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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 명설교편◑/옥한음목사 설교(66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 빌3:7-9

by 【고동엽】 2022. 2. 3.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              빌3:7-9               

 

예수 그리스도가 너무 좋아 기뻐하고 환호성을 지르는 한 사람(바울)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만이 나의 마음에 공간을 채우는 기쁨이요 찬송이라고 외치는 바울을 본다.

고상하다는 말은 품위나 몸가짐이 훌륭하다는 의미인데,

'휘페레오 excellency' 라는 원문에 비하면 의미가 약하게 전달되는 것 같다.

'최고다~ 그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가장 귀하다'는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바울은 보통 흥분한 것이 아니다.

 

마4:2 비유의 주인공이 생각난다.

요사이 말로 하면 일용직 노동자가 어느 사람의 밭에 들어가 일하다 보물 단지를 발견하고 열어보니

어마어마한 보물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덮고 일을 마치고 돌아와 자기 가진 모든 것을 모아

그 밭을 통째로 사 버린 것이다. 그 밭의 보물이 자기 것이 되니 기뻐 싱글벙글하는 사람이 연상된다.

바울은 자기가 그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 예수님 발견한 것이 너무 좋아서..

 

바울은 특별한 부름을 받은 사도니까 그렇겠지 그것은 오해다.

예수 믿는 우리도 이처럼 흥분하고 기뻐하고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메세지가 이 속에 담겨있다.

 

저(옥한흠 목사님)는 이런 은혜가 그립다. 30대만 해도 그런 은혜를 가슴에 담고 있었다.

5년동안 대학생들과 모이기만 하면 102장을 부르면서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

그 찬양을 부르면서 눈물도 흘리고 감격도 하던 아름다운 때가 있었다.

 

40대때도 이 열정이 식어지지 않았고 자주 자주 제자훈련 하면서

눈물도 흘리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은혜를 느꼈다.

지금은 많이 식어 버린 것 같아 답답하다.

 

이 본문을 택한 것은 저 자신이 이 은혜를 회복하고 싶어 택한 것이다.

성령께서 이 자리에 임하셔서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최고다!

라고 외칠 수 있는 은혜를 누리기 바란다.

 

바울이 이렇게 예수에 푹 빠진 이유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될 수 있을까?

바울이 늘 고민하던 문제였다. 바울은 유대인의 경건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율법대로 선행하면 너는 의로운 자가 될 수 있다고 들은대로 열심히 노력했다.

 

빌3:5-6절, 할례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들 중 순수혈통의 자부심을 갖고 자랐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새파 중에서도 가브리엘이라는 유명한 스승을 만나 특별한 지도를 받았다.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율

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자라 했다. 예수님을 찾아온 청년이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나이까?

율법을 지켜라 하니까 나는 어려서부터 그것을 다 지켰나이다. 자부심을 가지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다.

 

어느 날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고,

동시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는 율법의 선행으로 인정받고 얻는 의가 아니고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만이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의라는 것을 알았다.

그 예수가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이신 것이다.

바울처럼 흠없이 율법을 지킨 사람이 있는데 예수가 왜 죽어야 하나요?

자기가 아무리 의를 행하고 선행을 하려고 해도 하나님 앞에 의 롭다함을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죽으신 것임을 깨달았다.

 

3:9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고후5:21과 비교하면 좀더 실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았다.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은 죄가 되게 하시고, 나는 의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예수의 의는 나에게 주시고 나의 죄는 예수님이 담당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평소에 모시던 혈통, 학벌, 자기 경건, 선행 같은 것들은 다 배설물처럼 취급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다 해로운 것이라,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

오직 나의 의가 되신 예수님만 남았다 한다.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크로스비 여사도 그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 은혜에 감격하여 평생 독신으로 예수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던져 희생했다.

온갖 희생을 다 하면서 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사람이 바뀌었다.

