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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사도행전 10장 9절~16절)

by 【고동엽】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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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사도행전 10장 9절~16절)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 시더라.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복잡한 서울 거리를 다니느라면 종종 애교 있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자동차 뒷유리에 '초보운전'이라고 써 붙인 것이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도 모자라서 '진짜 초보운전'이라고 했는가 하면 아예 노란 병아리를 그려 붙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차는 당연히 속도가 늦습니다. 운전자도 두리번거리게 마련입니다. 뒤를 따라가기에는 다소 위험부담이 따릅니다마는 그런대로 애교 있는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그런 차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지금 저 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내 손으로 직접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해본 일이겠습니다 마는 처음으로 차를 몰고 나가는 기분이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엄청나게 기쁩니다. 천하가 다 내 것인 양 신납니다. 아주 즐거운 시간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굉장히 두려운 시간이기도 합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시간입니다.
죽어도 나만 죽는 것이 아니요 남까지 죽이게 됩니다. 얼마나 위험합니까? 핸들을 힘껏 꽉 잡고는 벌벌 떱니다. 그렇습니다. 기쁘고 감격스럽습니다마는 정신없이 두렵고 떨리는 경황이기도 한 것입니다.
또한 겸손해지는 시간입니다. 돈이 있고 없고, 지식이 있고 없고, 지위가 높고 낮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 그저 존경스러울 뿐입니다. 빠른 속도로 쌩쌩 달려나가는 옆 차를 보면서 '나는 언제나 저렇게 달려볼까'하고 부러워합니다. 운전면허시험을 보러 가서도 그러합니다. 서너 번 불합격하고 보면 합격한 사람들이 마냥 위대해 보입니다. 겸손해집니다.
아마도 일생을 통하여 가장 겸손해지는 때인지도 모릅니다. 이 '병아리운전자'들은 그렇듯 겸손한 마음으로 운전을 하기에 사고가 적은 편입니다. 통계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보험관계자의 말을 들어보면 대체로 운전을 시작한 지 1년에서 1년 반사이, 조금씩 운전에 자신이 붙을 즈음해서 큰 사고를 낸다고 합니다. 교만해져서 그렇습니다. 겸손한 운전자는 사고를 내지 않습니다. 더욱이 처음 운전하기에 엄청난 책임감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는 많이 타보았습니다. 버스도 택시도 타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다릅니다. 내가 직접 핸들을 잡고 차를 모는 것입니다. 전혀 색다른 경험입니다. 새로운 세계에 부닥칩니다. 새로운 눈으로 거리를 보게 됩니다. 새롭게 깨닫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풍자소설 「걸리버 여행기」로 유명한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Swift, Jonathan)는 설교 잘하기로 이름나 있는 성직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유머가 풍부한 목사였습니다. 어느날, 부유하게 사는 한 부인이 찾아와서 상담을 합니다. 아주 솔직하게 말합니다. "목사님이 보시기에는 제가 얼마나 예쁜 것 같습니까?" 그 부인은 아침마다 거울 앞에 앉기만 하면 자신의 예쁜 모습에 그만 황홀해져서 무려 두 시간씩이나 화장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이어 또 묻습니다. "목사님, 이것이 죄가 될까요?" 스위프트 왈 "내 잘난 얼굴 들여다보는 게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단지 오해일 뿐이지요." 그래요. 오해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한 초대교회의 대표자 베드로, 그의 마음속에는 엄청난 감격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그로부터 권세를 얻었습니다. 엄청난 감격과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두렵기만 합니다.
새로운 세계에 부닥칩니다. 환난과 핍박과 비난이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큰 감격과 함께 큰 두려움으로 초대교회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부활신앙 안에서 중생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만나본 사람을 말합니다. 기쁨에 넘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만나서 기쁨에 넘친 사람, 예수님의 부활생명을 체험한 사람, 그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재림을 믿고 그 대망사상을 지니고 사는 사람 또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은 유무 상통했습니다. 함께 나누고 사랑을 베풉니다. 이는 종말론적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보았고, 부활을 보았고, 승천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시 오시리라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오늘 오실 것인가, 내일 오실 것인가--이제나저제나 주님 오시기만 학수고대하며 서로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내것 네것 따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주님 오실 때까지 서로 나누어 쓰십시다.
모든 사람이 필요에 따라 서로 나누는 사랑의 윤리가 그리스도인의 윤리입니다.
한편 나의 뜻대로 나의 의견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오직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받았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느끼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서 주님의 마음을 배웠습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던 자를 나도 사랑하고 주님이 하시던 일을 나도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 :8)"하신 주님의 마지막 분부를 지키기 위하여 전심전력했습니다.
