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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바른이해

by 【고동엽】 2011. 11. 4.
 
 

 

구원 바른이해       

 

구속과  구원  두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할수 있는데 

다시  구속은 세부적으로 히브리어 파다(פדה)와 가알(לאג)로서 뜻을 이해한다.

먼저 파다(פדה)는 속죄금을 지불함으로서 생명을 구원하는 구속의 행위이고,

그리고 가알(לאג)은 현재 능동태 분사형으로 가족법에 속하는 구속행위로서 페두트(פדות),

즉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를 구속했다는 의미이다.

 

구약에서의 구속이라는 용어는 그의 백성을 애급에서 구출해낸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초점을 맞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그래서 출애급기  20장에 십계명이 나오지만 이 십계명보다 더 중요한  2절의 "너를 애급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라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구속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신약에서의 구속은 어떠한 개념보다 오희려 속죄(Atonement), 희생(Sacrifice),의인(Justification)등과 같은 의미들을 좀더 합리적이고 설득력있게 한다.

 

마태복음20장:28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라는   이 구절에서도 속전 즉 루트론(λυτρον) 구원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구체적적으로 역사적인 사건안에서 자기의 백성을 멸망으로부터의 구원하셨다는 그 증명된 역사적 구원이 장차올 구원의 "예표 또는 전형" 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공통된  주제이다. 즉 성경에서  구원은 역사적이며 종말론적 현실인 것이다. 구원을 하나님의 아들이 성취하셨으므로 그를 구원자를 뜻하는 이름 "예수" 라 불렀다. 이같이 구원은 성서전체의 중심 주제이다.

 

역사적인 구원이 종말론적인 구원으로 변화되는것이 독특한 성경의 특징이므로 과거 하나님의 행위는 "미래에 있어서 하나님의 행위의 전형이거나 예표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안에서 성취된 구원은 마지막때에 있을 구원의 "약속이며 보증이다".

 

역사의 마지막에 올 구원을 새로운 백성들은 실제로 새하늘과 새땅이 이뤄어질 것으로 이해한다.이러한 예언자적 대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교회 형성에 있어서 이미 첫단계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이 신약의 주장이다.

 

즉 새로운 창조는 비록 현 세대에서는 신앙의 눈으로만 볼수 있기는 하지만 이미 존재한다. 구원 받은자는 아직도 마지막 구원 즉 옛 질서가 사라지고 위대한 창조와 구원 행위에 의해서 새 하늘과 새땅이 나타날 것을 기다린다.

 

구원을 종말론적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구원이 단지 미래의 사건 혹은 미래의 현실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종말론적 현실이란 바로 지금 현실적이고 현재적이며 활동중이며 동시에 아직 실현되지 않은것이며,눈에 보이지 않은 것이며(믿음을 제외하고는),또한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신구약 전체에서  구원은 실재적이고, 성취되었으며, 그리고 활동적 이지만 그러나  구원은 아직도 완전히 실현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결정적으로 믿음을 통해 이미 우리의 것으로 된  구원을 확신한다.

 

이미 지금 현재에 활동중인 종말론적 구원은 역사적인 구원이 예시하고, 약속해준 그 역사를 넘어 최종적으로  실현된다.

 

그러므로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 다른 세가지  구원 이 아니라 하나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구원 하신다 [신9:4-6].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 하시고 정결케 하신것은 이스라엘이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이다.

 

에스겔 36장22절 "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바울은 공로에 의해  구원 이라는 랍비들의 모호한 교훈을 회복시켰고,  루터도 중세 공로에 의한 이라는 흐트러졌던  구원의 교리를  한번더 회복시켰다. 

 

신약에서  구원은 예수의 부활을 포함한  전 그리스도 사건이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에  구원은 그리스도의 탄생,죽음과 부활의 전 관계성이다.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은 그 자체가 하나님과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 안에서 만나게 되는 구원 행위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구원 하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피는 죽음과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생생한 상징 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에 의해서 죄의 용서를 얻게해주는 희생제물로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구약에서 모든 희생은 하나님 과의 친교수단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만찬은 매주 지키는 유월절(부활절) 축제가 되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역사적 구원을 기념하며 그가 이룩한 구원계약에 대하여 감사함이다.  하나님 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하신  구원 또는 화해의 행위는 인간에게만 뿐 아니라 전 우주적이다. 즉 신약의 구원은  우주적 개념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땅에 있는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을 막론하고 다 자기자신과 화해시켰다.

