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라 사61:장 10~11 출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변함없는 명령가운데 하나는 '항상 기뻐하라'입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에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도 ‘항상 기뻐하라’
또한 고린도후서 13장 11절 전반에도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전 세계에서 무서운 테러가 자행되고 있습니다.
폭력이 만연하고 21세기, 대명천지에도 고문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마약은 젊은 세대를 파괴시키고 있고 갖가지 성적인 부패, 사탄 숭배, 자살율의 증가,
가정의 파괴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불경스런 책을 쓴 크리스토퍼 히친스를 비롯한
많은 무신론자들이 전에는 숨어 있다가 요즘은 공공연히 나오고(coming out) 있습니다.
이처럼 21세기의 현실은 기뻐하기 어렵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던 주전 8세기에도 기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주변에서 앗수르, 바벨론 등 강대국들이 일어났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이미 주전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했고
남 왕국 유다도 앗수르가 계속 위협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사야 선지자는 남왕국 유다도 결국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포로 되어 끌려갈 것이라는 운명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기뻐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선지자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본문 10절 전반에는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성도의 기쁨은 어떤 특징이 있는 기쁨인가, 기쁨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세 가지 주제에 대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1. 성도의 기쁨의 네 가지 특징
본문 10절 전반에는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성도의 기쁨이 갖는 네 가지 특징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큰 기쁨(great joy)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8절에서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쁨은 크고 위대하며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둘째, 내적인 기쁨(internal joy)입니다.
기쁨의 원인이 외적인 환경이나 조건의 변화에 있지 아니하고
내적인 영혼의 변화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모친인 마리아가 가졌던 기쁨도 이런 종류의 기쁨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 46~48절에는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 성도의 기쁨은 마음의 기쁨, 영혼의 기쁨, 내적인 기쁨인 것입니다.
셋째, 개인적인 기쁨(personal joy)입니다. 본문 10절,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라는 짧은 구절에 ‘내’ 혹은 ‘나의’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이 말은 남의 기쁨이 아니라 나 개인의 기쁨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넷째, 하나님을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기쁨의 근원이 밖에 있지 않고 여호와 안에 있다(joy in the Lord),
즐거움이 하나님 안에 있다(rejoice in the Lord)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2. 기쁨의 근원 두 가지
본문 10, 11, 각 절은 기쁨의 근원 foundation of joy 을 하나씩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옷’을 입혀 주셨기 때문에 기뻐해야 됩니다.
이것을 ‘입혀주신 의(clothed righteousness)’라고 합니다.
본문 10절에는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은 한 사람이 지옥의 멸망, 죄, 하나님과의 분리, 마귀의 지배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옷을 바꿔 입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 정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눈이 밝아졌습니다.
창세기 3장 7절에는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원래 아담과 하와는 옷을 안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벌거벗은 걸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원래적인 의(original righteousness)를 입혀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범죄함으로 본래적인 의가 사라졌습니다. 몸이 벗은 것을 알게 되고,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게 되며, 벗은 몸으로는 하나님을 뵐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고 다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며 아담을 부르셨을 때
아담이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께서 본래 입혀 주셨던 본래적인 의를 아담이 상실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할 수 없어 벗었으므로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창3:장 21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고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어 입히셨다고 했습니다.
무화과 나뭇잎은 안 되고 가죽옷은 된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무화과 잎으로 만든 옷은 인간의 의를 상징하고 가죽옷은 하나님의 의를 상징합니다.
가죽옷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어야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창세기 3장에서부터 범죄한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어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64장 6절에는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이 아무리 의롭고, 착하고, 선하게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의의 옷으로 입혀 주셨으니
참으로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다.
스가랴 3장 1절로 5절에도 동일한 주제가 반복되어 나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학개 선지자와 함께 바벨론 포로 이후에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성전을 재건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16년 동안이나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학개, 스가랴 두 선지자를 일으켜 유다백성들을 야단치십니다.
그리고 산에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재건을 앞장서서 추진해야 될 두 사람은 총독이었던 스룹바벨과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수아였습니다.
학개와 스가랴는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며 이 두 사람을 격려합니다.
그런데 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사단이 우편에서
“하나님, 여호수아가 대제사장이라고 하지만 저렇게 더러운 누더기 옷을 입고
범죄하는 죄가 있는 자가 어떻게 성전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여호수아를 대적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스가랴 3장 4절에는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처럼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벗고 아름다운 옷을 입게 되었으며
성전 재건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11~12절에는 천국잔치 비유가 나옵니다.
임금님이 아들을 위해 천국잔치를 벌리고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길거리에 나가 아무나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임금님이 잔치에 오는 사람들에게 “너희들 옷이 더러우니까
밖에 있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들어와서 식사를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임금님이 나중에 돌아보니 어떤 사람이 더러운 옷을 그냥 입고 밥을 먹고 있습니다.
“너는 예복을 입고 들어오라고 했거늘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아니했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임금님은 “이 자를 바깥 어두운데 내어 쫓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았다(13절)고 기록되었습니다.
