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의 변절과 교권주의 교회가 변질되는 이유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3)
최근 제자교회, 갈보리교회, 사랑의교회, 그리고 증가성결교회뿐만이 아니라 과거 충현교회, 소망교회, 금란교회, 개봉감리교회, 한국대학생선교회, 각 교단 총회 등 한국교회 일각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들을 돌아보면서 '바른 교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일단 이 사건들이 크게 우려스러운 이유는 목회자들이 문제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는 점이며, 아울러 수천년 교회 역사의 그늘에서 끈질기게 기생하여 온 '교권주의'라는 독버섯을 또다시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교권주의란 부패한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일반 신자들과는 다른 특별한 성직이라고 강조하면서 권력을 세력화하고 제도화하여, 부와 명예 그리고 세속적 성공을 추구하며 진리를 왜곡하고 교인들 위에 군림하려는 사상을 의미합니다. 신약 성경은 교회 내에 공존하는 이런 잘못된 종교 지도자들이나 불순한 세력들을 '바리새인',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 또는 '사단의 회'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어느 나라에서든 교회가 외형적으로 성장하고 부흥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이 교권주의가 기승을 부려 왔습니다. 중세 유럽 교회와 17-18세기 영국의 교회, 그리고 오늘날 미국의 일부 대형 교회들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커진 그만큼 더 큰 이권과 부수익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수백 개의 크고 작은 교단들로 사분오열된 것도 실제로 진리 문제로 갈라선 경우는 매우 드물고, 거의 다 이들 교권주의자들이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거나 또는 교권 세력 사이의 밥그릇 싸움으로 기득권에 따라 이합집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교권주의의 뿌리 속에는 인간의 탐심과 죄성이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교권주의자들은 입으로는 언제나 하나님과 교회를 말하고 있으나, 뒷전으로는 자신들의 사익 추구를 최우선으로 합니다. 그리고 이런 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왜곡시켜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한국교회 교권주의의 뿌리와 그 실태를 간략히 살피고, 이에 대한 기본적인 대처 방안도 일부 논의해 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여기서 말하는 '한국교회'란 일반적인 의미로, 한국의 많은 교회들을 뜻합니다. 즉 한국의 모든 교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한국교회의 친권력 전통과 교권주의
먼저 한국교회 교권주의의 뿌리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멀리 일제 식민지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파된 시점이 바로 구한말로부터 연결되는 일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제의 집요한 속박과 탄압 속에서 한국교회는 기초적인 성장을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조선의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크고 현실적인 난제는 바로 신사 참배 문제이었습니다. 물론 이에 저항하여 주기철 목사님처럼 순교를 당하시거나 투옥을 당하신 많은 목회자들도 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거의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적당한 핑계를 구실로 하여 신사 참배에 굴복했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단체로 떼를 지어 일본 본토 신궁에까지 찾아가서 참배를 하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교단 총회장과 지도급 인사였던 목사님들이 자진하여 전투기와 기관총 대금을 헌납하고, 심지어 교회 종까지 떼어다 바쳤으며, 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황국 신민 사상을 전파하고, 기독 청년들을 전쟁터에 내모는 정치 선동을 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하였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즉 이분들은 필요하면 파렴치하게 예수뿐만이 아니라, 덤으로 민족까지도 팔아넘길 수 있음을 일찍이 손수 보여 준 것입니다.
초기 한국교회 교권주의의 문제는 여기서부터 증폭되고 확산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당수의 순수한 지도자들은 투옥을 당하거나 국외로 망명을 하거나 순교를 당하게 된 반면에, 일제에 협력하고 변절한 목회자들이 교회 내에서 승승장구하며 주도권을 잡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일반 신도들이야 일제의 칼날 아래서 숨도 제대로 못 쉬며 그저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암울한 시절이었으니, 교단 정치 따위에 신경을 쓸 여유가 있었을 리가 만무합니다.
이렇게 일제의 비호 속에서 교회 내의 권력을 유지한 친일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더욱 일제에 협력하였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초기 성장기에서부터 매우 건강하지 못한 취약 체질을 갖게 된 것입니다. 즉 대부분의 교회들이 변절된 지도자들의 그늘 아래서 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1938년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의 주도로 열린 제27차 조선 장로교 총회는 신사 참배 반대자들을 회의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며, "신사 참배는 국민의례이다"라고 가결시켰습니다. 그리고 바로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는 23명의 노회장들을 데리고 평양 신사에 가서 시범적으로 신사 참배를 하였습니다. 어떤 목사들은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일본 우상 천조 대신의 이름으로 세례까지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신사 참배를 끝까지 반대한 약 200여 교회가 파손되었고, 2,000여 명이 투옥되었으며, 그중에 50여 명은 옥중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음양으로 믿음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고군분투하신 목사님들도 적지 않게 계셨습니다. 그리고 비록 신사 참배가 큰 죄이기는 하지만, 그것 하나로 신앙을 버리고 완전히 배교하였다고 정죄해서도 안 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존경하는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도 당시에는 신사 참배를 하였다고 고백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이 신사 참배를 계기로 하여 성장기 한국교회의 지도부가 신앙적으로 순수하지 못한 세력에게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에 협력하던 이런 변절된 목회자들이 모인 노회나 총회 등이 갈수록 정치화하고 세력화한 것이 한국형 교권주의의 뿌리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이런 한국교회의 친일파 전통과 토양이 초기 교권주의를 고착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부인하기가 힘든 역사적 사실입니다.
변신 그리고 또 변신
여기에 추가하여 심각한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의 정치권, 경제계, 언론계, 군부 등과 마찬가지로 이들 친일 교권주의자들은 해방 후에도 철저한 친일 청산과 회개 없이 계속적으로 기득권을 유지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세상이 바뀌자 태생적 변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과거 일본 제국 대신에 이번에는 미국과 자유당 독재 정권에 유착하여 세력을 견고하게 확장했습니다.
마침 공산주의에 대한 대처가 최우선적으로 시급한 어수선한 시절이었기에, '반공'이라는 매우 훌륭한 명분을 이용하여 과거 '친일'이라는 수치스런 행적을 적당히 얼버무리고 감출 수 있어서 변신의 기회도 아주 좋았습니다. 그 덕분에 고사 직전의 매국 친일파들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모두 열렬한 '애국 반공 투사'들로 새롭게 부활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성지가 바로 지금의 한국 땅입니다.
이런 역사적 토양 속에서 아직도 선거 때가 되면 일부 목사님들이 설교 중에 특정 정치 세력을 지원하는 못된 버릇을 가끔 보여 주시는데, 아마 권력에 아부하던 옛 습성을 미처 버리지 못한 생생한 증거일 것입니다. 이분들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구약 성경의 깊은 의미를 다시 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여튼 다시 권력을 유지한 대다수 친일 교권주의자들은 제대로 진심을 담은 공식적 회개조차 없이 오히려 순수 세력인 출옥 성도들과 목회자들을 압박하고 내몰며 교권의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래서 해방 뒤 출옥 성도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회개 운동이 친일파 인사들의 반발로 큰 성과 없이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경남 지역 고신 교단의 설립도 이런 일련의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아시는 내용일 것입니다.
더구나 장로교 총회는 신사 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제명하고 추방시켰던 한부선 선교사를 해벌(解罰)한다는 결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범법자이며 가해자였던 한국교회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거나 참회하지 않고, 오히려 무고한 피해자에게 해벌을 통보한 것은 적반하장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이 역시 참된 반성과 회개를 모르는 친일파 지도자들의 철면피한 역사 인식과 교권주의적 발상이 낳은 기막힌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필자는 이런 저급한 교권주의자들을 단순히 '친일파'라고 규정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다고 느낍니다. 적어도 이들에 대한 보다 정확한 표현은 '기회주의자'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필요 시 언제든지 예수는 물론이고 민족과 영혼까지 팔아 가며 친일뿐만이 아니라 친미, 친독재, 친군부, 그리고 친재벌 등 어떤 변신도 불사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행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일제 시대 이후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교권주의에 의하여 휘둘린 한국교회는 정의를 추구하며 약하고 억눌린 자들의 편에는 한 번도 제대로 서지 못하고, 언제나 부와 권력을 가진 강자의 편에 서 왔다는 신랄한 비판에 마땅히 변명을 하기 힘들게 된 것입니다. 단지 개혁 교회 내의 일부 양심 세력들만이 교권주의를 거부하고 저항해 왔을 뿐입니다.
한국적 교권주의의 악습
이렇게 세상이 바뀌고 정권이 여러 번 교체된 이후에도 한국교회의 교권주의자들은 혈연, 학연 그리고 지연 등의 인맥을 이어 가며 교묘한 줄타기를 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매우 성공적으로 잘 지켜 왔습니다. 물론 이들 모두가 자신들의 권력을 자식들이나 친인척에게 물려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매우 심각한 것은 이들 교권주의자들이 세계 교회사에 보기 드문 한국적 악습들을 교회 내에 뿌리 깊게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우선 목회자를 위한 과도한 권력 집중이 한국교회 특유의 나쁜 관습입니다. 담임목사가 '주의 종'이라는 명분으로 교회 내에서 사실상 입법, 사법, 행정 등 삼권을 모두 쥐고 마치 '중세 교황'처럼 행세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개혁 교회 안에서 어떤 직분자도 신도들 위에 군림할 권한은 없습니다. 신약 시대에 사는 모든 신자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그런 면에서 직분에 관계 없이 신자들 모두가 대등한 '성직자'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계적으로 매우 희귀한 일로써, 한국교회의 거의 모든 교단들이 합창이라도 하듯 십일조를 율법처럼 문자적으로 의무화하여 중대형 교회마다 돈이 쌓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자국에서는 십일조를 의무화하지 않는 건전한 외국 교단들도 유독 한국에 들어와서는 십일조를 챙깁니다. 이렇게 넘치는 돈으로 성장주의와 물량주의를 추구하며 영업을 크게 확장하여, 전세계 50대 초대형 교회 중에서 가장 큰 교회를 포함한 무려 27개 교회가 한국 땅에 좌판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교권주의자들은 교회 공금을 자기 주머닛돈으로 쉽게 착각합니다. 그래서 툭하면 교회 공금을 횡령하거나, 아니면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자기 주머니를 만족시킵니다.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 집회에서 몇 번 설교를 하고서 강사료 명목으로 1,000만 원이나 챙겼다고 소문이 난 어느 목사님 이야기는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요즘은 외부에서 하도 시끄럽게 떠든 덕분에 그래도 다소 개선되고 있지만, 교회 재정 처리 역시 담임목사의 입김이 너무 강하고 아직도 불투명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목사님은 은퇴를 위한 교회를 짓겠다는 명분으로, 교회 돈을 무려 200억 원이나 빼 가고 교회 장부를 아예 불살라 버렸다는 소식도 들려 옵니다. 이렇게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교회를 개인 회사처럼 운영하는 것 역시 한국형 교권주의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입니다.
거기에 추가하여, 선거 부정이 상습화해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단 선거에서 자신들이 당선되기 위해 돈으로 표를 매수하는 악한 행위가 그것입니다. 만일 외국 목회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전혀 믿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다른 목회자들을 매수한다는 것은 차마 상상도 못할 엄청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한다면 가능하겠지요. 그런데 이런 부끄러운 현상이 한국교회 내에서는 비일비재합니다.
다음으로는, 당연히 담임목회자들의 교회 세습을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구촌 어디를 둘러보아도 한국교회처럼 광범위하게 세습을 자행하는 교회들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친족들에게 특혜를 준다는 면에서, 이 역시 사실상의 성직 매매와 크게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교회가 이미 기업화했음을 잘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물론 이외에도 더 많겠지만, 거짓된 교권주의자들이 교묘한 말로 신도들을 속이며 자신들의 배를 불리며 부와 이권을 축적하고, 교회 내에 기생하며 교인들을 착취하여 오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어두운 실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찾기 힘든 이런 악습들이 교권주의의 그림자 속에서 거의 관습화하고 제도화한 것이 기형적인 한국교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들은 거룩한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의 세속적 가치관을 그대로 추구하며 이를 성취하기 위해 불의한 수단들을 거침없이 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필자가 한국교회를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지구촌에서 가장 부패한 교회라고 서슴지 않고 지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없고 세상과 짝하여 목사와 건물만이 위세를 부리는 바람난 교회, 이것이 바로 고멜의 모습입니다. 또한 오늘날 교권주의에 짓밟히고 세속적 거품으로 가득 찬 한국교회의 슬픈 한 단면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교권주의의 동역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권주의에 적극 협조하고 지원하는 강력한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 교권주의자들의 충실한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맹신도들입니다. 이들은 목사를 따르는 일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일과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분들의 안목은 매우 특이합니다. 그래서 목사가 교회 공금을 횡령하고, 교단 선거에 돈을 뿌리고, 여신도와 간통하고, 자식에게 교회 세습을 하는 등 하여간에 무슨 짓을 해도 별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들도 분통이 터질 정도인데, 이들만은 그렇게 충직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하고 놀라울 정도입니다.
더군다나 한국의 교권주의자들은 대부분 위선적인 인사들이고, 그들 스스로 내세우는 세탁된 학력이나 경력 역시 알량하기 그지없습니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보아도 교인들의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조잡한 인물들이 목사직이라는 겉옷으로 성직자처럼 위장하고, 유명인으로 행세하며 거짓된 입술로 경건을 말하고, 순진한 신도들 위에 군림하며 기만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권주의에 잘 길들여진 맹신도들은 겸허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참된 주의 종들은 외면하고, 오히려 자기들이 드린 헌금으로 호의호식하면서도 자신들을 힘으로 억누르는 이런 거짓된 종교 업자들을 더 좋아하고 그들에게 충성을 바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일이 비단 한국교회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깊이 한탄한 바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고후 11:20)
이런 일만 보더라도, 허탄한 인생들이란 정말 어쩔 수가 없는가 봅니다. 겉모습만 보면 모두 똑똑해 보이는데, 희안하게도 영적인 문제로만 가면 갑자기 이상하게 변합니다. 여기에는 대학 교수도, 국회 의원도, 장관도, 판사도, 장성도, 언론인도 거의 상관이 없습니다. 우선 주변의 이단 종파들을 한번 살펴보십시요. 얼마나 많은 멀쩡한 분들이 그 줄에 서서 애쓰고 있는지, 정말 답답한 일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를 더욱 확신케 되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지혜로운 자는 태산이라도 기필코 넘어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저 작은 지푸라기 하나에도 이를 핑계삼아 쉽게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맹신도들의 안쓰러운 모습입니다. 하여튼 앞으로 이 맹신의 문제는 교권주의를 해소하는 일에 가장 큰 장애가 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교권주의를 끝내려면
사실 교회가 정화되려면, 제도의 개혁만으로는 불가능함을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목회자와 신도들 자신이 우선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물론 이는 옳은 말이고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고칠 수 있는 제도적인 악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이는 매우 지혜롭지 못한 일이 될 것입니다.
먼저, 최근에 자주 언급된 것처럼 모든 교회는 개혁 교회다운 정관을 만들고 이를 통하여 모든 직분자의 권한과 의무의 한계를 명확히 설정하고 지켜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럴 경우에, 목회자나 장로들의 독주와 교권 남용을 크게 해소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담임목사나 시무 장로의 임기도 물론 여기에 포함되면 좋을 듯합니다.
