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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주기도 바른 이해

by 【고동엽】 2011. 10. 15.
 
 

 

주기도 바른이해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의 모임에서 '주의 기도'는 가장 빈번히 드려지는 기도가 되었는데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그 주의 기도가 얼마나 형식에 매인 기도가 되어있는가 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에 대한 개괄적 이해

이 기도에는 예수의 구원사역의 의미가 함축적으로 정리되어 있고  복음서의 요약으로서,  예수의 구원사역의 모든 것이 드러나 있다.

 

주기도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번째 부분은 하나님에 대해,  두번째 부분은 인간에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일,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인간의 일용할 양식, 용서, 늘 따라 다니는 유혹, 인간을 위협하는 악 등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의 핵심은 "아버지와 우리가 만남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경험"이다. 이는 우리의 전인적(total humanity) 삶 속에서 아버지의 뜻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주님은 이 기도를 통하여 제자들이 하나님의 관심을 일상 속에 있으며,  하나님의 뜻이 삶의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을 하도록 가르치신 것이다.

  

기독교의 기도는 '나에게서 하나님께로'가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에게로' 오는 신비한 합일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신앙적 삶의 내용이어야 하면 또  신앙고백인 것이다.

 

 주 기도의 구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로서

1 :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높임
2 : 하나님 나라 임재를 위한 간구 
3 : 하나님의 뜻 실현 소원


사람을 위한 기도로서

4 : 일용할 양식을 구함 
5 : 사죄의 은총을 구함 
6 : 유혹과 죄악에서의 구원 간구

7 : 하나님을 높임(나라 권세 영광)  으로 되어 있다.
 


 예배시 주 기도의 위치에 있어서 

 

초대교회의 예배는 가르침(성서낭독과 설교), 교제(코이노니아와 공동식사), 떡을 뗌(주의 만찬), 찬양, 기도 등의 요소를 갖추고 있었는데 제자들은 주님의 기도모범을 따라 예배의 한 요소로서 주의 기도를 고백하였다.

 

이 기도는 갈 4:6의 아바 아버지란 칭호와 롬 8:5의 같은 언어사용과의 관련에서 초대교회의 예배 속에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가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초기 로마교회 예배에서의 주의 기도

이 시기의 예배는 초신자 예배(missa catechumenorum)와 믿는자들의 예배(missa fidelium)라는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주의 기도는 후자인 믿는자들의 예배에서 드려졌다. 이 기도는 헌금, 헌물과 함께 떡과로 성찬식 후 이어지는 '감사제물에 대한 기도'의 일부분으로서 드려졌다. 다시 말해 예배에 있어서 주의 기도는 봉헌 기도와 성찬의 교제(communio) 사이에 있었다.


*동방교회의 예배에서의 주의 기도

동방교회의 예배는 준비예배, 세례 청원자의 예배, 믿는 자들의 예배라는 삼중구조를 가졌는데 동방교회 예배에서의 주의 기도도 언제나 세 번째 예배인 '믿는 자들의 예배'에서 성찬식 직전 '중보의 기도' 직후에 드려졌다.


*중세시대의 예배에서의 주의 기도

중세시대의 예배는 말씀의 예배와 성만찬 예배의 이중구조를 가졌다. 주의 기도는 '성만찬 예배'를 이루는 예배의 한 요소로서 '성찬기도'와 '하나님의 어린양' 사이에 드려졌다.


*종교개혁시대 예배에서의 주의 기도

(1) 루터의 예배 : 루터는 설교 후 성찬 직전에 주기도문을 하였다.

(2) 쯔빙글리의 예배 : 쯔빙글리는 종교개혁가 중 가장 급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예배는 지극히 단순하게 진행되었다.

 

그의 예배에 있어 주기도문은 초반부에 위치하였다. 두 번의 이어지는 기도(올바른 말씀 청취를 위한 기도, 정부를 위한 기도) 직후 주의 기도가 드려졌다, 설교나 신앙고백, 주의 만찬은 모두 주의 기도 이후에 드려진 순서였다. 이 점은 다른 예배모델에서의 주기도문의 위치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의 예배 : 칼빈의 예배에서 주의 기도는 회중의 시편찬송 이후, 설교전 설교자의 기도 직전에 드려졌으며 설교 후 기도에 이어 다시 한번 주기도문을 석의하였다. 칼빈의 예배에 있어서 주의 기도는 예배를 구성하는 중요한 순서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주 기도의 중요성을 인식함

이상에서 살펴 본 바에 따르면 주의 기도는 지극히 예전적인 형태로서 성만찬 예전에 속한다. 이 기도는 초대교회에서부터 개혁자들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배예전의 큰 축을 유지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로 밝혀졌다.


주의 기도가 성만찬 예전에 속하여 있었다는 것은 이 기도가 지니고 있는 중요성을 암시한다. 물론 예배의 어느 요소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겠으나 성만찬을 하나님과 인간의 합일의 사건으로 볼 때 주의 기도는 이 사건에 이르는 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주의 기도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님을 위한 기도와 사람의 필요 청원이 그것이다.

 

예수의 성육신과 삶과 죽음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한 사건이었으며 인간의 구원을 위한 죽음이다. 예수에게 신성과 인성이 '나뉘지 않고, 분리되지 않고, 혼합되지 않고, 변형되지 않은 채' 있으며 예수 자신이 하나님을 위한 삶과 인간을 위한 죽음을 동시에 경험하셨기에 그가 가르치신 기도는 따르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예수 자신을 보여주는 전형이라 할 수 있겠다.

 

주의 기도는 우리의 입으로 하여금 종말론적 신앙을 고백하게 한다. 그것은 교회가 종말론적 공동체이기에 교회가 드리는 기도 또한 종말론적 기도라는 말이다. 주의 기도는 예수와의 육체적 이별 후에 임박한 주의 재림을 기다려야 할 제자 공동체에게 주는 사명인 동시에 축복이며 희망의 정표(情表)였던 것이다.

