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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삼상15:17~23)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또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기독교의 교리적 신앙고백 제 1조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데 있습니다.
성경 맨 처음 책인 창세기 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기독교의 근본이요 신앙고백의 첫 장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역사의 종결자이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시작도 하나님께 있고 역사의 끝도 하나님에 의해 맺어질 것을 믿습니다. 그 모든 진행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경륜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두 번째 우리의 고백은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빠진 인간들을 친히 구원하고 계십니다. 모든 말씀, 모든 사역을 다 동원하시어 당신의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선택적 역사라고 말합니다. 이 선택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인 우리에게 오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일반적인 혹은 보편적인 구원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환경이나 역사 또는 사람들을 통하여 여러 모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부르시어 구원하십니다. 둘째는 특별한 선택으로 엄격한 의미에서 구원과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도적인 사역으로 은사적 사명적 역사라고도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을 부르시어 구원의 사역에 특별히 고용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만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지식, 그의 경험, 그의 능력 및 그의 환경 등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효과적으로 다 고용하시어 목적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특별한 선택이지만 쓰임을 받는 자가 특별한 사람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그 사람을 고용하실 따름입니다. 아무튼 인간으로서 이 구원의 사역에 들리어 쓰여진다는 것은 최고의 영광이요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이 고난의 길이든 형통의 길이든 문제삼을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시는데, 어떤 사람을 쓰시고, 또한 어떤 때에 버리시는가를 본문을 통하여 찾아 보겠습니다. 우선 부정적인 면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실 때 전혀 상관하지 않으시는 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와 용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사무엘상 16:7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말이지 사람들은 우선 눈에 보이는 외모에 지나치게 치우치고 있습니다. 특히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 그 중에 남자의 90%가 여자들의 외모에 점수를 주고 있습니다. 물론 요즘은 학벌․능력, 심지어 재산까지 따져서 결혼하는 잘못된 경향이 늘어나고 있긴 합니다만 아무튼 외모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옛날 송나라 범문공이라는 사람이 관상쟁이에게 가서 자기가 재상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관상을 좀 봐 달라고 했습니다. 그 관상쟁이는 범문공을 가만히 보더니 재상이 되지 못하겠다고 해서 그는 되돌아왔다가 얼마 후에 다시 찾아가서 의원은 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당시는 의원의 신분이 아주 낮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관상쟁이는 왜 의원이 되려 하느냐고 묻자,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건지기 위해서 재상이 되고 싶었는데 안 된다고 하니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나 돕고 싶어서 의원이 되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관상쟁이는 "당신은 재상이 되겠소"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범문공은 어리둥절하여 "얼마 전에는 안 된다고 바로 당신이 말해놓고 이제 와서 재상이 된다니 어떻게 된거요?"라고 되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관상쟁이는 웃으면서, 관상이란 색상이 먼저이고, 둘째는 골상이며, 셋째는 심상인데, 당신의 골상은 시원치 않아 재상감이 아니지만 심상을 보니 재상이 되겠다고 설명해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외모보다 중요한 것은 분명히 마음입니다. 사람은 심성이 좋아야 합니다. 논어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공이 공자에게 "훌륭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사람을 훌륭하다고 하면 그는 훌륭한 사람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공자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사람을 나쁘다고 하면 그는 나쁜 사람입니까?" 역시 아니라고 공자는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냐고 묻자 "훌륭한 사람이 그를 훌륭하다고 하면 훌륭한 사람이고, 나쁜 사람들이 그를 나쁘다고 하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라고 공자는 대답했다 합니다. 사실입니다. 그를 누가 인정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스스로 자기를 옳다고 인정하거나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인정한다고 옳은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실 때에 비로소 옳은 사람입니다.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꼬마가 키가 빨리 크기를 원해서 엄마에게 자기 키가 270cm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엄마는 어떻게 갑자기 270cm가 되었느냐고 아이에게 묻자, 그는 자기가 만든 자로 재어 보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합니다. 내가 만든 기준으로 아무리 키가 크고 위대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과거를 보지 않으십니다. 그가 과거에 교회를 핍박했느냐 혹은 방탕했느냐가 문제가 안 됩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여 의롭게 만들어 쓰시는 것이므로 과거의 그의 업적이나 경력은 상관이 없습니다. 본문에서도 사울 왕은 아말렉을 이긴 업적을 내놓으면서 자기 잘못을 정당화하려고 합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그 실적과 업적에 대해서 무관하셨습니다. 단지 현재의 겸손과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사람의 능력과 지혜를 묻지 않으십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므로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모세가 처음 하나님 앞에서 사명을 받을 때, 자기는 말을 할 줄 모른다고 변명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호되게 책망하시며 사람의 입을 지은 자가 누구냐, 내가 가라고 하는데 무슨 변명이냐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가진 능력보다도 깨끗한 그릇이 필요합니다. 또한 신앙적 용기와 순종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것들을 중요하게 보십니다.
