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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부흥회의 변질과 목회자들의 돈 잔치

by 【고동엽】 2011. 12. 4.

은혜받고, 돈 바치고, 그리고 복받으라!

지금으로부터 114년 전인, 1897년 한국침례교의 창시자인 펜윅(M.C. Fenwick) 선교사님이 주도한 소래교회 사경회는 한국교회 최초의 부흥회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당시 약 300명이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고, 뜨거운 회개의 역사도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는 평양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인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 사경회보다 약 1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한국교회 초기의 부흥강사 목사들은 농어촌과 산간 지역의 작은 교회들을 찾아 나서서 열정적으로 부흥회를 인도하였습니다. 강사 사례비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물론 요즘처럼 편리한 교통수단도 거의 전무했습니다. 버스를 못 타면 트럭을 타고 가기도 했습니다. 또한 교파나 교회의 크기도 차별하지 않고 가능한 모든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기복 설교와 헌금 강요 
부흥회의 본래 취지는 안일해지기 쉬운 신앙생활에 성경 말씀으로 새로운 격려와 활력을 주어, 보다 성숙한 신자와 교회가 되기 위함입니다. 또는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이런 의도가 좋은 열매를 맺어 교회에 큰 유익을 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한국교회의 부흥회가 초기 부흥회처럼 순수한 '말씀 잔치'가 되지 못하고, 부끄러운 '돈 잔치'로 점차 변질되었습니다. 그래서 큰 교회 부흥회를 한번 잘하면 목돈을 챙기는 이른바 '부자 목사'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심한 경우는 집회 중에 걷은 헌금을 사전 약속에 의하여 부흥 강사와 교회가 일정 비율로 나누어 가지기도 합니다. 

이 러다 보니 신도들에게 헌금을 많이 내도록 유도하는 강사가 일류 강사로 대접을 받기도 합니다. 또한 이런 부흥강사들은 담임목사들의 가려운 곳을 잘 알기 때문에, 담임목사 처우 개선이나 십일조 강요 등 평소 교인들에게 직접 요구하기 힘든 사안들을 대신해서 처리해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흥회가 끝나고 나면, 많은 신도들이 시험에 들거나 마음에 큰 상처를 받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부흥강사들이 자주 애용하는 수법들을 몇 가지만 열거해 보면, 우선 주요 직분자들인 장로나 권사들에게 노골적인 헌금 강요를 합니다. 이는 매우 상투적인 수순입니다. 웬만큼 억지를 부려도 그들이 쉽게 교회를 떠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부흥회 때가 되면 헌금 걱정으로 잔뜩 긴장하는 직분자들도 많습니다. 

교회에 피아노나 비품을 새로 헌납하라거나, 담임목사 양복이나 승용차를 사 드리라고 강권하는 일 등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물론 교회 건축 헌금 독려도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입니다. 하여튼 돈을 요구하는 이유는 하도 많아서, 여기에 일일이 다 열거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문제는 그 목적과 수단이 너무 비성경적이고, 인위적이며, 그리고 저질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부흥회의 건전성과 분위기는 교단이나 교파에 따라 다양하게 다릅니다. 사경회 형식으로 성경 말씀을 진지하게 나누는 건강한 부흥회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변질된 부흥회는 주로 '복과 성공'을 노래합니다. 한국교회 초기 부흥회와는 달리 죄, 회개, 고난, 그리고 인내 등 신도들이 부담스러워 하는 말은 가능한 생략하고, 달콤하고 흥미 있는 이야기들을 주로 늘어놓습니다. 그래서 참된 은혜를 받기보다는, 헛바람만 잔뜩 드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여튼 많은 부흥강사들은 마치 복 받는 비법에 대한 전매특허라도 지닌 듯 전국을 누비며, '기복 신앙'을 아주 비싸게 팔아서 짭짤하게 재미를 보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설교를 듣다 보면, '세속적인 복'을 못 받는 사람들은 모두 바보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또한 어떤 부흥회는 웬만한 코미디보다도 훨씬 더 웃깁니다. '웃기는 자장면'으로 소문난 어느 유명 목사님이 그 좋은 예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누구나 세속적 복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부흥강사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세속적인 복을 전혀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부자 청년에게는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세속적인 관점으로만 본다면, 제자 된 삶은 고생길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평생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흥강사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모두 피하고, 주로 구약성경을 즐겨 인용합니다. 구약에서는 '세속적인 복'을 자주 긍정적으로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분들은 구약에 표현된 '세속적인 복'이 장차 신약시대에 받을 '영적인 복'을 예표한다는 사실을 크게 간과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부흥강사들 중에는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오로지 '잘 먹고 잘살자'는 기복 신앙을 부추기는 데에 도가 트신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아울러 이런 복을 받기 위한 '헌금'을 매우 강조합니다. 따라서 입에 꿀을 바르고, "많이 바치면 큰 복을 받는다"고 무당처럼 열창을 하십니다. 물론 이런 무속적 논리는 성경을 크게 왜곡하는 허구적인 주장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헌금을 많이 하고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헌금보다 먼저 그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의 돈 잔치 

건전한 부흥회는 교회에 많은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기복 전도사'들은 오직 세 마디만을 말합니다. '은혜받고, 돈 바치고, 그리고 복받으라'입니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돈'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흥회는 기복 신앙을 이용하는 목회자들의 '돈 잔치'로 변질되었습니다. 

중대형 교회의 경우, 부흥회를 한번 할 때마다 거액의 돈이 들어오고 나갑니다. 물론 들어오는 돈은 모두 교인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헌금이고, 나가는 돈의 상당 부분은 강사 목사의 주머니로 들어갑니다. 언제나 놀라운 일들이 끊이지 않는 한국교회에서는 교인들만 작은 교회에서 큰 교회로 '수평 이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거액의 헌금도 교인들의 주머니에서 목회자의 주머니로 은혜롭게 수평 이동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계속 교회 종탑 위의 높은 십자가에 홀로 계시게 하고, 자기들끼리만 돈을 주고받고 매우 분주합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돈 잔치가 화려하게 잘 끝나면, 아주 은혜로운 부흥회였다고 서로 자화자찬합니다. 해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슬픈 모습입니다. 

특히 유명 강사 목사들 중에는 이를 주수입으로 하여 대단한 축재를 하기도 합니다. 수십 억 부자님들도 많습니다. 물론 중대형 교회 담임목사들이 서로 두터운 강사 인맥을 형성하여, 상호 '교차 초청' 또는 '순환 초청' 등의 수법으로 상대방 교회의 두둑한 부흥회 예산을 사이좋게 나눠 먹는 것도 이제는 더 이상 큰 비밀이 아닙니다. 

한국교회의 기복 전도사들은 부흥회를 크게 두 가지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우선은 신자들을 자극하여 교회의 외적 성장을 추구하는데 이용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복음을 포장하여 기복화하고 돈을 챙기는 것입니다. 이런 태생적이고도 숙명적인 이유로, "십일조를 해야 복을 받는다"는 상습적인 주장은 이들이 몸 바쳐 반복할 수밖에 없는 필수 구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수하지 못한 목회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부흥회는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되는 신바람 나는 장사입니다. 이분들은 신도들의 마음이 진정 뜨거워졌는지, 아니면 단지 찬송하며 박수치던 손바닥만 잠시 뜨거워진 것인지를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일단 아무 데나 뜨거워지면 교세를 확장하는 데에 당장 큰 도움이 되며, 또한 헌금도 더 많이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혹은 많은 교회들이 왜 부흥회에 그토록 열을 올리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크게 경계해야 할 '성령 체험'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일부 부흥회 강사들은 성령 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그 목적은 물론 신도들을 더욱 신비적 신앙에 몰두시켜, 자신들의 추종자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이 성령 체험 역시 '한국교회 사이비화와 미신화'에 큰 기여를 한 주범 중에 하나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성령 체험은 대개 신약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은사'를 의미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방언, 예언, 병 고침이나 기타 신비적 체험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신학적인 논쟁이 적지 않은 매우 조심스러운 사안입니다. 특히 방언이나 예언의 경우, '특별 계시'인 신약성경의 완성과 함께 이미 중지되었다는 견해가 보다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더구나 방언을 한다는 사람들은 많은데, 왜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보기 힘든지요. 또한 어쩌다가 통역한다는 이들 중에도 왜 서로 통역이 일치하지 않는지요. 이를 보더라도, '거짓된 은사'가 만연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기타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특별 계시'인 신약성경의 완결 이후 '더 이상의 계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19세기까지는 '은사 중지론'이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초대 교부들인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은 물론 종교개혁가 루터와 칼뱅 그리고 청교도들이 이런 견해를 지지했습니다. 반면에 역사적으로 주로 이단이나 신비주의자들이 간헐적으로 '은사 지속론'을 지지했습니다. 따라서 19세기 이후로 특히 이단 종파나 사이비 교단에서 이런 성령 체험을 크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거짓된 목회자들로 인해, 성령 체험이란 용어가 너무 남용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부흥회를 빌미로 신도들을 불건전한 신비주의나 고난주의 또는 미신적 신앙으로 미혹케 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미 성령께서 함께하고 계십니다. 신자들은 거짓된 은사에 한 눈을 팔지 말고, 오직 기록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차분하게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성령 체험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초기 부흥회처럼 헌금을 없애자 

한국교회 부흥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신도들을 기만하여 기복 신앙에 빠지게 하고, 간교한 방법으로 돈을 거두려 하는 데에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라도 좋으니 확실하게 해명을 좀 해 보십시오. 한국교회는 왜 모이기만 하면 돈을 걷으려고 합니까. 세인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개신교는 돈에 환장한 교회'라고 감정적인 비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목사들은 자신의 목회 성취를 위해 큰일을 벌이기 좋아합니다. 하지만 불의하게 돈을 많이 거두어 큰일을 하는 것보다, 신도들 믿음의 분량대로 걷어 작은 일이라도 정의롭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 어떤 일도 교회의 성결과 공의보다 우선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돈을 걷는 방법이 너무 치졸하고 무속적입니다. '복받으려면 돈 내라'는 헛소리 좀 그만 멈추고, 교인들에게 헌금의 필요성을 떳떳하고 당당하게 가르치고 '자발적인 헌금'만을 받으면 안 됩니까. 또한 그렇게 무리하게 걷은 돈을 다 어디에 쓰고 있습니까. 어느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는 전체 헌금 중에 겨우 3~4%만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합니다. 작은 교회들은 어쩔 수 없으니 예외로 하더라도, 중대형 교회들마저도 거의 다 자기들끼리 먹고 마시고 흥청거린 셈입니다. 