 

에베소서 1장10절 "하늘에 있는것이나 땅에있는 것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새하늘과 새땅은 예언자들이 예언한 새창조와 다를바 없다. 고린도후서 5장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 세대에서 새창조는 믿음의 눈으로만 식별되며 또한 그것은 교회의 영역에 구성요소가 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이며 창조와 구원의 새로운 행위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이 백성은 장차 이뤄질 완성의 첫열매이다. 교회는 지금 구원의 영역 혹은 "과정의 사람들인" 쏘조메노이 (σωζωμενοι) 즉 구속받은자들로 구성된다. 그래서 역사적  구원은 이미 발생했다. 

 

 

 엡에소서 2장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역사적인 구원{바로지금}과 종말론적인 구원{아직아닌} 사이에 신약에서는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구원 하시는 "의"는 역사적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다.그러나 그것은 다만 "믿음근거" 한에서 계시된 것이다.

 

그리고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인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세대에서 "믿음을 위한 믿음을 통해"전파된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은 앞으로 계시될 거대한  구원의 보증일 따름이다.

 

그 역사적 사건은  구원이 신앙에 의하여 "바로지금" 우리에게 전달되는 수단이다.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가 얻은 현재의  구원의 "지식"(누가복음 1장77절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하리니)은 다만 그리스도의 재림때에 우리가 알게될  구원의 "전조요 예표"이다.  

 

예수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현재의 구원 경험은 말하자면 장차 올  구원의 실재앞에 던져진 "그림자"이다. 이런의미에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구원도 그 자체가 종말론적이며 다가올  구원의 "전계시"라고 말할수 있다. 

 

신약의  구원개념은 철저하게 "종말론적"이며 신앙을 통해 바로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미래의 현실"인 것이다.   신앙을 떠나서는  구원을 알수없는데 그 이유는 신앙이 역사의 세대에서는 지식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 하셨다고 말할 때에 (유다서 3장5절 우리를  구원 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는 독특한 성경 히브리어 관용구는 과거와 미래가 동일시 된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우리를 구원 하실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의 역사안에서 실현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13장11절에서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또는 로마서 8장 24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라고 쓸수있었다. 완전하고 결정적인 의미에서 구원은 주 예수의 날에 성취되었다.  

 

고린도전서 5장5절 "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  주의날(즉 재림)은 (구원의 날)이며 또한 (진노의 날) 이다. 구원의 날과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안에 계시되었다.

 

구원의 소망으로 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도 내일도 하늘로부터 올 구세주를 기다린다. 빌립보서 3장20절"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 그리스도인들은 구원 얻을 자들이며, 이 구원은 그리스도가 근원이 되는 쏘테리아 아이오니오스 (σωτηρια  Αιώνιωος ) 즉 장차 올 세대의 구원이다. σωτηρια  ζωή Αιώνια

 

대체로 신약의 일반적 태도는 히브리서 9장28절에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이다.  

 

이제 신약의 구원은 이 생명뿐 아니라 다가올 세대의 생명에 관해서도 관련돼있다.  실지로 구원과 다가올 세대의 생명은 동의어이다.  예를들면 제4복음서 요한복음4장22절 "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에서 여기의 구원(쏘테리아σωτηρια ) 의 개념을

생명(조혜ζωή  ), 혹은 영원 (조혜 아이오니스 ζωή Αιώνιωος) 개념과 일치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들러간다는것과 생명에 들어간다는 것은 동일한 표현이다. 이 두가지 표현은 모두 종말론적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데 구원받는다는 것은 바로 지금 믿음에 의해 장차 올 세대의 생명에 들어가는것이며,  또한 바로 지금 종말론적으로 생명을 소유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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