 

인생의 종착점은 죽음이라 생각한다. 죽으면 육체와 영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믿는다.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죽음은 삶의 연장선상에 있는 건널목이다.

넘어가는 곳이지 종점이 아니다. 종점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히9:7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정말 두려운 일이다.

그 자리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의가 우리의 운명을 자랑한다. 내가 가진 의가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시103:3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 하나님의 눈에는 죄가 하나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용납하지 못하신다. 하나님이 만족하실 의가 무엇인가?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의를 가진 자는 영생으로, 아니면 영원한 심판으로 들어가야 한다.

 

세상에서 좋은 것 가지고 있으면 무얼하나? 좋은 그림 가지고 있으면 무얼하나?

행복한 눈물인지 그 그림은 몇 백억 한다는데… 그 작은 그림 하나를 산다. 꼭 만화같은 그림을..

만화같다는 말도 못한다. 무식하다고 할까봐. 미술계의 위선 아닌가?

그런 그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서 455억 입니다 하면 인정을 받을 수 있겠는가?

 

최근 신문에 감동적인 이야기다.

53년 가난할 무렵, 무명 화가가 미군 병사 하나를 사귀어 물감 같은 것을 사 달라고 했다.

빨래터라는 그림을 그 병사에게 주었다. 미국 에서 살다가 이미 80이 넘은 존 닉스라는 어른이

생활이 너무 어려워 그림이 값이 나간다고 하는 말을 듣고 한국에 내 놓았는데

45억 2천만원이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벽에 걸어 두었던 그림 하나가

이 노인에게 충격적인 선물로 다가 온 것이다. "박수근의 빨래터"

 

예수 믿는 우리에게 죄값을 다 지불했고, 율법을 다 지켰기 때문에

우리는 잘 모르고 받았는데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면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 나라를 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값으로 칠 수 있겠는가?

 

엄청난 축복을, 우리 예수님께서 그런 은혜를 주셨다.

기독교 교리중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만큼 장엄한 진리인지 모른다.

다른 모든 것은 사소하고 무의미하게 보인다고 어떤 신학자가 말했다.

사람이 바뀐다. 인생관이 새로워진다. 사랑의 교회 25년 사역을 하면서 많이 본 사실이다.

 

오래전 멀린 케로도스라는 목사, ‘감옥에서 찬송생활로’를 쓴 사람. 전공을 인정받아

감옥에서 나온 그가 복음을 듣고 자기 같은 죄인도 과거를 묻지 않고 의롭다 해주신다는 말씀 앞에

돌처럼 굳어져 있는 마음이 깨어졌다 .

 

그 은혜에 사로잡혀 성품이 변하고 삶도 달라졌다. 평소 애지중지하던 돈가방을 들고 화장실에 갔다.

그동안 불법으로 모아둔 수표와 돈이 가득 든 가방을 열고 그것을 화장실 변기속으로 집어 던져 버렸다.

이 때를 회상하며, 돈 뭉치가 변기에 떨어질 때마다 내 가슴에는 기쁨이 해일처럼 넘쳐 흘렀다.

이 기쁨이 어디로서 오는 것인가?

 

예수 믿으면 의인으로 받아 주신다면 엄청난 진리를 깨달았을 때 이런 기쁨이 오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 사실을 깨닫고 캄캄한 방에서 나온 사람들은

세상을 놀라게 하는 엄청난 일들을 했다. 바울은 로마를 뒤집어 엎어 기독교를 국교로 만든 사람이다.

 

진리가 어둠속에 파묻혀 버린 절망적 세상에 루터가 진리를 깨달았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은혜에 감격해서 그 은혜게 힘을 입고 일어서니

한 사람 때문에 중세기가 달라졌다.

 

영국을 구한 요한 웨슬레. 로마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말씀 때문에 영적 거장이 된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는 매우 걱정스런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런 영적 지진과 같은 변화와 감격과 능력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위협적이고 사악한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 영혼에 계속 오물 같은 것들이 쌓이고 있다.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의 소리가 진동하고 있다.

