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99%사회와 한국교회
요즈음 미국 뉴욕의 맨해튼 월가에서는 연일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우리가 잘 아는 대로 월가(Wall Street)는 미국 금융의 중심지다.얼마 전 불과 30 여 명의 젊은이들이 시작한 시위는 이제 하루 수천 명이 참여할 정도로 확대되었다.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공감을 표시한 이 시위의 불은 미 전역으로 그리고 유럽으로도 번지는 기세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the Wall Street!>는 큰 구호를 내건 시위자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우리는 1%의 탐욕과 부패를 더는 참을 수 없는 99%이다."라고 밝히고 있다.미국은 그 국민 소수의 이익을 위해 나머지 다수가 희생되는 사회 체제가 됐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물론 그 소수의 중심에 바로 월가의 금융기관들과 그 종사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타당성이 없지 않다.상당한 근거가 있음을 보여주는 한 객관적 자료가 있어 소개해 본다.
지난 2008년 10월,미국 정부는 금융위기로 흔들리던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에 450억 달러(약 53조 7천억원), 'JP모건체이스'에 25억 달러(3조원정도),'골드만삭스'에 100억 달러(12조원) 등 총 7000억 달러(약 835 조원)의 구제금융을 투입했다. 이 돈은 모두 미국민이 낸 세금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시민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구제금융을 받은 금융기관들이 돈잔치를 벌인 것이다.골드만삭스는 직원 1명당 59만 달러(약 7억원), 제이피모건체이스는 46만 달러의(5억4천만원) 보너스를 줬다.2009년 월가의 보너스 총액은 그 전 해에 비해 17%나 늘어난 200억(24조원) 달러였다.
이뿐만 아니었다.이들은 규제 강화와 세금 인상을 막기 위해 막대한 로비자금을 정치계 등에 뿌렸다.2010년 6월까지 쓴 로비 자금만 1억 2600만 달러나 된다.정부는 금융기관들에게 막대한 재정 지원을 해주는 대신 복지비는 삭감함으로써 일반 시민들에게 큰 고통을 안겼주었다.
'1% 대 99%'
이는 점점 벌어지는 빈부 격차 ,부의 극심한 불균형 사회현상을 말해 주는 표현이다.빈익빈 부익부의 모순을 심화시키는 구조적인 모순을 가진 사회 현실을 심히 우려하는 목소리이다.
그런데 이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 공통의 문제이기도하다.사회의 극심한 양극화,점점 벌어지는 부의 불균형 현상은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등진 인간들이 자신 만만하게 만든 사회,그것도 인류 역사상 가장 문명화되고 진보했다는 현대 인류사회의 얼굴이 그 모양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은 어떤가.
물론 예외가 아니다.
그 사실을 우리는 무엇보다 토지 소유 통계에서 여실히 볼 수 있다.최근 자료에 따르면 우리 국민 10%가 전국 토지의 72%를, 1%가 45.3%를 보유하고 있다. 토지 소유의 심한 불균형이다.이는10%가 전 국토(남한 10만㎢)에서 전남・북과 충북(국토의 28%)을 제외한 면적을 갖고 있으며, 1%가 경기도와 경남・북 그리고 6개 광역도시를 합친 넓이(국토의 45%)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그런데 더 우려스러운 사실은 이 불균형이 갈수록 더 심화되고 또한 고착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토지는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 특히 인간의 삶의 태반과 같은 것이다.그것은 인간이 모여 사는 공동체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활동의 기초가 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땅은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의 행,불행을 결정짓는 주요 변수이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다'(레위기 25:23)
이 선언을 우리가 가볍게 여기면 안된다.왜냐하면 가볍게 여기며 사는 사회일수록 고통이 따르기때문이다.이는 한국,미국만이 아니라 지구촌 전체의 고통스러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는 말씀이다.이 선언은 토지 공개념의 정신을 함축하고 있다.
불행히도 우리나라의 심한 토지 소유 불균형은 토지공개념 정신을 비웃고 있다.이 현실을 앞으로 계속 그냥 내버려둔다면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1:99의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이 불균형문제는 우리 사회의 안정과 번영,평화를 해치는 결정적인 요인이다.우리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암적 요소이다.