이제 긍정적인 면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쓰시는가를 본문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겸손한 사람을 쓰십니다. 본문에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겸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삼상 15:17).
사무엘은 사울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을 당시를 회고시키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0:22에 보면 아주 극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사울을 불러서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셨고 사무엘은 명령에 따라 백성들과 함께 사울에게 갔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소식을 듣고 도망을 갔는데, 찾아보니 행구 사이에 숨었다고 했습니다. 상상을 한번 해 보십시오. 보통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이나 큰 사울이 머리를 밑으로 박고 엉덩이를 내밀어 숨어 있었으니 얼마나 겸손하고 순진한 모습입니까? 그는 스스로 작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그를 높이시어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권좌에 앉으면서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 겸손에 지속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은 어느 지위를 얻을 때까지는 겸손하다가 지위를 얻고 나면 변심하기가 쉽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사울도 처음에는 그렇게 수줍어하고 겸손했는데 나중에는 스스로 기념비까지 세웠습니다(삼상 15:12). 기념비란 죽은 다음에 그의 공을 기리는 후세 사람들이 세우는 것이지, 살아생전에 자기 것을 스스로 세우는 우스꽝스런 일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지금까지 살아 있으면서 자기 기념비를 세웠다가 생전에 부끄러움 당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목격했습니다. 자기 공을 자기가 내세워 기념비를 만드는 것은 정말 넌센스입니다. 사울은 처음에 스스로 작게 여겼던 그 겸손을 지속하질 못했습니다. 절대 겸손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건 상관할 것 없이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사에서 전해오는 조만식(曺晩植) 장로님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오산중학교에서 교장으로 계실 때 제자인 주기철 전도사님이 그 학교에서 시무하고 계셨습니다. 어느 주일날, 조장로님은 손님과 이야기하다가 그만 예배 시간에 늦어져서 전도사님이 설교하시는 도중에 들어가셨답니다. 전도사님은 설교하다 말고, "그대로 서서 계십시오"라고 자기 스승을 향해 말했다는 것입니다. 장로님은 순종하여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서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감사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조금도 어두운 기색 없이 교회를 잘 받드셨다고 합니다. 조만식 장로님의 위대한 일면입니다. 신앙적 겸손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누구를 보고 겸손하며 누구를 위한 겸손입니까? 하나님은 신앙적 겸손, 지속적인 겸손을 가진 자에게 일을 맡기십니다.
둘째, 자기 위치를 아는 자에게 일을 맡기십니다. 사울은 어디까지나 정치가로서 왕입니다. 그런데 그가 제사장 노릇을 한 일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13장을 보면, 블레셋 나라와 전쟁을 할 때에 군인들의 사기가 떨어져 그 상황으로는 도저히 전쟁에 나갈 수가 없어 하나님께 먼저 제사를 드리고 나가기로 했습니다. 제물을 다 준비해 놓고 기다리는데, 약속한 시간에 제사장이 오질 않습니다. 7일을 기다렸는데도 오지 않아 사울 왕은 지쳐서 자기의 팔을 걷고 나서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나오니 사무엘 선지자가 도착합니다. 성경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은 제사장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 위치를 떠나 주제넘게 제사장 역할을 하고 만 것입니다. 권력을 가졌다고 교력을 쥐었거나 경제력을 쥔 것은 아닙니다. 각자 해야 할 부분이 따로 있습니다. 사울 왕은 자기 분수를 떠나 망령되이 행동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자기 일보다도 남의 일을 간섭하느라고 바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은 남의 일이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할 말도 없습니다.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하여 바쁜 사람은 자기 일이 엉망인 것도 모르고 돌아갑니다. 결국은 자신은 황폐해지고 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쓰지 않으십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분명히 내가 해야 합니다. 왕이 할 일이 따로 있고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왕이라고 해서 제사장의 일을 할 수 있는 권리는 없습니다. 내게 맡기신 경륜,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충성 되이 행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들어서 쓰십니다.