 

주의 기도는 박해로 인한 질곡이 극에 달하고 모든 인간적 희망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될 제자 공동체의 상황을 직관하는 예수의 사랑의 선물이다. 예수는 이 기도에서 질곡의 상황(sitz im Leben)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신다. 모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의 뜻 앞에 바쳐져야 한다. 예수는 우리가 비록 인간의 한계상황에 맞닥드려진 고통스런 현실 한가운데 있다하더라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친밀한 아버지 "압바" 앞에서, 그를 부르고 그를 힘입어 새 세계를 얻으라고 기도를 가르치신다.

 

이 기도의 시작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라는 송영(doxology)으로 시작되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송영(doxology)으로 끝을 맺는다. 이것은 성경에 이른바 대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을 연상시킨다.

 

우리의 삶은 물론 기도의 목적이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먼저 구하여야 할 간구의 내용이다. 예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다. '나라와 의' 즉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 기도는 모두 이방인들의 간구일 뿐이다.


예수께서는 주의 기도를 가르치시기 직전 이미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같이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드리지 말라고 말한 바 있다. 영혼의 진한 고백없이 반복적이고 형식적으로 주의 기도를 드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무의식적으로 내뱉어지는 주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지 못하고 땅에 떨어질 뿐이다.

 

우리의 삶과 예배에 있어서 주의 기도는 신령과 진정을 다해 드려지는 고백적 기도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기독교인의 모임을 마무리짓는 한 형식으로서의 기도가 아니라 성례전적 경건과 기쁨, 하나님의 임재의 감격으로 이 기도가 드려질 때 주의 기도는 종교적 주문(呪文)이 아니라 주님이 가르치신 '바로 그 기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 6:9-13, 누가 11:1-13)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이 계신 곳을 하늘이라 할 때, 이 하늘은 땅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공간적 하늘이 아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공간적 하늘에만 계시다면 하나님은 땅에 사는 우리의 삶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늘'이라는 이 표현 때문에 종종 이런 오해가 초래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초월적 존재로만 인식하게 되고 초월은 거룩한 것이며 내재는 이에 대비되는 악이라는 이원론적 구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일컬어 '하늘'에 계시다고 말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편재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주기도의 본문에서 {하늘에}라는 단어는 두 번 사용되었는데 한번은 단수로, 또 한번은 복수로 사용되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에서는 단수(ουρανω| 우라노)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의 하늘은 일정한 지시적 장소에 가깝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이란 본 절의 표현은 복수( τοις ουρανοις/토이스 우라노이스)로 쓰여졌는데 이는 편재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주와 자연과 세상에 그리고 공간적 의미에서의 땅과 하늘에 더 나아가 사람의 전인격에 계셔서 삶과 역사를 주관하시며, 경외의 대상이 된다. 인간은 누구도 하늘에 있지 못하다. 이 말은 인간은 공간을 초월해 편재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할 때에 이것은 '하늘'이라는 초자연성과 '아버지'라는 친밀성 즉, 초월과 내재을 고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시다고 말할 때 이 말은 하나님의 실존과 주권이 만물 가운데 있으며 만물에게 미침을 고백하는 것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행 7:49)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왕상 8:27)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115:3)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막 14:36을 보면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며 하나님을 "압바 아버지(αββα ο πατηρ)"라고 부르셨다. 여기서 사용된 '압바'(αββα)라는 단어는 아람어에서 기원한 호격(呼格)으로서 어린아이와 가정의 언어이다. 이는 또한 성인들도 그들의 아버지나 노인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표할 때 사용하는 애칭이기도 하다. 이처럼 익숙하고 평범한 표현을 하나님에 대해 사용한다는 것은 예수 이전에는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압바"라는 표현이 "친밀함"의 표현이라 할 때, 이 친밀함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의식하게 한다. 지금 여기에 있으며 또한 다가오고 있는 이 나라는 결단에 의해 완성된다. 이 결단은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압바"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고백하는 자의 아버지이다.


기도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πατηρ 파테르)라고 부를 때 이 말은 우리 존재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셨다. 창1:27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렇게 창조된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기에 사람은 '생령'이 되었다.

 

그러므로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 곧 그 아들의 영(靈 : πνευμα/ 프뉴마)이 그 속에 있는 사람은 그 속에 있는 생명의 근원 곧 아버지 숨결 곧 성령에 힘입어 하나님을 '압바 바로 그 아버지'αββα ο πατηρ()라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이 외에도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우리의 자녀 됨을 확인할 수 있는데 몇 곳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요1:12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롬8:15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8:17 :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갈4:4-5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 사도는 롬 8:15-16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하였으며,

 

갈 4:6에서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의 신분을 하나님의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도는 성령 안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어린아이가 되어 아버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 분의 뜨락에서 그 분과의 사귐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기도의 이 절에서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라는 표현이다.

사63:16은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이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공동체 즉, 이스라엘의 아버지임을 고백하고 있다.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얻는다. 한국교회는 지금껏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이라는 동전의 두 면을 각기 하나씩만 붙잡고 서로를 인정치 않으며 한편으로 치우쳐 왔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우리'라는 표현을 통하여 공동체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셨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이뤄진 사랑의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 공동체 안에서의 삶이 공동체의 고백으로 드려질 때 진정한 사랑의 가족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아무도 형제를 돌보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이 말은 나와 너, 혹은 개인과 전체가 사랑이란 묘약으로 유기적 관계를 맺음으로 하나님 사랑의 절정에 이른다는 뜻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주기도문에서 '우리'라는 단어를 여섯 번씩이나 언급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주기도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을 얻어 부르심을 입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 즉 교회론의 기초 위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교회의 기도임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우리는 신구약의 두 곳에서 우리 기도의 모범을 찾을 수 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시115:1)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요12:28)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이름은 유대적 전통에 의해서 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인격을 보여주고 그 사람의 존재(Being)와 가치(value)를 드러낸다.