그동안 우리가 공정한 과정을 거쳐 토지의 불균형을 형성했다고 해도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불공정한 과정 즉 부동산투기나 온갖 불법과 편법 등이 개입되어 만들어진 불균형이라면 그것은 끊임없이 우리 사회 전체의 평화로운 삶을 옥죄는 사망의 줄이 된다.사실 지난 1960년대 이후 수 십 년 동안 우리 국민 전체가 부동산투기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위 탕자의 비유(눅15장)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어떠한 삶을 살게 되는지를 분명히 말해준다.그는 결국 돼지들과 뒹구는 신세가 되었다.돼지처럼 탐욕에 종노릇하는 존재로 전락되었다.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 무한한 능력(사랑,지혜 등)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떠나 제한된 능력으로 살다보면 필히 남의 것을 빼앗거나 착취하게 되기때문이다.하나님을 등지니 탐욕은 무제한으로 늘어나고 그에 따라 살다보니 남의 것을 빼앗게 되는 것이다.이러다 보면 결국 세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무자비한 다툼이 끊이지 않는 정글이 된다. 1% 대 99%의 사회는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약육강식의 무한 경쟁의 사회가 달려간 종점인 것이다.여기서 1%의 사람들은 더불어 먹으면 넉넉할 파이의 99%를 차지하고 99%의 사람들은 파이 1%를 겨우 차지하고 있는 처지가 된다.여기서 1%의 사람들은 살찐 돼지이고 99%의 사람들은 파리한 돼지 같다.살쪘느냐 삐쩍 말랐느냐만 다른뿐 돼지라는 사실은 똑 같다.
지옥이 따로 없다.1%의 돼지들과 99%의 돼지들이 꿀꿀,꽥꽥 대고 쉴 새없이 으르렁대며 뒤섞여 사는 세상이 지옥이다.지옥은 지금 여기서부터 있는 것이다.여기서 하나님 노릇하는 것은 탐욕이다.탐심을 우상으로 단언한 바울 사도의 말(골로새서3:5)은 참으로 적합하다.
그런데 교회가 탐욕을 부채질하고 인간의 탐욕적 소원을 위한 기복신앙과 소원성취신앙을 고취하면 그곳은 우상숭배의 전당이 된다.비록 그 교회가 아무리 크고 아름답게 교회 건물 십자가 첨탑을 세워 놓았어도 그곳은 단지 우상숭배의 처소일뿐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새 세상을 꿈꿨다.
저마다 탐욕 우상을 부수고 새롭게 사는 새 누리 말이다.누구나 제 속의 돼지를 죽이고 이제 진정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 되어 평화롭게 어울려 사는 삶이다.
어디 한번 그가 그린 새 세상을 보자.
"늑대가 새끼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수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어
그 새끼들이 함께 뒹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리라.
젖먹이가 살모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겁없이 손을 넣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
(이사야 11:6-9)
이사야는 짐승으로 전락된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능력으로 새세상을 만들 가능성을 보고 꿈을 꾼게 아니었다.인간에게는 그 가능성이 털끝만치도 없다.짐승이 사람이 되는 법은 이 땅에 없다.저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새로 이룰 새세상은 짐승이 되어버린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온 인자(the son of man)에 의해서 오는 것이다.이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이 주어진다.인간의 존재적 변화와 새세상은 오직 그 인자를 통해 주어지는 은총이다.
이사야는 이 메시야를 가리켜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야훼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고 미리 말했다(사11:1) 예수는 육신으로는 이새의 아들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지만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이시다.(롬1:3-4)
그런데 메시야 예수께서 이 땅에서 행한 공적 활동의 첫 선언(누가복음에 의하면)은 '희년'喜年(주의 은혜의 해, Year of Jubilee 눅4:19) 성취이다.
희년법은 구약시대 이스라엘공동체법의 꽃과 같은 것으로서 50 년마다 한번씩 지켜야하는 대대적인 사회개혁프로그램이었다.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7번 지나고 그 다음 해(50년 째)에 주기적으로 지키는 것으로서 그 때에는 부리던 종들을 조건 없이 풀어줘야하고 토지는 원주인에게 되돌려주어야한다.게다가 토지를 경작하지 않고 쉬게하라는 생태적 배려까지 그 법은 갖고 있었다. 토지 소유권이 아니라 관리,사용권만 인정했던 당시 본래 분배받은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줌과 동시에 자유인이 된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서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이 제도는 평화로운 세상 건설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이다.
희년!
예수,그는 바로 이 희년의 정신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오신 메시야이다.예수께서 선포한 메세지의 주제인 하나님나라는 곧 희년정신이 실현된 사회,세상으로서 일찌기 이사야가 그렸던 새세상이기도하다.