또한 담임목사의 시녀로 전락되기 쉬운 당회를 늘 감시하고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상대적으로 소수 모임인 당회를 이용하여, 전체 교인의 권리를 짓밟고 월권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일반 교인들이 참여하는 제직회나 공동의회의 감사 기능과 권한을 크게 강화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각 교단의 노회나 연회, 그리고 총회 등의 핵심 임원들은 원칙적으로 평생 단임제로 하면 좋을 듯합니다. 그래서 한 번 임원을 했던 분들은 다시는 교단 정치에 나서서 계속 세력화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즉 한 번 봉사한 것으로 만족하시고 깨끗히 물러서시라는 뜻입니다. 이럴 경우 어느 특정인들이 파벌을 이루며 지속적으로 교단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개혁하기 매우 힘든 이유 중 하나는, 개혁의 대상인 정치 목사들이 교단의 지도급 자리에 눌러앉아 돈과 인맥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평생 교권을 흔들며 개혁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교회 내 부정과 부패에 대한 단호한 치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교단 선거에 돈을 뿌리거나, 교회 공금을 유용하거나, 또는 도덕적으로 치명적인 잘못을 범한 직분자들은 반드시 해임 처리하여 다시는 교회 정치나 직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조치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에 저항하거나 회피하는 교권주의자들이 있다면, 기독교 언론이나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하여서라도 끝까지 추적하고 감시하며 고발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소명에 따라 순수하게 헌신할 준비가 된 분들만이 목회하시기를 권고하고 싶습니다. 비록 주님을 위해 죽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주님을 위해 한 번 바르게 살아 보겠다는 결연한 각오조차 없이 함부러 목회에 나서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생계나 치부의 수단으로 목회를 하는 불행한 일도 반드시 사라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독재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사람은 단순하고 무식한 대중들이고, 교권주의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교인은 영적으로 무지한 신도들입니다. 사실 지각 있는 신자들이 모인 교회라면, 누구도 교권을 함부러 휘두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교권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사람들은 외부인들이 아니라 바로 개교회의 맹신도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깨어 있어야만 비로소 교권주의를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깊이 모르는 목회자는 평생 외식을 할 수밖에 없고, 성경을 제대로 모르는 신도들은 평생 맹신을 벗어나기 힘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늘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그 가르치심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신자들이 되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말씀 한 구절 때문에 고민하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을 치고, 때로는 고난도 불사하고, 그러나 결국은 그 말씀의 능력과 위로 가운데 하늘의 소망과 기쁨을 이웃에 전하는 참된 제자의 길을 겸허히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거짓된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영육으로 죽어 가도 언제나 평안하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정말 지금 한국교회가 평안한지요. 과연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정의롭고 순결하며, 또한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어려운 이웃들과 잘 나누고 있습니까. 아니면, 일부 목사님들과 신도들이 잘 먹고 잘사니 평안하다는 뜻입니까.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다시는 저속한 교권에 흔들리지 않는 건강한 모습을 보여 주려면, 일찍이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보여 주신 애타는 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 4: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막 9:42)
교인들이 주일마다 교회에 가면 은혜로운 찬송가와 복음 성가 등 많은 아름다운 노래들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새 신자가 처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 딱 두가지 노래만이 귀에 들린다고 한다. 바로 '복 타령'과 '돈 타령'이다. 담임목사께서 모처럼 좋은 설교를 잘하시는 듯하다가도, 틈만 나면 이야기가 '복과 돈'으로 빠져 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새 신자들의 거부감은 대단히 크다. 그중에서도 특히 헌금 채에 대한 비난이 매우 신랄하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나이 꽤나 먹은 사람들이 기껏 모여서, 유치하고 속 보이게 왜 잠자리채를 돌리며 헌금을 강요하냐는 것이다.
이런 반발이 교회를 구약의 성전처럼 신성시하고, 담임목사를 제사장처럼 모시는 분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반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분들은 교회가 하는 일은 무조건 옳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을 조금이라도 바르게 이해하시는 분들이 본다면, 이는 중학생이라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극히 상식적인 비판이므로 마땅한 반론이 떠오를 리가 없다.
필자는 예전부터 이 헌금 채를 볼 때마다 항상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누가 주도하여 슬그머니 사용하기 시작했는지 그 기원도 정확히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토록 비성경적이고 세속적인 악습이 그토록 오랜 동안 교회 내에서 계속 채용되어 오고 있다는 것이 정말 기적처럼 느껴진다.
거룩하고 순결해야 할 교회에서 왜 구태여 이런 졸렬한 방법으로 반강제적인 헌금을 거두어야 하는지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는 사실상 가장 경건해야 할 예배 속에 위장된 매우 저급한 헌금 강요가 아닌지. 세상의 그 어느 모임에서도 모일 때마다 눈앞에서 채를 돌려 가며 돈을 거두는 곳은 없다. 이러니 '교회가 세상보다 더 세속적이다'라는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좋게 보아 주려 해도, 헌금 채 고수는 새 신자들에게 상처를 주고 교회의 문을 막는 졸렬한 행위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누구나 보편적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헌금 채가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더 많은 헌금을 내도록 유도하기 위한 매우 인위적이며 통속적인 수단이라는 데에 다른 이의를 제기하기가 힘들 것이다.
교회 문을 막고 있는 헌금 채
많은 분들이 교회 개혁을 논의하고 이를 위하여 큰 노력을 하고 있으나, 사실 우리는 아직도 지극히 비성경적인 이 헌금 채 하나도 제대로 바꾸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느 분의 지적처럼, 그동안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물질에 시험 들어 교회를 떠났는지 정말 안타깝고 두려운 일이다. 이러니 새 신자를 전도해도 자신 있게 추천할 만한 교회가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 초신자들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만 귀에 들어온다고 타박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오히려 그런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분들이야말로 시력에 맞지 않는 안경을 쓰고 계신 분들이 아닌지 거꾸로 묻고 싶은 심정이다.
그동안 헌금 채를 그저 하나의 관습으로 여기고 무심코 사용한 개혁 교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믿는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느니, 차라리 연자 맷돌을 자신의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하셨다. 형제를 실족케 하는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경고하신 것이다.
혹시 이 헌금 채가 과연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신학적으로 따져 보자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으나, 필자는 그럴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헌금 채 사용의 성경적 근거가 아예 전무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헌금 채라는 단어조차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어느 가난한 과부가 헌금 채가 아닌 '연보 궤'에 돈을 넣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구태여 이렇게 비성경적이며 전도의 문을 심각하게 가로막는 헌금 채를 꼭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이는 마치 바리새인의 누룩처럼 그저 사람이 만든 또 다른 올무일 뿐이다. 따라서 그런 옹색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신도들의 돈을 긁어모아야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면 오늘 당장이라도 폐지하자는 것이다.
신자들이 교회에서 열심히 헌금을 하는 것은 물론 아름답고 귀한 일이다. 그리고 믿음의 분량과 능력에 따라 더 많이 할 수 있으면, 더욱 좋은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헌금이 자발적이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더 내게 만드는 반강제적인 것이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인위적인 헌금 강요는 성경의 가르침에도 어긋나며, 전도의 문을 크게 막고, 그리고 믿음이 연약한 이들을 시험에 빠트리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돈 없으면 교회에 다니기 힘들다!"라는 말이 나온 지는 이미 오래다. 어떤 분의 분류에 따르면 헌금의 명목만 해도 70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마 전 세계에서 한국교회처럼 돈을 밝히는 교회는 결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인의 체면과 헌금 채
해외 여행 시 여러 나라 교회들의 예배를 참석해 보면, 그중에도 아직 헌금 채를 사용하는 교회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헌금자들은 아무런 스스럼이 없이 당당하게 동전으로 헌금한다. 처음에는 동전 소리가 너무 자주 나길래 아이들이 그렇게 헌금하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호기심이 나서 자세히 보니 어른들 대다수도 아주 태연하게 동전 헌금을 하는 것이었다.
아마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 교인들은 이렇게 하기가 매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 동전 헌금자들의 신앙을 가볍게 보아서는 곤란하다. 이들 중에는 자신의 유언장에 자기 재산의 상당 부분을 나중에 교회에 기부하도록 이미 작성해 놓으신 분들이 많다.
반면에 일부 교인들은 예배 시 아예 헌금을 하지 않고 별도로 은행 입금이나 온라인으로 헌금을 하기도 한다. 그들의 표정에서 헌금을 많이 하거나 적게 하는 데에 대한 차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물론 필자와는 다른 경험을 하신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분명한 것은 적어도 외견상으로라도 외국 교회에서는 헌금으로 교인들을 차별하는 일은 보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주보에 매 주일 헌금자 명단을 공개하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우선 주일헌금 외에 다른 잡다한 헌금 명목 자체가 거의 없다. 목회자 역시 예배에 참석해 준 것만 해도 즐겁다는 표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헌금 생활이 무조건 올바르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헌금 액수가 많고 적음이 교회 생활에서 전혀 장애가 되고 있지 않음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헌금 채를 사용해도, 한국에서는 그 의미가 서양과는 크게 다르다. 체면과 겉치레와 자존심을 매우 중시하는 사회 풍토 때문에, 남보다 적게 하거나 못하면 스스로 크게 부끄러움을 느끼기 쉽다. 물론 이런 행위가 옳다고 두둔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현실을 정확히 보자는 뜻이다. 이런 이유로, 헌금 채가 한국에서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보다 더 큰 강압감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헌금 채 앞에서 이를 못 본 척한다거나, 동전이나 저액권을 꺼낼 만큼 얼굴 두껍고 간 큰 신도들은 현실적으로 매우 드믈다. 이런 특수한 문화적 환경 때문에, 한국에서는 헌금 채가 충분히 신도들을 실족케 할 수 있고, 또한 새 신자들에게 상처를 주며 전도의 문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부작용을 잘 알면서도, 왜 예배 때마다 헌금 채를 돌려 가며 사람들 앞에서 헌금을 해야 하는지. 본당 입구의 헌금함에 미리 넣으면 재정 관리에 무슨 큰 문제라도 발생하는가. 일부 목사들은 입으로는 늘 경건을 말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하는 사람들이다. 올바른 헌금이라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큰 길에서 기도로 외식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따라서 헌금 생활도 가능하면 골방에서 하는 기도처럼, 하나님 앞에서 은밀히 하는 것이 마땅하다. 아울러 이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에도 합당한 자세가 아닌가.
그런데 헌금 채 사용도 모자라서,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주보에 헌금자 명단을 공개하거나 심지어 액수까지 알려 주는 교회들도 많다. 물론 이렇게 주보에 이름 올리는 것은 헌금 경쟁을 유도하려는 아주 저속한 술수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예배 시 헌금 기도를 통하여 십일조나 감사헌금을 한 사람들 이름을 일일이 불러 주며 별도로 축복 기도를 해 주기도 하는데, 이런 헌금 독려 행위는 마치 헌금을 많이 못한 사람은 별로 축복해 주고 싶지 않다는 의미인지 거꾸로 묻고 싶다.
특히 일부 부흥 강사 목사님들은 마치 목회자들만 무슨 특별한 영적 축복권을 갖고 있는 것처럼 오도하며 이를 남발하고 있는데, 이런 사이비적 행동들은 정말 도시락을 들고 따라 다니면서라도 말리고 싶은 심정이다.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이렇게 스스로 기만을 하며 신도들을 세상적인 복만 추구하는 복쟁이들로 만들고 있고, 이러니 멀쩡하던 사람들도 교회에만 나가면 '영적 저능아'로 변질된다는 탄식이 나오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교회에 돈이 쌓이면 반드시 썩는다
어떤 분은 한국교회의 지나친 금전 추구와 방만한 재정 운용을 이렇게 꼬집었다.
"목사님들 월급 두둑히 넣어 주고, 교회 운영, 행사비로 지출하고, 선교 지원 명목으로 동료 목사님들과 나누고, 대외 선전용으로 구제비 생색 좀 내고, 남는 것은 적금을 들어 잠실운동장만한 새 교회를 짓는 것에 써야죠. 그럴려고 돈 걷는 것 아닌가요?"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작은 교회들은 돈이 너무 부족해서 문제이고, 반대로 큰 교회들은 넘치는 돈으로 딴 짓을 너무 해서 문제가 되고 있다. 물론 교회가 정상적인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여러모로 꼭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재정이 튼튼한 교회를 원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 속에 목회를 망치는 큰 함정이 숨어 있는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교회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소중한 교훈은 비만으로 배부른 교회는 부패하고 타락한다는 사실이다. 즉 교회에 큰 돈이 쌓이면 반드시 썩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돈의 부스러기라도 좀 빼어 먹고 싶은 작은 유혹에 넘어간다. 그런 후에는 점차 '바늘 도둑'이 '소도둑'으로 변하는 것이다.
돈이란 꼭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반대로 넘치게 될 때는 도리어 화를 부른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좀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을 참된 복으로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일시적으로라도 교회에 돈이 넘칠 때는, 과감하게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거나 선교사와 미자립 교회를 후원하는 등 해마다 재정 잔고가 바닥이 보일 정도로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교회는 이처럼 늘 자신을 비울 때에만 비로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목회자라면 항상 교회의 군살을 빼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검소한 마음을 유지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으로 본다.
교회가 돈이 많아야 큰일을 할 수 있고 크게 헌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복음을 크게 오해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발상이다. 하나님께서 돈이 너무 부족하셔서 재정적으로 어려운 교회들을 방치하시는 줄로 생각하시는가. 절대로 아닐 것이다. 돈이나 세력을 의지하여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돈이 넘치는 많은 중대형 교회들이 하는 행태를 한번 살펴보자. 담임목사는 억대 연봉으로 억대 고급 승용차를 타고 호의호식하고, 교회는 부동산이나 기타 다른 사업에 투자를 하기도 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더 큰 예배당을 짓는다고 은행 빚을 얻어 일 년에 수억 원이나 되는 돈을 단지 이자를 갚는 데에 쓰고 있다. 과연 이런 것이 정상이고 부럽단 말인가.
그런 돈이 그렇게 부러우시다면 지금이라도 즉시 직업을 바꾸시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과소유로 멍든 한국의 중대형 교회들과 많은 목회자들은 첫 단추부터가 잘못되어 있다. 목회의 길이 가난을 추구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를 추구해도 좋다는 뜻은 더욱 아닌 것이다. 오히려 검소한 생활이나 가난을 각오하지 않고 목회를 하려는 그 생각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목회자들 중에 누구라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성공한 목회라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교회를 병들게 하지 마시고 이제라도 제발 다른 사업을 알아보시기 바란다. 이계선 목사님께서는 최근에 "미국 교회는 300명 교회 목사도 우체국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30명 교인 데리고도 목사가 넉넉하게 살아요"라고 지적하셨는데 물론 모든 목회자가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결코 가볍게 들을 수가 없다.
교회가 제대로 개혁이 되려면 담임목사부터 의식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교인들의 의식 수준도 동시에 달라져야 한다. 교인들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면 교회 개혁은 항상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실제로 오늘날 한국교회 개혁이 늘 겉도는 진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세상보다도 더 세속적인 악습
헌금 채를 버리고 헌금함으로 전환하자고 하면, 다른 여러 구구한 이유를 붙이기도 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반대가 그러면 당장 헌금이 줄어들어 곤란하다는 현실적인 이유를 말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말은 실제로 일시적이나마 크게 틀림이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이유를 역으로 분석해 보면, 헌금 채 사용은 자발적이지 않은 헌금도 추가하여 반강제적으로 걷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반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왜 헌금함을 사용하면 헌금이 줄어들고, 헌금 채를 사용하면 헌금이 늘어날까. 헌금함은 거의 자발적인 헌금만 거두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현상만 보아도 헌금 채는 헌금을 반강제적으로 강요하는 악습이 분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돈이 부족하고 사람이 부족한 가운데서도, 주님만을 의지하며 주님의 방법으로 일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한다. 돈과 사람과 세력이 우상이 된 이 시대에 주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다르기 때문이다. 중세 교회처럼 돈으로 일한 교회는 돈으로 무너질 것이며, 사람과 세력을 의지하여 일을 한 교회들도 바로 그런 사람들로 인하여 망할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챙기는 것은 신도들을 기만하며 착취하는 악한 행위이고 또한 교회를 망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헌금 채는 교회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악습 중에 하나임이 분명해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그 많은 거룩하신 목회자들께서 이를 묵과하고 구습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가 힘든 미스터리인 것이다.
한국교회에는 유능한 목사님들이 넘친다. 그런데 이분들 상당수는 희안하게도 돈 문제로만 가면 영 맥을 못추신다. 성경을 날카롭게 분석하시던 그 뛰어난 명철력이 갑자기 어디로 다 사라지는지, 돈이 안 되는 일에는 언제나 마음을 슬쩍 걸어 잠그시는 것이다.
왜 평소에는 성자처럼 경건한 모습을 보여 주시던 그 많은 유명 목사님들께서 유독 이 저속한 헌금 채에 대해서는 대부분 침묵을 하시는지, 정말 희안한 일이다. 아니면 헌금 채 사용이 신앙 양심에 전혀 거리낌이 없고 극히 자연스럽다는 말인지. 필자는 마치 이분들이 교회 세습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동조하시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곤 한다.
헌금함으로 자발적인 헌금을
한국 장로교의 좋은 스승이신 정암 박윤선 목사님은 일찍이 이 헌금 채 사용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다. 그래서 이미 60년대 서울 상도동의 어느 허름한 임대 건물 이층에서 한성교회를 개척하시면서 처음부터 헌금 채를 없애고, 예배실 입구에 헌금함을 마련하여 누구나 자발적인 헌금을 할 수 있도록 하셨다. 박 목사님 스스로 헌금함 사용을 몸소 실천하시며 모범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필자는 아직까지 어느 교회도 헌금 채 대신에 헌금함을 채택해서 망했다는 소리를 들어 본 기억이 없다. 오히려 지난 수십 년간 헌금함을 채택하여 현재도 견실하게 사역을 잘하고 있는 교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이런 교회들은 인위적인 수단을 저속하게 쓰지 않아도, 정상적인 목회는 언제나 통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실례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헌금함을 사용하고 있는 어느 교인의 실제적인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자.