 

창 2:19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모든 동물들을 이끌어 오게 하시고 이름을 지어주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한편으로는 동물들을 구별하는 호칭을 주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 동물의 존재에 대한 존엄성과 가치를 부여하게 하신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소개할 때 '여호와'( יהוה 예호바)라는 이름으로 7,040회, '하나님'< אלהים> 엘로힘)으로 4,000회, < אלהים יהוה>'여호와 하나님'은 11,040회를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가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엮여진 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이름을 반복하여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에 무수히 기록된 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칫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를 범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전이나 회당에서 드려지는 제사와 예배에서 부득불 하나님 이름을 발음하거나 파피루스에 기록하기 위해서는 ① 목욕을 하거나, ② 오랜 기도 후, ③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거룩한 옷을 입고 불렀으며 ④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 이름이 나오면 침묵(沈默 or 默音)으로 읽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인간의 입으로 부르는 것조차 불경한 것으로 간주하여 그저 '주님'( אדני ) 아도나이, Lord)이라고 만 부를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신성과 인성, 성품과 사역이 드러난다. 이와 관련해서 볼 때 하나님의 이름은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소개되고 있다.

 

1) 존재와 관련해서

① Jehovah, YAHWEH :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계시하며 가르쳐 준 가장 신성한 이름
② Elohim : 경외와 권능의 하나님
③ Elyon : 예배와 존귀를 받으시는 높으신 하나님
④ El-Shaddai : 족장들을 향한 위로와 축복의 하나님
⑤ Adonai : 모든 인류의 주인이며 통치자
⑥ 예호바 엘로힘 짜바 :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2) 사역과 관련해서

① 하르 예호바 라아 - 준비하시는 여호와
② 예호바 로프에하 - 치료하는 여호와
③ 예호바 닛시 - 승리의 깃발이신 여호와
④ 예호바 삼마 - 거기 계신(현실 속에 계신) 여호와
⑤ 예호바 샬롬 - 평강의 여호와
⑥ 아싸 예호바 - 일을 행하는 여호와
⑦ 쿤 예호바 - 성취하는 여호와
⑧ 예호바 라하 - 목자되신 여호와
⑨ 쩨다카 예호바 - 의로우신 여호와

 

이러한 하나님의 이름들은 그 분의 손길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우리가 그 분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삶의 주관자가 되시고, 삶의 의미가 되시고 우리와 교제하시며, 우리 삶에 내려와(incarnation) 친히 간섭하시며, 역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부를 때 우리에게는 승리가 있고 구원이 있다.

다윗은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17:45)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그에게 승리가 주어진 것이다. 신약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선언하고 있다.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말 2:2)

 

본문에 사용된 '거룩'은 [구별되다]는 뜻이다.

'거룩'이란 단어는 히브 리어로는 { קדוש카도-쉬:}, 헬라어로는 {αγιος, 하기아조}를 쓰며, 정결되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피조물과 그 거룩함에서 구별되는 (聖別)되는 창조주요, 다른 신들과 구별된 참 신(神) 여호와라는 뜻이다. 국어사전에서는 '거룩하다'는 말을 '성스럽고 위대하다'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다. 잠3:6은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 아래 놓여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욥은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거룩하심을 높이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말씀을 바울 사도는 고전10:31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설명한다.

 

우리 생활의 전 영역 즉, 지, 정, 의 곧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전반에 걸쳐 하나님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관념적인 신앙을 극복한다. 이것은 고백적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에수님은 마5:16에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시96:8은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지어다"라고 말씀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은 사람의 눈높이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전된 부패성을 가진 연약한 인간이 자신의 공로로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여야 볼 수 있고 드릴 수 있는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드릴 영광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함으로써 성별되고 흠없는 제사를 드리게 되고 이런 희생(sacramentum)의 제사가 삶에서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질 때 유일회적이고 완전한 제사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자신은 죽고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고 말할 때 이는

첫째, "하나님과 인간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고백이다.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의 피조물은 어떤 것이라도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아담의 타락은 이 질적 차이를 극복하려는 어리석은 교만에서 비롯되었다.

 

둘째, 이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뜻이다.

시편 14편에 보면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한다.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아무데나 가져다 붙이기 좋아하는 한국교회의 교인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그저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기만 하면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이라는 어이없는 착각이 만연해 있다.

 

 다시말해 그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행위는 비록 그들의 입으로 하나님을 부르지만 실제로는 가증한 소행을 일삼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사탄의 올무에 잡힌 사람들이며 죄에 빠진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있어야 할 기도의 제목은 무엇일까?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이 임하옵시며


1. '나라'(Kingdom)의 두가지 표현

본문은 '나라이 임하옵시고'라고 말할 때 헬라어의 βασιλειας/바실레이아 를 쓰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성서를 볼 때 이 '나라'는 두 가지로 표현되고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라는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나라(Kingdom of heaven) 라는 표현이다.

 

그렇지만 복음서에서 병행되는 이 두가지 개념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마태는 하늘나라를 30번, 하나님 나라를 3번 쓰고 있다.

 

마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16번,

 

누가는 32번 쓰고 있으나 하늘나라라는 말은 한 번도 쓰지 않고 있다.

우리가 마태 19:23, 마가 10:23과 누가 18:24을 비교해 보면 이 두 개의 말이 같이 쓰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왜 같은 의미의 말이 이처럼 두 가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지극히 거룩하기 때문에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다시말해 거룩한 이름에 대한 경외심이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마태가 그 중 가장 유대적이었으므로 그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 대신에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한 것이다.


2. 하나님 나라의 의미

헬라어의βασιλειας (바실레이아)는 왕권 혹은 왕의 통치를 의미한다.

여기서 사용되는 '나라, 왕국'이라는 말은 일반적 의미로 말하는 '영토'의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통치권이요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를 말한다.

 

하나님 나라란 땅의 임금이 통치하는 것같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토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이며 지배이며 최고의 통치를 하시는 상태요 상황을 말한다.