성령에 이끌리어 전도하기에 힘썼습니다. 교회에 봉사하고 구제하라고 세운 집사들, 나아가서 열심히 전도합니다. 스데반은 순교까지 합니다. 하나님의 선교, 이 구속의 역사, 그 큰 대열 속에 모두 끼여듭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형편에 따라 열심히 복음을 전파합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거룩한 사역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생활이 늘 순탄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갖가지 장애가 따랐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려 하는데 옛사람, 옛생활이 자꾸 고개를 쳐듭니다. 예수님의 사람과 옛사람이 함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옛습관, 옛편건, 옛사상, 옛가치관, 이런 것들이 늘 괴롭힙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나는 이제 새사람인데 아무도 나의 이 새 사람됨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알아주지 않을 뿐더러 따라주지도 않습니다. 물질생활도 사회생활도 정치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달라진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변화를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서 고민이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본디 방탕한 사람이었습니다. 무려 13년이나 그런 생활을 일삼다가 어느 날 극적으로 변화하여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사람이 됩니다. 성자가 됩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 옛날 술이나 마시며 방탕하게 놀던 유흥가를 지나갑니다.
그를 알아본 여자들이 뛰어나와 반깁니다. '어째서 그 동안 보이지 않았습니까?' '어서 들어와 놀다 가세요'하며 팔을 끌어당깁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묵묵부답, 무반응입니다. 여자들은 그를 보고 변했다느니 잘난 체한다느니 하며 입을 삐죽거립니다. 그는 갖은 비난과 조소를 다 받으면서 묵묵히 그 거리를 빠져나갑니다. 속으로 그들을 향하여 대답합니다. '당신들이 사람을 잘못 보았소. 당신들이 예전에 알고 지내던 그 아우구스티누스는 죽고 없소.'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새사람입니다.
제가 아는 분이 간증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하루에 담배를 다섯 갑이나 피웠다고 합니다. 술도 매일같이 마셨습니다.
위장에 병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이를 데 없이 허랑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좋아하던 술 담배를 다 끊고 그야말로 새사람이 되었건만 아내가 알아주지 않습니다. 함께 예수 믿어줄만도 한데 남편이 새 사람된 것을 인정하려들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고민이었습니다.
자, 여러분은 얼마나 새로워졌습니까? 내가 새로워졌다는 것을 얼마나 인정받고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나의 세계관이 변화하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생활에 변화가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도 말씀하는 바입니다. 편협한 민족주의, 몸에 밴 풍습, 제도, 윤리, 가치관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켜야 할 터인데 그 개혁이 문제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올포트(G. W. Allport)는 자신의 논문 가운데서 '편견의 본질'을 말한 바 있습니다. 편견이란 무엇인가---편견의 본질을 둘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그 하나는 자신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남을 비난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지위와 권력에 대한 욕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잘난 체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못난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못났기에 일부러 잘난 체하느라 애를 쓰는 것입니다. 게다가 남까지 비난해가면서 스스로를 정당화합니다. 남을 낮추어 나를 높이고 남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의도입니다. 내가 못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아는 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편견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여유가 있고, 내가 넉넉하고, 내가 건강한 인격을 지니고 있다면 누구든지 여유 있게 포용성 있게 덕 있게 대할 수 있게 됩니다. 왜 우리가 이토록 편협해졌습니까? 사람이 시원치 않아서입니다.
베드로, 그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만났고 오순절의 성령 충만으로 말미암아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의 한 번 설교에 3천 명이 회개하였습니다. 하루에 3천 명이나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뿐입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여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벌떡 일으켜 세우는 권능도 나타내 보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탄 없이 전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어 19절에 보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담대하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베드로는 여유도 있고 담력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마는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문화적 편견이 그것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10장은 고넬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넬료는 로마사람입니다.
유대나라는 지금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고넬료는 탈취와 폭력과 압제의 상징입니다.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유대나라 사람 베드로에게는 반갑지 않은 사람입니다. 더구나 고넬료는 군인에다 장교입니다. 아주 기분 나쁜 사람입니다. 민족의 원수입니다. 세상에 복음전할 사람들이 많고도 많거늘 하필이면 그 같은 '원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다니, 영 마음이 내키지 않을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편견입니다. 저는 일제시대에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학교에서 일본말로 공부를 합니다. 우리말을 썼다가는 무서운 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집에 와서는 그 반대로 일본말을 하면 매를 맞고 벌을 서야 합니다. 퍽이나 난처합니다. 그래서 양쪽에서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그러한 과거 때문인지 저는 지금도 '일본사람'이라는 말보다는 '일본놈'이라는 소리가 더 잘 나옵니다. 심지어 일본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 은혜조차 없습니다. 재미가 없습니다. 45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놈' 소리가 나오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편견에서 벗어나기가 이토록이나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유대나라는 로마에 철저히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36년이었지만 저들은 몇 백년 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고넬료, 이 로마사람이 어찌 반가운 상대였겠습니까?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상대입니다. 제아무리 복음 전하는 일이기로니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 그의 집에 들어갑니다. 유대사람은 이방사람의 집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식사도 같이 못합니다. 더욱이 유숙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서슴없이 고넬료의 집에 들어갑니다. 그런 베드로를 고넬료가 어떻게 맞이합니까? 로마 장교로서의 체통도 다 버리고 온 집안 식구와 더불어 이 갈릴리의 어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예를 드렸던지 황송하게 된 베드로가 '나도 사람이라'하고 얼른 일으켜 세웁니다. 베드로는 그 집에 복음을 전합니다.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 규례까지 어기면서 세례를 줍니다.
