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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구하시는 것(미가서 6 : 6~8)

by 【고동엽】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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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구하시는 것(미가서 6 : 6~8)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라" (Let God be God!)하는 명제를 내놓았습니다. 이 말은 그의 사상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루터는 자기 자신이 이 말이 무슨 뜻인가를 스스로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의 뜻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여 주신 길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목적을 나 자신에게 두고 있는 사랑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하나님을 위해서 나를 사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에는 구체적으로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대화라고도 말을 합니다. 이 대화적 관계없이 만나는 만남은 진정한 만남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설사 수십 년을 같이 살았다고 해도 대화가 없다면 동숙인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만남 될 수 없습니다. 만남은 반드시 소통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화, 이 통하는 마음에서 우리는 행복을 느끼게 되고 마음이 통하지 않을 때에 고독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60억이라는 인구가 살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가 고독한 것은 이 대화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이 대화를 연결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원칙 제1조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뜻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세계관, 언어, 과거 경험 등 그가 말하는 언어의 배경이 되는 그 개념을 이해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의 뜻을 모르고는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사랑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대화를 하더라도 내가 말하는 사랑과 상대방의 사랑의 뜻이 다르면 대화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세계관을 이해한다는 것은 대화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귀중한 일입니다.
언제나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해야 합니다. 이 존중 없이 무시하는 가운데서 대화를 하게 되면 상대방에게 자기의 뜻을 단 한 마디도 전달할 수 없게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대화의 기본 자세는 바로 상대방의 세계관과 그 의사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이것을 가리켜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도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마음과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를 믿어야 하고 그에게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절망하는 가운데에서는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고, 상대방이 믿어지지 않을 때 그의 의견을 존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믿을 때 내 의견보다 그의 의견이 더욱 훌륭하여 나의 의견을 고집할 마음이 없어지고 그의 의견을 따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사랑입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항상 자기만이 옳고 자기 생각만이 절대적인 사람은 언제나 고독합니다. 이런 사람은 그 어느 누구와도 대화를 할 수 없으며 사랑을 모르는 참으로 고독하고 비참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자기 의견을 깨끗이 포기하고 찬송가의 가사처럼 "내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고백이 마음 중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평안하고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신앙은 곧 우상 숭배입니다. 많은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서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소원 성취뿐입니다. 왜 그렇게 정성 들여 절을 하느냐고 하면 소원 성취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기독교인 중에서도 몇 년 동안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여전히 소원 성취만을 목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세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자세이며, 아직까지 미신적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믿음이란 이런 미신적인 자기의 소원 성취가 목적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도적인 역사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이 크고 완전하다고 하는 것을 알고 그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뜻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에게 걱정이 있다면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걱정일 뿐이며, 그것만 안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문제삼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믿음입니다.
우리가 흔히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말을 하는데, 그 기도의 응답이 무엇이냐고, 하면 여러 가지로 대답을 합니다. 예를 들면 병을 고쳤다거나 사업이 잘 되었다거나 자기가 원하는 학교에 입학을 했다거나 하는 여러 가지로 간증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아서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이란 오직 하나님께서 이 구체적인 삶의 사건 속에서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재확인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주전 8세기에 많은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것을 요약하면 아모스 선지는 주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하여 설교를 했고, 호세아는 하나님의 인간을 위한 희생적인 사랑에 대하여 말을 했고, 이사야는 참 경건의 실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중심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본 미가서는 의와 긍휼을 행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라고 하는 메세지를 전달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미가서 6:1부터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을 먼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기적으로 보호하여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게 한 과거의 역사를 상기시키며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했느냐는 것을 전제하고, 그 다음 이 확실한 사실 속에서 다시 계속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소원이 먼저 이루어지고 난 후에라야 우리 인간적인 소원도 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채널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도 없고 소원 성취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채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의 뜻을 먼저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뜻과 역행한다면 아무리 많은 수고를 해도 모두 헛수고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제사와 제물을 원치 않으십니다.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드려도 기뻐하지 않으시며,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드려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려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드리는 제사의 성격은 대체로 자기의 소원 성취를 위하여 뇌물로 드려지는 제사가 많습니다. 이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창한 종교 의식을 통하여 드리는 제사일수록 자기 죄를 정당화 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거창한 예식을 통하여 드리는 제사도 받으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죄악을 정당화하기 위한 보상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헛된 제물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것이며 막 마당만 밟을 뿐이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겠으니 다시는 내 앞에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제사가 자기 교만의 표시로 드려질 때도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선한 일을 많이 하고 그리고 예식을 행하는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내세워 마치 목에 거는 훈장처럼 생각하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바리새주의가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제사를 원치 않으십니다.