3.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전통적인 두 가지 견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상은 두 가지 관점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 첫째는 현세가 모두 악한 세대이며 희망도 바라볼 수 없는 이른바 악의 세계에 넘어간 세대이지만 내세는 완전히 선한 시대이며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시대라는 것이다. 이와같은 사건은 하나님이 직접 시간과 이 세상에 개입하셔야만 가능하다. 혼돈과 고통과 진통 속에서 하나님이 최고의 주인이 되시는 새시대가 동터 온다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통치가 느린 과정으로 실현된다는 사상이다. 즉 사람들이 결국 하나님의 통치권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되는데 그 날까지는 사람들이 더욱 더 율법의 지배 아래 있게 된다는 것이다.


4.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나라이 임하옵시고' 라는 주의 기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많은 언급을 함과 동시에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시하고 있는데 그것을 몇 가지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복음서에서는 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온 것으로 종종 묘사되고 있다. 이 나라는 역사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고 영원에서 시간 속으로 들어온 것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며,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마20:1-16 ; 포도원의 일꾼 비유, 마22:1-14 ; 혼인잔치초청 비유)

 

둘째, 이러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들어오는 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상태이며 획기적인 것이며 새로운 인간형의 출현에서이다.

 

마 18:3-4은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였다.

이 역설(paradox)은 '존재의 전이자(轉移者)'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천국에서 크다 일컬어지는 구성원으로서 그 나라에 사는 것 뿐 아니라 '천국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의 전형(全形)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곧 하나님 나라이다. 그리스도는 어린 아기로 오셨고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셨으며 지극히 존귀한 자기를 비워 비천한 인간이 되셨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다. 그는 전적으로 새로운 인간이었다. 둘째 아담인 것이다.

 

셋째,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는 아직도 오고 있으며 어떤 의미로는 미래적인 것이다.(마 25:1-13 ; 슬기로운 다섯처녀 비유) 하나님 나라는 능력으로서 현재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생애 속에 온다는 것이 예수의 약속이었으며,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로운 것으로 마시겠다는 것이 예수의 희망이요 믿음이었고, 예수는 그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5. 주기도문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우리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역설을 가지고 있다. 그 나라는 예언자와 족장들이 들어가는 곳이며, 현재 사람들 속에 또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며, 예수가 제자들에게 그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는 그 나라가 주어진 나라요, 하나님 자신의 행동에서 나온 직접적인 결과요, 동시에 인간의 행위와 반응에 큰 관계를 가진다는 역설을 가지고 있다.

 

주기도문 가운데는 두 가지 기원(祈願)이 나란히 있다.

"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히브리 문체의 가장 일반적인 특색은 병행법이다. 서술을 병행형으로 반복하는 것은 유대의 시 문체의 특징이다. 두 번째 구절은 첫 번째 구절을 확대하고 설명한다. 즉, 하나님 나라는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으며, 메시야가 통치할 다윗 왕국을 대망하였다. 특히 그들은 회당 예배가 끝날 때마다 고대 아람어 기도인 '콰디쉬'(Qaddish, 성화를 뜻함, 여기에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소망이 간절히 깃들어 있다)를 암송하기도 했다.

 

눅17:21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볼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였는데, 이 누가복음의 말씀은 현세에서부터 천국이 벌써 영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중요시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이에서 더 나아가 예수는 주기도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적 임재와 통치가 우리의 생활에 이르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 실현에 있는데. 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진 상태를 말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롬 12:2) 하늘에서 온전히 성취된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여기서 뜻에 해당하는 원어 '델레마'(qe,lhma)는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들(7:21 ; 12:50)과 구속사에서 어떤 사건을 전개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18:14 ; 26:42)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나라가 우리에게 지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1)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자기를 굴복시키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2) 그 나라에 대한 이 개념은 그 나라를 개인과 관련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각자가 하나님이 뜻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3) 그 나라에 대한 이 개념은 어떻게 그 나라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동시에 있을 수 있는가를 설명해 준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사람은 누구나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나라에 들어갈 충분한 자격을 갖추지 못하게 하였다.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이나 열심이 그것을 가능케 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의 통치를 인정하는 열려진 가능성 아래서 이 나라는 인간에게 미래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4) 이 나라는 예수를 통하여 왔고 예수를 통하여 이해 가능한 나라이다. 이 나라는 예수에게서 구체화되었고, 예수의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복종이 그것을 가능케 하였으며 예수는 단순히 그의 인격 속에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한마디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아모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사11:6-9)하고, 이 땅에서 "다시 사망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않은" 나라, 질병과 사망과 눈물과 아픔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아픔이 없고 사망이 없고 눈물이 없는 나라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첫째,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는 물질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주님은 그 나라가 먹고 마시는데 있지 않다고 하셨다.

 

현실에 매이는 물질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교회의 물량주의와 성장에 대한 강박, 보이는 것 즉 예배당의 건물, 사람의 숫자, 현실에서 누리는 복에 대한 집착 등은 하나님나라를 만져지고 볼 수 있는 것으로 물화(物化)한다.


여기서 물질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은 결코 물질을 악한 것으로 보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물질에 대한 집착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세계를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극복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한한 인간의 세계에 묶어 두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적 세계를 초월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게신 곳은 그 어디나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그 곳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셋째, 그 나라는 우리 안에, 내 안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의 마음과 그 마음들이 모인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임재이다.

삶과 가치관이 바뀌고 내면의 변화가 넘쳐 삶의 열매로 맺어질 때 그 나라는 내 속에 있으며 관계의 세계에서 사랑하며 용서하며 인정하며 용납할 때 하나님 나라는 움트고 자라나 그 마음과 공동체의 한복판에 채워지는 것이다.


눅17:21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을 보게되는 것이다.

  

본문의 '뜻'이란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델렘마(qelhma)인데 이 말은 'will' 즉 '의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소원이란 말이다.

 

마12:50에서 주님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엡5:17에서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이해하고 수행해야 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인가?

첫째, 살리는것 곧 인간의 구원이다

하나님의 뜻은 자기가 지으신 만물의 회복이다. 특히 타락한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 일은 인간을 살리는 일이요 인간의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8-39)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의 뜻은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요 3:16)이요, 하나님의 나라에서 잃어버린 바 되었던 자들이 예수님의 구속의 피 값으로 속전되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케 되는 것이며(잃은 양, 드라크마, 탕자 비유),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새사람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둘째, 우리의 거룩함이다.

