 시간이 지나면 아무런 것 가진 것 없이 신 앞에 서야 할 그 모습으로 지금 제 앞에 누워있습니다. 저 역시, 그에 필적할 만한 우여곡절 속에 여러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한 끝에 의대를 지망해 드디어 의사의 자격을 취득했으나 달리 뾰족하게 이 환자를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초라한 한 내과의사로서 이 환자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토록 파란만장한 삶의 두 주인공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곳에서 마주 보게 된 것은 우연이랄 수 없는 신의 인도하심이라 생각되며 이 만남에는 측량할 수 없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땅에 수많은 의사가 있음에도 하필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저에게 이 환자의 마지막 순간을 맡기신 것은 저를 통해 이 환자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모두는 죽기 마련입니다.
내가 원해서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내가 원하지 않아도 죽음은 찾아옵니다. 어느 날 잘 뛰던 심장이 고요해지고, 코 속을 들락거리던 바람이 잠잠해지면 나는 죽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 죽음은 태어난 순서대로 오지 않으며 어떤 동기로 찾아올지 알 수 없기에 예측할 수 없는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위인들은 혼인집보다 상갓집을 찾는 자가 더 지혜롭다고 말하며, 우리에게 매일 죽음을 준비할 것을 가르칩니다.

죽음은 마치 올림픽의 마지막 종목인 마라톤 대회와 같습니다.
40여 킬로를 최선을 다해 달려온 후 이제 결승점에 도달하는 선수와 같은 셈입니다. 좀 빠를 수도 있으며 늦을 수도 있고, 물을 더 마시고 뛸 수도 있고 덜 마실 수도 있지만, 모두 머나먼 길을 굽이굽이 돌아온 것만은 사실입니다. 오르막과 내리막, 그리고 도심과 강변을 거쳐 이제 메인 스타디움 안으로 들어오면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마라톤을 완주한 선수들을 열렬히 환호하며 영접하게 됩니다.

어쩌면 호스피스는 인생의 경주를 다 마치고 스타디움에 들어오는 선수들을 끝까지 격려하며 환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누구도 한 사람의 일생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테이프를 끊는 순간까지 그들을 격려하며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감격으로 일생을 마치도록 돕는 도우미들인 셈입니다.

치료할 수 있는 암은 우리를 훈련시키는 용광로이며, 치료할 수 없는 암은 하나님께 정결한 모습으로 서기 위한 신부 대기실과도 같습니다. 가족과 의료진, 그리고 우리 모두는 신랑되신 예수님을 신부가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아름답게 가꾸고 곱게 드레스를 차려 입혀 손잡고 신랑에게로 인도하는 길동무와 같습니다.

30년 가까이 내과의사로, 곁에서 지켜본 죽음만도 어느새 3천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지만, 제가 경험한 임종은 두 가지로 선명하게 구별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첫 번 부류의 사람들은 죽음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어떻게든 이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몸부림치며 저항하다가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죽음이 찾아오는 것을 알고서는 오히려 그 죽음을 맞이하러 반갑게 달려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 그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죽음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사람들의 반응은 다르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임종을 앞둔 말기암 환우들에게 가끔 얄궂은 질문을 던져봅니다. 왜 더 살고 싶으시냐고? 며칠 또는 몇 달을 더 사신다면 무엇을 하시겠냐고? 대부분 더 살고 싶은 이유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기 위함도 아니고,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며칠이라도 가족들과 함께 일상의 삶을 더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내는 주방에서 된장찌개를 준비하는 동안, 자녀들과 마루에서 뒹굴고 놀았던 그 일상의 삶이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운 것입니다. 늘상 지내왔던 일상의 삶이, 그리고 늘 가까이 있기에 소중한 지조차 몰랐던 가족들이

임종을 남겨놓고서야 비로소 소중한 줄 깨닫게 됩니다.
이미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 저로서는 당연히 저의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죽음을 지켜본 의사인들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해병대의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라는 구호처럼, 기왕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면 적극적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지혜롭지 않을까요?

머지않아 다가올 나의 죽음을 예견하며, 지금부터라도 언제 죽음을 맞닥뜨려도 주저하지 않도록, 하루하루의 삶을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가고 싶습니다.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 하였던 내일이며, 나의 남은 생애의 첫 날이라는 말이 더욱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 누구도 살아보지 못한 이 하루를 생명을 만끽하며 살아있음을 온 몸으로 느끼며 성실히 살아가렵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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