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혜사 성령님 요16:1~33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고별사 입니다.
조금 있으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십니다.
예수님이 떠나면 그들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닥쳐올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회당에서 쫓아 낼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요16:2절).
그들은 울며 애통할 것입니다(20절).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슬픔은 곧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출산하는 여인에게 출산할 때는 고통이 있지만, 아이를 낳으면
아이가 태어난 것이 너무 기뻐서 그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과 헤어질 때 큰 고통을 겪지만, 예수님과 다시 만나는 기쁨이 너무 커서
그 고통을 잊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1,22절).
▲그러나 제자들은 조금 있으면 일어나게 될 이 모든 일들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18절).
그런데도 예수님은 자신이 떠남으로써 제자들이 당하게 될 일들을
누구보다 잘 아시지만, 기꺼이 그들을 두고 떠나시고자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유익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을 통해
제자들에게 보내질 성령님을 통해서 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공생애와 죽으심과 부활, 승천을 통해
마침내 제자들에게 보내질 성령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그분은 제자들에게 와서 어떤 일을 행하실까요?
◑1. 먼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신 후 보내실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성령님은 보혜사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앞에서(요 14:16절),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있을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保惠師)는 '도울 보, 은혜 혜, 스승 사'자를 써서 '은혜로 돕는 스승'이라는 뜻.
보혜사로 번역된 헬라 원어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인데,
주로 법정에서 피고인을 변호하도록 판사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다른(another)이란 말씀에는 예수님 자신이 보혜사이시며, *알로스
또 예수님께서 보내실 성령님도 보혜사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보혜사이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가셔서 파송하실 성령님도 보혜사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님도 본질적으로 예수님과 동일한 인격체이십니다.
▲성령님에 대한 오해
1)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령님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성령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여기기 보다는 힘이나 권능, 능력이나 에너지 등과 같은
기능적인 존재(functional being)로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받는 것을 마치 전기에 감전되는 것처럼 이해하거나,
파워에이드를 마시는 것처럼 이해하거나,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처럼 이해합니다.
자연적 존재인 인간이 초자연적 능력을 가진 영과 접촉하여, 능력이 극대화되는 측면으로
성령님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문제입니다.
2) 성령님에 대한 가장 흔한 또 다른 오해 중 하나는,
성령님을 은사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곧 치유, 방언, 예언 등이 나타나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이해입니다.
그래서 은사를 받으면 곧 성령님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령님의 은사가 나타나는 것을
마치 성령님을 소유한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성령님과 그분이 나눠주시는 은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이해입니다.
이것도 문제입니다.
3) 성령님에 대한 또 다른 오해 중 하나는, 성령님에 대한 지나친 무관심입니다.
'교회 다니면 당연히 성령님도 받겠지...' 라는 정도로만 성령님을 생각합니다.
4)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도
성령님에 대한 무관심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많이 알면 성령님을 받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성경을 통독할 때 유의해야 할 점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면 성령님이 자동적으로 부속되어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큰 오해입니다.
역시 문제입니다.
▲성령님을 특별히 보혜사라고 지칭한 것은,
성령님께서 제자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제자들의 보혜사로서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변호하고,
그들을 도와주셨던 것처럼, 성령님도 보혜사로서 그들을 보호하고 변호하고 도와주십니다.
「보혜사」라고 번역된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은 '곁에 불려온 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변호자, 대변인, 상담자, 조력자 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 NIV에서는 Counselor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을 변호하고, 그들의 상담자요 조력자가 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누군가의 변호자가 되려면 어떠해야 할까요?
의뢰인의 형편을 먼저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변호사는 먼저 의뢰인과 여러 차례 깊이 있는 상담을 합니다.
변호자는 의뢰인을 알 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잘 알아야 합니다.
또한 법조문도 잘 알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은 성경의 저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잘 아십니다.
또한 율법을 가지고 제자들을 공격하는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잘 아십니다.
그 누구보다도 제자들의 형편을 잘 아십니다.
그런 점에서 성령님은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제자들의 '또 다른 보혜사'가 되십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동일한 분이시지만 구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제자들의 보혜사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정한 기간만 제자들의 보혜사로 계실 수 있으셨습니다.
이제 때가 되어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셔야만 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16:28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은 특별합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거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피치 못하게 슬픈 이별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사람으로 오시지 않습니다.
영으로서 오시기 때문에 죽음도 없고 부활도 없습니다. 시공간의 제약도 받지 않으십니다.
어떤 한계도 없이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7절)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에도 성령님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인격적인 보혜사로 오십니다. *위로자, 상담자, 보호하는 변호사
우리가 그 분을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변호하시며, 우리의 상담자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하시고, 우리의 형편을 가장 잘 아시기 때문에
가장 적절하게 우리를 도우십니다.
성경의 제자들에게,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보혜사가 되셨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령님께서 보혜사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을 인식하며
그분과 교제하는 삶을 사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성령님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우리의 깊은 생각을 아시고,
우리의 갈망을 아시고, 우리의 소원을 아십니다.
우리가 교회에서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 대화하는 곳에도 참여하십니다.
식사하는 곳에 함께 하시고, 노는 곳에도 함께 하십니다.
세상에서 혼자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그런 곳에도 성령님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은 속여도 성령님은 속일 수 없고,
사람은 함께 할 수 없어도 성령님은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말뿐 아니라 생각의 목격자이시고, 증언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을 의식하고 그분과 함께 교제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2. 둘째로, 예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실까요?
예수님은 성령님께서 하실 일을 크게 3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세상과 관계한 일이요,
-다른 하나는 제자들과 관계된 일이요,
-마지막은 예수님과 관련한 일입니다.
▲1 성령님께서 <세상에 대해서> 하실 일은 8절에서 요약됩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6:8
(쉬운 성경) “보혜사가 오시면, 그분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잘못 생각한 것들을 책망하실 것이다.”
