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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δεδομένα 18,185편 ◑/प्रवचन पूरा

우리가 가장 소홀히 여기는 큰 죄

by 【고동엽】 2022. 1. 5.

마25장24~30절

금년 한해도 우리 모두가 다 후회없이 살고, 기름지고 축복되게 한 해를 살기를 바랍니다.
닭과 개가 싸움이 붙었습니다. 개가 닭보고 말합니다. “너는 요즘 왜 아침에 꼬끼오하고 울어서 주인을 깨우지 않느냐?” 닭도 개보고 말합니다. “너는 멍멍하고 짖어서 도둑을 잡는 것이 너의 일인데 왜 요즘은 짖지 않느냐?” 둘다 서로에게 ‘꼬끼오’ 하고 울지 않는다고, ‘멍멍’하고 짖지 않는다고 핀잔하며 싸웠습니다. 그래서 둘은 달님에게 재판을 받기로 했습니다.
달님이 닭에게 묻기를 “너 요즘 왜 꼬끼오하고 울지 않느냐?”했더니 닭이 말하기를 “저희 주인은 지금 알람시계를 맞춰놓고 자신이 자고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기 때문에 저는 더 이상 울 필요가 없습니다.” 달님이 개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왜 요즘 멍멍하고 짖지 않느냐?” 그러자 개가 “제 주인이 도둑인데 어떻게 짖습니까?”
주인이 알람시계를 틀어놓고 자던지 그렇지 않던지 닭은 울어야 하고 개는 짖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한 해를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즉 잘못을 잘못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은 축복의 길을 막아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달란트 비유에서 마지막 한 달란트, 앞에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열심히 장사를 해서 배를 남겨 주인이 돌아왔을 때 갑절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큰 칭찬을 받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그것을 받자마자 그 달란트를 땅속에다 묻어 놓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돌아왔을 때 한 달란트를 땅속에서 파내어 그것을 주인에게 가져옵니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이 말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아주 자랑서럽게 말합니다. “주인이여, 여기 당신의 것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인의 것을 한 푼도 잃지 않고 손해나게 하지 않았습니다.” 당당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달란트를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상밖으로 주인의 추상같은 책망이 그에게 떨어졌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 악하다는 말은 ‘너는 본질적으로,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너는 본질적으로 나쁜놈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달란트를 남긴자에게 주고 이 놈을 바깥 어두운데 내어쫓으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큰 책망을 받게 되었고, 너무나 무서운 벌을 받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한달란트를 땅 속에 파묻어 놓았던 종의 문제가 뭘까요? 예수님이 뭘 가르쳐줍니까? 자신은 그렇게 잘못했다고 느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나름대로 한 달란트를 손실을 보지 않고 지켰는데 주인이 볼때는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와같은 우를 얼마든지 범할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는 잘 한 것같은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엄청나게 책망받을 수 있는 그러한 문제를 우리가 보아야 되겠다는 겁니다. 나름대로 자신이 잘했다는 것을 가지고는 좋은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복된 생애를 살고, 건강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이 한 달란트를 땅속에 묻어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사람아!”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합시다. “착각하지 맙시다.” 나름대로 나는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주인이 보실 때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무서운 책망을 내렸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주님께서 이 한 달란트를 땅 속에 파묻어 놓은 종을 가리켜서 악하고 게으르다고 말씀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나에게 적용해서 나에게 이런 부분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사람의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하면,
첫째, 이 종은 주인의 뜻을 무시했습니다.
주인의 뜻을 무시하면서도 자신은 주인의 것을 잘 간수한다고 착각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 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며 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잘한다고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주인의 뜻을 무시했기 때문에 주인은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너는 악한 사람이다.” 주인은 한 달란트를 가지고서 정말 많은 것을 남기기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이 한 달란트를 가지고 내 능력대로 열심히 일해라는 것이 주인의 뜻인데 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 달란트를 땅 속에 파묻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인의 뜻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의 뜻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일했노라고 착각합니다.
이번에 기도원에 갔을 때 제 옆방에 한 부자가 왔습니다.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면서 교사임용고시를 쳤는데 떨어졌고, 아버지는 사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 이 부자가 예배드리고 한 시간이상씩 대화를 하는 겁니다. 요즘 부자간에 이렇게 대화하는 가정이 잘 없잖아요.
그래서 그날 제가 노크를 하고 그 방에 들어가 한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에는 그 분이 제 방에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한 세시간 대화를 했습니다. 이 분은 부인 때문에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업을 해서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기쁘지를 않는 겁니다.
사업을 해서 빌딩을 올려 지하를 술집으로 임대를 주었는데 그 술집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겁니다. 임대료도 몇 천만원 주지 않고, 또 술집 허가증을 자신에게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것을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속이 상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술집을 계속하는게 좋습니까? 안 좋습니까?” 하니 “그게 어떻습니까”라고 합니다. 여러분, 괜찮습니까?
자신이 않하니까 괜찮은줄 알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현명한 생각을 하나님이 주셨어요.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만약 집사님 아들이 이런 문제에 걸려있다면 집사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니가 직접하는게 아니니까 돈 받아 먹어라고 하시겠습니까?” 그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게 정답입니다”라고 해주었습니다.
뭔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고 지나갈 때가 많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한해를 살아가면서, 남은 생애를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뭐냐하면 악한 것인 줄을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이제 이 시간 이후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그런 삶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 한마디도 행동하나도 당신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으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도 “아버지여 이 잔을 할 수만 있다면 옮겨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오늘 우리도 이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가 떨어지고,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내 기분대로 삽니다. 하나님의 뜻은 의도적이던 무의도적이던 무시해버리고 내 판단대로 내 뜻대로 살아가기가 쉽습니다. 이걸 조심해야 합니다. 그 인생길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종이 왜 악합니까? 주인의 뜻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악한 종에게는 좋은 것을 주지 않습니다. 주인의 뜻을 무시했기 때문에....