한국교회는 돈을 삼키려고만 하지 베풀지를 않습니다. 그저 베푸는 흉내만 냅니다. 특히 미자립 교회들을 쳐다보는 대형 교회들의 욕심은 흥부 형님이신 놀부보다 더 심합니다. 그냥 마지못해 언 발에 오줌 누기 정도로 돕는 척만 합니다. 실제로는 소가 닭 보듯이 합니다. 이게 과연 정상적인 주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앞으로 '부흥회 헌금'만은 꼭 폐지하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부흥회를 변질시키는 근본 원인은 결국 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예배는 구약의 제사가 아닙니다. 따라서 반드시 제물을 바치거나 헌금을 하며 집회를 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도들의 초대 교회에서도 그런 '율법적 바침'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계선 목사님에 의하면, 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교회 부흥회에는 별도의 헌금 순서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이 교회가 점차 대형화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모일 때마다 알량한 잠자리채를 돌리며 돈을 걷는 못된 습성을 몸에 익히게 된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과거의 좋은 전통을 버리고, 오히려 갈수록 개악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과거처럼 단순히 은혜만 받는 담백한 부흥회로 돌아가면 안 될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감히 돈으로 갚아야만 하는지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은혜를 거저 나누면 안 됩니까. 그리고 헌금은 평시처럼 주일예배에 하면 무슨 심각한 문제라도 생깁니까. 

아울러 한국교회는 모일 때마다 틈만 나면 돈을 거두는 '고약한 전통'도 함께 폐지하면 좋겠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못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 어디에 무슨 근거로, 모일 때마다 헌금을 요구합니까. 참으로 염치를 모르는 종교업자들이 교권을 쥐고 흔드는 것이 아닙니까. 부흥회뿐만이 아니라 구역예배, 송년 예배, 헌신 예배, 그리고 대형 교회들은 수요 예배와 금요 집회까지도 온통 돈으로 모든 집회를 도배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어설픈 개혁 교회들은 입술로는 개혁신학을 자랑스럽게 떠벌이지만, 하는 행동은 사이비 교단이나 이단 종파들의 간교한 돈 챙기기 수법들을 열심히 배워서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직분자들의 책임이 크다 

그래도 우리 교회만은 건전한 부흥회를 하고 있다고 함부로 자만하지 마십시오. 요즘은 신도들을 기만하는 수법도 더욱 고도화하여, 집회 기간 중에는 성경적으로 올바르고 유익한 설교를 매우 건전하고 은혜롭게 잘하시는 고수님들도 많습니다. 다만 이분들은 집회 후에 조용히 거액의 목돈을 챙겨 가실 뿐입니다. 이처럼 앞모습은 경건하나, 뒷모습은 추잡한 현대판 바리새인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은혜를 많이 받아서 감사함으로 하는 헌금이 왜 나쁘냐고 구차한 변명도 하지 마십시오. 그런 감사 헌금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헌금을 더 걷기 위해 잔 수를 부리고 간교한 방법으로 강요하는 것이 나쁘다는 뜻입니다. 

오 늘날 스스로 건강하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교회에서조차 부흥회는 이미 크게 사이비화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세속화에 깊이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은 부흥강사들이 신도들의 죄책감을 자극하여 교권으로 억압하는 것과 기복 설교를 통한 우회적인 헌금 강요를 당연시하고, 오히려 이를 '은혜스러운 부흥회'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기생하는 이런 거짓 목사들을 모두 몰아내면 좋겠습니다. 이런 저런 교활한 핑계로 헌금을 강요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사례비를 듬뿍 챙겨 가는 그런 잡상인들을 우리는 거부해야 합니다. 저들은 그저 목사 가운을 걸치고 있는 이리들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들을 잘 구별하여 초빙해야 할 장로나 집사 등 교회 직분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중요한 책임을 더 이상 담임목사에게만 미루어서도 안 됩니다. 

진심으로 건강한 부흥 집회를 원한다면, 먼저 부흥회 강사 사례비부터 실경비 수준으로 조정해야 합니다. 만일 사례비가 너무 적어서 나서는 강사가 없다면 뜻이 맞는 목회자들끼리 서로 강단을 교류하거나, 그것도 어려우면 차라리 담임목사를 모시고 자체 부흥회를 하면 됩니다. 그러면 돈만 밝히는 파렴치한 강사들도 점차 사라질 것이고,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복되고 아름다운 집회 문화가 형성될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부흥회가 한국교회 성장에 긍정적 기여를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건만 허락된다면, 말씀에 집중하는 건전한 부흥회는 얼마든지 바람직합니다. 참된 회개, 격려, 감사, 그리고 헌신을 강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숙한 신도들의 자발적인 헌금도 많을수록 좋습니다. 

하지만 교인들을 겁 주고, 억누르고, 속 뒤집고, 울리고, 웃기고, 기만하고, 그러다가 결국에는 거액의 돈을 슬그머니 챙기는 그런 사이비 부흥회는 앞으로 반드시 없어져야 합니다. 이는 거룩한 교회를 장사꾼들이 설치는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매우 부끄러운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눅 19:45~46)." 

목사의 월권 중앙선을 넘었다 

목사의 직무를 제한해야 하는 이유


날이 갈수록 목사가 '교주'가 되고, 교회는 '목사 왕국'이라는 가슴 아픈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물론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교회 내에서 담임목사가 반대하는데 이를 거스려 제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고, 반대로 담임목사가 열심으로 추진하는 일이 부결되는 경우도 매우 드믄 것이 냉엄한 현실입니다. 

물론 당회니 제직회니 하는 주요 의사 결정 기관들도 맥없이 어용화해 그 본연의 기능을 망각하고 목사의 시녀처럼 거수기로 전락해서 오히려 목사의 독주와 월권을 돕는 경우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여 기에는 다른 여러 가지 이유도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담임목사에게 집중된 유형, 무형의 과도한 권한이 문제가 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따라서 이처럼 개혁 교회 내에서 상식을 넘어서는 지나친 '교권력 집중'이 앞으로도 이대로 계속 허용되어야 하는지 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중세 교회를 빰치는 일부 목사들 

여러 교단들 중에서 특히 장로교단의 경우, 이 교권 집중의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초기 개혁자들이 처음 장로 중심의 교회 정치 체제를 세울 때, 가장 경계한 것이 중세 교황 제도와 성직자 제도이었습니다. 이 가톨릭 성직자 제도는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사제가 나서서 중간자 역활을 하는 것으로, 신자들 모두가 다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성경과 개혁의 정신에 크게 어긋남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장로제는 근본적으로 모든 신자는 '직분에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며 따라서 신도들 사이, 교회들 사이의 평등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교회 내의 계층적 또는 계급적 구조도 반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특정한 직분자에게 절대적 권위를 두지 않고, 회중이 선출한 장로들이 교회의 치리를 담당하는 제도입니다. 하지만 장로제 자체도 '목사 직분을 매우 중시하는 전통' 때문에 중세적인 계급화로 빠져들 수 있는 위험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언급하는 '장로'나 '감독'은 사도 시대부터 있던 성경적 근거가 분명한 직분들입니다. 다만 감독 역시 장로이며, 단지 장로의 주요 기능 중의 하나가 감독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여튼 역사적으로 보면 개신교의 장로제나 회중제가 교황제나 감독제 이후에 나온 제도임을 알 수 있고, 전자는 후자의 문제점인 교권적, 계급적 제도에 대한 거부감과 이를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채택된 제도임을 추측케 해 줍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시대착오적인 한국 개신교의 교권주의자들은 중세 주교들처럼 신도들 위에 군림하며 상전처럼 행세를 하고, 권위주의적인 목회를 고집하려 합니다. 특히 중대형 교회로 갈수록 그 행태가 더욱 가관입니다. 