살전 4:3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롬12:3)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거룩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잔치자리에 초대받은 자가 마땅히 입어야 할 예복이다.

하나님

부르심 : 인간의 구원 ↙↗ 응답 : 우리의 거룩함

인간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내 몸에 체현(體現)해 내는 것이다. 이 응답 곧, 우리의 거룩함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에서 난다. 아무도 자기 행위로 의롭다함을 입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우리들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인 셈이다.

 

셋째, 하나님 나라의 성취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은 우리가 잃어버린 낙원 즉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를 부르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하나님나라에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나라는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왔으며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있으며 또한 하늘로 올리우신 그 예수의 재림 때에 완성될 것이다.

 

이 과거와 미래의 한 지점 즉 '지금 여기'(here and now)는 그 나라를 일구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다. '지금 여기'라는 시점은 단순히 시제의 문제가 아니라 성도의 신앙고백적 삶 전반에 걸친 '전인적 지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궁극적으로 그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지만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장차 성취될 하나님나라 도래의 사건을 현재적 사건으로 보게 하는 렌즈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도래에 대한 간구는 믿음의 눈으로 보고 '지금 여기'에서 그 나라를 일구고 동시에 그 나라에 있어야 할 이유가 된다.

 

 그 이유는 바울사도가 말했듯이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우리의 삶이 이미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으며 그 분의 섭리 안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우리의 기도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뤄질 것을 간청하는 것이다. 성도의 현재의 삶이 미래의 삶을 지시한다. 현재에 충실하지 않고 미래를 꿈꾸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생이란 밭을 주셨다. 이 밭은 하나님나라의 열매를 거두기 위한 밭이다. 이 밭에서 거둘 열매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열매이다.

 

이 세상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이 세상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우리를 하나님나라로 부르시는 '소명'
(calling)에 응답하여 충직한 청지기로서 '지금 여기에서' 그 나라를 일구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미 하나님나라에서 베풀어지고 있는 그 잔치가 오늘 이 땅에서도 이뤄지기를 간구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히 드릴 기도인 것이다.

 

이 기도는 "하늘과 땅"이라는 우주적 표현을 통해 드려진다. 고대 근동지역과 구약에서 "하늘과 땅"이 병행되어 사용될 때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를 지칭한다.

 

그러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할 때 이것은 단순히 관념적 기원이나 종교의 현상학(現象學)적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기도는 개인적, 내면적 차원에서 배양된 신앙이 우주적 차원으로 나아가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나라를 이렇게 묘사한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 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나라는 평화의 나라이다. '샬롬'과 '에이레네'의 나라인 것이다.

샬롬은 '완전하다' '건전하다' '온전하다' '전체적이다'라는 뜻이 있고 '복지' '조화'라는 뜻과 함께 구약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샬롬은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것, 분열이 없는 통일된 상태, 부분적이 아닌 전체적인 것을 뜻한다." "인간이 하나님과 계약을 어기지 않고, 깨지 않고, 잘 지켰을 때 평화이다. 영적인 완전성을 의미한다. ... 완전하고 건전한 삶이다. 생명이 충만한 상태이다. 삶이 조화되어 있는 상태이다.

 

평화로운 민족은 나뉘어져서는 안된다. 그리고 차별이 없이 조화롭게 살아가야 한다. 평등이 있어야한다. 자유가 있어야 한다. 또한 경제적인 번영도 있어야 한다. 구약에서 때로 경제적 번영을 평화라고 부른 경우도 있다.(대상 4:40, 22:9 등) 정치적인 안보 역시 샬롬이라고 했다. (왕하 20:19 사 32:18) ... 인간의 평화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평화 위에 근거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계약을 잘 지켰을 때 평화가 주어졌다. (렘 26:6, 겔 34:25) 모든 평화는 하나님께 속해있다. 평화의 조건은 하나님의 현존에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현존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올바르게 지킬 때 거기에 의가 존재케 되고 따라서 샬롬 평화가 깃들게 된다. 여기서 평화와 정의가 직결되고 있다."

 

부연하면 "'평화'라는 말로 번역되어 온 히브리어, '샬롬'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와 같이 그렇게 단순하게 '전쟁의 종식'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이른바, 매우 제한된 의미의 소극적인 '평화(eirene)'개념과는 다른 성서 특유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이다. ...  

 

말하자면 '샬롬' 은 '전쟁의 물리적인 휴식'만이 아니라 불의와 거짓의 종식과 정의와 진실의 구현도 불가분리적으로 함께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 히브리성서 기록자들의 확신이었다."

 

 "평화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화해가 없이는 이룩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이고 동시에 화해케 하는 직분을 맡은 사람이다.

 

인간과 세계 안에 있는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화해의 역사로써만이 가능하다. 샬롬의 다음 요소는 자유이다. 이 자유는 자기로부터 자유하는 것이고 이것은 자기를 비우는 것이다. (빌2장)

  

 *샬롬은 이 자유에 의해서 이룩되는 질서인 것이다. 샬롬의 세번째 요소는 희망이다. 이 희망은 오늘에서 내일에로의 차원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일에서 오늘로 오는 차원도 있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샬롬은 구약성서가 지향하고 있는 궁극의 목표이었으며 이와 같은 사상은 예수를 통하여 신약시대에 이미 성취되었고 사도들과 바울을 통하여 기독론적으로 증거되었던 평화의 사상은 종말로부터 현재로,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영원으로부터 유한(有限) 으로 다가오는 종말론적 평화이다.