둘째, 이 종이 악한 이유는 이 종은 책임감이 없는 이기적인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이기적으로 살면서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악한 모습으로 산다고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남에게 구체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고 산다면 자신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삽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땅 속에 한 달란트를 파묻어 놓은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이다.’ 왜 그렇습니까? 만약 이 한 달란트가 자신의 것이었다면 이문을 남기려고 발버둥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의 것이기 때문에 내가 벌어도 주인의 것이 되고, 내가 잃어버리면 내가 다시 갚아야 되고...내게 직접적으로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이라면 나는 손을 대지 않겠다. 나는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오늘 여러분은 인생을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오늘 많은 이 땅의 크리스찬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면서도 너무나 자기 이익에 집착하고 내 이익에 관계가 없는 것은 전혀 터치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관심조차 가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악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냥 교회 와서 은혜받고 돌아가는 생활이 아닙니다. 우리는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나라와 민족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내게 직접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의 이익을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맡은 자리에서 충성하는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이익이 된다면 내가 뛰어들겠습니다. 회사에 이익이 된다면 내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이익이 된다면 내가 그 일에 헌신하겠습니다.
지하철에 사람이 빠져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생명을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내려 그 사람을 구출할 때 온 사람들이 그 사람을 존경합니다. 몇 년전에 일본에서 한국인 대학청년이 일본사람이 전철에 떨어졌는 것을 보고는 뛰어내려 그 사람은 살려내고 자신은 죽었습니다. 그 때 온 일본 사람들이 감동했습니다. 왜 감동했을까요? 너무나 너무나 이기적인 사회속에서 자신을 희생하여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기 이익에만 집착하여 남은 보지 못하고 살면서도 이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여기에 우리의 잘못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남을 비판할 자격이 있습니까? 스스로 속지 맙시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기에 앞서 남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기업과 가정에 복을 넘치도록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기적으로 살면서도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인 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니 이렇게 살아서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셋째, 이 종이 악한 이유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작은 일에 충성하지 않고 무책임하고 게으르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범하는 가장 흔한 잘못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하면서도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하고 있다고,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고 있다고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한해 하나님 앞에서 축복받으려면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귀한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작은 일을 귀하게 보는 사람입니다. 작은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입니다. 따라합시다. ‘우리는 작은 일에 목숨을 걸겠습니다.’
하나님이 맡긴 일이라면 어떤 시시한 일이라도 내게는 시시한 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믿습니까?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이 내게 맡긴 일이라면 작은 일이 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런 사람입니다. 보디발의 가정에 종으로 들어갔지만 종에게 주어진 그 직무가 그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일을 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여러분의 부하라면 너무 행복할 겁니다.
작은 일을 맡겼지만 그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작은 일에 목숨을 거는 겁니다. 얼마나 충성스럽습니까?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배로 남긴 자에게 주인이 칭찬하기를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이 말보다 더 좋은 칭찬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겠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죽은 일에 충성했다는 것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 유학을 가고 그곳에서 조국을 위해서 일하실 때 남의 집에 하우스보이로 들어가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주인이 그 하우스보이인 안창호선생을 물끄러미 지켜본 모양입니다. 일이 끝났을 때 미국 주인이 그 볼품없는 동양인에게 “You are Gentleman!" 주인이 가만히 살펴보니까 아무리 사사로운 작인 일도 너무나 알뜰하게 일을 하는 겁니다. ”당신은 참 귀한 사람입니다.“