교 권과 기득권의 단맛에 길들여진 이분들에게서 갈수록 사치, 위선, 오만, 탐욕 등은 쉽게 볼 수 있으나, 겸손과 온유와 절제를 찾아보기란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는 제자된 모습은 더더욱 보기 어렵습니다. 이들은 그저 높아지고 대우받고 누리려고만 하지, 스스로 낮아지고 나누고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적지 않은 목사님들의 연속적인 추태로 인하여, 목사의 권위가 진창에 떨어지고 세인들의 비웃음과 조롱도 이미 차고 넘치도록 받고 있건만,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분수를 모르는 처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터넷을 잠시만 들여다보아도 각 지역 교회의 목사님들이 얼마나 원색적인 비난을 다양하게 받고 있는지 생생히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거룩하신 이들 목사님들께서는 백성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세인들의 이유 있는 비판마저 못 들은 척 무시하며, 교회라는 거룩한 울타리 속에서 충직한 신도들을 거느리며 이미 넉넉히 챙겨 놓으신 재물과 함께 독야청청 풍족한 삶을 누리고 계십니다. 물론 이분들의 이런 철면피한 행동들은 지각 있는 신자들의 주름살을 늘리는 데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 요즘 세상에 한국교회만큼 어처구니 없게 억지로 웃겨 주는 곳도 아주 드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들에게 잘 길들여진 많은 신도들은 목사의 독주를 별로 개의치 않고 당연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도리어 매사에 담임목사님을 찾으며 끌어들입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 예배, 교육, 선교, 구제, 각종 행사, 사업 계획, 행정, 관리 등 도대체 약방의 감초처럼 목사가 간여하지 않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현상 역시 목사직에 더욱 큰 힘을 실어 주게 하고, 동시에 목사가 다른 사심을 가질 수 있는 좋은 여건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담임목사제' 폐지도 고려해야 

그런데 목사가 초인도 아니고 또한 만능 연기자도 아닐진대 어찌 이런 다재다능한 역활이 가능할까요. 그래서 때로는 점차 능력에 넘치는 무리수를 자주 두게 되고, 그러다가 자꾸 반발이 생기면 결국 자신에게 맹종하는 사람들만 곁에 두고 교회가 서서히 독재화해 가는 것입니다. 드디어 중앙선을 넘어서는 것이지요. 이때부터 목사는 황색선을 무시하고 월선하는 매우 위험한 재미에 빠지게 됩니다. 

더구나 변변한 제동 장치 하나 제대로 없이 월권하고 독주하는 담임목사를 따라 마냥 달리다 보니, 한국교회는 내실 있게 제대로 되는 일도 별로 없고 반대로 외견상 안 되는 일도 별로 없는 이상한 교회로 변질되게 된 것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그만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 형국입니다. 예로부터 머리가 이상해지면, 발도 고생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이제 발에 병이 생겼으니 더 이상 과거처럼 마구 달리기도 어려워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무당 굿하듯 안하무인으로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목회는 이제 부끄러운 일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신자들이 지체가 되어 각자의 은사와 믿음의 분량대로 사역을 나누고 함께 '동등하게' 동역하는 목회 풍토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 내에서 직분 간의 계급이나 우열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전하는 목사만 목회자가 아니라, 교회 학교 교사도 목회자이고 구제하고 심방하시는 집사님과 다른 봉사를 하는 여러 신도들도 모두 목회자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앞으로의 목회는 신자들 모두가 '작은 예수'가 되어, 모두가 참여하고 합심하여 동역하는 '공동 목회'를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장기적으로는 현재의 '담임목사직'을 폐지하고, '전임설교자'나 '시무목사' 또는 '교육목사' 등의 직제로 바꾸는 방안도 시간을 가지고 충분히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이 '담임'이라는 용어가 '담임교사'나 '담임교수'처럼 다분히 수직적이며 권위주의적인데다가, 또한 전문적으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이 주요 책무인 목사직이 구태여 교회나 당회를 대표하는 직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담임목사직의 월권으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을 고려해 볼 때, 이를 폐지하거나 대체하는 것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세우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구더기가 더럽다고 장독을 깨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설교나 교육이 주업무인 목사직이 구태여 교회의 수장이 되거나, '담임'이라는 명판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선 교회에 왜 이 '담임'이라는 역활이 필요한지도 큰 의문이 가지만, 설사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이는 도리어 시무장로들에게 적합한 직책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필자의 부족한 소견을 감히 추가하자면, 특히 교회 공금 횡령, 치부, 간통, 세습, 교권 남용 등 그 도덕적 결함으로 인하여,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며 '종교 귀족'이라고 국민의 지탄을 받는 일부 대형 교회들의 담임목사직부터 시범적으로 폐지하면 더욱 바람직할 것입니다.


설교권은 그 자체로 큰 권력 

여기서 '설교권'에 대해 또한 언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좋은 설교는 축복이며 보약이 되지만, 나쁜 설교는 저주이며 동시에 독약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가장 우려스러운 문제 중의 하나는 매 주일 강단에서 일방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설교권을 가진 담임목사가 신도들을 맹신화하며 독주하려고 할 때 발생합니다. 

1960년대 한창 학생 운동이 미국 대학가를 휩쓸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버드 법대의 한 학생이 졸업식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있습니다. 대학가는 반란과 난동을 부리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으며, 공산주의자들은 이 나라를 파괴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이 들끓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법과 질서'가 필요합니다. 법과 질서가 없다면 이 나라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그것은 한참이나 그칠 줄 몰랐습니다. 마침 시국이 어수선하던 차에 하버드 법대 졸업생의 소신에 찬 뜨거운 졸업사라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박수가 가라앉을 무렵, 이 학생은 조용한 어조로 다시 말을 이어 나갔습니다. "방금 한 말은 1932년 아돌프 히틀러가 한 연설 내용입니다." 

설교권이 악용될 때의 상황은 마치 과거에 독일 국민들이 무더기로 독재자 히틀러의 화려하고 달콤한 말에 세뇌당하고 기만당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또한 오늘날의 간교한 정치 독재자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기도 합니다. 비록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작금의 한국 사회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절실한 내용이며, 동시에 '일방적인 발언권'이 얼마나 크고 위험한 권력인지를 잘 보여 주는 일화이기에 여기에서 다시 인용하였습니다. 

많은 독재자들은 히틀러처럼 자신의 욕망과 치부를 가리기 위해 '법과 질서'를 강조하며 경찰력으로 반발하는 국민을 누르고, 뒤에서는 스스로 초법적인 부정을 은밀히 자행합니다. 자신들은 정작 더욱 중요한 '법의 정신'을 지키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만 문자적 '법규'를 강요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들은 한국의 교권주의자들과 매우 닮은꼴입니다. 

부패한 목사들도 마찬가지로 설교 시 교묘한 말로써 신도들을 오도하거나 미혹하고 협박하여 순종을 요구하며, 스스로는 비성경적인 악행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일방적인 말의 힘이 주는 부작용을 우리는 이미 세속 언론에서조차 너무 많이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험하고 큰 권력도 부족해서 추가로 교회의 입법권, 사법권 그리고 행정권까지 담임목사의 영향력 아래에 둔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목사라는 직함으로 위장한 종교업자들이 교권을 흔들며 교회를 사유화할 수 있게 된 이면에는 이런 제도적 결함도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 거룩한 교회에서만은 예외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매우 순진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역시 어쩔 수 없는 '죄인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들 뿐만이 아니라 교수나 기업인 또는 정치인 등 하여튼 모든 허탄한 인생들은 체질상 틈만 나면 끝없이 권력을 탐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런 권력 추구 습성은 역사가 가르쳐 준 진실이며, 부패한 인간의 죄성에 기인합니다. 오죽해야 '권력은 부자 간에도 서로 나눌 수 없다'라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이 점을 경계하고 교권력을 분산시키고 견제하고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교회가 직임자들의 권한과 직무와 임기를 명확히 분배하고 제한해야 하는 절박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직분'으로 전문화해야 

한국교회의 극심한 부패는 우선적으로 현행 목사 제도의 약점에 큰 책임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는 시계추처럼 분주하고, 만능 탤런트처럼 잘나야 하는 기존 목사의 역활을 깊히 생각해 보고 본연의 자리로 돌려 놓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저급한 권위주의적 목회도 제거해야 합니다. 목사가 교회를 섬겨야지, 교회가 목사를 섬겨서야 되겠습니까. 

또한 목사는 물론 장로나 감독 그 누구라도 교회 내에서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독선적인 태도도 반드시 버려야 할 것입니다. 초기 교회에는 베드로나 바울은 물론 마지막으로 의지했던 지도자 사도 요한마저 죽고 없었지만, 여러 신도들이 합심하여 무려 3세기에 걸친 10여 차례의 혹독한 박해를 받고도 믿음의 순결을 잘 지켰던 것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각 교단의 노회나 연회, 그리고 총회에서 소란을 피우는 정치 목사님들은 깊은 자성이 필요합니다. 목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가르치는 것이지, 다스리고 정치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몰려다니며 패싸움이나 하는 것일까요. 더구나 왜 자신이 아니면 절대 안 되는 것처럼 교만을 떠시는지요. 정말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목사만이 성직자라거나, 목사직만이 다른 직분에 비해 특별히 높은 자리는 절대 아닙니다. 목사직도 당연히 권사직이나 집사직처럼 그저 교회의 여러 소중한 직분들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매우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 그 해법과 진실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목사님들 은 이제 자신의 직분이 아닌 '다스리는 위치'에서 내려와 성경의 원리에 걸맞는 설교자의 위치로, 전도자의 위치로, 교사의 위치로, 그리고 '가르치는 장로의 위치'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물론 다른 직분들이 해야 할 여러 직무들과 함께 당회장직도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회중을 다스리고 관리하고 봉사하는 일은 시무장로들과 제직들의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칼뱅은 일찍이 "교회의 행정 체계나 제도가 영원히 우리의 양심을 묶어 둘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과연 무슨 근거로 목사가 삼권을 흔들며 교회 위에 군림하는 것인가요. 교회가 목사의 개인 기업입니까. 그리고 교회 개혁이 자꾸 겉도는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목사 자신들이 사욕을 못 이겨 개혁을 거부하고 이권을 챙기며, 맹신도들이 이를 추종하기 때문이 아닌지요. 