 

평화에 대한 또 다른 표현, '에이레네' ειρηνης 

 

"신약에 나타난 희랍어 평화는 구약의 샬롬의 개념을 거의 다 포함하고 있다. 원래 희랍어는 라이벌 그룹 간의 다툼이나 미움이 제거되거나 중지될 때 사용된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이 개념에 구약의 샬롬개념을 집어넣어 쓰게 되었다. 더구나 신약시대에 이 말이 성도들간에 인사말로 쓰였던 것이다. 예수나 바울이 첫 인사를 그 말을 써서 했다. 특별히 엡 2:14-17에서 평화란 말이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화해, 이때까지 극한적으로 대립되어오던 두 그룹간의 화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두 대립 그룹간의 화해에 쓰여지고 잇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복음에 전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산상교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평화를 만드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그같은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선언했다. 평화를 위해서 그가 이 땅에 오시고 평화 때문에 죽으신 분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평을 이룩하였고 다음으로 인간들 상호간의 화해를 이룩하였다. 인간 가운데 놓여 있는 갈등, 시기, 질투, 미움, 경쟁 등을 제하고 화해와 화목을 이루는" 일이 예수님의 일이었던 것이다.

 

요한1서 2장 17절은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했다. 이 땅과 땅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영원할 것이며 오늘 우리에게 부여된 이 영원한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샬롬'의 나라, '에이레네'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일용할 양식"에 대한 바른 해석은 다음의 몇 가지 전제를 이해할 때 가능하다.

이 말은 우선 1세기의 일용 노동자들, 매일의 급료로 생활해야하는 궁핍하고 불안정한 이들을 염두에 둔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자들에게 이 기도는 절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현실의 삶에서 굶주림을 해결해야 하는 당시의 수많은 민중들에게 이 기도는 삶의 문제와 가장 가까이 있는 현실적 기도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서 나누게 될 빵'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예수는 이 기도에서 분명히 1세기 일용 노동자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의 실제적 필요에 마음을 주고 있지만 이것이 결코 현실적 요구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예수는 이미 그의 공생애 초기, 사막에서의 유혹에서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선언한 바 있다.

 

그러므로 이 기도의 두 번째 차원은 현실에서부터 다가올 새로운 현실 즉, 예수의 말씀안으로 들어 온 하나님나라와 그의 강림과 함께 완성될 하나님나라에서 누릴 온전한 삶, 즉 궁핍과 그로 인해 초래되는 온갖 차별과 불이익이 없는 신천지(新天地)를 구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양식'에 대한 세 번째 견해는 초대교회 교부들의 견해를 따라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매일 먹는 '성례전의 빵'이라고 할 수 있다.

 

*성례전은 하나님나라 잔치의 모형이다. 우리는 이 잔치에서 예수의 살을 먹음으로써 예수의 생명을 먹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누는 '성례전의 빵'은 단순한 물(物)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생명'인 것이다.

이 빵이 독점될 때 그 빵에는 생명의 가치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만나'를 내려 주시는 광야의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이 빵은 나눠져야 하고 그 나눔의 자리에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잔치가 배설된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나라의 도래와 완성에 대한 약속'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나눔을 전제한다. '나'와 '너'의 양식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교적 구원의 독점사상 즉 선민의식을 뛰어넘는다. 복음은 보편적인 모든 죄인 즉 '오늘날 우리에게' 미치는 구원의 능력이다. 생명의 빵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이 빵을 구하는 일만큼 간절한 것은 없다.

 

위에서 우리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다양한 이해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해석들이 그 의미가 서로 상충되거나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견해들은 오히려 우리 기도의 자리가 위의 의미들이 통전적으로 융합되는 한 지점이어야 함을 암시한다. 그 때에 비로소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본문의 참뜻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죄 : 하마르티아와 오페일렘마 그리고 파라프토마

이 본문에 있어서 죄라는 단어는 눅 11:4에서는 하마르티아(αμαρτιας )가, 마 6:12에서는 오페일렘마(οφειλημα)가 사용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 사용된 '하마르티아'는 '화살이 과녁을 빗나간 상태'를 뜻한다. 이 단어에 의하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있을 때 그것이 죄(sins)가 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사용된 '오페일렘마'는 도덕적인 실수, 빚진 어떤 것(debts) 등을 일컬을 때 사용되는 말이다. 누가복음의 '죄'가 상태 혹은 본질로서의 죄라면, 마태복음의 죄는 '관계'로서의 죄이다. 또한 누가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죄에 집중하고 있다면 마태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죄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마18:24-35에 보면 일만 달란트를 빚졌던 자가 가까스로 자기 빚을 탕감받고 길을 나서던 중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받은 탕감의 은혜를 잊고 자기가 입은 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액수를 빚진 채무자를 자기 옥에 가두었다가 후일 이 일이 발각되어 자신도 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비유가 등장한다.

마태는 35절로 이 비유를 정리하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소개한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형제의 그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그런데 한글 개혁판 본문에는 마태복음 원문에 있는 '그 과실'(τα παραπτωματα  ) 이라는 단어가 누락되어 있다.

 

 여기에서 사용된 파라프토마( παραπτωματα )는 계획적인 범죄, 고의가 아닌 실수, 진리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복합의 뜻을 가진 단어이다.

 

이 말씀을 누가의 입장과 연계하여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 친히 성육신 하신 주님의 값비싼 대속의 죽음으로 사죄의 은총을 입고 구원을 얻었는데 어찌 자기에게 사소한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씀이 된다.


비록 누가와 마태가 사용한 '죄'라는 단어사용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두 본문의 각기 다른 '죄'를 주목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예수는 용서에 대한 베드로의 물음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의 관념상 7은 완전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는 것은 완전한 용서를 촉구하는 말씀이다.

 

자기 이웃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없으며, 형제에 대한 자비와 사랑의 마음이 없고, 동정과 용서를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사죄의 은총을 누릴 수 없다.

 

로마서 14:7-9에서 사도 바울은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말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용납하고 이해하여야 함을 강력히 상기시키는 한편, 인간은 누구라도 하나님의 용서가 반드시 필요한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심같이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주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라고 말씀하심으로 용서의 마음을 촉구하신다. 진정 용서 하는 자만이 용서받을 수 있으며, 용서와 화해는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바울서신에서 본 주님의 사죄의 일

바울서신들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사죄의 일은 '평화를 이룩'(골 1 : 20)하시고 만물을 자기와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엡2:14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화평'이시다.