요셉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노예로 팔려갔지만 그는 작은 일에 충성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애굽의 총리가 되게 했습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양을 치는 그 작은 일에 충성했을 때 이스라엘의 양무리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그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십시오. 보잘것없은 일에 생명을 거십시오.
여러분의 자녀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테스트하려면 작은 일을 맡겨보면 압니다. 큰 일이 아닌 작은 일을 맡겨보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습니다. 작은 일에 목숨을 거세요.
카터대통령이 왜 존경을 받습니까? 세계 제일의 강국인 미국의 대통령에 있을 때도 충성했습니다만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을 때도 그의 고향인 조지아 주로 내려가 교회 청소를 합니다. 주일학교 교사로 섬겼습니다. “아! 내가 대통령까지 한 사람인데...”라고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교회는 주일마다 카터를 보기 위해서 온 교인이 본 교회 교인들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카터 대통령이 “여러분의 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리세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종은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했습니다. 악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소홀하기 쉬운 너무나 큰 죄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사소하고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이 시간 이후로 고쳐나가기를 바랍니다. 가정주부는 가정에 사소한 일이 있습니다. 이 사소한 일을 점검하고 철저하십시오. 작은 일에 충성하십시오. 그리하여 이 한해도 축복된 삶을 누려나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넷째, 이 종이 악한 이유는 아무 것도 남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간을 선용하지 못했습니다. 기회를 놓쳤습니다. 여러분!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달란트를 주시고 물질도, 시간도, 여러가지 재능도, 공부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주셨는데 땅 속에 파묻어 놓고 그것을 선용하지 못하고 낭비했다면 이것은 악한 것입니다.
남기지 못하면 악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 마지막에 보면 “이 무익한 종”이라고 합니다. 무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제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꼭 기도제목으로 삼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주여 무익한 종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이 기도 꼭 하시기 바랍니다.
무익하다는 것은 아무런 필요가 없는 사람, 아무런 소용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회사에 가면 회사에서도 가장 필요한 사람, 가정에서도 가장 필요한 사람, 교회에서도 가장 필요한 사람, 어디 가든지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익한 사람이기 때문에 악하다고 했습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주의 은혜로 유익한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살아가세요. 어디가도 “그 분 참 귀하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돈이 많아서 귀하고, 능력이 많아서 귀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봉사하기 때문에, 섬기는 마음으로 맡은 자리에서 충성하기 때문에 ‘이 사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라는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남을 헤치지 않는다고 선하게 산 것 아닙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해서 선하게 산 것 아닙니다. 남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했다면 우리는 나쁘게 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저도 산상에 올라가서 기도하면서 질문해보니까 대답할게 없어요. 목사로서 32년을 목회를 했는데 남긴 것이 뭐냐? 대단히 부끄럽더라고요.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아요. 이제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야 되겠나?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 되었습니다.
정말 주님 앞에 섰을 때에 무엇을 남겼는냐? 천지도 모르고 한 달란트 내어 놓고 “주여 보시옵소서. 당신이 내게 주신 것을 가져왔습니다.” 착각 속에서 살다가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날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는다면 그 인생은 실패가 아니겠습니까?
무엇을 남겼는가?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 자신에게 정직해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더 정직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소극적인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가정에 유익을 끼치고, 교회에 유익을 끼치고, 사회와 국가에 유익을 끼치는 주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면 이 한해 뿐 아니라 남은 생애도 하나님이 그 길을 열어주시기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가리켜 “저 사람을 보라. 착하고 충성된 종을 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최낙보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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