앞으로 목사직은 본분을 벗어나 월권하며 교회 정치나 행정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당회의 관리를 받게 하고, 주로 설교하고 전도하고 가르치는 고유의 직분으로 전문화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권주의자들이 월권하고 독주할 수 있는 악순환의 고리를 단호하게 끊어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이 바로 목사의 방만한 직무와 권한을 철저하게 제한하고 명확히 규정하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목사직 전문화'는 모두에게 유익한 길 

그런데 목사님들의 책임만 지적하자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교회의 잘못이 더 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회나 제직들이 목사가 온전히 말씀을 연구하고, 설교를 준비하고, 교육에 집중할 수 있도록 충분히 배려해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온갖 교회 일에 목사를 찾고 개입시키니 무슨 여유가 있어 전문화가 가능하겠습니까. 몸이 두 개라도 감당하기 힘들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더라도 '목사직의 전문화'는 교회의 유익은 물론이고 목사님들 자신의 은사를 극대화하고, 또한 깊이 있고 효과적인 목회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아울러 이는 사도들이 전도와 교육에 전념하기 위하여 구제와 관리 및 행정을 집사들에게 맡겼던 것처럼, 초대 교회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되는 동시에 오늘날 한국교회가 심각하게 직면하고 있는 목사직 월권을 해소하는 좋은 대안이 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동안 민심을 외면하고 소통을 거부하고 있는 한국교회 교권주의자들은 과도한 교권력을 쥐고 독주하며, 차라리 담임목사직이 없는 것보다도 못한 역기능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만일 이를 시급히 시정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담임목사직이 없는 '가정 교회'나 '평신도 교회'가 일반화할지도 모를 지경입니다. 이제는 평신도들의 인내도 한계에 이르러 금이 가는 소리가 서서히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배당만 크고 화려하게 지어 놓고, 몰락한 유럽의 교회들이 보여 주는 역사적 교훈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한국교회도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이 세대가 가기 전에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미 많은 젊은이들이 실망하고 분노하며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안타까운 현실이 개혁 교회가 지금이라도 교권주의의 오류를 겸허히 인정하고, 바른 목사직의 정립을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 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애 5:21)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교회는 먼저 '쉴 만한 물가’가 되어야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5) 
불 과 한 세대 전에는 수백 명이 북적거리던 마을 교회가 지금은 주일에 10여 명의 노인만 둘러앉아 조용히 예배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재 서구의 많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풍경입니다. 대도시의 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수많은 사람이 모이던 중·대형 교회들이 이제는 관리 유지조차 힘들어 다른 용도로 개조되거나 팔려 나가고 있습니다. 

1995년 당시 65%의 영국인이 기독교인이라고 응답을 했으나, 단지 전 국민의 8% 미만이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의 조사에서는, 1979년과 2005년 사이 단지 26년 만에 영국 교회 출석 교인 수가 반 토막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교인들이 교회를 떠난 것입니다. 

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안타까워하면서도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로 치부했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그런 사치를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한국의 교인들도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지난 30년간 건물만 지어 놓으면 차고 넘치던 성장 신화가 이제는 거품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징조들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장과 증식에 힘을 쏟아 비만해진 한국의 중·대형 교회들이 점차 고질적인 성인병으로 활력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세속적 복과 외적 성장만을 추구하며 변질된 복음을 전한 교회들에 대하여 매서운 응징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라, 심은 대로 거두고 있습니다. 내실 있는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계속 먹고 몸집 키우기에만 몰두를 했으니 병이 난 것입니다. 

자신들의 교회를 키우기 위해서라면, 이웃의 작은 교회들이 죽든 말든 크게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배당 신축을 위해서라면, 가난한 교인들을 압박하여 그들의 속주머니까지 넘보는 행위도 결코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아 울러 건축 헌금을 더 걷기 위해, 단순히 예배와 모임을 위한 처소를 '성전'이나 '거룩한 땅'이라고 우기며 순진한 신도들을 기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바람마저 피하기 힘든 '솔로몬 행각'에서 모이던 사도행전 성도들의 그 가난한 마음과 검소한 정신은 모두 사라지고, 세속적 성취와 안일한 편리주의가 순수한 옛 신앙을 몰아내고 있습니다. 

또한 목적이 수단과 방법을 모두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금을 유용하여 치부하는 목사나, 성추행을 한 목사들도 설교를 잘하고 교회를 키우는 능력만 있으면 그냥 적당히 넘어가자고 합니다. 그래서 '진리가 이끄는 삶'이 옳은 것이 아니라, '목적이 이끄는 삶'이 옳은 것이고 복인 것처럼 선전하며 외형적 성장에 명운을 걸어왔습니다. 

목사, 장로 그리고 집사들 

어 느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비교인들 반수 이상이 과거 교회 출석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났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반증 자료입니다. 반면에 최근 가톨릭 신도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였습니다. 개신교에 실망하여 개종한 교인들도 여기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여기서 또 다시 중복하여 일일이 나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또한 세상이 너무 좋아서 교회를 떠나는 분들도 일단은 논외로 하고자 합니다. 오히려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에 상심하여 교회를 떠나는 분들이 더욱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심할 경우는 교회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떠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니 때로는 더 머물고 싶어도, 사욕으로 눈이 먼 교권에 의해 강제로 내몰리기도 합니다. 최근 제자교회나 경신교회 사태도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말세가 되니 목사가 교인들에게 교회에서 나가라고 합니다. 공금 횡령이나 성추행 의혹에 항의하며, 교회법을 지키자는 교인들의 지극히 상식적인 요구가 그리도 부당한가요. 

교인 이탈 문제의 핵심은 대량 생산으로 불량화된 목회자들의 자질에 가장 큰 원인이 있습니다. 크게 결여된 경건과 어설픈 실력에도 불구하고, 어쩌다가 호황기에 기회를 잡아 갑자기 교회 지도자라는 신분으로 급상승한 일부 인사들이 자기 분수를 까맣게 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하고 인내하는 성경의 가르침은 모두 탐욕에 저당 잡히고, 대접받고 누리고 군림하는 교만한 독재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분들은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에서는 광채가 나지만 경건의 능력은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선한 논리와 마음으로 설득시키지 못합니다. 온갖 부끄러운 부정과 비리는 자신들이 다 저질러 놓고, 오히려 이에 저항하는 교인들을 위선과 교권이라는 양날의 칼로 가차 없이 잘라내고 있을 뿐입니다. 

많은 경우, 노회도 총회도 모두 한통속이니 거칠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입만 열면 "아멘"하고 화답하는 맹신도들이 뒤에서 든든히 후원을 해 주고 있습니다. 과거 군부 독재자들에게도 추종자들이 많았는데, 성직자로 포장된 이들에게 어찌 맹신도들이 없겠습니까. 

그런 데 이들 목회자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위 교회 생활을 오래 하였다는 주요 직분자들에게도 답답한 문제가 적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 내에서 좋은 목사님, 전도사님, 장로님, 집사님 들을 너무 많이 보아 왔고 그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분들이 주신 사랑의 빚을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교회가 그렇지는 못한 듯합니다. 

먼저 가까운 지인이 경험한 일을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어느 도시로 이사를 하여 근처의 한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별로 크지도 않은 교회인데, 근 3개월이 지나도록 장로라는 분이 한 번도 다가와서 인사를 나누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원래 성격이 저런 분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먼저 고개를 숙이며 가벼운 눈인사를 자주 드렸다고 합니다. 물론 반응은 아주 시큰둥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좀 부유해 보이는 사람들이 새로 오면 이 장로님이 아는 척도 하고 잘 어울리더랍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분이 장성 출신이었습니다. 아마 자신의 수준에 맞는 사람들만 골라서 상대하겠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생업 때문에 그 교회를 떠날 때까지 계속해서 서먹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비 단 이런 장로님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집사님들도 예배가 끝나면 자기들끼리만 즐겁게 몰려다닙니다. 그 구분은 거의 한가지입니다. 재산이 있거나 사회적 신분이 좀 좋아 보여야 거기에 낄 수가 있습니다. 그 순간 아파트 단지에서도 아이들이 평수대로 어울려 논다는 말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운한 마음을 누르고 이 친구는 가능하면 구석에서 소외받는 다른 교인들을 살피고, 가깝게 지내려고 더욱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결국은 큰 효과가 없었습니다. 담임목사님 역시 차별적 분위기를 조장하는 데에 은근히 앞장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유한 교인들과는 친밀하게 지내시고, 그렇지 못한 교인들은 그저 의례적으로만 대했습니다. 설교도 너무 기복적이고 비성경적이며, 헌금만 지나치게 강조해서 교회 생활이 매우 불편했다고 합니다. 

더 구나 후일에 들으니 교회 수련원 부지를 구입하면서, 일반 교인들이 모르게 사모 명의로 등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세월이 한참 지나면 이런 수법으로 교회 재산이 슬그머니 목사의 사유 재산으로 둔갑하게 될 것입니다. 그도 아니라면, 교회를 세습하여 대를 이어 죽도록 충성을 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험은 단지 하나의 삽화에 불과합니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교회에서는 드문 일이 아닙니다. 필자는 과거 지방 근무나 출장 중에 여러 교회들 주일 예배에 참석할 기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 시간 내내 지역 목사님들이 단체 관광을 다녀오신 지루한 체험담만 듣다가 예배를 마친 기막힌 경우도 있었습니다. 