"저희 교회는 입구에 헌금함이 있으며 예배에 들어가기 전 내고 들어갑니다. 예배 순서에는 대표 기도 후에 헌금함을 들고 들어가시는 여집사, 권사님들이 순서상으로 헌금에 대한 축복 기도를 합니다. 예배 시에도 없지만 주보에도 헌금자 명단은 없습니다. 그리고 감사헌금, 십일조, 주정헌금 이런 헌금 종류도 없습니다. 헌금 봉투는 한 가지이며 그 위에는 교회 이름 외에는 아무 표시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보에는 전체 금액만 나오고 있지만 제가 보기에 출석 인원에 비해서는 훨씬 많은 헌금이 매주 나오며, 이런 것을 느낄 때마다 무엇이 올바른 신앙생활인지 깨닫습니다."
그러나 위의 교회와는 달리, 만에 하나 설사 헌금함을 사용한 이유로 교회 재정이 적자가 되었다고 치자. 그래서 부득이 교회 문을 닫아야 한다면, 필자는 차라리 문을 닫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본다. 목회자에게 마음에 거리낌이 있는 불의한 사역보다는 의로운 안식이 오히려 복된 결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강요적으로 헌금을 거두어 큰일을 하는 것보다는, 자발적인 헌금으로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이라 확신한다. 미네소타 주님의교회는 2008년 기존 헌금 접시를 버리고 헌금함으로 전환하였다. 이때 김성은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헌금함을 설치하면 헌금이 줄어들 것이라 예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헌금 시간에는 접시가 돌기에 헌금하던 분들이 헌금함을 설치하면, 헌금을 잊거나 하지 않을 것이기에 헌금이 줄어들 것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제가 섬기던 교회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헌금은 부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헌금 정신이 제대로 훈련되리라 생각됩니다."
이런 자세야말로 진정으로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목회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선 오늘날 스스로 박윤선 목사님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생각하시는 장로교 신학교들인 고신, 총신, 그리고 합신 출신의 그 많은 목회자들만이라도 지금 당장 헌금 채를 던져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해 본다. 감리교 역시 웨슬리 목사님이 얼마나 당시 영국 교회들의 부정을 따겁게 지적하며 청빈한 삶을 보여 주셨는지 잊었는가. 물론 다른 교단들도 마찬가지이다.
왜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은 믿음의 스승들이 잘 가르쳐 준 것은 제대로 따라가지 않고, 쓸데없이 무게 잡는 목사 가운 착용 등 시키지 않은 일에는 열심을 낼까. 정말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헌금 채는 개혁 교회가 반드시 고쳐야 할 고질적인 악습 중의 하나이다. 이를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시킨 원인은 목회자들의 무관심이나 사심에 기인하고, 또한 교인들의 맹종이 도와주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개혁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작은 것이라도 잘못된 일이라 판단되면 바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헌금함을 설치하면 헌금이 덜 들어올 것이다'라는 고루한 사고방식은 아직도 오늘날 순수한 성도들의 믿음을 과소평가하고 우습게 여기는 행위이다. 오히려 이로 인해 참된 성도들은 더욱 열심히 헌금을 할 것이며 더욱 순수하게 헌신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헌신을 통하여 결국은 새 신자들이 점차 증가할 것으로 믿는다.
교회는 '돈 타령' 아닌 '신령한 노래'를 들려주어야
아울러 이런 참된 헌신을 통하여 새신자들은 교회 내에서 복 타령과 돈 타령이 아닌, 다른 신령한 노래, '그리스도의 복음'을 비로소 듣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신자들이 믿음 안에서 건강하게 잘 성장하면 헌금은 오히려 더 늘어나게 될 것이 당연하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분들의 자발적이며 복된 헌금을 크게 기뻐하시리라 믿는다.
현재 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독사 같던 바리새인들조차도 사용하지 않은 헌금 채를 돌리고, 헌금자 이름을 떠벌려 가며 신도들의 돈을 거두고 있다. 게다가 한편에서는 '돈을 많이 바쳐야, 복을 받는다'는 사이비적 기복 신앙으로 신도들을 수시로 세뇌시키고 있다.
바리새인 시대나 그로부터 이천 년이 지난 지금이나, 재물을 챙기는 위선적 종교 지도자들의 행태는 크게 변하지 않고 오히려 그 수법이 더욱 고도화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헌금 채는 과거 십자군 전쟁이나 면죄부 판매처럼, 교회의 이름으로 저질러지고 있는 또 하나의 오류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예배 시 이를 계속해서 돌리는 행위는 교회의 본질을 크게 훼손하는 중대한 잘못이므로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
아울러 헌금 채를 폐지하는 것은 교회를 해롭게 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확신한다. 어떤 거리낌이라도 시초에 이것이 방치되어 깊히 곪게 되면, 나중에는 치료가 더욱 어려운 심각한 중병으로 커질 수 있다는 것을 '교회 세습'에서 이미 많이 보고 있지 않은가. 비록 늦었지만 이제라도 우리가 헌금 채를 과감히 던져 버려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 예배는 구약의 제사가 아니다. 그런데 예배 시 헌금 채를 돌리며 헌금을 바치는 것이 마치 제사할 때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과 같은 의미인 줄로 오해하시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구약의 제물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장차 오실 어린 양 예수님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런 오해는 예배를 제사로 착각하는 잘못이며, 스스로 제물 되신 그리스도 십자가의 의미를 거스르는 행위가 되므로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일부 신도들은 교회가 하는 일은 모두 옳은 줄로 여기며, 무비판적으로 순종을 하고 이를 미덕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가 하는 일이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무조건 옳은 일을 해야만 비로소 교회인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제부터라도 궁색한 변명으로 헌금 채를 미화하거나 정당화하지 말고 헌금함 사용에 적극 동참하기를 간곡히 촉구한다. 그 어느 교회에서든 이 헌금 채로 인하여 한 교인이라도 실족케 되면, 주님께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 23:15)
먼저 오래전 호주 어느 현지 교회에서 들은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고 싶다. 한 백인 목사님이 5년 동안 담임하던 교회의 임기가 끝나서 사직을 하고, 새로운 임지를 향해 아주 멀리 떨어진 다른 주로 이사가게 되었다. 이사 당일 그분과 가족들은 허름한 자기 승용차 뒤에 작은 트레일러 하나를 끌고 나타나셨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거기에 실은 것이 그 목사님과 가족들의 이삿짐 전부였다는 것이다. 트레일러라고 해봐야, 우리나라에서 연탄배달하던 손수레보다 서너배 큰 정도이니 얼마나 들어 가겠는가.
더욱 놀란 것은, 교인들 아무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드렸고 요란한 이임식도 없었다고 한다. 그 목사님도 웃으시며 교인들과 일일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셨고, 교인들은 떠나는 차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어준 것이 송별회의 전부였다는 것이다. 새로운 임지까지는 차로 3일 걸린다고 들었다.
이 이야기가 한국교회의 많은 귀족목사님들에 익숙해 있던 필자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시에는 그 목사님과 가족들을 생각하며 크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고, 국내선 비행기표 몇장 제대로 안 챙겨준 인정머리 없는 교인들에 대해 많이 서운해 한 기억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생각을 달리하고 있다. 그 백인 목사님은 당연히 '주의 종'다운 검소한 모습을 실천하며 정상적으로 살고 계시는 것일 뿐이었다. 오히려 비정상적인 데에 익숙하게 살다가 보니, 순간적으로 정상이 비정상으로 보인 것이 아닌가 한다. 하여튼 그런 목사님이라면 저절로 존경심이 생기고 어려우실 땐 내 숟가락이라도 쥐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날 것 같았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호주교회 거의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그처럼 검소하게 사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필자도 한 백인 목사님 일가족이 여름여행 중에 경비를 아끼기 위해 모텔이나 호텔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친구 목사님댁에 들려 거실 쇼파와 바닥에 슬리핑백을 깔고 자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기도 하다.
목사가 부유해도 되나
목사가 너무 가난해서 생활이 어려울 정도가 되는 것도 잘못된 일이겠으나, 목사가 중산층을 넘어 부유층으로 산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스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언젠가 "교인 중에 굶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으면 목사도 숟가락을 내려 놓으라"고 말씀 하셨던 어느 원로목사님의 말씀 생각난다. 어느 교회나 자기 교인들 중에는 가난한 교인들이 분명히 있을 터이고, 나아가 교회주변의 지역사회에도 틀림없이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터인데 정상적인 목사라면 어떻게 부유해질 틈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돌아가신 한경직 목사님처럼 입고 있던 양복마저도 있는대로 남들에게 자주 나누어 주다 보면 저절로 검소하게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드물게 유난히 사치를 떠는 한국교회의 귀족목사님들께서는 양을 돌보는 목사라면서,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시며 식사 때마다 입으로 고급음식들이 잘 넘어 가는지 정말 궁금하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말씀은 가난한 자를 잊지 말라는 뜻이며 성경 여러책에서 반복해서 강조되어 나오는 하나님의 중요한 명령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혹시 요즘 귀족목사님들은 성경을 필요한 부분만 가위로 오려서 들고 다니시는지, 그것이 알고 싶은 것이다. 게다가 점입가경이라더니, 심지어 어떤 귀족님들은 돌보라는 고아는 돌보지 않고 엉뚱하게 시키지도 않은 교회 여비서나 여집사 돌보기에만 몰두해 사고를 치고 있으니 보는 사람들의 속이 다 터질 지경이다.
교회 내의 무법자들
요즘 교계 뉴스를 잠시만 들여다 보아도, 지금 한국교회는 이들 귀족목사님들로 인해 얼마나 큰 고통을 받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어떤 분들은 교계 뉴스만 보면 너무 속이 상하고 우울해져서 아예 안보시기로 했다고 한다. 하여튼 이 귀족님들이 그 동안 뉴스를 오르내리며 얼마나 크게 사고들을 쳐놓았는지, 심지어 믿지 않는 분들까지도 누구나 한국 개신교는 너무 썩었다고 주저없이 말한다. '개독교'니 '먹사'니 이런 불명예스러운 용어들은 사회 일반인들이 우리에게 손수 붙여준 이름들인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 안에서 담임목사의 권한과 영향력은 거의 압도적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담임목사만 바로 서 있다면, 적어도 고질적인 교회 문제의 80%는 긍정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이다. 거꾸로 말하면, 교회 문제의 대부분이 담임목사가 바르게 처신하지 못해 생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어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 교인들이 교회에 무슨 직접적인 이권이나 사심이 있다고 목사나 장로들에게 저항하고 분란을 만들겠는가. 대부분의 문제들은 이들 귀족목사님들이나 귀족장로님들이 자기들의 욕심을 챙기다가 발생하는 불협화음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귀족님들이 이렇게 무법자처럼 '교권'과 '위선'이라는 쌍권총을 차고 좌충우돌 개판치고 설치게 된 데에는, 이들을 가르친 신학교는 물론 일반 교인들의 책임도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마치 목사가 하나님의 대리자라도 되는 것처럼 무조건 그에게 순종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잘못된 인식이 넓게 퍼져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인식이 이젠 거의 관습처럼 되어 버린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시라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그 어떤 성직자는 물론, 설사 바울이나 베드로 그리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설 수 있는 대리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우리는 합심하여 이런 근거 없는 신앙적 무지로부터 벗어나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야 절대적인 것이지만, 사람들 사이의 순종은 옳을 때만 해야 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면, 목사가 어떤 사실에 대하여 거짓 증언을 하라고 요구할 경우, 신자는 순종이 아닌 거절을 해야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이 귀족님들이 교회내에서 입법, 사법 그리고 행정에 이르기까지 삼권을 손에 쥐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교회에 큰 상처를 줄 경우, 잘못된 점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지적하여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이 귀족목사님들을 한국교회의 '무법자'라고 거침없이 부르는 이유는 이 분들이 그 동안 보여준 행동이 성경의 가르침과 교회법의 테두리를 넘어 명백하게 위법적이라는 데에 있다.
성경이 언제 목사들에게 탐욕, 축재, 횡령, 교회세습, 치부, 간통, 외식, 파당 짓기, 사기, 명예 추구, 월권, 교회사유화, 성직매매, 교만, 사치, 거짓말 등을 해도 좋다고 가르친 적이 있는가. 그리고 교회법 어디에 목사에게 교회재정, 행정, 인사, 관리 등의 모든 업무에 직접 관여하여 왕같은 권력을 써도 좋다고 되어 있나. 더구나 교인들과 부교역자들이 담임목사와 함께 사역하는 대등한 동역자들이지, 목사를 떠 받드는 무슨 부하직원들이나 들러리들인가. 교회안에 모든 이는 동등하며 직무의 구분은 있으나, 계급차별이란 없다는 것이 개혁교회의 정신이 아닌가. 이 귀족님들의 상당수는 성경의 가르침을 명백히 거역하고 교회법도 거스리는 자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필자는 주저없이 그들을 '무법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근자에 이르러서는 이 귀족님들의 행태가 더욱 극에 달하여, 스스로 자신들이 한국
교회의 공적 1호라고 자임하는 듯한 모습마저도 갈수록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로마 교회의 타락과 쇠퇴에서 보았듯이 교회는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을 때보다, 오히려 평안하고 흥청거릴 때에 더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귀족목사님들은 그리스도, 십자가, 회개, 구원, 실패, 지옥, 고난, 희생, 겸손, 경건, 헌신, 나눔 그리고 섬김을 제대로 강조하지 않는다. 즉 복음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분들은 거꾸로 귀에 듣기 좋은 성공, 희망, 축복, 평안, 희락, 천국, 선교 등을 즐겨 노래부른다. 주님께서는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으나, 이 분들은 설탕을 주로 뿌리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로 교회는 세상의 빛이 아닌 세상의 천더기로 전락하고, 교인들은 이런 단맛에 깊히 길들여져 이제는 회복하기 어려운 영적 당뇨병에 신음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라고 느껴진다.
중세 교회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중요한 교훈 중에 하나는 영적으로 무지한 성직자는 영적으로 무지한 교인들을 양산하고, 다시 그 무지한 교인들이 모인 교회는 부패한 성직자들의 놀이터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은 비상한 시기이고, 깨어 있어야 할 때인 것이다. 이제 이 글에서 논하는 '귀족목사'란 단순히 큰 교회의 목사나 부유한 목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교회 목사라도 스스로 신앙양심을 버리고 사리사욕을 쫓으며 부를 추구하는 목사를 의미한다. 한가지 조심할 것은, 어느 목사님이 여기에 지적된 내용 중에서 한 두가지 항목에 해당된다고해서 그분을 귀족목사라고 섣불리 단정지어서는 안돨 것이다. 또한 상당부분은 필자의 극히 주관적인 체험에 따른 관점도 있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두고 싶다. 따라서 여기에는 시각적 오류도 있을 수 있으니 어디까지나 참고자료로만 사용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그리고 큰 교회나 부자들이 무조건 다 잘못했다거나 나쁘다는 식의 단세포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이 글의 의도와 크게 다르다는 것을 인지해 주시면 좋겠다.