에베소서에서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 또 국가나 사회생활에서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길을 가르치고 있다. 그 저자는 복음을 '평화의 복음'으로(엡 2:17 ; 6:15) 표현한다. 특히 2장 14-18절은 골로새서나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이론적 설명에 들어갈 위치에 들어있는 본 서신의 핵심적 부분인 것이 주목할 만 하다."


에베소서 2장 14절-18절을 중심으로 그 안에 나타난 화해와 평화의 의미를 찾아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기도의 참 뜻을 살필수 있을 것이다.


에베소서가 기록된 1세기말 소아시아의 역사적 현실을 보면 "헬라지역에 널려 있는 유대인에 대해서 그들의 특수주의적 생활양식에 격분하여 일어나는 반셈주의 폭동이 있었고, 또 반면에 종교신앙을 찾아 회당에 몰려드는 이방인에게 대해서 빗장을 굳게 하며 그들의 부도덕과 무신성(atheoi-12절)에 대한 규탄이 유대인 쪽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에베소서는 고대의 반셈주의와 유대교의 이방인 멸시의 완화될 줄 모르는 적대와 보복과 증오의 사회에서 형제답게 살아가는 새인간의 탄생을 갈망"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서신의 기록연대를 A.D 60년 경을 전후해서 볼 때 이 시기는 아그립바 1세로부터 제1차 유대전쟁이 끝나기까지의 기간(A.D.41-74)이다. 이 당시는 아그립바가 헬레니즘문화의 옹호자로 자처하던 시기였고(44년까지), 44년 그의 사망 후 로마가 팔레스틴을 직접 통치하는 총독통치기였다. 총독들의 정책은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소요들이 발생 하였으며 경제적인 상황은 악화되었다.

 

주기도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려면 우리 자신이 먼저 해야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에베소서가 말하듯 '둘을 하나로 만드는' 화해의 일 즉, 서로를 용납하는 것이다.

 

14 '그(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그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원수짐을 그의 육체로 해소시켰습니다.

15 그는 여러 법조문으로 된 계명들의 율법을 폐기하신 것은 자신 안에 둘을 하나로 곧 새사람을 만들어 평화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16 그리고 서로 원수된 것을 십자가에 의하여 해소하시고 하나님께 대하여 둘을 한 몸으로 철저하게 화해하게 하였습니다.

17 그는 오셔서 멀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를 통하여 두 편이 접근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여기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야웨는 우리의 평화'라고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궁극적 기대를 그리스도론적으로 다시 쓴 것이다."

 

 

"샬롬은 안일, 행복, 구원뿐만 아니라 야웨의 선물로서 종말론적 기대의 내용으로서 파악되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평화의 군주, 메시아에게 집중되었다.(사 9 : 5). 곧 그분이 샬롬이신 분이다. (미 5 : 4) 후대에 가서 랍비학에서는 하나님도 메시아도 평화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평화는 결코 한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본문 저자에게 멀리 있는 자와 가까이에 있는 자는 어김없이 이방인과 유대인이었다. '평화'는 그리스도의 화해의 업적을 가리킨다. 그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구원자 야웨(샬롬 야웨)를 기대했던 것의 성취이며. 1세기 말 소아시아 지역의 그리스도 교회가 종교적 이유에서 발생하는 두 부류 인간들 사이의 적대관계의 해결책으로 확신된 그리스도의 업적의 표현이다.

 

율법은 유대인에게는 대체 하나님을 모시는 사람의 생의 질서를 규제하는 대원칙이며 생활방식의 보호벽이었다. 이 율법의 틀을 벗어난다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그 율법의 보호벽으로 지어내는 대립과 적대를 해소하기 위하여 그의 몸을 바치고 피를 흘림으로 평화를 실현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화의 실현은 '새사람'(καινον ανθρωπον)의 실현으로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영구히 주장하는 평화의 방도이다.

 

예수님의 정신은 한마디로 사랑이라 말하지만 이 사랑은 용서 없이는 나눠질 수 없는 것이다.

용서는 평화를 이루는 밑거름이고 용서를 통해 이뤄진 평화는 '새로운 인간성의 표현으로서의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완성되었고 '새롭게 태동한 기독교 공동체'.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저 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덕목이다.

화해를 이룬 기독교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피흘리심이 화해의 수단이었다는 것을 안다. 인류는 값비싼 대속의 행위를 통해서만 평화의 적절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인식하여야 한다. 예수의 대속적 죽음이 값진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이뤄야 할 용서와 화해의 첫열매였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그런 대속적인 행위였다. ... 평화의 代價를 기꺼이 지불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뿐만 아니라 화해된 공동체 속에서도 확실하게 발견된다.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대속활동을 계속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가야 할 것이다.(골1:24)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에게 평화의 선물을 유산으로 남겨주었을 때, 그리고 팔복(八福) 중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서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마 5:9)을 내세웠을 때 우리는 이것이 안정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값비싼 행위를 계속하라는 초대"인 것이다.


"기도할 때 어떤 사람과 등진 것이 생각나거든 그를 용서하라. 그래야만 너의 아버지께서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실 것이다"(막11:25)

 

"예물을 드릴 때 원한을 푸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돌아와서 예물을 드려라"(마태5:23).


예수님은 누구든지 형제와 화해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비는 용서가 진실할 수 없음을 명확하게 밝히신다.
형제와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나라를 향해 가는 성도가 몸을 싣는 수레의 두 바퀴인 것이다. 이것을 인식할 때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한글 개혁판에서 사용된 '시험받다'(πειραζομενος/페이라타이)이라는 말은 '유혹'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여기서 시험은 temptation이다. test가 아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시험(test)하시지만 결코 우리를 유혹(temptation)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혹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하여 넘어뜨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결코 악으로 우리를 유혹하지 않는다.

 

야고보서 1장 13절에 의하면 "사람이 시험(유혹)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유혹)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유혹)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유혹)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유혹'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약 1:14-15절을 보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유혹)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와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일찌기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유랑할 때 그들에게 만나가 내려졌다. 그러나 그들은 하루치의 양식만을 거두도록 허락되었다. 초과하여 거둔 것은 썩어 먹을 수 없었다. 허용된 분량에서 초과하여 거두는 행위는 공동체 생활에서 타인의 것을 도둑질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행위는 '탐심'에서 비롯된 죄로 간주되는 것이다.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욕심은 결국 죄를 짓게 하고 죄로 인해 결국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다(약 1:15).