같은 지역의 또 다른 교회에서는, 담임목사님이 예배 중에 성령을 받으라고 바람 소리를 내며 기도하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부부가 각자 십일조를 따로 내라거나, 일 년치 헌금을 미리 작정하라는 등 정말 보기 민망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극소수가 비정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상당수가 비정상이라는 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 저급한 목회자들, 오만한 장로들 그리고 방자한 집사들이 한국교회 전도의 문을 정면에서 막고 있습니다. 아니 가만히 있는 교인들마저도 교회 밖으로 내치고 있습니다. 많은 여집사님들의 부드러운 입방아 또한 큰 재난입니다. 그리하여 교회 내에서 배고픈 것은 참아도, 기죽고는 도저히 못살게 만듭니다. 

과도한 돈 자랑, 자식 자랑, 그리고 남편 자랑이나, 반대로 무책임한 험담들이 교회를 병들게 하고 믿음이 연약한 교인들의 마음을 멍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에 목말라 교회를 찾아왔으나, 가슴에 상처만 가득 담고 떠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수년 전에 어느 노부모님을 겨우 설득하여 집 근처 교회에 출석하시도록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거기서 얼마나 상처를 많이 받으셨는지, 지금은 목사나 예배당 소리만 들어도 진저리를 치십니다. 

극에 이른 교회 부패 

이 미 잘 알려진 대로, 거룩한 교회가 깊숙이 세속화되어 세상이 추구하는 속된 가치관을 그대로 따르며 수용하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사장, 교수, 판사, 장관, 장성, 기타 부유층이면 교회에서도 금방 장로나 권사 그리고 집사가 됩니다. 반면에 서민들은 교회에서도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귀족들이 대접을 받던 중세 교회만 흉을 볼 일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중세적 성직 차별이 현재 한국 개혁 교회 내에 폭넓게 퍼져 있습니다. 중·대형 교회 목사는 교황이나 주교처럼 고위 성직자로 군림하고, 장로나 집사나 신도들은 평민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하인이 주인을 부리며 행세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입니다. 

이런 한심한 모습을 더 이상 안 보려면, 우선 중·대형 교회 목사들의 권한을 가르치는 직무에 맞도록 전문화하고, 크게 제한해야 합니다. 그래서 목사를 최고 경영자(CEO)로 보는 잘못된 관념부터 철저히 뜯어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중·대형 교회의 갱신과 개혁을 원한다면, 우선 부유한 목회자들에게 유입되고 있는 지나친 돈줄을 먼저 제거해야 합니다. 무슨 명분이든, 목사가 사역 기간 중에 수십억 원을 모을 수 있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입니다. 

과도한 목회 사례비와 외부 강사비 역시 과감하게 축소하거나 삭감하여 다시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여튼 목사의 주변에 흐르는 돈이 넘치게 되면, 항상 부패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유 감스럽게도, 회칠을 한 무덤처럼 한국교회 속에는 은밀한 불의와 부정이 일반화하고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은 교회 공금 횡령, 과도한 집회 사례비, 교회 세습, 성추행, 사기, 월권, 학위 세탁, 헌금 강요, 재단 운영, 정치 참여 등 온갖 속된 방법을 다 동원하여 부와 쾌락과 명예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속은 구토가 나도록 썩었는데, 겉으로만 치장하고 눈가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신자들만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내부 사정을 깊이 알게 될수록 더 큰 좌절을 느끼며 떠나는 중견 교인들도 많아졌습니다. 

중세 시대의 암울한 역사가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당시에도 소위 고위 성직자들은 사치스러운 부를 누린 반면에, 지방의 말단 사제들은 끼니를 잇기가 어려울 정도로 혹독한 가난에 시달리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대형 교회와 미자립 교회 간의 극단적인 양극화가 이를 잘 재현하고 있습니다. 

극히 일부 목사들만의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제 구차한 변명이 될 뿐입니다. 한국교회에는 총회, 노회, 연회 그리고 각 교회에 기생하며 거룩한 직분을 모독하고 사욕을 채우는 인사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불의한 돈이나 뇌물을 하나도 안 뿌리고 당선된 교단 총회장이나 노회장, 그리고 기독교 단체 대표회장이 과연 몇 명이나 있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니 사회에서도 교회를 '공공의 적'으로 보는 혐오감이 급속히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의 지탄을 단골로 받는 정치권보다 더 부패한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정치 목사들입니다. 이스라엘 하스몬 왕조의 사악한 왕 아리스토불루스가 죽었을 때, 백성 중에 아무도 울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혼자서 실소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소위 한국교회 지도자라는 인사들의 표리부동한 행태를 보면서, 그 백성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진리가 아니면 계속 목마를 수밖에 없는 그런 영적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두세 번 정도는 속더라도, 계속해서 속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신도들도 점차 그 진실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느냐고 묻습니까? 물론 세상의 유혹이 너무 커서 떠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교회가 준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더 이상 속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또한 더 이상 변절한 목사님들의 욕심에 이용을 당하기 싫어서 떠납니다. 

교회를 떠나는 것이 물론 좋은 일도 아니고, 결코 권할 일도 아닙니다. 또한 이를 정당화하거나 미화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냉철히 직시하고, 문제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유형 교회의 한계와 새로운 시도들 

많 은 분들이 개혁을 논하다가, 이제는 교회 현실에 너무 실망하여 탄식할 힘마저 없다고 말하십니다. 실제로 교회 정의가 개선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그 교묘한 수법이 지능화, 고도화, 조직화, 그리고 일반화하며 악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는 한국 대부분의 제도권 교회들은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는 절망적 결론에 도달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 의욕도 점차 약해지고, 냉소적이며 비판적인 방관자로 변하기 쉽습니다. 

반 면에 이런 냉소주의를 극복하고, 바른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새로이 구체적인 노력을 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예배당 건물이 없는 교회, 담임목사가 없는 교회, 십일조가 없는 교회, 계급적 직분이 없는 교회, 유급 사역자가 없는 교회, 헌금 채가 없는 교회, 그리고 무기명 헌금만 받는 교회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대부분은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더욱 크게 부각된 현실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시도들이 모두 옳고, 기존의 교회 제도가 무조건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기성 교회들이 스스로 바르게 개혁할 수 있으면 더욱 바람직합니다. 또한 새로운 형태로 이룬 교회들 역시 언젠가는 또 다른 문제점으로 인하여 다시 개혁을 요구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못 담그겠습니까. 교회 역사는 언제나 '순수'와 '비순수'의 싸움이었으며, 그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성찰과 개혁이 필요함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세속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유형 교회들은 그 제도에 관계없이 계속해서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 이름이 유대교든,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또한 앞으로 그 무슨 이름이 새로 붙게 되든지, 근본적으로 그들의 구성원인 부패한 인생들이 쉽게 변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냉소적으로 방관하거나 좌절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만일 기존 교회에 정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다시 시작하면 될 것입니다. 교회 개혁이 루터나 칼뱅의 전유물은 아니지 않습니까. 두세 명이 모이면 어떻습니까. 열 명이나 백 명이 모이면 더욱 좋습니다. 작은 공동체도 지역 사회에서 그 능력에 맞게 얼마든지 유익한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박해 시대의 지하 교회들보다는 훨씬 좋은 여건이 아니겠습니까. 

이제는 신도들의 인내에도 금이 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어느 해외 도시에서는 십여 가정이 전임 목회자도 없이 별도로 모여 예배를 하고 있는 곳도 보았습니다. 대부분이 지역 한인 교회들에서 크게 실망했거나 상처를 받은 분들이었습니다. 이 교회 저 교회를 기웃거리다가 그것도 지쳐서 아예 가까운 지인들끼리 따로 모이게 된 것입니다. 

또한 필자가 존경하는 어느 선배 부부는 작은 '가정 교회'를 이루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현직 회계사로서 자비량 사역을 위해 탄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신앙 공동체들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는 마치 과거 청교도의 모체이었던 '회중 교회'를 연상하게 하기도 합니다.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한국적 여건에서는 이 회중 교회의 장단점을 자세히 연구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자신의 밥그릇을 크게 염려하는 일부 기득권 목회자들은 적극 반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먼저 '쉴 만한 물가’가 되어야 

오 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유럽의 교회들은 거의 텅 비어 가고 있고, 한참 흥행하던 미국의 교회들마저 급격히 쇠퇴하고 있습니다. 미국적 성공주의로 위장된 잘못된 복음의 약발이 거의 떨어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년마다 수백만 명이 교회를 이탈하고 있습니다. 오죽해야 그 기세가 등등하던 수정교회마저 파산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이제는 한국교회를 주시해야 할 때입니다. 

옳든 그르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다만, 교회가 이들에게 '쉴 만한 물가'를 충분히 제공해 주지 못했기 때문임은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렇게 교회를 떠나는 분들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폄하할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래도 한 가지는 있습니다. 

비록 사정에 의해 '유형 교회'를 일시적으로 떠나더라도, 그리스도의 몸인 '무형 교회'는 절대로 떠나지 말자고 격려해 주고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다시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또한 이를 위해 우리 자신들도 모이기를 더욱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해야 할 일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고, 또한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교 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간판이나 종탑이나 십자가가 없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목사나 장로나 감독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들이 있어야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였다면 그것으로 일단 족합니다. 당장 무슨 대단한 일을 하기 이전에, 우선 교인들이 영육으로 '쉴 만한 물가'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교인들 사이의 화평과 사랑의 교제가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무엇이 그리 복잡하고, 화려하고, 요란하고, 분주하고, 이리도 번잡합니까. 오히려 이런 껍데기들을 열심히 챙기다가 속 알맹이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요. 