날마다 무수한 죄를 범하지만 죄의식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교회에 다니고 있다. 우리도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버릇이 생기고 있다.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구원, 하나님 사랑, 심판, 의, 용서, 선행, 믿음, 영생, 영원한 나라 같은

본질적 주제가 되는 말씀에 대해서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들으면 기분 좋은 말씀들만 따라 다니려 한다. 단 것만 좋아하는 어린애 같다.

 

예수 믿는 목적이 무병 장수에 있는 것처럼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품을 개발하면 성공한다는 풍토가

교회안에 만연하고 있다. 이런 것도 중요하고 들어야 되는 말씀이지만, 성경의 부제에 속한다.

주제는 아니다. 밥을 먹어야지 과자만 먹어서 되겠나?

 

예수 믿는 사람이 비관적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예수님이 긍정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바로 가르쳐야 한다. 예수님 때문에 긍정적이 되어야지,

밑도 끝도 없이 긍정을 말하고, 조엘 오스틴처럼 몰몬교나 기독교나 같다고 하는 위험한 말을 하는 것을

우리는 가만히 둘 수가 없다.

우리가 그런 메세지를 좋아한다. 세상 사람들도 좋아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진리인가?

 

목회자로서 늘 불안이 있다.

그분만 믿으면 나를 의인으로 받아 주신다는 이 놀라운 은혜를 제대로 아는 분이 얼마나 될까?

그 은혜에 감격해서 바울처럼 소리칠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이 불안하다 

 

자기 귀에 만족한 메세지만 듣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다면 어떻게 하나 고민이다.

아무리 더러운 죄인이라도 나의 죄값을 치루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기만하면 ,

한번도 죄를 범한 일이 없는 사람처럼 우리를 받아 주신다는 이 놀라운 은혜..

우리는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은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신다. 예수님이 주신 의이다.

하나님이 나를 정죄하시면 예수님을 정죄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정죄하실 수 없다면 우리도 결코 정죄함이 없다 (롬8:1)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예수님이 우리 의가 되신다.

 

그 예수님을 모실 때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정죄하실 수 없다.

인생이 고달퍼도 이 은혜 생각하면 감당할 수 있다.

조금 지나면 주님이 주신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 주저않을 수 없다 .

우리가 받은 은혜까 너무 크기 때문이다.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한 얘기,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

에서처럼 꾸민 야곱이 아버지에게 가서 장자의 축복을 받는다.

아들 위에 손을 얹고 모든 풍요로움과 만인의 복의 원천이 되는 모든 축복을 다 해 버렸다.

그 사실을 놓고 야곱은 스스로 자격이 없었으므로 그 형의 의복에 몸을 숨기고

형의 냄새가 나는 겉옷을 걸치고 아버지에게 나아가 자신이 형인테 하고 축복을 받았다.

우리도 맏형인 예수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의롭게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복음전하다 3번이나 감옥에 들어가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우리 의가 부족하다고 하지 않으신다.

우리 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의 선이 우리의 의를 더 훌륭하게 하거나,

악이 우리 의를 악하게 하지 못한다 우리의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 되심을 믿는가?

그 의를 들고 하나님 앞에 들어가면 영접받을 수 있음을 믿는가? 우리도 바울처럼 외칠 수 있다.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 나의 모든 것은 배설물같다 라고 외칠 수 있다.

 

인생은 잠깐이다. 지나고 나면 안개와 같이 다 사라진다. 마지막 날, 내가 예수님의 의를 들고 서면

의인으로 인정이 된다. 무얼 들고 하나님 앞에 갈 것인가? 예수 믿고 그 의를 나의 의로 받으시기 바란다.

 

17년전 로마서 설교를 할 때,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의가 되심에 감격 해서

춤을 추며 찬송을 불렀었다.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

세상의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네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

 

날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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