성령님은 죄, 의, 심판에 대해 세상이 잘못 생각한 것들을 책망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① 성령님께서 <죄>에 대하여 세상이 잘못 생각한 것을 책망하시는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9절).
곧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책망하십니다.
사람들에게는 죄에 대한 각자의 기준이 있습니다.
어떤 문화에서는 죄가 되는 것이, 어떤 문화에서는 죄가 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같은 문화권이라 해도 각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심각한 죄로 여기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는 것은
정결법을 어기는 심각한 죄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민족에게는 그것이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로마인들에게는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 것을 심각한 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오히려 황제를 숭배하는 것이 죄가 되었습니다.
또한 죄에 대한 규정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유교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조선 시대에는 칠거지악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로 여자가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죄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느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연유 때문에, 사람들은 죄란 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산물이고 시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님께서 분명하게 죄라고 지적하시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다'라는 것입니다.
문화나 시대에 상관없이 성령님이 임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다라는 인식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책망한다 convict 는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누군가에게 죄를 드러내 보여주고 회개로 이끈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회개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임하시는 곳에서는 반드시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성령님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② 세상은 또한 <의>에 대해서도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의란 옳음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옳음에 대해서도 각자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근거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예를들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에게는 나름대로 의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한 비유를 말씀해 주셨는데,
거기에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옳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18:11~12
그는 무엇을 옳게 생각합니까?
다른 사람 즉 인간 말종들과 자신이 같지 않은 것을 의롭게 생각합니다.
또한 종교적인 의무를 다한 것에 대해서 자신의 옳음을 주장합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도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옳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흔히 보게 됩니다.
특히 성실하게 산 사람들, 모범생들, 실패를 안 해보고 성공만 한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꼭 그런 사람들만 그러냐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죄를 지어 감옥에 있는 사람도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오시면 의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책망받게 되고,
진정한 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의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심으로써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10절) 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시는 데 그냥 아무 일 없이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장 흉악한 죄인으로서 정죄 받아 십자가에 달리시게 됩니다.
온 세상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들어 올리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아무 죄가 없는 분이심을 온 천하에 공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사건만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성령님은 알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 때문에 죽으셨음을 알게 하시고,
세상에 '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의'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모든 세상의 의가, 누더기 옷과 같은 더러운 의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임하시면 어느 누구도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힘써 구하고, 그 의를 힘입어 살기를 원합니다.
③ 세상은 <심판>에 대해서도 잘못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면 자신들은 구원받고,
이방인들은 심판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심판? 에이 그런 게 어딨어?' 하며
아예 심판에 대해서 무시합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들리실 때
이미 세상 통지자인 마귀가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공중의 권세 잡았던 마귀가 쫓겨나고 “우리 주님과 그리스도께서 이제 이 세상을 다스리시며,
앞으로도 영원토록 다스리실”(계 11:15절) 심판자가 되셨는데
왜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성령님은 책망하십니다.
이상에서 볼 때, 성령님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을 드러내시고
책망하여 회개케 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임하는 곳에서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금도 성령님은 이런 일들을 하고 계십니다.
▲2. 다음으로, 성령님께서 <제자들에 대해> 하실 일은 13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6:13
모든 진리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하신 모든 가르침과 일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가져오셨고, 진리 자체가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 된 하나님이 곧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그 진리를 제시하셨습니다.
이제 보혜사 성령님은 이 진리를 밝히 알리시고,
모든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진리로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여는 일을 하십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든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고,
그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3 마지막으로 성령님께서 <예수님과 관련하여>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서 가르치심과 사역으로 드러내신
진리의 말씀만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십니다.
특별히 가르치심과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드러내심으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십니다(14절).
이런 점에서 성령님은 '예수의 영'으로 불려 지십니다(행 16:7절).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6-1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성령님이 오시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더 잘, 더 깊이, 더 넓게, 더 분명히 알게 됩니다.
성령님은 오직 예수님만을 드러내시기 때문에, 성령님이 임하시는 곳마다
예수님이 드러나고, 예수님이 영화롭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곳에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나고,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곳에 성령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이곳에 오늘도 성령님께서 역사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고, 예수님을 붙들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오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이 오심으로 제자들과 우리들이 누리게 되는 유익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23, 24, 26절에서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3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24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할 것이다.” :26
▲1 성령님이 오시면 제자들은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됩니다. (기도)
제자들은 고난을 당하지만, 그 가운데서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그때 그들은 고난이 잊혀질 정도의, 마음 가득 찬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님에 의지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고,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2 성령님을 받은 제자들은 고난을 당하지만 담대하게 세상을 이깁니다. (승리)
30절에서, 제자들은 이제야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주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심을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시련을 당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혼자 버려두고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때,
그들 또한 예수님처럼 담대해 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그들 또한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의 신앙 생활은 어떠해야 할까요?
성령님은 특별히 말씀과 함께(cum verbo) 일하십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싶다면, 말씀과 함께 해야 합니다.
평소에 성경을 읽고, 매일 아침 첫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고,
성경 공부를 마음을 드려서 하고, 주일 예배 말씀을 귀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말씀과 함께하면
우리는 성령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분명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말씀을 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에게 점점 더 성령님의 역사가 희미하게 경험되고,
그것에 비례해서 점점 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고별 메시지를
우리를 위한 메시지로 듣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파송하신 성령님을 '또 다른 보혜사'로 받았습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성령님의 일하심 때문이요,
우리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알게 된 것도 성령님의 일하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도 성령님이 오셨기 때문이요,
우리가 고난과 어려움 중에도 담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 또한 성령님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볼 수 없지만,
성령님은 분명하게 우리의 보혜사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매 순간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일하시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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