결론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교회들이 타락하고 무너지고 있는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짐이 너무 무겁고, 실망과 낙심이 우리를 매우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 사도처럼 이미 복음에 빚진 자들이며, 하늘의 소망과 믿음의 비밀을 함께 나누는 참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떠나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은 교회에 남는 것입니다. 날 선 비판과 이유 있는 변명의 혼재 속에서, 제자들마저 교회를 떠날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크기나 형태는 문제의 핵심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교회'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며, 마지막까지 남아 믿음의 순결을 지키는 그루터기가 되는 것이 더더욱 중요합니다.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그네 된 삶을 사는 동안, 부족하지만 주님 안에서 더욱 용기를 내어 형제들을 서로 붙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른 교회를 이루는 일이라면, 언제든지 감연히 나서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할 때입니다. 그래서 이런 작은 다짐들이 모아지고 열매를 맺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우리의 이웃들과 더욱 풍성하게 나눌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변함없이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7) 

돈을 바치면 복 받는다는 목사님들  
세속적 복에 명운을 건 한국교회  

모 든 부패한 종교의 공통적이며 상습적인 거짓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돈을 바치면 복을 받는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물론 기독교 역사의 그늘 속에서도 가장 오래된 거짓말 중의 하나입니다. 심지어 중세 교회 사제들은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돈을 바치면, 이미 죽어 연옥에서 고생하고 있는 다른 가족들의 영혼도 즉시 천국으로 직행할 수 있다고 기만을 하였습니다.

사실 '마음을 다해 자발적으로' 하는 헌금은 매우 소중하며, 건강한 교회 운영을 위해서 꼭 필요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울러 적은 사례비에 연연하지 않고, 검소하게 사시며 묵묵히 교회를 섬기시는 존경할 만한 목사님들도 이 나라 구석구석에 절대 적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틈만 나면 성경을 왜곡하며 돈을 바치라고 신도들을 압박하는 극히 세속적인 목사님들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제자 된 도리를 망각하고 한 여름 상한 고등어보다도 더 심하게 변질된 이분들은,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속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돈을 거두고 있습니다.


맘몬을 따르는 목사들

이런 목사님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 성경을 객관적이며 종합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자신이 설교하는 내용과 실제 처신이 서로 크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많은 목사님들이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는 구절을 자주 인용하며 신도들에게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헌금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은 왜 재물을 땅에다 쌓고 있는지요. 전혀 공감이 안 되는 부분입니다.

자신들의 설교가 옳다면, 스스로 과소유한 재물을 털어서 교회에 바치거나 가난한 이들을 돕거나 하여 하늘에 쌓아야 할 것이 아닌가요. 왜 자신들은 은행이나 부동산에 돈을 쌓아 두고 고가의 주택과 고급 승용차를 즐기며, 교인들의 평균 수준보다도 더 사치스럽게 사시는지 속 시원하게 해명을 좀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느 분의 지적처럼, 입으로 하는 설교와 삶으로 보여 주는 설교가 너무 딴판입니다.

심지어는 "십일조 안 하면 구원 못 받는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인사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아예 논할 가치마저 못 느껴서 생략하고자 합니다. 다만 현재 세계에서 십일조를 실제 제대로 하고 있는 신도는, 가톨릭을 포함하여 아무리 크게 보아도 전체 기독교인의 5%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는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유일한 '십일조 왕국'인 한국교회와 미국의 극히 일부 교단 교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매우 사이비한 주장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아울러 자신의 체험을 소개하며 "제일 복 받는 믿음이 무언지 아는가. 바로 헌금이다. 뭐니 뭐니 해도 헌금이다"라는 말도 하더군요. 성경 어디에 이런 선동적인 내용이 들어 있는지 필자는 도저히 못 찾겠습니다. 여기서 '제일'이라는 단어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지요. 그런데도 이런 진부한 속수가 복을 좋아하는 순진한 신도들에게는 의외로 잘 통한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는 반찬 값을 절약하거나 아이들 학원비를 줄여서 어렵게 바친 교인들의 가슴 어린 헌금이, 거룩한 예배를 통하여 담임목사님 자녀의 해외 유학비나 고급 승용차 관리비 등으로 새롭게 변화하는 이적도 그리 보기 드문 일이 아닙니다. 어쨌든 이런 인위적인 헌금 유도를 통하여 신도들이 실제로 복 받을 일은 별로 없겠지만, 대신에 상당수 목사님이 돈 복을 크게 받으시고 지나치게 잘 먹고 잘살게 된 것만은 틀림이 없는 사실로 보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매우 궁금한 점은 그렇게 '헌금을 잘 바쳐서' 제일 좋은 복을 많이 받으셨다면, 십일조뿐만이 아니라 아예 나머지 재산도 다 바쳐서 그렇게 좋아하시는 복을 몇 배로 더 확실하게 받으실 것이지, 왜 남은 십 분의 구는 자신의 주머니 속에 꼭 쥐고 계시냐 하는 것입니다. 계산이 단순한 필자에게는 그 점이 언제나 큰 의문입니다.

반면에 감리교의 스승 웨슬리 목사님은 수입의 십 분의 구까지도 선교와 구제에 사용했고, 마지막에는 거의 빈손으로 생을 마치셨다고 합니다. 물론 모든 목사님들이 꼭 그렇게까지 따라 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요즘 가식적인 귀족 목사님들의 분수를 모르는 처신과는 하도 수준 차이가 나서 저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돈이나 받고 복을 주시는 분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이 너무 부족하셔서 할 수 없이 미천한 인생들과 돈으로 거래하실까요.

돈을 바쳐야 사업이 잘되고 부자로 만들어 준다는 저속한 사상은 '맘몬의 가르침'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성황당 미신이기도 합니다. 이는 예수를 따라 나누고 돕고 고난받는 '제자 된 삶'이 아니라, 편함과 안일만을 따르는 '이교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타락한 솔로몬 왕이 천 명의 처첩들을 거느리고 이방 신을 좇으며 호의호식한 것을 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겸손히 주님을 따르는 삶이 중요합니다. 돈이나 재물 그 자체는 축복의 조건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돈을 많이 바치고도 죽임을 당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도 이런 사실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바리새인들보다 십일조와 기타 율법들을 더 잘 지킨 무리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복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큰 화를 입어 멸망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는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참혹한 오명을 얻었을 뿐입니다. 

세속적 복에 명운을 건 한국교회

한국 보수 교단의 대표적 개혁 신학자이신 박윤선 목사님은 '교회는 십 분의 일이라는 숫자의 법령적 제재를 받지 않으며, 헌금의 수량 문제는 신자들 개인이 각기 정할 일이다'라고 하시며, 일찍이 '자발적'인 헌금의 중요성에 대하여 명확하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또한 국제신대 이승구 교수님도 '십일조는 교회가 교인들에게 강요하거나 표준을 세워 지령할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십일조와 연보의 참된 정신'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그저 '복'이라는 사탕으로 유혹하며 돈만 거두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의 정신을 따라 나누고 섬기고 절제하라고 가르치기보다는, 모으고 쌓고 누리고 흥청대는 것이 복인 것처럼 오도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세계 교회사 어디에 헌금 종류가 무려 85가지나 되는 이상한 교회가 있었던가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복' 비즈니스 덕분에 영세한 미자립 교회들은 급격히 위축되고, 중대형 교회들로 갈수록 돈과 사람이 넘칩니다. 이와 함께 목사들의 교만과 탐욕도 태산을 찌릅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몸소 져야 할 십자가는 단지 장식으로 만들고, 그저 '사람의 일'로 북적거리며 분주할 뿐입니다.

거룩함과 순수함으로 위장한 대부분의 교회 프로그램들이나 행사들 역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갈급함은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그저 돈과 사람과 세력을 모으기 위한 삼류 이벤트로 전락하고 있으며, 겉으로 요란한 눈가림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아마 지구촌 어디에서도 한국교회보다 더 행사를 좋아하고 여기저기에 떠벌이는 교회를 찾아보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남들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 약하고, 실패하고, 가난하고, 낙심하고 그리고 병에 지친 사람들은 점차 구석으로 밀려나 조용히 소외를 당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복을 많이 받았다는 착각 속에서 잘나고, 부유하고, 그리고 힘 있는 사람들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의 중요한 직분들도 이들이 대부분 다 차지합니다.