불교나 유교, 혹은 이슬람교신자 중에서는 기독교신자보다 더 의롭고 착한신자도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의롭고 착하게 사는 것만으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왜냐면 사람이 아무리 의롭고 착하다 해도 뒤돌아서는 나쁜 짓을 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10절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기 의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의의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이 천국 앞에 가면 하나님께서
“너는 어찌하여 더러운 누더기를 걸치고 왔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죄사함을 받고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어야
천국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8절에는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성도들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bright and clean linen)를 입은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계시록 7장 14절에는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옷을 입는다는 것을 신학용어로는 ‘전가(imputation)'라고 하는데
성경은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전가를 말합니다.
하나는 우리의 죄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에게 전가되어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셨을 때 우리의 죄도 다 형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믿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죄가 전가되어 십자가의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아 지옥 갈 심판이 면제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급의 심판은 받을지언정 지옥에 갈 심판은 받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의가 믿는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의인이로되 죄가 없는 100% 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100% 의로운 의가 믿는 우리에게 전가되어
의의 겉옷이 되어서 우리에게 입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의인이 되어 천국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에는 다른 것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의의 예복을 입어야 들어가는 것입니다.
의의 예복을 입는 방법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르틴 루터가 발견한 위대한 개신교 원리, 이신득의 종교개혁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첫째는 죄사함(forgiveness)을 받았고
둘째는 의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전가된 의를 받아서 의의 옷을 받았기 때문에 크게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의의 옷을 입은 성도의 모습은 마치 신랑이 사모를 쓰고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한 것 같다고 그랬습니다.
아버지들은 대부분 아들이 더러운 옷을 입고 머리한번 감은 적 없으며
발 냄새가 심하게 나는 여자를 결혼상대로 데려오면 며느리로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온갖 보물로 단장하고 신부의 옷을 입고 나타나면
아버지에게도 그 신부가 매력적으로 보여 며느리로 받아 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의의 옷을 입은 우리를 매력적인 모습으로 보신다고 하셨죠.
이사야 62장 4절에는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바가 될 것임이라’고 기록되었고
5절 후반에도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고 기록되었죠.
‘헵시바’는 ‘나의 기쁨이 그녀 안에 있다(my delight is in her)’는 뜻이고,
‘쁄라’는 '결혼했다(married)'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의 옷을 입은 성도들을 기뻐하고 매력적인 존재로 보시며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로 삼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의의 씨앗’을 심으셨기 때문에 기뻐해야 됩니다.
이것을 ‘심어주신 의(planted righteousness)’라고 합니다.
본문 11절에는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의와 찬송을 열방 앞에 발생하게 하시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영혼에 의를 심어주십니다.
그래서 이 심겨진 의가 씨앗이 되며 움돋고 발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 후반에는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베드로는 이 ‘의의 씨앗’을 가리켜 ‘신의 성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속에 심어 놓으신 신의 성품은 의의 씨앗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씨앗을 싹이 나고 열매 맺도록 잘 가꿔 나가야 됩니다.
성도들의 현세에서의 삶은 이 의의 씨앗을 가꾸어 나가는 과정인데
이 씨앗이 점점 자라나가는 과정을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하고,
이 씨앗이 완전히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되면 그것을 영화(glorification)라고 합니다.
영화는 우리의 형상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완전히 바뀌어 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10절의 입혀주신 구원의 옷은 칭의(justification)를 의미하는 것이고,
11절의 우리 마음속에 심겨주신 의의 씨앗인 심겨진 의는 성화를 위한 씨앗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의를 받고 신의 성품을 받아 이 신의 성품을 잘 키워나감으로써
기쁨을 얻게 되는 존재인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 두 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가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구원의 참 의미인 칭의의 확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의 겉옷을 이미 입은 존재이므로 언제 죽더라도
천국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으며, 이 의의 겉옷은 나의 행실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의라는 것을 확신해야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의심하면 안 됩니다.
이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이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성도들안에 심어주신 의를 움돋게 하는 성화의 과정 보다
세상 일에 더 삶의 초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돈을 벌고, 출세를 해서 얻는 기쁨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달성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다가
그것이 이루어지면 조금 좋겠지만 안 이루어지면 기뻐하지 못하고
‘나는 어쩌다 이런 인생이 되었는가?’ 하면서 좌절하고 슬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복은 세상 목표를 달성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목표도 없이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달성했다고 행복하고, 달성하지 못했다고 불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의의 씨앗을 키워나가는데 최우선 순위를 두고
나머지 목표는 달성하면 감사하고 못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때
행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 실패한 사람, 출세하지 못한 사람이 다 슬퍼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가난할 때, 김치찌개 하나 놓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을 때가 행복했어요.
이처럼 행복은 외적인 조건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데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후서 1장 5~7절에는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이런 삶을 살 때
우리는 실족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벧후1장 10~11절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마치는 말
느혜미야 8장 10절 후반에는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할 때 우리가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의의 겉옷을 입고
내 안에 심어주신 의의 씨앗인 신의 성품을 키워나가는 삶이 하나님께 매력 있는 삶입니다.
의의 겉옷을 입혀주셨다는 입혀주신 의를 확신하고,
심어주신 의를 성숙시켜 나가는 것이 큰 기쁨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입혀주신 의로 천국에 들어가고 심어주신 의로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기쁨이
더욱 넘치게 될 줄로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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