셋째, 신앙적 인내가 있는 사람을 쓰십니다. 사울 왕은 7일 동안을 기다리다가 참지 못하여 제사를 드렸습니다만 7일만이 아니라 100일이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약속된 날짜보다 늦었다고 해서 편법이 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라도 끝까지 바르게, 끝까지 믿음으로, 끝까지 경건하게 행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났으니 무슨 방법이라도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당치 못한 자세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사무엘 선지자가 약속 시간에 왔으면 될 것인데 왜 늦어서 문제를 만드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늦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기다리는 동안 백성들이 흩어진다고 해서 왕이 제사를 드릴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아니 벼락이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사울은 자기 인내를 지켜야 했습니다. 목적과 방법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적 인내, 절대적 인내가 있었어야만 했습니다.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인내입니다. 상황 변화에 따라서 목적을 바꾸고, 그래서 방법이 변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는 합당치 않습니다.
넷째, 탐욕과 욕심이 없는 사람을 쓰십니다. 본문 19절에 보면 탈취하기에만 급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다고 사울을 문책하고 있습니다. 탐욕은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고 우매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범사에 탐심과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명예에 대한 탐욕, 물질에 대한 탐욕이 없을 때, 밝은 총명과 지혜로써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솔직한 사람을 쓰십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사울 왕에게는 솔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두 번이나 주어졌었는데 그만 놓치고 맙니다.
다시 말하면 책망 받는 기회이면서 구제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었는데, 정직하지 못하여 안타깝게도 그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에 소나 양은 물론 사람까지도 모두 진멸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좋은 것은 거두어들였습니다. 사무엘이 와서 소나 양의 울음소리를 듣고, 이것이 웬 울음소리냐고 사울에게 물었을 때, 바로 이 순간이 정직할 수 있는 기회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솔직하게 자기가 탐이 나서 좀 남겼으니 죄송하다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아니, 이제라도 다 없애겠으니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말할 수도 있었는데, 사울은 변명하기에 바빴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남겼다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정직하지 못한 여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정말 이런 거짓말은 해묵은 거짓입니다. 잘 알다시피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에, 왜 먹었느냐고, 하나님의 물음에 무엇이라 대답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그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고, 하와는 뱀이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고 죄를 변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울의 이 거짓은 얼마나 뿌리깊은 죄입니까? 아무튼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사울은 7일 동안 기다리다가, 제사를 드려 책망을 듣게 되자 그 변명을 백성들이 흩어지기 때문이라고 핑계했습니다. 다윗 왕을 한번 비교해 보겠습니다. 그는 밧세바로 인하여 큰 실수를 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성군 다윗으로 역사 하지만 도덕적으로는 사울이나 다윗은 오십보 백보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위대한 점은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윗을 기록할 때마다 "다윗처럼 정직히 행하고", 또는 "내 종 다윗은 정직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의 그 많은 참회 가운데서 단 한번도 밧세바를 핑계하거나 나무라는 흔적이 없습니다. 그저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라고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결코 누구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정직한 다윗이었기에 하나님은 크고 놀라운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정직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한 어린 형제가 갑자기 부모를 잃었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먹을 것이 없어 난감했습니다. 며칠을 굶다가 생각 끝에 이웃집의 양 한 마리를 훔쳐다가 잡아먹었습니다. 그러나 서툰 도둑질이라 그만 발각이 되었습니다. 양의 주인은 성품이 몹시 고약하여 그 어린이들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강제로 끌어다가 그의 이마에 ST(Ship thief). 즉 양 도둑놈이라고 화인을 찍어 놓았답니다. 그 형은 이 사실이 너무 속상해서 다른 마을로 이사가서 살다가 사람들이 알게 되면 또 이사가고 전전긍긍하다가 너무 분통이 터져 죽어가고 맙니다. 그러나 동생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자기들이 양 도둑인 것은 사실인데 양 도둑놈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사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그날 그날을 성실하게 살아갔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는 훌륭한 덕을 많이 세워서 덕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 어린 동네 아이들이 어른들께 "저 할아버지 이마에 새겨진 ST는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동네 어른들이 대답하기를 아마도 성자(Saint)의 약자로서 ST가 아니겠느냐고 해석을 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사실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비난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하나님 앞에서 솔직할 때, 하나님은 그를 들어서 쓰십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절대적인 신앙, 절대적 순종, 절대적 겸손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들리어 쓰여지는 거룩한 그릇이 되어 그 영광에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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