그런 이유로 중대형 교회로 갈수록 가난한 장로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설사 오늘날 세례 요한이 다시 와서 저들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도, 아마 그 허름한 '약대 털' 옷 때문에 평생 서리집사 이상의 직분은 받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들은 그 초라한 옷이야말로 세례 요한에게 매우 소중한 큰 복이었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


세인들은 누구나 복을 좋아합니다. 가난해서 지지리 고생하거나, 몸이 아파서 고통받는 삶은 모두가 싫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는 복이란 일반적으로 물질적이며 현세적인 복을 의미합니다. 물론 여기서 세속적인 복이 무조건 필요가 없다거나 나쁘다고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복을 추구하는 목적과 우선순위가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껍데기가 본질을 잃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이 복이고, 애통하는 것이 복이고, 온유한 것이 복이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복이고, 긍휼히 여기는 것이 복이고, 마음이 청결한 것이 복이고, 화평케 하는 것이 복이고, 그리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예수를 따른다는 신자들에게 이것보다도 더욱 크고 귀한 '다른 복'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 어디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제일 좋은 복'이라는 저속한 논리가 끼어들 틈이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한국교회 목사님들은 복채에 눈먼 무당처럼 더 이상 '복'이라는 말을 함부로 남용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목사님들이 전심으로 전하여야 할 복음은 '돈을 바쳐서, 복을 받아라'가 아니고, '마음을 다해서, 서로 사랑하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의 길은 결코 푼돈으로 산 복권이 대박 난 것처럼 편리하고 안락한 길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결코 걸을 수 없는 '무거운 길'임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기로 결심한 우리 신자들은 이미 '신령한 복'을 넘치게 받은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추가로 무슨 대단한 복이 더 필요해서, 허구한 날 '세속적인 복'을 노래하며 허탄한 일에 인생을 지나치게 소모해야 하는지요. 잘 먹던지 못 먹던지 또는 잘살든지 못살든지, 그에 관계없이 신자들은 이미 '충분히' 복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헌금은 자발적이어야

어떤 경우든 헌금은 반드시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분위기를 조장하여 인위적으로 압박하거나 강요하는 헌금은 비성경적이며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돈을 바쳐야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제자 된 삶 그 자체가 바로 복입니다. 이제 옛 사람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면, 돈과 허세로 어두워진 세상과는 그래도 무언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사랑으로 모여야지, 돈으로 모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돈이라는 음란한 우상을 내려놓고, '돈이 없어도 다닐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 운영을 위해서는 약간의 헌금 강요가 불가피하다거나, 또는 교회 재정 현실을 너무 모르는 소리라고 구차한 변명을 하지 마십시오. 만일 헌금 강요나 다른 불의한 수단으로 돈을 걷어야만 운영할 수 있는 교회라면, 오히려 간판을 내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도 꼭 목회가 소명이라면, 차라리 자비량 사역을 각오하시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믿음이 크거나 가진 자들만이 나서서 설치는 쇼 무대가 되기보다는, 믿음이 부족하거나 가난한 형제들도 편안하게 동참하고 나눌 수 있는 '쉴만한 물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지체들이 서로의 부족함을 감싸 주며 아무런 선입관과 차별이 없이,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와 사랑을 마음껏 공유하며 누릴 수 있는 '복된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용서받아야 하는 죄인들의 모임이지, 의인들만을 모으는 수도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더 이상 거짓된 가르침에 미혹을 당하고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어찌 돈이나 재물이나 세속적인 출세 따위가 감히 우리가 간직한 '하늘의 소망'과 '신령한 복'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여호와의 말씀이 아닌 것'을 복이라 하며 삶을 허비할 수 있을까요.

"너희가 말하기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여도 내가 말한 것이 아닌즉, 어찌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한 것이 아니냐!" (겔 13:7)

마음을 다해 연보를 하여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돕는 것은 성숙한 신자로서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여기에 무슨 이견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이를 일률적으로 '수치화'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며, 또한 이렇게 모은 헌금으로 일부 목사님들이 치부를 하는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내에서 가장 개혁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정답은 유감스럽게도 '목사님'들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소수의 존경할만한 목사님들은 예외입니다. 사실 헌금을 직설적으로 강요하는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문제는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방법으로 그 수법이 갈수록 고도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일조 의무화, 헌금채 활용, 헌금자 명단 공개, '기복적'인 헌금 설교, 은근한 헌금 경쟁 유도, 그리고 임직시 십일조 헌금자 우대 등 일일히 다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많은 신도들은 교회의 부패가 너무 심각해서 예수교가 아니라 '목사교'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유독 목사님들만 아니다 괜찮다고 하시니 정말 웃지 못할 현실입니다.

철밥통 속에 머리를 묻은 이분들은 소통마저 거부하고 늘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고 있을 뿐입니다. 큰 길을 막고 지나는 사람들께 한번 물어보십시요. '교회'나 '목사'라는 용어만 들어도 진저리치는 사람들이 수두룩할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이제 더 이상 보여 줄 무슨 '거룩'과 '순결'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요. 참된 주의 종들과 양들은 오늘도 가슴이 터져 울고 있건만, 거짓 선지자들과 이리들은 늘 평안하다고 웨칩니다.

아래 '선비'님, 저는 십일조를 안하는 95%의 신도들을 미화하거나 반대로 5%의 신도들을 비하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 중에 누가 참된 믿음이 있는지는 주님만이 아십니다. 각종 탈세와 불법으로 번 돈으로 복받기 위해 십일조를 하는 사람도 있고, 반면에 지구촌 여러 나라들에서는 십일조보다도 더 큰 자발적 헌금을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십일조나 헌금으로 신앙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대안'이 있는 비판을 하라고 지적하셨는데, 정말 아직도 대안을 모르시는지요. 대안이 복잡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어려울 뿐이지요. '신자'들이 깨어나는 것이 대안이기 때문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의 감리교단과 제자교회 등을 한번 보십시요. '교인들의 맹신화'와 '목사들의 교권화'는 한국교회 부패의 쌍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도 배신자가 있었고,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지 않은 자들입니다. 아마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 땅에서는 이런 일들이 계속될 것입니다.

처음에 답변 댓글을 올렸다가 지웠습니다. 제글에 대한 비판은 독자님들의 몫으로 남겨 드리고, 구태여 불필요한 변명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댓글도 유용한 소통의 수단이라는 생각에 다시 이렇게 올립니다. 많이 부족하고 미흡한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깊히 감사드립니다. 특히 댓글로 따끔한 조언과 따뜻한 격려를 주신 분들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샬롬!

한국교회 부정과 부패의 중심에는 언제나 담임목사들이 우뚝 서 있습니다. 6억 원의 연봉을 챙긴 이도, 상습적으로 신도들을 성추행한 이도, 자식에게 담임직을 세습한 이도, 거액의 교회 공금을 횡령한 이도, 그리고 법원 명령까지 불응하며 재정 장부 공개를 버티는 이도 모두 다 소위 '담임목사'라는 분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비행으로 인하여 교인들의 억장이 무너져도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은 예배당을 우상화하여 '성전'이라고 열심히 주장하지만, 오히려 다른 비판자들은 성전이 아니라 '복마전'이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악의 소굴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부패와 비리의 온상지를 우리는 흔히 복마전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한국의 여러 대형 교회들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태들을 보며, 이들의 '공동의회'는 과연 무엇을 하는 곳인가 하는 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세습 승인, 성추행 감싸기, 공금 횡령 은폐, 예·결산 날치기 통과, 그리고 초대형 예배당 신축 등이 모두 이들 공동의회의 자랑스러운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일방적인 설교권과 무제한 발언권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가장 큰 취약점 중에 하나가 회중을 대표하는 공동의회에 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공동의회가 담임목사의 '거수기' 노릇하는 것을 막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형 교회에서 공동의회는 담임목사의 입김대로 의사 진행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요한 안건에 대해 보통 90% 미만의 지지를 받으면, 오히려 그것이 이변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 이유는 담임목사가 막강한 설교권을 갖고 있어, 평상시 특정 사안에 대한 신도들의 선입관과 여론을 거의 좌지우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집단에서든 일방적인 발언권이 무서운 이유는 모두 잘 아실 것입니다. 특히 맹신적인 목사 숭배가 폭 넓게 일반화한 한국교회에서는 특정 개인이나 소수파가 담임목사를 견제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오히려 잘못하면 이단이나 사단의 앞잡이라는 누명을 쓰고 쫓겨나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수천 명이 참석한 회의에서 개인들에게 발언권을 골고루 주고, 충분히 토론할 시간을 얼마나 줄 수 있을까요.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대형 교회는 강단에서 '무제한 발언권'을 지닌 담임목사가 자연스럽게 '수령'이 될 수밖에 없는 '허약 체질'이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한국교회 역사상 대형 교회 공동의회에서 담임목사가 추진하는 중요 안건이 부결된 사례가 얼마나 있었을까요. 

그 덕분에 한국교회에는 대를 이어 충성하시는 세습 목회자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본인들은 이런 세습에 대하여 얼마나 긍지를 느끼며 자랑스러워할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는 전 세계 어느 나라 교회사에서도 보기 힘든 대단히 수치스러운 행위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무려 한국 대형 교회의 약 70%가 공동의회의 합법적인 승인을 받아 세습을 한다고 합니다.



어용화한 공동의회, 당회, 그리고 제직회 

사실 모든 신도들이 교권주의자들의 간교함을 정확히 이해하고 불의한 안건에 대해서 소신껏 거부할 수만 있다면, 교회의 크기 자체가 문제가 될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많은 신도들은 담임목사를 나머지 직분자들이나 일반 신도들과는 달리 다소 '성스러운 신분'으로 크게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목사들은 그나마 조금이라도 '聖'스러워지지는 못하고, 도리어 갈수록 '性'스러워져서 큰 탈입니다. 

하여튼 고용 측면에서만 본다면, 목사는 교회가 임명하고 고용한 '유급 직원'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고용주'인 회중이 '피고용인'인 목사를 상전처럼 떠받들고 오히려 그에게 휘둘리고 있으니, 정말 한심한 일입니다. 게다가 이제는 이 못된 하인이 주인의 자녀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힘겹게 돈을 잘 바쳤더니, 이제는 몸까지 바치라고 합니다. 