헤롯왕이 40여 년을 걸려서 대 성전을 지었지만 그후 40년이 못 되어 그것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헤롯왕은 간사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은 것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으로 거창한 성전을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증한 것을 원치 않으셨으므로 그것을 그냥 두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와 제물이 아니라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자신에게 이롭고 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과 안정을 위하여 공의와 사랑과 겸손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도로 교통법을 무시할 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고와 마찬가지입니다. 법을 지키지 않으면 질서가 유지되지 않으며 질서가 없으면 인간은 단 한 순간이라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우리 양심의 법을 주셨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주셔서 우리를 지켜 나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의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공의는 견고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불안과 공포가 있다면 그것은 공의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항상 공포에 떨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대헤롯은 죄를 짓고 그리고 회개하지 않고 마침내 세례 요한의 목을 베고 그리고 어머니와 두 아들을 죽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저녁에 산책을 하다가 가랑잎 소리만 바스락거려도 칼을 쭉 뽑았다고 합니다. 죄를 지으면 이렇게 비겁하고 나약하고 초조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의를 행하는 것보다 견고한 힘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화목하고 하나될 수 있는 것도 이 공의를 중심해서만 있을 수 있습니다. 불의를 중심해서 서로 악수를 하고 맹세를 하는 것은 결코 며칠 가지 못하여 허물어지고 맙니다.
우리가 혹시 회사를 경영하며 직장에서 그들이 하나되기를 원한다 하더라도 보너스 많이 준다고 그들이 하나되는 것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협잡하고 불의를 행하면서 우리 하나 되자고 아무리 외쳐 보아도 하나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정당하고 대의명분이 서고 그것을 위하여서는 모든 수고와 노력을 아낌없이 바칠 만한 의로운 일을 행할 때만이 한 마음 한 뜻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공의를 행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또 "인자를 사랑하며"라고 했는데 이 인자란 케세트 (chesed) 라고 하는 히브리말로서 이 말을 영어로 옮기면 "steel best love" 곧 흔들리지 않는 사랑, 불변하는 사랑 즉 높은 차원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리말로서는 표현하기가 어렵지만 사랑은 대상에 따라서 그 내용이 다릅니다. 나보다 윗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존경이라고 하며, 나와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하며, 나보다 아랫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긍휼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하나의 사랑입니다.
케세트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높은 차원의 사랑 즉 아버지의 마음으로 자녀를 자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창조적이요 절대적이요 불변하는 것입니다. 팽팽하게 맞서 있는 긴장 관계의 사랑이 아니며, 네가 사랑한 만큼 사랑을 받고 있는지 저울질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완전히 베푸는 사랑으로서 조건이 없습니다. 마음을 활짝 열어 놓고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그런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베풀고 나서야 나도 그 사랑을 받을 수 있으며, 이 긍휼을 베풀어야 나도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이 긍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긍휼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가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겸손을 원하십니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볼 때 이 겸손은 최고의 복입니다. 많은 소유보다도 지혜보다도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도 때로는 공의를 행하는 것보다도 이 겸손은 더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
다윗은 의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했으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모세도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는 겸손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겸손이 가장 큰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사람들은 모두 옛날 사람들보다 잘 살고 있습니다. 옛날보다 잘 먹고 잘 입고 그리고 좋은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보다 불평과 원망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습I니다. 이것은 사람이 교만해서 복을 복으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옛날을 돌이켜 보며 조금만 낮게 생각한다면 감사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이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겸손이며 이것이 곧 복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겸손한 만큼 복을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으로 복되게 하기 위해서는 겸손이 필요하며 복을 보존하는 데도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겸손한 만큼 복을 주시고 어느 순간에 이르러 교만해지면 거기서 우리를 낮추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한계입니다. 계속 겸손할 수 있는 사람은 계속 복을 받고, 교만해지면 축복은 그 순간에 끝나고 맙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육체의 가시로 인하여 고민을 합니다. 뼈아픈 고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 고백하기를 자기가 받은 은혜가 너무 많아서 자고할까 보아 자기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기 위하여 육체의 가시 즉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 말을 합니다. 바울은 겸손이 제일 큰 복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위대한 점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겸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겸손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내 인간적인 욕망과 소원을 멈추고,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며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주시고자 하는지, 또한 나로 하여금 어떠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지를 물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좀 더 솔직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채널이 맞지 않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와 인자와 겸손을 주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순간적인 것,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을 달라고 합니다. 주시려고 하는 하나님과 받으려고 하는 인간의 마음이 서로 엇갈린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서는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채널에다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의로운 사람, 긍휼히 여기는 사람, 겸손한 사람으로 만드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므로 어떤 방법으로든지 효과적으로 역사하여 겸손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고 말 것입니다. 나는 부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의롭게 되기를 원하시며, 우리는 강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며, 우리는 지혜와 능력을 바라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겸손해 지기를 지금도 소원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알고 그 뜻을 먼저 이루고 이 길을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루어질 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기도 : 항상 불의하고 교만하고 사랑이 없음으로 인하여 하나님 의 원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많은 실패와 역경을 거듭하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의를 행하고 사랑을 베풀며 겸손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그 안에서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하시옵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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