아울러 어떤 내용에 있어서는 꼭 귀족목사님들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반 목사님들에게도 해당되는 사항들이 부분적으로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알려 드리고자 한다. 또한 이 글은 어떤 특정인이나 특정교회를 지정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 역시 다른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란다. 그럼 이만 본론에 들어가서, 교회 내의 무법자들이라 할 수 있는 귀족목사님들의 문제점들과 또 이 분들이 어떻게 교회를 거덜내고 계신지 그 활약상을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주의 종'이 '교회의 왕'인가
우선 많은 목사님들이 자신들을 '주의 종'이라고 부르시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는 좋은 의미에서 그리 말씀하시는 목사님들도 많이 계시지만, 반대로 은근히 권위를 내세우시기 위해 그렇게 부르시는 목사님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어떤 때는 자신들이나 다른 교역자들을 '목자'라고까지 부르시기도 하시는데, 이 대목에서 말씀을 좀 구별해서 하시면 좋겠다는 것이다. '주의 종'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으나, 양들의 '목자'는 예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에 함부로 쓸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태여 말하면 목사는 '보조목동'이나 '양치기 개' 정도로 알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예수님께서는 '내 양을 치라'고 하셨지, 언제 '네 양을 치라'고 하셨는지 직접 성경을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예수님은 분명히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칭하셨다. 우리에게 목자가 여러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목사님들께서 목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가지 더 지적할 것은 하나님이 목사님들에게 '주의 종' 노릇을 하라고 하셨지, 언제 '교인의 왕' 노릇하라고 시키셨는가 하는 점이다. 목사가 '주의 종'이라면, 교인들은 오히려 '주의 자녀'들이라 말할 수 있다. 종이면 종답게 '주의 자녀'들인 교인들을 잘 섬겨야지 무슨 근거로 군림하려 드시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목사직은 '가르치는 장로'나 '교사'의 직무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녀교육'을 잘 시키라고 귀한 자식들을 기껏 맡겨 놓았더니, 오히려 이 분들은 교인들의 상전 노릇을 하며 '자녀학대'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귀족목사님들께서는 목사님들만 주의 종이 아니라, 일반 교인들도 넓은 의미에서 주의 종이라 불릴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 주셨으면 한다. 동시에 모두가 대등한 '왕같은 제사장'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일은 다른 장로님들이나 집사님들에게 맡겨진 고유의 책무이니, 귀족님들께서는 아무일이나 나서서 월권을 하시시지 말고 오늘부터라도 제발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시기를 부탁드린다. 그래도 교인들보다 성경을 몇자 더 배웠으면 좀 똑바로 처신해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어떤 귀족님들께서는 입만 열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함부러 하시며 교인들을 쥐고 흔드는데, 그런 소리를 주저리는 입을 볼 때마다 재봉틀이 떠오르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인지 궁금하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게 하나같이 자기 욕심을 채우는 내용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화려한 예배당을 짓는 것도, 전과 장로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교회세습을 하는 것도, 교회돈을 빼돌려 개인사업하는 것도, 호의호식하는 것도, 심지어는 간통하다 들켜도 모두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둘러대는 황당한 인간들이다. 경건이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는 인생들이, 마치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나 예언자처럼 외식하고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주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실상은 늘 자기 뜻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점만 보아도, 이 귀족님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지를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종들이 무슨 철학을
또한 근자에 들어 '목회철학'이니 '목회비전'이니 하는 말을 흔히 듣게 되는데, 비록 좋은 의도로 쓰더라도 적지 않은 거부감을 줄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좀 심하게 말을 하자면, 아니 종이 건방지게 무슨 철학이 필요하고 비전이 필요한지 개인적으로 정말 궁금하다. 종이란 주인이 시키면 죽는 시늉이라도 내야 하는 신분인데, 종이면 종답게 주인께서 성경에 시킨 일이나 빠뜨리지 않게 열심히 처리할 것이지, 무슨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라도 되는 듯 구태여 철학타령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이 '목회철학'이란 용어는 과거에는 전혀 못 듣던 용어인데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에 슬그머니 나타난 다소 황당무계한 용어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요즘 종들은 분수를 모르고 주인의 자녀분들이신 교인들에게 자기의 철학과 비전을 내세우며 따르라니, 이 종이 '종놈'인지 '종님'인지 영 헷갈리는 판이다. 목사기 목회를 할 때, 성경대로 가르치고 그대로 살면 되었지 무슨 철학이란 말이 따로 필요하단 말인가. 바울이나 아볼로 그리고 다른 제자들이 언제 각자 만든 목회철학을 가지고 목회했나. 오히려 자신들이 예수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지는 않나 염려하며 경계하였다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껏 그 목회비전이라는 것도 가끔은 좋은 내용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몇년도까지 교인 몇명에 선교사가 몇명이고 건물이 어쩌고 저쩌고 등등 돈을 부지런히 긁어 모아 비지니스 확대에 열중하겠다는 이야기들이던데, 이런 얘기는 다른 분들이 하도 많이 지적하셔서 이 정도로 생략하기로 하겠다. 하여튼 순진하고 충성된 교인들은 그 철학인지 비전인지를 따라서 총력 동원되느라 아예 등골이 빠지고 있다. 그저 차분히 앉아 성경공부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하면 좋겠건만.
특히 큰 교회로 갈수록 일년 내내 각종 화려한 프로그램으로 교인들을 혹사시키는데, 이는 보는 사람이 다 안스러울 정도이다. 평일에는 직장이나 사업체 또는 학교에서 돌림빵을 당하고 주일이라도 예배를 마치고 가정에 돌아와서 좀 쉬어야 하는데, 오히려 주일날이 더 바쁘고 더 피곤할 경우가 많다. 그래서 월요일이면 쌍코피가 정기적으로 터지는 사람도 여러명 보았다. 귀족님들께서야 잡다한 일들은 부교역자들께 맡기시고, 평일에 편안한 웰빙책상에 앉아 멋진 설교를 준비하신 후, 주일날 자신의 목회비전에 맞춰 목소리 높여 화끈한 설교 몇번 하시면 되는지는 잘 몰라도, 그 알량한 비전을 따르기 위해서 많은 교인들은 일주일 내내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혹사 당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서로 사랑하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 명료한 것인데, 이 분들은 오히려 간단한 것에 군살을 더덕 더덕 발라서 내용을 더욱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어 실천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얼마 전에 미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 중에 하나인 윌로우크릭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가 "우리는 실패했다"고 고백하면서, "교회에 수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교인들로 하여금 영적인 활동을 하도록 이끌었지만, 그것이 영적인 성숙함을 보장해주지 않더라"는 결론을 인정했었던 일도 잊어선 안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주일에만 우리끼리 모여 분주히 활동하는 '선데이 크리스천'이 아니라, 오히려 평일에 사회 속에서 소금이 되는 '올데이 크리스천'이 아닌가. 과연 초대교회 기록에서 우리가 요즘 바쁘게 하고 있는 다양한 교회행사나 프로그램들을 한두가지라도 찾아 볼 수 있는지 묻고 싶다. 혹시 이런 것 역시 교회의 몸집을 키우기 위한 비지니스 마인드로 추진되는 것은 아닌지. 마치 예수님은 한가지만 해도 좋다고 하시는데 저 혼자 바쁘게 고생하는 마르다의 모습이 아닌가도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귀족목사님들께서는 평소에 매우 경건한 척 하시며 목에 기브스하고 무게를 엄청 잡기 좋아하시는데, 제발 교만 좀 떨지 마시고 진정으로 겸손해질 순 없는지 묻고 싶다. 설사 목사가 아니라고 해도 신자라면 누구나 온유하고 겸손하며 관대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그런데 사실 사람들 앞에서 방귀도 참아가며 천사처럼 경건한 척 열연하는 이 분들 뚜껑을 살짝 열어보면, 거룩이라고는 개벼룩만큼도 찾기 힘들 경우가 많다는 것이 그동안의 아픈 경험에서 얻어진 개인적인 소견이다.
다음으로, 귀족목사님들은 거의 한결같이 눈부신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즐기시는데 중소형차로 좀 바꾸실 생각은 전혀 없으신지. 스스로 종이라면서, 왕같은 차를 타고 다녀서야 되겠는가. 자신의 인품이 모자라는 것은 참아도, 품위없는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절대 못 참으시는 것일까. 남들이 이를 비난하면 대부분 교인중에서 누가 선물했다고 핑계댄다고 하시던데 목사가 정직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진짜로 고급차를 사주는 통큰 교인도 더러는 있다니 다른 것은 몰라도 정말 돈복 하나는 끝내 주시는 분들인 것 같다. 그래도 선물로 고급차를 누가 주면 꼭 받아야 하는지 아직 의문이 남는다. 거절하거나 팔아서 다른 좋은 일에 쓰시면, 괜히 길 지나가던 사람들이 달려들어 패기라도 하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사리사욕을 채우는 귀족목사들
뭐니뭐니해도, 귀족님들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돈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 분들은 거의 예외없이 어떤 요상한 명분과 이유를 붙여서라도 기필코 돈을 챙기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점만 유심히 잘 관찰해 보아도 이 분이 귀족목사이신지 아니신지가 드러나게 되어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본능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흔히 잘 알려진대로, '돈, 명예, 그리고 여자' 이 세가지야말로 귀족님들에게는 뿌리치실 수 없는 멍에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귀족목사님들께는 교인들의 영혼보다는 교인들의 돈을 더 사랑하시는 것이 기본 정석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이 분들이 교회를 사유화하는 문제인 것같다. 특히 교회재정을 직접 관리하며 예산과 결산을 불투명하게 하는 목사님들도 적지 않은 듯한데, 이런 행태는 한국교회가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할 악습중의 하나일 것이다. 최근 어느 형제님에게 받은 메일에 의하면, 자신의 교회는 출석교인이 7000명이 넘는 큰 교회인데 지난 15년간 단 한번도 수백억원의 교회 재정에 대해 결산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 바로 한국교회인 것이다. 심지어 어느 큰 교회는 교회건물 등기를 아예 담임목사 개인의 이름으로 등록하기도 했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그 외에도 목사의 친인척들로 교회 직원들을 도배하거나, 교회 재정 집행시에 각종 이권에 관여하기도 하고, 기타 이분들의 범죄적 행태를 구체적으로 다 서술하려면 '귀족행전'을 한권 새로 써도 모자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분들의 눈에 띄는 행태들을 위주로 몇가지만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돈 버는 재미로 외부강사로 일년 내내 꾸준히 돌아다니시는 것이 이 귀족분들의 공통적인 생활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교회월급은 그대로 굳고 추가로 부수입이 더 짭짤하시다니, 꿩먹고 알먹기로 이 분들의 눈에는 세상이 참 평안하고 즐겁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강사교류 인맥을 넓히기 위해 반대로 막대한 교회예산을 들여 외부강사들을 수시로 청빙하는 것은 너무 비열한 행동이 아닌가 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서로 짜고 상대 교회돈을 나눠 먹는 셈이니, 정말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용감무쌍 마징거제트라도 타고 계신 분들인 것만 같다.
어떤 능력있는 고참 귀족분은 몇년만에 월급외에도 5억이상 챙기셨다고 들었는데, 뭔지 모르는 순진한 교인들은 우리 목사님께서 안밖으로 말씀사역에 너무나 수고를 하신다고 때로는 보약을 갖다 바친다고 하니 정말 '세상은 요지경'이란 가요가 히트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하여튼 귀족목사님들 치고 돈문제에 깨끗하신 분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십일조와 건축헌금을 해야 복받는다고 수시로 강조하시며 부추기신다고 하던데, 그렇게 열심히 긁어 모아 정말 자신들의 일이 아닌 주의 일을 하려는지 묻고 싶다. '인자는 머리둘 곳도 없다'하시던 예수님이 돈이 없다고 무리들에게 언제 헌금 요청하시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오천명이나 사람들이 몰려 와도 대형천막 하나 없는 빈 들에서 한 아이의 오병이어를 함께 나누어 먹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으셨는지. 제자들도 옷 한벌만 가지고 궁색하게 돌아 다녔다고 했다는데, 이 분들도 자발적으로 들어오는 헌금만큼만 사업을 벌리시면 안되겠는지 따져보고 싶은 것이다.
또한 헌금을 조금 내거나 못내는 교인은 결국 기죽어서 떨어져 나가거나 아니면 교회모임에서 늘 구석자리에 찌그러져 있게 되고, 거의 헌금을 많이 낸 부자들이나 유명인사가 장로나 권사가 되어 설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이들 교회의 현실이다. 이는 마치 중세교회 성직매매와 무엇이 크게 다른가. 이것도 확실히 해명이 필요한 문제 중에 하나이다. 아울러 왜 교회 내에 가난한 이들이 설 자리가 갈수록 무너지는지 그 이유를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귀족님들께서는 특히 목회를 비지니스로 여겨 교인수를 중요시하며 예배당을 크게 짓는 것을 성장목표로 삼는다고 한다. 사실 이 문제는 귀족님들의 체질상 웬만해선 고치기 힘들 것같다. 또한 원래 잔머리가 잘 돌기 때문에 설교를 미끈하게 잘하시고, 심지어 어떤 때는 하도 잘한 자신의 설교에 스스로 감동받아 강단에서 눈물을 짜기도 하신다니, 이 분들은 정말 순진한 교인들 홀리기에는 아주 탁월난 재능을 가지신 듯하다. 이 귀족분들은 아마 안방드라마 탈렌트로 나갔어도 크게 대성했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런데 설교내용은 주로 교인들 귀에 듣기 좋은 웰빙설교만 즐겨 하니,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 중에 하나라고 생각된다. 항상 복받고 잘되고 평안하고 성공한다는 설교는 잘하시는데,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자는 내용은 잘 말하지 않는다니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보신 적이 없으신지. 게다가 요즘은 평일에는 골프에 낚시에 신나게 놀러 다니시다가, 주일이 되면 상습적으로 남의 설교를 표절하시는 저질 얌체분들도 있다던데 정말 양심에 방탄조끼를 채우신 분들이다. 그리고 어쩌다 가끔은 교인들에게 함께 회개하자고 설교할 때도 있으시다면서, 어느 분의 말씀대로 어째서 자신의 묵직한 돈주머니는 평생 회개하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감투를 너무 좋아하셔서 너저분한 명함 한 다섯개 정도는 기본이고, 떼로 몰려다니시며 이름만 들어도 역겨운 허접 단체에도 많이 가입하신다던데,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마시고 그 시간에 자신의 교인들이나 잘 돌보시면 좋겠다고 부탁드리고 싶다. 또한 이분들은 수구정권이나 수구언론, 재벌기업, 대형교회 등을 비판하면 바로 빨갱이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매도하기도 한다. 그 동안 챙겨둔 재산과 인맥을 지키고 늘리는 데에 이들 수구세력의 강력한 보호와 지원이 필요해서 그러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가끔은 하늘도 한번 쳐다보거나 '정의'라는 단어도 좀 찾아보시고 자숙하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아울러 이 분들은 각종 교단선거에서 금품을 살포하고 패거리를 만들고 자기 사람을 챙기는 등 각종 추태를 다 보여 주시기를 서슴치 않고 있다. 이는 막가는 정치판에서 조차도 부끄럽게 여기는 일이 아닌가. 이로 인해 교단이 너무 시끄럽고 혼란하여 국민들의 지탄을 크게 받고 있는 것은 물론 전도에 지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아시기는 하는건지 답답하다. 누가 이 분들 앞에서 감히 목사 임기제니 무슨 회장 단임제니 이런 말을 꺼내면 난리가 난다는데, 차라리 지나가는 개 귀를 잡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들 귀족분들은 언론의 자유 이딴거 무지 싫어하신다고 한다. 자신들이 과식하는 것이 자꾸 노출되서 괴롭다고 하니, 그나마 약간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특히 말이 많은 놈들은 무조건 싫어 하신다고 한다. 또한 자신들은 뒤로 할 짓 안할 짓 고루고루 못된 짓을 다 저질러 놓고 나중에 결정적으로 들통나게 되면, 언제나 주님의 사랑 운운하며 사랑으로 모두 다 덮자고 얼버므리시는 것이 이 분들의 상투적인 수법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한심스럽고 우려스러운 것은, 많은 목사님들이 이들 귀족목사님들과 귀족교회를 하나의 성공모델로 삼아 프로그램이나 조직을 흉내내며 불철주야 달리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압도적으로 유리한 여건을 두루 갖춘 한 대형교회가 교인들의 수평이동을 통해 근처에 있는 다수의 소형교회들을 무너뜨리는 현상 못지 않게 더 심각한 문제는, 전국의 많은 교회들이 그 대형교회를 모델로 너도 나도 모두 열을 받아 자신들도 저렇게 대형화하겠다고 미친 듯이 몸부림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비판자들의 입에서 "대형교회가 죽어야, 한국교회가 산다"는 말이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대형교회의 좋은 장점들은 거의 희석되고, 다른 이유도 물론 있지만 단순히 크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거운 족쇄가 되어 따거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여기까지 이들 귀족목사님들의 철면피한 개인기와 문제점들을 간단하게나마 검토해 보았다. 물론 더 쓰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현재 전국의 지역교회들은 물론 주요 교단의 총회나 노회 지도부의 상당수가 이 귀족님들의 절대적인 입김 아래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모양이 된 것이다. 어찌보면, 이 분들이 저질 정치꾼들처럼 돈봉투까지 뿌리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리 챙기기에 몰두해 온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과거 예루살렘 성전에 장사꾼들이 북적거렸던 것처럼, 지금 한국교회 내에도 온갖 잡상인들이 날뛰며 설치게 된 것이다.