이방사람에게 복음 전한 사건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문제화하였을 때에 베드로는 이 고넬료 사건을 상기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담대하게 피력합니다. 사도행전 15장 7절로 1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저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는데 내가 무엇이라고 성령을 거스르겠느냐, 규례고 이방민족이고 따질 것 없이 세례를 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막을 수 없다고 당당하게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서로 원수지간이요 도저히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관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운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두 사람 모두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유대사람들은 하루에 세 번, 즉 우리의 시간대로 9시, 12시, 오후 3시로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합니다. 고넬료가 비록 로마사람이었습니다 마는 하나님을 믿어서 유대사람들의 규례대로 하루 세 번씩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아침 일찍 채플에 나가곤 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조용히 기도하느라면 이 시간에 우리 나라에서도 기도하고 있었으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만히 시간을 따져보니 미국이 새벽 5시일 때에 우리 나라는 저녁 7시입디다. 한참 바쁜 시간이 아닙니까? 같은 시간에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 여간 섭섭하지 않았습니다.
고넬료와 베드로가 기도한 장소는 달랐지만 같은 시간에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려다보신 것 같습니다. 베드로도 보시고 고넬료도 보셨습니다.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어 말씀하십니다.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베드로에게도 환상을 보여주시고는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하십니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는 중에 만났습니다. 그야말로 놀라운 역사입니다. 이해관계도, 인연도 없었습니다. 다만 기도하는 중에 만납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청하라 하니 청했고, 응하라 하니 응했고, 가라 하니 갔습니다. 고넬료는 고백합니다.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전합니다. 마침내 은혜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다함께 주님의 말씀에, 주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사랑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를 기뻐합니다. 여기에 어떠한 편견도 개재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떠한 고집도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사랑할 뿐입니다.
구약성경 가운데「호세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호 1:2)."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대로 결혼을 합니다. 아내가 잉태하여 어린아이들을 낳았는데도 정신 못 차리고 과거의 음란한 생활을 계속합니다. 집을 나가 딴 남자의 여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호 3:1)."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옵니다. 그리고는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호 3:3)"-내가 너를 사랑할 테니 너도 나를 사랑하라고 간청을 합니다. 이 사랑에 까닭이 있었습니까? 그가 몹시 괴로워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다고 하십니다. 네가 이 더러운 여자를 사랑하기가 힘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기가 힘들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기에 내가 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랑의 이유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에 복음을 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민족적 편견 때문입니다. 니느웨는 원수의 나라 앗수르의 수도가 아닙니까? 복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본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다 하시면 정한 것입니다.
내가 정결한 것도 십자가의 보혈로요 저가 정결한 것도 십자가의 보혈 때문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도 십자가의 은혜요 저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도 십자가의 은혜일 따름입니다. 이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러합니다. 본문 35절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사람이냐 이방사람이냐, 부하냐 가난하냐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경건한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이 받으신 줄을 내가 깨달았다--진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민족적 편견이나 집단적 편견 따위는 다 버리고 오직 십자가를 이유로 저를 사랑할 수 있을 때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느 선교사가 평생동안 남의 나라에 나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말년에 그는 교회도 없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결심을 하고 선배 선교사를 찾아갑니다.
"제 고향으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선배는 그 일이 무척 어려울 것이라고 합니다. "욕을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하게 여기겠습니다." "조롱할 것이네." "그러면 돌을 던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기쁘게 여기겠습니다." "돌을 던질 것이네." "그리면 칼로 찌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족하게 여기겠습니다." "칼로 찌를 것이네." "죽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겠습니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을 것이네." 그때에 그는 중요한 대답을 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순교자가 된 것으로 기쁘게 여기겠습니다." 그 결심이 이같이 단호한 것을 보고 그제야 선배는 기꺼이 가라고 합니다. 마침내 그는 그 마음 그 정신으로 고향에 돌아가 선교를 하고 교회를 세우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이유로 사랑을 하십니까? 무엇이 사랑의 동기가 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나에게, 나의 과거에 매여 있어서는 안됩니다. 나의 본질, 나의 소유, 이것도 문제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주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것과 주님이 약속하신 종말론적 구원이 있을 뿐입니다. 편견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14장 15절에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저를 생각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 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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