그러면 이 희년 정신이 깃든 새세상 즉 하나님나라를 만들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새로운 사회제도나 법을 제정하는 일일까?
사회 혁명일까?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했던 예수께서 취한 방법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다.
이는 법이나 제도를 고치거나 사회혁명 보다 근원적인 방도로써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어리석어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지혜이다.
예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탐욕에 절어있는 인간을 죽이고 새 인간을 탄생시키기 위한 것이다.누구든지 예수를 신뢰하고 그에게 믿음으로 붙으면 그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은혜로 들어간다.십자가는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키기 위해 돼지 인간을 죽이는 틀이다.이렇게 다시 태어난 인간은 이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로 살게 된다(롬6장). 더이상 그는 탐욕에 종노릇하지 않고 이제 사랑과 공의에 종노릇한다.
희년정신이 깃든 새세상을 이루는 데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장애 요소는 인간속의 탐욕이다.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인류 속에 우상처럼 완강히 버티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탐욕이기에 이것을 죽이지 않고서는 어떤 법이나 제도의 변화,사회개혁이나 혁명도 무의미하다.탐욕의 죽임 없는 사회개혁이나 혁명은 단지 살찐 돼지와 파리한 돼지의 자리 바꿈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바로 이 탐욕 우상을 파쇄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다시 부활하셨다.초대교회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었다.(고전15:1-8,고전2:2)
에수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위로부터 맡은 일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즉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음으로써 예수와 연합하도록 돕는 일이다. 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죽이고 새사람으로 예수와 함께 다시 태어나 그리스도로 살게 돕는 것이다.
맨처음 그리스도교회공동체는 사랑과 공의 안에서 더불어 사는 본을 보였다.
바로 이 모습이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 하게 하시니라."(행2:44-47)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4:32-35)
하지만 참으로 통탄스럽게 이 위대한 공동체의 모습은 갈수록 퇴색되고 말았다.대체로 주후 4세기(기독교의 로마 국교 공인 ) 이후 이 아름다운 공동체 모습은 사라지고 만다.그러다 중세기엔 기독교가 면죄부까지 팔아 먹는, 그야말로 강도의 소굴,탐욕의 덩어리 조직,이권 집단으로 아주 전락되고 만다.
16세기에 절정을 이룬 종교개혁은 의미심장한 족적을 남겼다.하지만 그 운동은 미완성 개혁이었다. 오직 성경,오직 은혜,오직 믿음이라는 슬로건을 내 걸고 피 흘리며 벌인 그 운동은 구원이 인간의 노력,선행,공로가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진리- 복음의 진수지만 기초 차원을 다시 확보하는 데 그치는 아쉬움을 남겼다.사실 이 차원은 인간 구원의 여정 전체에서 볼 때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개혁은 루터가 말했듯이 지속되어야할 과업이다.종교개혁은 이제 완성되어야한다.종교개혁의 고삐를 쥐고 계시는 성령은 개혁을 멈추지 않으신다.지금은 종교개혁의 완성을 향해 달려야 할 때이다.개혁의 완성은 십자가복음을 곧추 세우는 데 있다.짐승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믿음으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은혜가 흐르는 공동체에서 그 완성을 위한 벽돌은 쌓인다. 그리스도와의 연합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이루는 초대교회적인 공동체를 성령 안에서 회복하는 데까지 가야 종교개혁은 완성된다.교회가 이 이 완성을 향해 질주할 때 비로소 세상을 변화시키는 누룩도 되고 맛을 내는 소금도 될 것이다.세상을 인도하는 빛도 되고.
사도 바울은 이 십자가의 복음 외의 다른 것(짝퉁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목회자와 교사들을 혹독히 저주했다(갈1:9) 그만큼 이 십자가복음은 그리스도교회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핵심적 요소이기때문이다.그리스도교회는 돼지(살이 쪘든 파리하든 간에)를 도살하는 십자가복음에 투신해야한다.그렇지 않고 교회가 탐욕을 부추기며 성공주의 신앙이나 번영신앙,기복신앙이나 소원성취신앙에 몰두하면 스스로 저주를 자초하게 되고 세상에는 재앙을 안겨주는 집단이 되고 만다.이는 기독교 2천년 역사가 이미 증명한 바이다.
인류의 구원은 예수 십자가에 달려 있다.
지구촌의 소망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에게 있다!
김달성목사(평안감리교회)/<예수 믿지 않는 기독교인>(대장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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