어쨋든 간덩어리가 아주 크신 이 분들은 대부분 자신의 안위에만 몰두하고, 교인들이 영육으로 말라가도 크게 신경쓰시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회 여론이 그들의 부정과 탐욕을 비난할 때는 적당히 연막을 쳐서 빠져나가거나, 그것도 잘 안되면 교인들을 동원하여 전면에 세우고 자신은 교회라는 성역의 울타리 뒤로 깊숙히 숨어 버리는 것이 이 분들이 즐겨쓰시는 일상적인 수법인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이 귀족목사님들의 개인기가 너무 탁월해 한국교회가 거의 거덜나게 생겼다. 심지어는 "한국교회는 이미 스스로 정화할 능력을 잃었다"라거나 "한국교회는 예수를 버렸다"고 까지 단정지어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더구나 이 귀족님들 중 상당수는 무슨 기연이라도 있었는지, 맨손으로도 바리새인 몇 명쯤은 순식간에 뺨을 치고 초상비로 날아 오를 정도로 엄청난 절정고수들이신 것이다. 양심에 철판을 삼겹으로 깔고 천사처럼 가장하여, 교인들을 속이며 해치고 있는 것이다. 간이 작은 보통사람들은 내공이 약해 정말 그런 경지에 이르기가 쉽지 않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종교 지도자들인 동시에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정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런 큰 힘을 악용하여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여 자신들의 배만 채우는 늑대와 같은 자들이었다. 굶주리고 지친 백성들의 눈물과 탄식은 외면하면서, 자신들이 만든 유전과 규례는 철저히 지키라고 항상 강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백성들이 자신들보다 예수를 따르는 것을 두려워했다. 예수가 성전에 들어가 장사꾼들을 내어 쫓는 것도 보았다. 자신들의 밥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이상 예수를 따르는 것을 막기 위해 그 분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이다. 이때 제자였던 가롯유다가 앞장 서서 은 삼십에 예수를 그들에게 팔아 넘긴 것은 우리에게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 주위를 살펴보면 한국교회의 부패와 탐욕이 그때보다 못하다고 감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무법자, 귀족목사님들이 그래도 바리새인들 보다는 더 의롭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 오히려 바리새인을 뺨치는 내공으로 한국교회를 거덜내고 계신 것이 아닌가 한다. 이들 귀족목사님들은 예수를 따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유다처럼 예수를 팔고 있는 것일까. 이 분들의 귀에도 영육으로 메말라버린 저 양들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들릴까. 이 분들의 눈에도 저 양들의 목이 꺾여 늑대에게 찟겨지고 있는 모습이 보일까. 그리고 이 분들의 양심에도 저 양들의 슬픈 눈망울에서 나오는 분노와 절규가 느껴질까.
답답해서 묻고 싶지만, 결코 긍정적인 대답을 크게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책 어디에도 바리새인들이 회개하고 돌아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외쳤어도 듣지 않은 자들이었다. 세리와 창기들은 돌아왔으나, 그들은 성경을 손에 들고도 끝까지 거역하였다. 차라리 개 귀에 명심보감을 들려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죽해야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하셨겠는가. 이들은 끝까지 백성을 돌보지 않고 자신들의 탐욕을 쫓은 자들이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불과 몇 십년뒤인 AD70년에 후일 황제가 된 티투스 장군의 강력한 로마군단에 의해 처절하게 짓밣히고 찟겨져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졌다. 물론 그들이 자랑하던 큰 건물, 헤롯성전도 예수님이 예언하신 그대로 완전히 파괴되어 이때 함께 무너졌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성읍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약 100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비참하게 몰살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토록 슬프게 무너진 거대한 헤롯성전을 생각하며, 오늘날 오로지 큰 건물, 큰 무리, 큰 사업만을 추구하며 교회 대형화에 눈이 먼 한국교회의 많은 목사님들을 바라보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리고 문득 이런 의문을 가져본다. 이천년전처럼 예수님이 오늘 한국에 다시 오신다면 큰 건물들과 대형교회들이 많은 강남으로 먼저 가실까, 아니면 무너져 타다 남은 재 속에서 가슴터져 울고있는 용산으로 가실까.
이제 결론을 맺기 전에, 평소에 존경하는 신현우 교수의 짧은글을 먼저 인용하고자 한다.
개는 없고 양반들만 있으니
아직 잠들지 않은 그리고 결코 잠들 수 없는
깨어 있는 목회자들에게 이글을 바칩니다.
나는 차라리 개같은 목사가 되렵니다.
경건을 보수의 울타리에 가두고
학문을 교리의 울타리에 가두고
실천을 교회의 울타리에 가두고
그리고 나면 우리는 감옥에 갇힐 겁니다.
역사의 암울한 시기에
한 번도 목소리를 내지 못한 교단에서
한 발작 벗어나는 것이
이리도 힘드는 일일까요?
성경을 교리로 난도질하는 인본주의적 인습에서
혁명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무릎꿇는 길로 가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 일일까요?
목사님들은 모를겁니다.
그래서 저도 모를겁니다.
교회를 보며 갑갑해 하는 일반 성도들의 마음을,
이리를 보고도 짖지 못하는 개와 같은 목사들을 보며
물려죽으며 분통이 터져가는 양들의 마음을 ...
예수님을 잃은 중세카톨릭이 부패하였듯이
개혁정신을 잃은 개혁교회가 썪고 있는 것을 보며
혹시 우리가 양들을 지키는 개가 아니고 이리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사나운 개가 몇 마리만 더 있어도 좀 덜 할 터인데
개는 없고 양반들만 있으니 양들이 죽는 것이 아닌지요.
소금은 없고 설탕만 있으니 썩는 것이 아닌지요.
그래서 결심해 봅니다.
나는 개같은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설탕보다는 소금을 뿌리는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거룩한 목사님들은 모르실 겁니다.
왜 제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왜 차라리 개같은 목사가 되려고 하는지 ...
양들 가운데 있다보면 우리는 양같은 목사가 되어
양을 바로 인도하지 못하는 거룩한 양같은 목사가 되거나,
이리 같은 목사가 되어 양을 잡아먹게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같은 목사가 되어야 할 겁니다.
점잖은 목사님들은 못 들으실 것입니다.
이리를 만난 저 성도들의 아우성을 ...
천사들의 찬양 소리만 들리실 터이니 ...
저는 이리를 물어뜯는 개같은 목사가 되렵니다. - 신현우
갈릴리로 돌아가자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점잖은 목사'와 '개같은 목사'를 생각해 본다. 한국교회에는 지금 '점잖은 목사'만 너무 많은 것이 아닌지. 양들을 해치는 저 이리를 물어뜯을 '개같은 목사'는 없는가. 그리고 이 일이 어찌 목사님들만의 책임일까. 스스로 동역자라고 자처하던 모든 평신도들도 분연히 일어서야 하지 않은가. 생각해보자! 우리가 언제 나 하나 잘 먹고 잘 살자고 예수를 따라 나섰던가. 그렇지 않다면, 과연 예수를 따르겠다면서 가난한 이웃들과 배 불러 죽어가는 부자들을 그냥 외면하고 이렇게 우리끼리만 건물 짓고, 흥청거리고, 재미있고, 즐거우면 되는 것인가.
산에서, 빈 들에서, 또 강가에서 감동과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했던 그 처음 사랑은 지금 다 어디에 있는지. 먼저 믿은 우리라도 소금을 좀 뿌려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우리마저도 세상의 단맛에 빠져 다시 세리와 창기로 돌아가야 하는 것인가.
주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한국교회를 거덜내고 계신 귀족목사님들 대부분은 바리새인들처럼 이미 예수 따르기를 거부한 사람들이다. 이제는 우리가 대답할 차례인 것이다.
눈을 감고 조용히 들어 보시라. 이천년전 목수의 아들로 유대땅에 오셔서, 가난한 어부들의 마을 갈릴리 바닷가를 걸으시던 그 예수님은 오늘도 변치않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지 않은가?
" 나를 따르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 23:27]
한국교회의 무법자들
목사도 제자가 되자
목사를 위한, 목사에 의한, 목사의 교회
요즘 주변에서, "주객이 바뀌었다"라는 안타까운 말을 자주 듣는다. 우선 정치권을 보면 그 말이 이해가 간다. 국민이 주인이고 정치인이 하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다음으로는 교회가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많은 교회에서 목사가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목사를 모시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고 교인들은 주의 자녀들인데, 스스로 '주의 종'이라는 하인 신분의 목사들이 위치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왕 같은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비판자들의 입에서 '예수교'가 아니라, '목사교'라는 조롱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목사들의 이런 무법적인 행위는 이제 극에 달해서, 교회를 사유화하고 세습화하는 악습이 아예 노골적으로 정착화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목사가 교회의 우상이 될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많은 귀족 교회들은 비대한 몸집으로 평안과 축복만을 노래 부르고 있다. 또한 이들 귀족 교회들의 영향력 아래 있는 대부분의 기독교 언론들도 이들의 충실한 나팔수가 되어 그 빛을 잃은 지 이미 오래인 것으로 보인다.
교회의 양극화
강원 속초 오봉교회의 강단
그런데 이런 담임목사의 독주가 대형 교회에서 더 심하고, 중소형 교회에서는 덜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중소형 교회에서의 독선과 부조리가 더욱 쉽게 눈에 띠기 때문에, 그 부작용이 더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것이다. 최근 어떤 분의 지적대로, 이런 중소형 교회에 지치고 실망하여 대형 교회로 옮기시는 분들도 적지 않다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사실 크기에 관계없이 많은 교회들이 병들어 신음하고 있으나, 그나마 대형 교회를 가면 다양한 프로그램은 물론 풍부한 인적자원으로 인해 개인적인 부담감도 훨씬 적어진다. 또한 상대적으로 담임목사의 독선적이며 직접적인 간섭으로부터 보다 자유스러운 신앙생활이 가능해지기 때문인 것이다.
이분들의 결정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현재 한국 교인의 80%나 되는 사람들이 소수의 중대형 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며, 겨우 20%의 교인들만이 전체 교회의 80%나 되는 작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이유가 부분적으로나마 설명이 되는 것이다. 물론 작은 교회의 영세하고 열악한 환경 때문이라는 다른 큰 이유도 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한국 교인의 거의 과반수가 아주 극소수의 대형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한국교회살리기운동본부'에 따르면 현재 전체 교회들 가운데 60% 이상이 교인 50명 미만의 미자립 개척 교회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런 극심한 양극화 현상은 대형 교회가 잘해서 생긴 것이라기보다는, 중소형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약점이 더 큰 원인이라 생각된다.
더우기 담임목사의 주도로 건축 헌금이나 십일조를 강요하는 분위기도 역시 교회의 양극화를 더욱 가속시키는 데 크게 일조하고 있다. 작은 교회에서는 이를 충분히 못 낼 경우 쉽게 노출이 되고, 목사나 다른 교인들 보기에 거북스러워지기 때문이다. 특히 초신자들은 이로 인해 더욱 큰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나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담임목사들의 독주와 잘못된 지도력은 교회의 크기 분포에 지대한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결과로 작은 교회는 항상 사람이 너무 부족하고, 큰 교회는 건물이 매우 모자라는 차마 웃지 못할 일들이 일어나는 데에 크게 내조하고 있는 셈이다.
수동적인 당회와 제직회
어쨋든 크기에 관계없이, 거의 모든 교회에 당회니 제직회니 하며 제법 교인들의 의사 참여가 가능한 조직들이 구성되어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그 활동 내용을 들여다 보면, 기존의 정규적인 사업이나 행사 그리고 사소한 일 처리는 잘하는지 몰라도 신규 사업, 해외 선교, 예배당 건축, 부교역자 인사, 예산 책정, 외부 강사 섭외 등 기타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능동적이며 창의적인 의사 결정 능력이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그들 대부분은 그저 담임목사가 결정하고 제시하는 정책을 수동적으로 승인하고 추종하는 거수기 역활을 성실히 하고 있다고 보면 지나친 비하일까.
가장 안타까운 일 중 하나는,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저 별로 반대 의견 없이 항상 '조용한 교회'가 매우 '은혜로운 교회'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런 안일하고 무지한 인식 덕분에, 많은 교회들이 담임목사의 독주 속에서 날마다 조용히 썩어 가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한국교회 내에서, 담임목사의 잘못된 정책에 반대하는 의견을 정당하게 밝히고 이를 추진하여 당회나 제직회를 설득할 수 있는 풍토가 갖추어진 교회가 몇 교회나 있을까 심히 궁금하다. "우리 교회에서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아마 일부 극소수의 교회를 제외하고는, 거의 드믈 것으로 보인다.
한국교회 안에서 이제 담임목사의 자리는 거의 성역화한 듯하다. 목사 의견에 조금이라도 반대를 표명하면 대부분의 목사들은 마치 영권에라도 도전을 받은 듯 자존심이 상해 펄펄 뛰고, 교인들 역시 감히 귀한 목사님에게 대든다고 난리가 나는 것이다. 광신도들을 거느리는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 교주들만 흉을 볼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바른 길을 의연하게 걷고 계시는 존경할 만한 목사님들도 적지 않지만, 도대체 무슨 근거로 다른 많은 목사님들은 이렇게 왕이 되어 안하무인으로 군림하게 된 것일까.
그들은 정말 마음으로 예수를 믿고 거듭나서, 참된 제자가 되어 예수를 따르고 있는 것일까. 이런 깊은 회의마저 드는 것이다. 하여튼 왜 미국이나 유럽의 교회보다 더 심하게, 유독 한국교회는 이렇게 '목사의 교회'가 되어 가고 있을까.
다른 이유들도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상당수의 목사들이 '주의 제자'를 키우는 데에 힘을 쓰기보다는, 자신들에게 순응하는 '목사의 제자'를 키우는 데 힘을 써 왔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순종과 헌신'을 잘 가르쳐 비지니스 확대에는 성공을 했으나, 그 핵심이 되는 '예수'와 '제자의 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그들 자신조차 아직 제자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목사와 무속인
거친 비유를 들어 매우 유감스럽지만, 오늘날의 많은 목사와 병든 교회들을 보면 자꾸 무당과 굿판이 연상되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무당들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춤추고 신명나게 한판 벌이다가, 나중에 굿이 다 끝나면 조용히 거기에 바쳐진 돈을 싹 쓸어 간다.
돈을 더 많이 바치면 큰 굿을 차려 주고, 적게 바치면 지성이 부족하다고 박대하기도 한다. 이는 병든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자주 보여 주는 일인극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천신굿'은 사업의 번창에 감사하고 지속적인 발전과 평안을 위하여 푸짐한 재물과 정성을 바치고 벌이는 큰 굿을 말하고, '성주굿'은 집안의 무사태평과 대주의 안녕을 빌고 부와 번영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이라 한다.
또한 '진적굿'은 무당이 자신의 신령들에게 바치는 감사제의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이는 무당으로써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무당 자신의 지속적인 발복을 기원하고자 하는 굿이다. 그리고 '내림굿'은 한 무당을 선생으로 모시고 무업을 배우고 익혀 다음 제자가 태어날 때 행해진다고 한다.
기분이 좀 으시시해지지 않는가. 혹시 무속인들도 '제자 훈련' 비슷한 것을 하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고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더러 있으실런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은 그들이 제자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사들이 이들 무속인들을 따라 늘 '복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부 목사님들께서 요란한 박사 가운을 입고 열 내며 설교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무당이 오색 찬란한 무복을 입고 열 올리는 모습과 어찌 그리 비슷한지. 이는 필자만의 착각일까 궁금하다.
권위주의에 회칠한 목사 가운
말이 나온 김에, 그 목사 가운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싶다. 물론 예배 시 복장이 정갈하다고 생각해서 별 다른 생각이 없이 입고 계신 분들도 더러 계시겠지만, 가운이란 구약의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릴 때 입던 복장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오늘날의 목사직은 제사직이 아니라 '가르치는 장로'로서 교사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목사는 예배 시에 제사장 역활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목사는 성직자이니 그런 성스러운 가운을 입는 것이 좋겠다고도 하시는데, 이는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폼 잡고 무게를 잡으시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말인지는 몰라도, 성경의 원리에는 맞지 않는 말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목사만이 성직자가 아니라, 소명을 받은 모든 신자들이 다 성직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슨 근거로 그런 요상하고 유치한 가운을 입어야 하는지 우습지 않은가. 이는 마치 어느 주일학교 반사가 아이들 앞에서 홀로 정장 가운을 입고 무게를 잡으며 가르치는 모습만큼 어색한 일이다. 결국은 인위적으로 예배 분위기를 성스럽게 보이도록 하고, 자신들의 모자라는 권위를 조금이라도 더 치장해보려는 알량한 수단이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목사 가운도 과거 한국 개혁 교회에는 거의 없었던 일이다. 미국의 어떤 폼 잡기 좋아하시는 세습 목사님이 화려한 박사 가운을 입고 설교하는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 따라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유감스럽게도 예술적인 안목이 전혀 없는 필자의 눈에는 그렇게 애쓰시는 모습이 그저 안스럽고 민망스럽게 보일 뿐이다.
이는 개혁 교회가 중세 가톨릭으로부터 나올 때 저런 겉치장은 좀 하지 말자고 하여 버린 관습인데, 다시 신부들이 사제복을 입듯이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분들은 부지런히 개혁과 갱신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개악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다음 주일부터라도 그 거룩한 가운을 좀 벗어 버리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성경에 시키지도 않은 엉뚱한 일을 구태여 고집스럽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만약 그냥 버리기가 정 아까우시면, 물걸레로라도 만들어서 교회 청소를 하실때 요긴하게 사용해 주시면 더욱 좋을 것이다.
모든 신자가 다 성직자다
교회 내 여러 미신 중 하나는, 마치 무당이 굿판의 주재자인 것처럼 많은 교인들이 목사를 교회의 주재자로 오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무당의 비위를 건드리기 두려워하듯, 목사를 은근히 어려워하고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그리 두려워하는지 그 근거가 불투명하다.