문제는 신도들이 목사의 월권과 독재에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권주의에 깊이 중독된 신도들의 의식이 변하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개신교는 전통적으로 목사직을 다른 직분에 비해 지나치게 존중하는 관습이 있어 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형 교회에서는, 당회나 제직회 역시 담임목사의 독주를 막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당회원만 해도 수백 명이 되는데, 목사가 홀로 독주할 때에 무슨 수로 서로 의견을 모으고 견제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교회의 부서장과 기관장 등 중요한 요직에는 대부분 담임목사에 순응하는 사람들을 기용하기 때문에, 당회나 제직회 역시 '목사의 시녀'로 전락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회중이 주체가 되는 교회 

이런 목회 독재를 막을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대안은 담임목사직을 다스리는 기능과 함께 폐지하고, 설교하며 가르치는 사역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전문화하는 것입니다. 명칭도 '전임 설교자'나 '시무 목사' 등으로 바꾸면 좋을 것입니다. 당회장은 다른 장로들이 임기에 따라 돌아가면서 교대로 수행하면 됩니다. 교회의 주요 사업 관리나 행정 등은 모두 공동의회에서 선출된 시무 장로들이 구성한 당회의 주관 아래서 이루어집니다. 이런 '집단 지도 체제'는 담임목사제보다 훨씬 투명하고 민주적인 교회 운영을 가능하게 합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에 의해 시작된 '회중 교회(Congregational Church)'가 이와 유사한 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은 장로제를 두지 않고 집사제만을 운용하며, 전체 교인 중에서 선출된 대표들로 '평의회'를 구성합니다. 그 안에는 필요에 따라 여러 '위원회'를 두어 예배, 교육, 재정, 전도 등을 맡아 봉사하게 합니다. 각 위원회 의장의 임기는 대개 일 년으로 하며 순수하게 봉사하는 직분입니다. 

회중 교회에서 시무 목사의 주요 직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고, 그리고 성례전을 집례하는 것으로 제한됩니다. 목사는 오직 말씀 사역을 담당할 뿐, 제반 교회의 모든 사업과 행정은 전적으로 일반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결정하고 집행합니다. 그래서 목사직을 포함한 모든 직분들 간의 평등이 잘 실천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매우 잘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세계적 전도자 무디 선생도 바로 이 회중 교회 출신입니다. 

그런데 만일 현실적으로 담임목사직 폐지가 당장은 어렵다면, 차선책으로 중대형 교회 담임목사와 시무 장로들의 연임을 적절히 제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목사 독재나 장로 독재를 제도적으로 사전에 예방하기 위함입니다. 한 교회에서 10~40년 이상 하는 장기 사역은 비교적 순수한 목회자들마저도 부정과 독재의 유혹에 빠지게 만듭니다. 가톨릭의 경우, 주기적으로 여러 사제들이 각 지역을 순환하며 동역합니다. 그런 연유로 지역 교회에서 '구조적인 부패'가 발생하기 매우 힘듭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기 때문입니다. 

연임을 제한해야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그동안 담임목사 재신임 투표 시에 너무나 많은 부작용이 표출되어서입니다. 부도덕한 담임목회자들은 재임 기간 중에 부지런히 자기 사람을 늘리고 세력을 확장하여, 재신임 투표 때마다 교회가 분쟁에 휩싸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하여튼 한번 잡은 밥그릇은 절대로 놓지 않는 것이 한국교회 교권주의 목사들의 본능적 전통입니다. 이를 잘 알고도 그들에게 제도적인 허점을 제공한다면, 이는 매우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직분자 임기제 역시 중대형 교회에서는 꼭 필요한 제도입니다. 담임목사를 위시하여 시무하는 당회원 전체의 임기를 개교회의 여건에 따라 약 2~7년으로 정하여,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교회 내에 세력을 형성하고 교권을 남용하는 일을 예방하도록 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보다 모든 교회의 감사 기능을 크게 강화하여야 합니다. 감사 위원회는 장로나 집사들로 구성하면 좋을 것입니다. 아울러 감사 결과는 회중을 대표하는 공동의회에 매년 문서로 보고토록 합니다. 여기에는 교회의 사업, 재정, 인사, 행정, 그리고 기타 관리에 대한 중요 내용이 포함됩니다. 특히 재정 감사의 경우는 필요시 외부 전문가도 참여할 수 있게 하여 그 투명성과 전문성을 보장하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위와 같은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교회 정관에 문서화하여, 사전에 불필요한 논쟁의 소지를 최대한 줄이고 늘 체계적이며 투명성이 있는 교회 운영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위에 전술한 대안처럼 교회를 개혁한다면, 아마 신학교 지원자가 급감할 것입니다. 목사가 부유해질 수 없는 것은 물론, 그나마 철밥통도 보장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안정한 직업 중에 하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교회도 평생 고용을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그럼 누가 그런 피곤하고 배고픈 목회를 하겠느냐"고 따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발 목회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싶으면, 절대로 목회하지 마시고 부디 다른 직업을 찾아보십시오. 지원자가 너무 적어서 경쟁력이 없는 신학교들이 줄줄이 문을 닫고, 교회들이 시무 목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워져도 좋습니다. 또한 목사직이 너무 고생길이어서, 신랑감으로 기피하는 첫 번째 직업이 되어도 좋습니다. 오히려 필자는 그런 신선한 세상에서 한번 살아 보면 좋겠습니다. 

매우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지만, 담임목사직이 철밥통이 되는 한 한국교회의 갱신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이런 가혹한 개혁만이 '목회자 저질화'와 '신학교 난립'을 해결하고, 동시에 세습을 뿌리 뽑고 거룩한 교회가 다시 새로워지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밥그릇'이 아니라, '소명'에 자신의 삶을 바친 목회자들만이 한국 사회에서 참된 존경과 신뢰를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식 담임목사 제도는 바리새인의 누룩 

사실 종교개혁 전까지는 교회 내에 '목사'라는 직분이 없었습니다. 단지 '사제'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루터, 칼뱅, 그리고 츠빙글리 등의 종교 개혁자들은 이 사제라는 직제를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마치 구약의 제사장처럼 일반 신도들과는 다른 계급적 역할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에 대해 처음에는 '설교자'나 '사역자' 등의 명칭을 쓰다가, 결국에는 신약성경에 단 한 번 언급된 '목사'라는 용어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한국교회 담임목사들은 과거 종교 개혁자들이 극히 싫어했던 중세 교회 사제들의 역할을 추구하며 도리어 그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목사직의 성직화, 귀족화, 그리고 교권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히려 일부 중대형 교회 담임목사들은 과거 중세 교회의 사제들보다 더 큰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러니 한국교회는 개혁 교회가 아니라, 차라리 '개악 교회'라고 불러야 할 판입니다. 

물론 시무 목사가 당회장이 되는 담임목사직에도 장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교회 성장 초기에는 일원화한 지도력으로 인하여 효율적인 면이 많습니다. 또한 모든 교인들의 직접 의사소통이 손쉬운 작은 교회에서는 담임목사의 독주도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개척 교회에 무슨 대단한 이권이 있겠습니까. 다만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한 후부터는, 담임목사에게 집중된 지나친 교권으로 인해 득보다는 실이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치는 장로'로서의 목사직 자체는 신약성경에 근거한 중요한 직분입니다. 다만 이 '담임'이라는 명칭은 성경에 전혀 언급되지 않은 직제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한국교회에서 언제부터 누가 이런 명칭을 목사직 앞에 붙였는지 확실치도 않습니다. 

더욱이 담임목사가 자동적으로 당회장이 되어 교회 모든 일을 주관하고 관여하는 이유를 설득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교회를 대표하고 다스리고 돌보는 일은 목사의 업무가 아니라, 본래 장로나 감독들의 주요 직무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보더라도, 이 담임목사라는 직책은 '바리새인의 누룩'처럼 사람이 임의로 만든 지극히 교권주의적 '유전'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요즘 당회장들은 아예 '왕회장' 행세까지 하여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혹자는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가 초대교회에서 지녔던 특별한 지위를 이유로, 목사직의 우월성을 주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신약 교회에서 목사직은 사도직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직분보다 우월할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심지어 사도들조차도 말씀 사역에 몰두하기 위해, 다른 사역들은 집사들에게 위임하였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결론은 사실 단순합니다. 성경의 원리대로 장로는 다스리고, 목사는 가르치고, 그리고 집사는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에 충실하면 됩니다. 각자 제 자리를 지키면 된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교회 문제는 목사들이 자기 분수를 넘어 다스리려고 월권하며 사욕을 부려서 생깁니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교회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이 누구일까요. 바로 이들 담임목사들입니다.


모든 교권은 회중으로부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회중을 대표하는 공동의회가 변질된 담임목사들에 의해 기만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신학은 교권의 시녀가 되고, 개혁 신앙은 기복 신앙의 시녀가 되고, 십일조는 맘몬의 시녀가 되고, 그리고 직분자들은 담임목사의 시녀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직 극소수의 교회만이 예외일 뿐입니다. 

도대체 한국교회에 더 이상 보여 줄 순수한 그 무엇이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입으로는 늘 복음을 말하지만, 행동은 크게 사이비한 교회가 한국교회입니다. 겉과 속이 극단적으로 다른 가증된 교회가 된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이 지경이 이르게 된 데에는 '담임목사 제도'라는 비성경적인 교권 남용에 큰 책임이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특정 개인이나 직분이 회중 위에 군림하며 교권을 행사하도록 허용한 바가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며, 모든 성도들은 교회의 지체입니다. 또한 각 지체들 간에 계급적 우열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진리이며, 아울러 개혁 교회의 신조입니다. 

따라서 과도한 교권을 독점한 한국식 담임목사직은 개혁 교회에 합당한 직분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 내에서는 그 어떤 직분도 다른 직분보다 우월하지 않고, 그 어떤 직분도 다른 직분을 지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바로 서려면, 먼저 담임목사가 과소유한 교권을 회중에게 다시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교권은 회중을 대표하는 공동의회로부터 위임을 받아 정당하게 시행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회중이 교회 운영의 주체가 되는 건강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 게시글의 출처 : 당당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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