성경에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듯이 목사님과 장로님들을 존경하는 것은 좋지만,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목사나 장로들은 교회 안에서 더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 대등한 직분의 형제이며 자매이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목사직은 구약의 제사직과는 크게 다르다. 개혁 교회 안에서는 목사와 장로만이 성직자가 아니라 집사, 권사, 교사, 반사, 성가대원, 봉사 위원 그리고 모든 성도가 다 거룩한 소명을 받은 성직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 교회 안에서 목사직이 다른 직분 위에 군림하는, 특별하게 우월한 높은 자리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아울러 교역자는 물론 모든 교인이 다 대등한 동역자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목사 홀로 중앙집권적으로 독주하고 독재하는 일인 체제가 더 이상 허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목사는 가능하면 설교 사역에 집중하고, 다른 일들은 동역자들에게 적절히 분담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특히 담임목사가 마치 재벌 기업처럼 수직적이며 계급화한 조직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은, 다시금 권력화한 중세 교회로 돌아가겠다는 탐욕스러운 몸부림으로밖에 볼 수 없다.
아울러 부교역자나 다른 제직들을 목사를 돕는 들러리나 도우미 정도로 생각하는 고질적인 악습도 오늘부터라도 당장 걷어치워야 할 시급한 과제다. 당연히 동역하는 부목사님이나 전도사님들에 대한 업무 분담이 보다 대등하게 배분되어야 하고, 처우도 담임목사에 비해 너무 차이가 나지 않게 적절히 개선되어야 한다고 본다.
다행히도 일부 교회에서는 이를 이미 잘 실천하여 다른 교회의 좋은 모범이 되기도 한다니 기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하여튼 많은 교회들이 말로만 '평신도를 깨워, 동역자로 세우는 교회'라고 거창하게 선전하지 말고, 정말로 모든 기득권을 사심없이 버리고 제대로 다른 교역자들, 제직들, 그리고 모든 교인들과 평등하게 동역을 해 주시기를 거듭 부탁드린다. 땅 위에서 고작 백 년도 못 사는 짧은 인생들이, 홀로 욕심을 부리고 주의 영광을 가리며 살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아울러 아무리 유명하고 베드로보다 설교를 더 잘하는 대형 교회 담임목사라도, 괜히 무게 잡고 거리를 두며 사치스럽고 교만을 떨고 잘난 척하는 사람은 아직 제자가 되지 못한 목사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참된 주의 제자라면, 언제나 겸손하고 온유하며 절제하며 형제들을 거리감 없이 사랑으로 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조금만 유명해지면 자신이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도 된 듯 문턱을 바벨탑처럼 높히고 우쭐하는 목사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그 영혼이 정말 불쌍하고 안스럽다. 이런 행태야말로 자신들이 주의 제자가 아니라는 간접적인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목사의 시녀들
사실 담임목사가 교회 내에서 마음껏 독재할 수 있도록 허용한 일차 책임은 장로들에게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당회가 일차적으로 제구실을 못하고 목사의 시녀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목사가 교회를 어려워하지 않고 교주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앞으로는 목사를 청빙할 때부터 노회법이나 교회 정관 등을 통하여 그 권한과 의무를 명확히 하고 약정서를 받아야 할 것이며, 교회 운영의 주체는 전교인이 모이는 공동의회와 여기서 권한을 위임받은 당회 및 제직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당회장도 모든 장로님들이 임기를 두고 돌아가면서 분담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이렇게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목사와 장로는 대등한 직분이다. 그런데 장로들이 이를 망각하고 필요 이상으로 목사를 떠받들고 맹종하니 교회가 사기업화하는 것이 아닌가. 만일 장로직을 제대로 못하겠으면 차라리 오늘이라도 당장 물러나야 할 것이다.
사실 교회가 부패하는 책임을 목사들에게 묻고 있으나, 오히려 이를 방조한 장로들의 책임이 더 클지도 모른다. 목사가 잘못하거나 실수하면, 오랜 신앙생활을 한 장로들답게 지혜롭게 대처하여 이를 잘 시정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목사의 말이라면 무조건 분별 없이 맹종하는 그 단순함은 절대 참된 신앙도 아니고 미덕도 아닐 것이다. 아니 오히려 장로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큰 죄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장로들이 뜨뜻미지근하여 늘 우물쭈물하니 목사가 월권을 하며 흔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이유로 장로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든든히 서 있는 교회야말로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대부분의 병든 교회에서는 이마저 기대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담임목사가 장로의 대다수를 스스로 장악하여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참된 '주의 제자'가 아닌 '목사의 제자'가 된 지 이미 오래다. 그러니 이런 목사와 목사의 제자가 주도하는 병든 교회들은 모두 '목사의 교회'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바보 목사가 그립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대로, 요즘 많은 목사님들은 정말 박학하시고 유능하다. 머리가 나쁘다면 그렇게 교회를 쥐고 흔드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물론 대부분 젊잖은 목소리로 설교도 그럴 듯하게 잘 하시고, 처신도 품위 있고 유연하게 잘하신다. 그런데 그런 미끈한 설교만 오래 듣고 살다 보면, 영혼은 메말라 가고 뱃살만 불어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지방에서 교회를 섬기시는 한 목사님이 있었다. 이 목사님이 하루는 신문에서 '안구 기증을 바란다'는 광고를 보셨다고 한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갔는데, 계속해서 이 광고가 마음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분은 이런 생각을 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두 눈을 주셨는데, 하나를 나누어 주어 한 생명이 광명을 찾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랜 생각과 기도 끝에, 결국 눈 하나를 기증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내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어느 날 아내에게 진지하게 설명하면서 동의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사모님은 그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발발' 떨고만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 사모님은 그 결심이 그냥 한번 해 보는 것이 아님을 알고, 결국은 동의하게 되었다.
아내의 동의를 받고 난 이 목사는 부모님이 또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어느 날 아버님을 모시고 좋은 식당에 가서 음식을 잘 대접한 후, 집에 모시고 와서 무릎을 꿇고 자기의 결심을 차분히 말씀드렸다. 아버님도 은퇴하신 목사님이셨는데, 그 말을 들으시고 충격을 받으셨는지 아무 말씀도 안 하시다가, "네가 신앙적으로 그렇게 결심했다니, 내가 어떻게 반대하겠느냐?"고 하시며 마침내 동의를 하셨다.
이 목사님은 드디어 신문에서 오려 놓았던 연락처에 전화를 걸었다. "제 이름은 아무개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눈이 필요하다는 광고를 보았는데, 아직도 눈이 필요하신지요? 필요하시다면, 제 눈을 하나 기증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랬더니 전화를 받은 사람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희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실 때 각막(角膜)을 기증을 해 달라는 것이지, 생사람의 눈을 빼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법으로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 바보 같은 목사는 안구 기증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정말 목이 메어 한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요즘 세상에도 저런 분이 있다니,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저런 바보 같은 목사님이 진짜 목사님이 아니겠는가. 이분 외에도, 자신의 교인을 위해 신장을 떼어 기증하신 목사님도 계시다고 들었다.
어떤 분은 가난한 시골 교회 목사였던 자신의 부친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는 한번도 제대로 사례비를 받은 적이 없다. 백만 원? 평생 만져 보지도 못한 숫자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하늘만 보고 사셨다. 그래도 시골이니까 돈 쓸 일이 별로 없어서 굶지는 않았고, 또 돈 때문에 죽겠다고 악을 쓰지도 않았다. 비록 간장에 밥을 비벼 먹으면서도, 그 위에 참깨를 뿌려 먹으면 좋은 날이었고 거기에 날계란까지 있어서 비벼 먹으면 정말 행복한 날이었다."
그래도 이분은 부친으로 인해 그렇게 고생스럽게 살았는데도, "다들 돈이 최고라고 사니까, 목사라도 돈 없이도 산다고 보여 줘야지. 다들 자기 살기 바쁘니까, 목사라도 남들 챙기기 바빠야지. 다들 땅만 보며 사니까, 목사라도 서서 하늘을 보며 바보짓을 해야지"라고 하시며, 그런 아버지를 자랑스러워 하셨다.
이분들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목사님들이 주변에 얼마든지 많이 계실 것이다. 꼭 사람들의 눈에 띠는 무슨 특별한 일은 하지 않더라도, 허탄한 세류에 휩쓸리지 않고 겸허한 마음으로 묵묵히 교회를 섬기시는 여러 목사님들이야말로 정말 한국교회에 보물 같은 귀한 목사님들이 아니겠는가.
다들 영악하고 이기적인 이 시대에 이런 뚝배기 같은 목사님들만 계신다면 얼마나 마음이 든든하고 좋을까. 이분들이라면 과연 '예수의 교회'가 아닌, '목사의 교회'를 만들어 자신의 사욕을 채우고 세상을 어지럽히겠는가.
처음 사랑으로 다시 시작하자
많은 분들이 교회 개혁에 공감하고 이를 위해 힘쓰고 계시지만, 기존 교회의 개혁에는 많은 한계를 느끼신다고 한다. 병든 교회 내에서 누군가 듣기 싫은 쓴소리를 조금이라도 하면, 목사는 대개 뒤로 살짝 빠지고 자신을 추종하는 다른 교인들을 동원하여 그 사람을 매도하거나 몰아세운다.
그런 일을 자주 겪다 보면, 교회 개혁은 실종되고 순진한 교인들끼리의 막장 싸움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결국은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마음이 약한 개혁 성향의 교인이 물러설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많게 된다.
어느 교회 개혁 모임에서 오랫동안 몸 담고 수고하셨던 한 목사님은 "그동안 얻은 최고의 소득은 기존 병든 교회 내에서 개혁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뿐이다"라고 탄식한 바 있다. 이는 전혀 과장된 고백이 아니라 생각한다. 그만큼 기존 교회의 동맥경화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경직된 독재정권처럼 '소통'이라는 것이 잘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 교회 내에서의 개혁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추진함과 동시에, 이제는 별도로 새로운 대안을 추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익히 경험한 것처럼, 교회의 지나친 대형화 추구는 언제나 교회의 세속화를 이끌어 왔다.
따라서 새로운 대안은 제도적으로도 대형화를 막고, 부정과 부패를 최소화할 수 있는 모델을 가지고 시도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런 모델은 바울과 베드로 그리고 다른 제자들의 사역을 자세히 연구하고 지혜를 모으면 반드시 얻어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다행히 일부에서 이미 공동 목회, 자비량 목회, 가정교회, 평신도 교회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런 시도를 하고 있다. 이는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 생각된다.
불과 100여 년 만에 한국교회는 큰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이제라도 다음 100년을 내다보며, 내실 있는 질적 성장을 위해 새로운 시도를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 땅의 참된 복음화를 위하여, 초대교회의 제자들처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고 말하고 싶다. 우리도 바울, 베드로, 누가, 요한, 바나바 그리고 디모데처럼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복음을 가지고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우리도 참된 제자가 되자
결론을 말하고자 한다. 목사가 제자답지 못함을 염려해야 할 정도로 매우 혼란한 세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과연 목사만이 잘못하고 있을까. 오늘날 목사가 목사답지 못하고, 장로가 장로답지 못하고, 그리고 신자가 신자답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슬픈 현상이 아니겠는가.
이런 비판에서 과연 누가 자유스러울 수 있을까. 우리 모두가 허물 많은 죄인이라는 탄식이 저절로 터져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죽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고까지 말했을까. 하지만 여기서 그냥 좌절해서는 안 되니, 서로 일으켜 주고 붙잡아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단순히 일부 목사님들을 비판하자고 주제넘게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목사님도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하겠지만, 우리도 제자의 길을 바르게 가야 한다는 깊은 자성을 하자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잘못된 교회를 바라보며 개혁을 논하기에 앞서, 그 전에 먼저 자신을 고치고 개혁하자는 뜻이다.
왜냐하면 교인들의 참된 변화가 없는 교회 개혁이란 언제나 실패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며, 나 자신이야말로 언제나 가장 골치 아픈 개혁의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목사를 위한, 목사에 의한, 목사의 교회'는 단연코 잘못된 교회이다. 따라서 이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한다. 그리고 개혁이란 언제라도 성경으로 돌아가는 일이요,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작업이다.
성경이 가르치라 하시니 가르칠 것이고, 성령이 흩어지라면 흩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성경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하셨으니 이 세대의 허상을 거부할 것이요, 성령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시니 부족하지만 이에 순종할 뿐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혁이란 자신의 잘못을 알았을 때 언제라도 바로 돌이키는 사역이라 생각된다. 이것이 참된 용기이며, 참된 순종이며, 참된 경건이고, 그리고 참된 제자의 길이 아니겠는가.
샬롬!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 1:13)
성전건축으로 무너지는 한국교회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한국교회가 예배당건축에 얼마나 미쳐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입력 : 2009년 11월 26일 (목) 20:32:37 / 최종편집 : 2009년 11월 27일 (금) 13:32:27 [조회수 : 3267] 신성남
우선 '성전건축'이란 말 자체부터가 잘못된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화려한 교회건물이 성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된 성전은 예수님의 몸을 뜻하며 또한 그의 지체된 성도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교회건물은 그저 예배를 드리고 모이는 장소일 뿐이다. 구약의 지성소처럼 무슨 하나님이 직접 임재하셔서 제사를 받고 기도를 들으시는 그런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신도들의 편리를 위한 모임의 장소인 것이다.
일부 목사들이 헌금강요를 위해 이를 과대포장하고 '성전건축'이라고 우기는 것은 지극히 비성경적인 발상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여기서 '성전'이란 예수님 자신의 부활하실 몸을 의미한다.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미 오신 예수님을 우리안에 모시고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러므로 성전이라는 말 대신에 예배당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우리가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한국교회가 예배당건축에 얼마나 미쳐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100명이 모이면 500명이 모일 수 있게 지으려 하고, 그뒤에 500명이 모이고 나면 다시 2000명을 위한 건물을, 10000명 교회는 50000을 위한 건물을...이런 식으로 한국교회는 평생 건물만 짓다가 볼장 다 보게 생겼다. 과연 이게 정상인가, 교회가 무슨 건설회사인가? 교회개혁실천연대 정운형 목사께서는 이를 지적하여 "한국교회는 딱 세 마디를 한다. 모여라, 돈내라, 집짓자!"라고 풍자하셨는데, 틀린 말이라고 반박을 할 자신이 없다.
더욱 한숨이 나오는 것은, 1000명을 위한 예배당을 지어놓으면 1000명이 모이고, 10000명을 위한 예배당을 지으면 또 10000명이 채워진다는 웃기지도 않는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맛에 귀족목사들이 신바람이 나 빚을 내서라도 건물을 증축하는 것이다. 이제는 이런 사실이 은행에까지 소문이 나서, 예배당건축이라면 돈도 쉽게 잘 빌려준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수준이며 냉엄한 현실이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교회들이 집짓기놀이에 몸바쳐 열을 올리니 건축헌금에 이골난 일반 교인들은 건축헌금을 자주해야 하는 작은 교회를 기피하여 큰 교회로 몰리고, 큰 놈이 이기는 자본주의 경제원리처럼 대형교회가 소형교회 수십개를 잡아 먹는 동족상잔의 참상마저 생기게 된 것이다. 즉 한 교회가 예배당을 더 크게 지을수록 다른 여러 교회가 무너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악영향은 논외로 하더라도, 도대체 끝도 없이 건물만 짓다가 언제 제대로 일을 할 것인지 답답하다. 보통크기의 교회가 주요예산을 건물에 투입하고, 또 교역자사례를 하고나면 얼마나 남게 되는가. 이러니 구제비, 교육비, 선교비 등이 항상 축소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교회는 본연의 일보다는 몸집 부풀리기에 매달려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한증식하기 좋아하는 괴물이 또 하나가 있는데, 바로 인체내의 암세포이다. 이놈은 브레이크가 고장난 트럭처럼 스톱을 모른다. 주위의 다른 세포를 좌충우돌 가리지 않고 공격하여 자신의 몸집만 키우는데, 결국은 환자가 죽어야 증식을 멈춘다. 마치 한국교회의 슬픈 현실과 미래를 보여주는 듯하지 않은가.
어떤 분들은 '교회가 더욱 커져야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고, 또 세계교회를 움직일 수 있다'는 그럴 듯한 말로 대형예배당건축을 정당화하는 모양인데, 이는 순진한 교인들의 간덩어리를 키우는 데에는 다소 도움이 될지 모르나 역사가 보여준 진실과는 크게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분들에게 정중히 말해주고 싶다. 큰 건물, 막강한 재력, 풍부한 인력 등 그딴 것들 믿고 헛바람든 소리하지 말고, 너나 잘 하라고! 그런 것들은 다 모래성이고 아침안개이며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와 세계교회는 당신들보다 간은 작아도 머리는 훨씬 더 크니 아무 걱정마시고, 당신들 자신이나 잘 감당하시라. 그리고 다른 교회들도 세계최대교회이니, 장자교단이니 이따위 시건방진 소리 좀 하지마라. 당신들의 헛소리가 '소녀시대'앞에서 개폼잡고 율동자랑하는 것처럼 보여 민망하기 그지없다.
지금 나는 나 하나도 제대로 못 뒤집어 엎어 날마다 죽겠는데, 당신들은 무슨 여유가 있어 세계까지 움직이겠다고 난리인지 정말 부럽다. 세계가 그렇게 블도저를 몰고 삽질하며 밀어부친다고 움직이는 그런 만만한 상대로 보이는가? 설사 그렇게 해서 세계교회를 움직였다고치자, 그럼 이제 그들에게 뭘 가르쳐 주려고 하시는지 묻고싶다. 혹시 또 한국교회 특유의 무한증식 집짓기비법이라도 전수해 주려는가?
그리고 최근에 그 잘나신 릭워렌 목사가 "대형화한 교회가 신도 개개인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다"는 말을 했다고 오두방정을 떠는데, 제발 자다가 김밥 엎구리 터지는 소리 좀 하지마라. 교회가 무슨 개인비지니스냐, 고객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게? 바울이 고객들의 요구에 따라 선교하고 목회했냐. 오히려 필요하면 가슴이 아플 정도로 신도들을 꾸짖으며 목회했다. 그러면 교회에서 게이파티하자고 해도 그 요구에 맞춰줘야 하나? 교회의 우선적 임무는 무슨 복지사업이 아니고 성경을 바로 가르치는 것이다.
목회는 '내 양을 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지, 양들의 요구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종이지, 신도들의 종이냐? 이 사람들은 근본적인 생각부터가 인본주의이니 목회를 주님의 일이 아닌 자기 비지니스로 수시로 착각하는 것이다. 세계에 영향을 주겠다더니, 오히려 미국교회의 한 미끌미끌한 목사에게 영향을 받고 있는 느낌이다. 릭워렌이 아니라 그 친구 할아버지나 사도 베드로가 말했어도 성경원리에 맞지 않으면 틀린거다!
정신 좀 차리자. 교회가 커져야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손에 쓰임을 받는 참된 의인 몇 사람이 있어야 세상이 바뀌는 법이다. 떼로 몰려 다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세상을 바꾼 것이 아니라, 바울과 베드로같은 소수의 헌신된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이 바뀌는 법이다. 지금에야 위대한 사도들로 세상에 모르는 이가 없으나, 예수님 당시의 12제자들은 출신도 배경도 그리고 학문도 초라한 가난한 어부들이 대부분이었고 아무런 권력도 없고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무명의 민초들이었다.
그들에게는 후원하고 파송해줄 막강한 대형교회는 커녕 대형천막이나 하나 제대로 있었는지 의문이다. 그러나 이름없이 빛도 없이 고난을 받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셨고, 결국 후일에 로마제국의 황제는 자신들이 죄인으로 몰아 처형시켰던 나사렛출신 목수의 아들 예수를 나의 왕, 나의 주님으로 받아 들였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다.
그러니까 요점은 정리하면 건물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일을 한다는 뜻이다. 정치판을 보라, 부실한 사람들일수록 겉을 치장하고 세력을 키우고 몰려 다니며 위세를 떠는 법이다. 건물을 키워 사람을 더 모으고 사람수로 영향역을 확대해보겠다는 그런 시도는 조잡한 세속의 방법이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방법은 다르다. 아무리 고급레스토랑이 화려하고 수백명 종업원의 서비스가 끝내줘도, 요리사가 엉망이면 게임은 끝난거다. 골프경기를 하는데 꼭 이기고 싶으면 타이거우즈나 박세리급을 몇명 키워야지, 이류선수 몇천명이 무슨 소용이 있나. 핀트가 맞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건물타령하지 말고, 사람에 집중하자는 의미이다.
감리교의 큰스승이라 할 수 있는 요한 웨슬리는 대형교회의 도움없이도 영국은 물론 미국까지 변화시키고 크게 영향을 끼친 존경할만한 분이다. 그런데 당시 큰 교회들은 오히려 그를 비난하거나 내어 쫓았다. 지지세력도 별로 없던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말 한필 정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기존의 대형교회도 하지 못한 큰 일을 해냈던 것이다. 무디를 비롯한 수많은 신앙의 인물들은 큰 교회나 세력을 의지해서 일을 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의지한 것은 교회도 사람도 물질도 아니었고, 오직 하나님 뿐이었다.
반면에 거대한 성당을 세우고 화려한 예배를 드리던 중세 교황과 주교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요즘 고등학생들도 잘 안다. 그 타락과 부패가 오죽 심했으면 세계사에 중세암흑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는가. 과거 찬란한 기독교문화가 있었다던 유럽교회들의 그 웅장한 건물들을 한번 쳐다 보라. 그들이 건물이 없어 오늘날처럼 허망하게 망했는가. 수천명이 모이던 그곳에 지금은 노인들만 십여명 달랑 모여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큰 건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르치고 구제하고 선교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에 망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를 무조건 짓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교회건축은 처음 한번만 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교인수가 증가하여 건물이 비좁게 되면 2부 3부예배로 운영하고 그래도 터지게 비좁으면, 차라리 다른 교역자를 분가시켜 중소형교회들을 확산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 교회가 끝도 없이 비대해져서 얻어지는 결과는 기존 대형교회들이 이미 충분히 잘 보여 주었다. 교회가 커지다보니 명예와 이권이 생기고, 이권이 생기면 욕심이 생기고, 욕심이 생기니 세습도 하고, 공금횡령도 하고, 교권싸움도 하고, 그런 과정에서 귀족목사님들 주머니가 두둑해지니 슬며시 딴 생각이 나서 간통도 하시고... 하여간 세상보다 더 썩은 곳이 교회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결론적으로 한국교회는 더 이상 무슨 삽질회사처럼 건물확장에 열내지 말고, 지역사회를 섬기며 예배와 구제, 선교 그리고 교육 등 교회 본연의 임무에 보다 충실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목사가 더 이상 먹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목사가 되면 잘 먹고 잘 산다는 말이 나오니 사명감도 자질도 안되는 사람들이 목사가 되려고 하고, 또 그런 불순한 목적으로 목사가 되니 교회가 부패하는 것이다.
반대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도 목회가 너무 힘들어 낙심이 되시는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된다. 그런 분들께 "힘내세요, 목사님! 지금 바른 길을 가고 계신 것입니다!"라는 위로의 말씀을 꼭 전해드리고 싶다. 다윗이 아비의 양을 지키는 목동이었을 때, 때로는 사나운 사자나 곰과도 싸워야 했다. 사자나 곰은 애완동물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비장하게 싸워야 하는 상대이다. 마찬가지로 주의 양을 돌보는 목회도 때로는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하는 영적전투이기 때문에 쉬울리가 없다.
특히 작은 미자립교회에서의 목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정말 힘든 사역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세상에 매우 편안하고 쉬운 목회가 있다면 그것은 병든 목회일 것이다. 오히려 힘들고 고생스러운 것이 목회의 중요한 본질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는 큰 교회의 귀족목회를 부러워 하지 않고, 작은 교회에서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한 영혼의 이름을 부르며 함께 기도해 줄 수 있는 목회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받은 목회인 것이다.
앞으로는 목사가 되면 호의호식하는 것이 아니라 고생길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순수하게 헌신된 사람들이 사역자가 되고, 그런 바른 사역자들이 합심해서 일을 할 때 한국교회는 더 이상 무한증식 집짓기놀이를 멈추고 교회 본연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건물을 키우는 대신에 사람을 키워야 한다!
나서서 설치기 좋아하는 얼뜨기들이 아니라, 이름없이 빛도 없이 헌신할 그리스도의 참된 일군들을!
샬롬!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16]
2,100억원 예배당이라! 구토가 난다
큰 교회이어야 큰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 자체가 세속적인 발상이다.
서울 강남에 있는 사랑의교회가 새 예배당건축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제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아주 제대로 망할 짓만 골라서 하는 느낌이다. 현재의 4만교인도 너무 많아 분산시키고 줄여도 시원치 않은 때에 더 키운다니 이 무슨 추태인가. 서울의 지하철역에서는 아직도 수많은 노숙자들이 찬바닥에 누워 칼잠을 자고 있건만 배부른 교회는 이런 짓을 하고 있다. 그 동안 한국의 다른 대형교회들이 근처의 수많은 중소교회를 삼키고 상처를 준 것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 엄청난 돈을 하필이면 예배당건축에 써야 하는가? 교회가 지역사회를 돕고 구제와 선교 그리고 교육에 우선적으로 돈을 써야지, 또 다시 몸집 부풀리기에 힘을 쏟아 붓는 악습을 재현하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다. 더구나 평소에 개혁신앙의 정도를 앞장서서 걷는 교회로 기대를 모으던 사랑의 교회마저 이런 일을 벌리니 안타까운 일이다.
전임 옥한흠 목사는 더 웃긴다. "교회를 크게 키운 과거는 후회한다, 그러나 미래에는 더 크게 키워야 한다"니 이런 말장난이 어디에 있는지 기가 막힌다. 스스로 대형교회의 문제점을 잘 아시던 분이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이런 요상한 말을 하고있다. 그래도 한 때는 꽤 좋아하던 목사님중에 한분이었는데 근자에는 다른 귀족목사들처럼 거품 빠진 모습만 보여 주는 듯하여 씁쓸하다. 그분의 발언은 마치 미디어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미끌미끌한 판결문을 듣는 느낌이다.
이러니 귀족교회들이 지들끼리 모여 잘 먹고 잘 논다는 말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네 교회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냐고? 그에 대한 나의 답변은 이렇다. 그러면 당신은 지나가다가 불난 집이 있는데 내집이 아니라고 그냥 지나가냐?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네 교회 내 교회가 어디 있냐? 다 우리 교회이지.
유명목사들이 보여준 위선적인 행태들이 비록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틈만 나면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설레발치며 헌금을 강요하더니 정작 자신들은 세상에 재물을 쌓고 있는 행동을 하고 있다. 우리가 그 땅을 안 샀으면 통일교가 샀을 거라고? 그럼 앞으로 통일교가 사들일 땅들을 따라 다니며 미리 다 사들일 예정이냐? 평소에 폼잡던 설교와 달리 유치한 소리 좀 하지말라.
오정현 목사가 어려운 경제 사정 때문에 헌금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아무리 어려워도 1세기의 초라한 어부들보다 잘 산다. 베드로를 비롯한 어부들은 끼니를 잇기 힘든 상황이었다. 어부들처럼 십자가의 사건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명자로 만들어 준다"고 헌금독려를 했다고 한다. 참으로 알량한 사탕발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요즘 귀족목사들이 과연 1세기의 초라한 어부들처럼 검소하게 살고 있는 지 묻고 싶다. 그들의 값비싼 고급승용차와 호화호식은 이미 도를 지나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교인들에게는 초라한 어부처럼 검소하게 살라고 하고, 자신들은 탐욕스런 세리들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소중한 돈으로 대신에 굶주린 사람들을 돕고, 농어촌 미자립교회를 지원하고 등등... 이딴 소리는 하도 많이 해서 당신들도 듣기 싫을 터이니 그냥 생략하겠다. 근본적으로는 당신들 돈을 가지고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하던 내 상관을 할 바는 아니나, 다만 교회를 더 크게 지어 무슨 바벨탑이라도 하나 보여 주고 싶은 것이냐고 묻고 싶다. 당신들이 똘똘 뭉치면 뭐 대단한 일이라도 할 것 같은가? 그렇게도 흩어지기가 두려운가?
잘 들으라. 교회역사는 대형교회들이 이끈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위기가 대형교회가 부족해서 생긴 줄로 착각하는가. 오히려 너무 많아서 탈이다. 때거지로 모여 앰프를 크게 틀고 북치고 기타치고 장구를 친다고 세상이 변하는게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두세사람이 모인 곳에 조용히 역사하신다. 더 이상 동네 시끄럽게 하지 말고 호화예배당 건축 때려쳐라. 난 요즘 무슨 삽들고 설치는 인간들만 보면 경기가 난다.
대형교회만이 널리 해외선교나 방송선교도 하고, 신학교를 지원하고, 또 제자훈련도 하고, 새세대를 위한 교육에 투자하는 등 작은 교회가 할 수 없는 무슨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런 일은 중소형교회와 교단이 힘을 합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큰 교회이어야 큰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 자체가 세속적인 발상이다.
제발 부탁한다. 징그럽다, 좀 흩어져라. 예수님의 12제자가 사람수가 모자라서 똘똘 뭉쳐 다니며 목회하고 전도하고 잘 먹고 장수했나? 숫적으로 한줌도 되지 않던 그들은 로마로 소아시아로 그리고 멀리 인도에 이르기까지 사방으로 각자 뿔뿔히 흩어져서 어려운 고난 가운데 살다가, 결국에는 복음을 위해 스스로 순교 당했다.
좁아 터져서 더 이상 모이기가 힘들다고?
그러니 제발 좀 흩어져라! 끼리끼리 모여 잘 먹고 잘 노는 짓 이젠 좀 그만해라.
역겹다.
"예수께서 성전에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마가 13:1-2]
자비량 공동 목회, 교회 부패 쪼개는 '날선 검'
주님의 소명 받은 제자들만 갈 수 있는 좁은 길
현재 한국에는 약 10만 명의 목회자와 크고 작은 5만여 개의 교회가 있으며, 교회당 평균 교인 수는 약 170명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비교에 지나지 않고, 실제 이들 교회 가운데 60% 이상이 교인 50명 미만의 미자립 개척 교회라고 한다. 이런 통계는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열악한 목회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직접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어려운 미자립 개척 교회들에 대하여, 그동안 대부분의 교단들에서 보여 준 대책들은 그야말로 '언 발에 오줌 누기'식의 미봉책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사실상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고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장단기 해외 선교 운운하며 물심양면으로 쏟아붓는 거창한 노력보다 우선순위에 있어서 뒤로 밀릴 이유는 없다고 본다.
해외 선교도 물론 중요하고, 반드시 동시에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가까운 마을들'도 다 제대로 복음화를 하지 못했다. 복음은 처음부터 로마나 아테네로 향한 것이 아니었고, 예수님은 로마 근처에도 못 가 보셨다. 선교도 가까운 데서부터 먼 데로 가는 일반적인 순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까운 마을들을 복음화하는 최전선에 서 있는 교회들이 바로 미자립 개척 교회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대부분의 이들 교회가 도시 변두리와 농어촌, 그리고 외딴섬 등 소외된 지역이나 기타 복음의 사각지대에 들어서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미자립 개척 교회들의 자립을 돕고 지원하는 일은 한국교회가 최우선적으로 노력해야 할 사역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고려해 볼 수 있는 대책 중의 하나는 기존처럼 각 교단의 노회나 총회 차원에서, 중대형 교회들과 미자립 교회들을 서로 자매결연하여 재정이 허락되는 범위에서라도 일정 부분 목회자 생활비를 꾸준히 지원해 주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물론 각 교단의 적극적인 노력이 계속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자비량 공동 목회'가 필요한 이유
하지만 교단의 어떠한 지원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목회자들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수시로 급변하는 목회 환경 속에서, 구태여 과거의 방법만을 고수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무려 3만여 교회가 미자립 개척 교회라는 현실을 감안하고, 또 현재도 많은 신학교들에서 새로운 목회자들이 끊임없이 배출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이제는 과거와는 다른 비상한 대안을 심각하게 연구하고 실천해야 할 때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교인이 50명 미만이 되면, 우선 당장 경제적인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된다. 교회가 수도원처럼 산속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을 하는 것이 아니니, 이는 현실적으로 가장 시급한 어려움이 될 것이다. 이쯤 되면 목회자 생활비는커녕 예배당 임대료도 감당하지 못해 숨이 찰 경우도 많을 것이다. 또한 개척 초기에 사람이 적다 보니, 헌신된 일꾼이 항상 모자람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절박함을 크게 개선하는 적극적인 대안 중 하나로 '자비량 공동 목회'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지역에 따라서 조건이 달라지겠지만, 초기에는 서로 뜻이 맞는 대략 2-5명의 목회자들이 한 팀을 이루는 것이 좋을 듯하다. 혹시 가능하다면 가까운 지역의 기존 개척 교회들이 서로 연합을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방법은 기존에 난립한 교회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구조 조정의 효과도 가져올 것이다. 지금 현재로는 한국에 교회 수가 적어서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 개척을 하는 경우에도 공동 목회는 여러모로 좋은 장점이 있다고 본다. 우선, 교역자가 여러 명이 있으니 짐을 서로 나누어 질 수 있다. 이럴 경우에 거의 자비량 목회도 가능해진다. 서로 효율적으로 시간을 조정하여 사역을 지혜롭게 분담한다면, 충분히 자신의 생활비를 벌 시간적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단독으로 하는 자비량 목회는 시간 관리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다. 하지만 '자비량 공동 목회'는 이런 단점을 크게 개선해 줄 수 있다. 따라서 목회자가 반드시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에만 의지해서 목회하겠다는 사고방식을 이제는 좀 바꾸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교인이 몇 명 되지도 않는 미자립 교회에서, 그들의 주머니만을 바라보는 목회는 모두에게 아픔이 될 뿐이다.
앞으로 공동 목회를 새로 시작하실 분들에게는 적어도 한 가지의 기술을 배우거나 또는 전문 자격증을 가지고 스스로 밥벌이할 각오를 하시라고 권하고 싶다. 이렇게 잘 준비된 목회자들이 세 가정 정도로 한 팀을 이룬다면, 그 즉시 가정 교회 형식으로라도 공동 목회가 당장 가능해질 것이다.
이때부터는 예배당 건물이나 교역자 사례비에도 크게 신경을 쓸 필요 없이, 형편에 따라 작은 예배 처소를 임대하거나 아니면 가정에서라도 교회를 시작할 수 있다. 또한 전도, 교육, 구제 및 지역 사회를 위한 봉사 활동들도 작은 일부터 나름대로 가능해질 것이다.
여기에 평신도 가정이 두어 가정이라도 더 추가될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처음부터 무슨 큰일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먼저 지역 내에 소외되고 힘든 이들을 찾아 힘이 닿는 대로 도우며 전도에 힘쓰다 보면 교회는 서서히 자라나기 시작할 것이라 생각된다. 설사 성장이 더디더라도 처음부터 잘 준비된 정예팀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교회는 흔들림 없이 잡초처럼 강인하게 뿌리를 내릴 것이라 믿는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해외에 나가서 의사나 배관공 또는 택시 기사로 일을 하시며 자비량 선교를 하시는 목사님들도 많이 계시고, 오히려 어떤 평신도 선교 단체들은 전문 직업을 가지고 현지에서 취업하여 사역하는 자비량 선교를 더욱 선호하고 권고하기도 한다.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UBF는 개척 초기부터 지금까지 근 40년 이상 자비량 선교를 고집하며 전 세계 83개국에 1,35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성공적으로 양육하여 오고 있다. 물론 본부로부터의 재정적 지원은 전혀 없었다. 이렇게 자비량 선교도 하는데 자비량 목회라고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캐나다에서 30여 년 동안 목수 일을 하시면서 자비량 목회를 하신 폴 스티븐스 목사님은 한국에도 잘 알려지신 분이다. 그 밖에도 동산침례교회 배제창 목사님, 달라스베델교회 최태근 목사님 등 많은 목사님들이 자비량 목회를 하셨고, 국내에도 적지 않은 목사님들이 자비량 목회를 하고 계신 것으로 파악된다. 탤런트 출신 임동진 목사님은 신학교를 다니면서 자비량으로 3-4 가정이 모이는 가정 교회를 시작해 나중에는 거의 100여 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시켰다고 들었다.
또한 2003년에 박상철 목사님 등 4명의 은퇴 목회자들이 시작한 미국 워싱턴 지역의 예수사랑교회는 최근에는 9명이 공동 목회를 하고 있다고 한다. 담임목사를 포함해 사역자들이 일체 사례금을 받지 않기 때문에 예산의 70%를 외부에 쓸 만큼 나눔에 큰 힘을 쏟고 있어 주위 교회에 귀감이 되고 있다. 비록 출석 교인은 불과 30명 내외로 그리 많지 않지만 예배 때마다 기쁨이 넘친다고 한다.
그리고 1997년에 서울 자양동에서 7명의 신도들이 모여 시작한 강동교회는 유급 목회자를 두지 않고도 건강하게 성장한 전형적인 '평신도 교회'다. 설교는 준비된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교대로 한다. 헌금도 성경적 원리(고후 9:7)에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교회 봉사로 아무도 봉급을 받는 자가 없고, 모든 헌금은 최소한의 경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선교비와 구제비로 사용된다고 한다. 현재는 6명의 선교사들을 후원하고 있다.
목사직은 '직업'이 아니라 '직분'이다
어떤 분들은 "목사는 성직자이기 때문에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교인들의 헌금으로 생활하는 거룩한 직분자이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자비량 목회를 반대하시고, 특히 '주의 종'이라는 말을 강조하는데 이는 잘못된 인식에 기인한 것이다. 목사직은 구약의 성직자라 할 수 있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과는 크게 다른 '가르치는 장로의 직분'인 것이다. 더 이상 구약적인 의미에서 제사를 담당하는 성직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일 넓은 의미에서의 성직자를 의미한다면, 목사들뿐만 아니라 모든 평신도들도 다 성직자이고 주의 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이 제물인 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가 다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사가 다른 직업을 갖는 것 자체가 비성경적인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교인들의 사례비를 받지 않고, 손수 장막을 만들며 선교와 목회를 한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겠는가. 초대 교회도 로마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처음 약 300년 동안은 자비량 사역자들에 의해 인도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2세기 알렉산드리아교회에는 약 600명의 성도들이 모였는데 이 교회의 교역자는 직업이 은을 조각하는 '은장색'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흥미를 끄는 것은 중세 교회의 본격적인 타락은 자비량 사역이 사라진 후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즉 후대에 정치 세력화한 중세 가톨릭 교회가 마치 중보자처럼 하나님과 신도들 사이에 직업적인 사제들을 세우고, 이들을 구별된 성직자로 대우하며 신도들 위에 군림토록 허용하면서 급격한 교권화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로 교회의 부패도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직을 성직으로 대우하려는 것은 다시 중세 가톨릭으로 돌아가겠다는 말만큼 위험한 생각이다.
따라서 목사도 다른 장로나 집사와 마찬가지로, 그저 가르치는 직분을 가진 신자의 한 사람일 뿐인 것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신약 시대에 사는 모든 신자는 다 성직자이고 주의 종이며 예수님의 친구이며 형제이다. 따라서 그들 사이에는 직분의 차이는 있으나, 어떠한 계급 차별도 없다는 것이 개혁 교회의 정신이다.
성경적으로 볼 때, '가르치고 목양하는' 직분을 맡은 목사가 사례비를 받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바울 사도도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 하였다. 하지만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 바울은 스스로 이 권한을 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장로나 집사 등 다른 직분자들은 모두 헌금을 하며 교회를 섬기는데, 유독 목사만이 거꾸로 사례비를 받으며 교회를 섬겨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 내에서 장로직이나 집사직이 '직업'이 아니라 '직분'이듯이, 원칙적으로 목사직도 하나의 직업이 되기보다는 직분이 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구약의 제사직도 아닌 목사직이 정기적인 사례비를 받는 '유급 직업'이 될 때 이권이 생기기 쉬운 법이고, 이권이 있는 곳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것이 교회 역사가 가르쳐 준 뼈저린 교훈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내의 극심한 세습도 이권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추태가 아니겠는가. 자비량 목회라면 세습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비량 사역은 희생과 헌신은 요구하지만, 재물과 이권을 보장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자비량 공동 사역은 앞으로 교회의 부패를 골수까지 쪼개는 날선 검이 될 것이다.
공동 목회의 장점
여기서 공동 목회의 장점들을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한다. 전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장 김중기 목사께서는 "건강한 목회는 바로 팀 목회이며, 오늘날 한국교회의 대안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의사도 외과, 내과, 산부인과 등 전문 분야로 분류되어 있지 않습니까? 목회도 전문 분야가 있어야 합니다. 목사라고 다 설교 잘하는 것 아니고, 다 선교를 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설교, 교육, 선교, 목양 등 4개 분야의 전문가들이 공동 목회를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일부 교회에서는 담임목사를 제외한 다른 사역자들 즉 부목사, 교육 목사, 음악 목사들을 단순히 담임목사의 목회를 돕는 보조 도우미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크게 잘못된 생각이라고 본다. 담임목사가 만능선수가 아니건만 교회의 모든 일을 직접 관여하여, 자신이 재능이 없는 부분까지도 사역한다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공동 목회를 하면 이런 단점도 크게 해소될 것이다.
필자가 항상 이해할 수 없는 일 중에 하나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대부분의 한국교회 담임목사들은 과도한 교권력을 쥐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고 신자들 자신이 주님의 몸 된 교회인데, 왜 담임목사가 마치 개인 회사 사장처럼 행세하려 하는지 정말 허무맹랑하지 않은가. 목사직도 다른 장로직이나 집사직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가르치는 사역'을 위해 구별된 대등한 직분일 뿐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자비량 공동 목회의 또 다른 장점은 교회가 성장한 후에도, 교회를 부패하게 만드는 위험 인자들을 제도적으로 크게 줄여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우선 사례비도 안 준다는데 어떤 귀족 목사께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려고 하겠는가. 즉 헌신된 목회자들만이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공동 목회에서는 당회장을 목사나 장로들이 돌아가면서 임기제로 할 수 있기 때문에 교권에 의한 독재도 막을 수 있고, 부정이나 부패를 강력하게 견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교회 사유화의 핵심이 되고 있는 '담임목사직' 자체가 없어도 전혀 지장이 없다. 따라서 사실상 고약한 교권주의의 머리가 되는 담임목사 제도를 완전히 폐지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마련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특정 직분의 한 사람에게 과도한 교권을 몰아준 담임목사 제도는 득보다는 실이 훨씬 더 많은 제도임을 갈수록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담임목사는 원래 직분대로 '당회장'의 자리에서 '설교자'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
특히 일부 귀족 목사들께서는 마치 자신이 신자들 위에 군림하는 무슨 대단한 사도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고, 틈만 나면 '영적 지도력'이니 '목회 철학'이니 하며 얼굴 뜨거운 언사들을 자주하시는데, 좀 자제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아울러 담임목사 제도가 폐지되면 교회가 무슨 이단에라도 넘어갈 것처럼 허풍을 떨지 마시기 바란다.
교회란 한두 사람의 독선적인 영향력으로 운영되기보다는, 공동 의회에서 권한을 위임받은 당회나 제직회가 주체가 되어 객관성이 있는 교회 정관에 따라 서로 상의하며 운영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초대 교회 사도들이 말씀 사역에 주력하고, 교회의 운영을 위해 '다수'의 집사와 장로들을 세운 사실을 반드시 참고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비량 공동 목회는 목회자들이 손수 직업을 가지고 생활 현장을 느끼며 사역하기 때문에, 다른 교인들의 어려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아울러 그들과의 사고의 간격도 크게 줄일 수 있다. 물론 교인들도 목회자들에 대해 단순히 설교자 이상의 강한 동료 의식을 마음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즉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서로 마음으로 소통하는 풀뿌리 사역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장점들을 잘 살려 나간다면, 한국교회의 상당수는 '목사의 교회'로 비판을 받는 자리에서 '예수의 교회'로 환원되고, 목회자와 교인들이 더욱 일체가 되어 긴밀하게 협력하며 동역하는 건강한 교회로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이 글은 '자비량 공동 목회'만이 가장 좋고 유일한 목회 방법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에 대한 아주 단순하고도 기본적인 제안에 불과하다. 하지만 앞으로 많은 실무 전문가들이 이를 더욱 연구하고 문제점들을 보완하여 나간다면, 기존 유급 목회 제도에 비해 크게 불리할 것도 없고 오히려 장점이 더 많아 보인다는 것이다.
특히 현재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극심한 부정부패와 작은 미자립 교회들에 대한 실제적인 대안으로 충분히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직업이 다 고상하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첨언하고 싶은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한 어떤 생업을 갖더라도 자비량 목회는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단순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 이에 대한 부담이 매우 클 수 있으나, 목회만이 가치 있는 일이 아니라 모든 직업이 다 가치 있고 중요하다는 인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직장사역연구소 방선기 목사께서 미국에 유학할 때 커다란 빌딩에서 청소를 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힘들고 짜증이 나서 청소기를 집어던지고 하나님께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그때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목사가 성경 공부나 설교를 주께 하듯 하는 것처럼, 청소하는 일도 주님께 하듯 해야 한다는 골로새서의 말씀을 들려 주셔서 일하는 자세를 바꾸었다고 한다. 직업에 대한 선입견이 심한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또한 방선기 목사님은 몇 해 전에 '잉크 천국'이라는 기업을 경영하는 분이 사무 기기에 잉크 충전을 하는 일을 목회자들에게 알선해서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하시기도 했다. 전문적인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로 땀 흘려 수고한 만큼 경제적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고,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다양한 사업들이 생겨나고 목회자들에게 지원된다면 자비량 목회가 새로운 목회의 대안적인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신약 성경을 보면, 바울의 자비량 사역은 고린도에서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만나 장막을 함께 만들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안식일이 되면 고린도의 회당에서 복음을 강론하고, 평일에는 힘써 생업에 종사했을 것이다. 물론 바나바, 실라, 디모데 등 함께 동거 동락했던 동역자들의 일부도 바울의 생업에 동참했으리라는 추측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렇게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도 자비량 사역을 했는데, 스스로 제자라는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거룩한 소명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할 정도로 가난하게 사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누구도 따르는 무리나 다른 교인들로부터 정기적인 급료을 받으며 사역을 하였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데 꼭 생활비를 받아야 하는가. 내 손으로 벌어 쓰면, 무슨 심각한 문제라도 생기는가. 이는 목사들께서 자신들만이 성직자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많은 목사님들이 목회는 정말 힘들다고 하소연하시는 것을 자주 듣는다. 필자도 물론 주저 없이 이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1년 내내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있는 평신도들은 쉽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오히려 교역자들 못지않게 평일에는 직장에서, 주일에는 교회에서 쉴 틈이 없이 수고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자비량 사역자를 외국에서는 '텐트 메이커'라고 부른다고 한다. 사도 바울이 손수 장막을 만들며 거룩하게 사역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상 교회 내의 모든 신도들은 이미 이런 자비량 사역을 하며 교회를 섬기고 있는 셈이다. 다만 많은 직분자들 중에서 유독 목사들만이 예외적으로 '유급 사역'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자비량 공동 사역으로 새로운 교회를 일구는 일은 목회자들뿐만이 아니라 훈련된 평신도들도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약간의 준비만 한다면 오히려 기존 목회자들보다 더욱 유리한 여건에서 시작을 할 수 있다. 이미 대부분은 각자의 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공산 국가나 회교권 국가 내의 지하 교회들을 한번 생각해 보자. 교회란 무슨 거창한 신학을 논하는 신학교가 아니다. 복음을 너무 혼잡하게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성경대로 따르며 실천하는 순수한 지체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따라서 뜻이 맞는 몇몇 형제들끼리 팀을 만들어 건강한 가정 교회나 평신도 교회를 세워 동역하며 섬기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혹시 평신도들의 잠재력을 가볍게 보시는 분들이 있다면, 스데반 집사의 설교가 결코 사도 베드로의 설교보다 못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비록 대형 교회들처럼 화려한 프로그램이 없을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탄탄한 유대감 속에서 내실이 있고 생동력 있는 교회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또한 이런 견실한 노력들을 통하여 교회란 세속적인 복을 받기 위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이미 주께 받은 신령한 복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 서로 섬기는 사랑의 공동체임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자비량 공동 사역은 구조적으로 교회를 보다 순수하게 만들어 준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누구도 교회에서 세속적인 단물을 빼어 먹을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리고 어떤 직분자에게도 아무런 경제적 이권을 주지 않는다. 또한 모든 교인들이 대등하게 동역을 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다. 교권이 어떤 특정인에게 집중될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많은 분들이 "한국교회는 희망이 없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고 하신다. 큰 교회, 작은 교회 따질 것 없이 많은 제도권 교회들이 고루고루 썩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수많은 주의 제자들이 있다. 이들의 헌신으로 앞으로 이 땅에 새로운 모습의 자비량 '가정 교회', '평신도 교회' 그리고 '공동 목회 교회'가 많이 세워지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복 타령과 돈맛에 절어 '짝퉁 복음'을 전하는 기존 병든 교회들의 탐욕을 극복하고, 초대 교회 가난한 제자들의 가슴으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소위 귀족 목사님들이 즐겨 노래하는 '기복적인' 복음이나 '멋지게 왜곡된' 복음이 아니라, 세상이 미련하게 여기는 '십자가의 도' 그 자체를 바르게 전하자는 것이다.
자비량 사역은 물론 매우 힘들고 어려운 길이다. 이는 누구도 강요해서는 안 되고, 또한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길도 아니다. 오직 주님의 소명을 받은 제자들만이 갈 수 있는 '좁은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 역시, 제자들 자신만이 스스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국 남가주 세리토스장로교회에서 목회하시는 김한요 목사님의 간절한 절규를 인용하며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영혼을 얻는 일과 관계되지 않으면, 우리의 직업은 결코 소명이 아닙니다. 하지만 영혼을 얻는 일과 관계되면, 세탁소를 하든지 파출부를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다 거룩한 소명입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18)
⊙ 게시글의 출처 : 당당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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