 

예수는 죄에 노출된 인간의 연약함과 그 죄에 오염된 인간성을 잘 알고 계셨다. 우리의 '연약한 육체'와 '유전된 부패성'은 유혹의 달콤함을 외면하지 못하고 그 유혹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


우리는 '사탄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는'(벧전 5:8) 세상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으며,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려는'(롬 8:35) 사탄의 온갖 계략이 우리를 인본주의적 가치관(쾌락주의, 물질주의, 물량주의, 세속주의, 혼합주의 등)에서 기인한 온갖 유혹으로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며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not into temptation)' 기도하라고 하신다. 환언하면 악에서 구원을 얻는 길은 욕심 곧 소유욕과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주님은 영생을 구하는 부자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다. 욕심있는 자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자기를 유혹하는 모든 것을 부인하고 비운 후에야 예수를 바로 볼 수 있으며, 이 예수께만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깨닫게 되고 비로소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40일 동안 광야에서 기도하던 예수께 사탄은 세 가지의 유혹을 감행을 했다. 이 유혹은 자기 욕심을 채우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계획을 젖혀두고 욕망이 이끄는대로 행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구약의 말씀으로 이를 단호히 물리치셨다. 유혹에서 예수를 건진 힘은 말씀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악에서의 구원이 불가능하듯이 '유혹' 또한 인간이 원해서 오는 것도 아니요, 인간의 힘으로 물리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유혹은 항상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있는 말씀에 근거한 자기 비하(卑下)의 기도(주님만이 구원이시다!)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지시고 또한 옮기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은 유혹을 따라 사는 사람이며 이 사람의 자리는 악이 넘실대는 땅이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탕자, 작은아들의 자리가 바로 그곳이다. 그곳에서 인간은 나약하다. 그의 주위를 감싸고도는 것은 찬란한 유혹이지만 정작 그가 취할 수 있는 것은 악(돼지)의 우리에서 얻는 쥐엄열매 뿐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결코 우리의 죽음이 아니다. 오히려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마26:41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경고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유전된 부패성과 이로 인한 연약함 즉 타락의 위험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것은, 압바 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든든히 선 기도가 그루터기만 남은 우리의 몸에 소망의 잎을 싹틔우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소망과 이 소망의 현재적이고도 연속적인 경험을 구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참고로 본문에 사용된 '다만'이란 단어는 원문과 상관없이 첨가된 것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박윤선 박사에 의하면 이 문구는 시내산 사본, 바티칸 사본, 베사 사본에는 없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학자들 중에는 이것을 사도들의 원본에는 없는 것으로 후대에 첨가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추정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기독교강요] 3권 20:17에서 라틴어의 사본에는 없지만 생략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적절한 말이라고 이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이 부분이 비록 최초 사본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이 고백을 후일 사도들의 교회에서 고백하게 된 것은 주님의 기도 안에서 사역하던 사도들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하여 자신들의 믿음을 첨가하여 고백하고 있음을 주지하게 한다.

이 부분은 주기도문 초두에 나오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라는 기도 구조를 이루며 주기도문 전체를 감싸는 송영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오직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이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근원이요 역사의 주인이라는 확신에 찬 송영인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신 것은 세속적인 복에 대한 기구(祈求)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는 인간을 위한 기도에서 머물지 않고 하나님을 위한 기도로 확장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한 기도의 삶이 전제될 때 우리에게 필요한 여타의 것은 은혜로 주어진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눅12:31)고 하신 것이다.


가장 위대한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뜻을 향해 열려있다. 그렇기에 다윗은 역대상 29:10-11에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가로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이심이니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위한 기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참고: 주기도문의 「대개」에 관하여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드릴때 난감한 부분이 바로 이곳이다. 어떤 교회는 "대개"를 넣기도 하고 어떤 교회는 빼기도 하기 때문이다.  넣어야 하는지, 아니면 빼야 되는지 기도할 때마다 주저하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역대 우리말 성경에서 보면 '대개'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는 경우와 '대개'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있었던 것을 볼수 있다.


'한글개역성경'에서는 '대개'라는 낱말이 없지만 일반적으로 '대개'라는 낱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마 찬송가 표지 안쪽에 실려있는 주기도문 때문인 듯 하다.  찬송가 위원회에서 무슨 연유로 '대개'라는 낱말을 삽입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개'라는 낱말이 헬라어 본문에서 접속사 '[oti'(호티)인것은 분명하다. 이 단어는 이유를 나타내는 문장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굳이 번역하자면 "왜냐하면"이라는 뜻이다.즉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옛 우리말 성경에서는 "대개"라고 번역을 한 것일까? 그것은 초기에 우리말로 성경을 번역할 때(1930년대) 중국어 성경이 참고본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초기 중국어 번역성경에서는 <大槪, 大蓋>를 사용하여 번역했는데, 이것을 우리말로 옮길 때 "대개"라고 번역한 것이다. 한편, 최근의 중국 성경은 <以, 또는 因爲>로 번역하여 바로 잡았다.


우리 한글 번역본에서 1936, 1933년 신약성경 번역본에 <대개>로 썼다가 그 뒤, 그 번역이 원문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대체로"라는 뜻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아예 생략하여 번역하지 아니하였는데,  우리말 '대개'를 사전에서 "대체의 뜻이나 사연", "대략, 대강" 등으로 그 뜻을 풀이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번역은 "호티"의 원 뜻과는 다른 오역이라 할 수 있겠다.

 

 

아 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 (시편 106:48)


아멘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많이 듣고 또한 말하는 기독교 언어로서 세계의 모든 교회에서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신앙언어이다. 또한 성경은 아멘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어느 곳을 펴 보아도 이 고백을 기록하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아멘」없는 신앙은 존재할 수도 없으며 우리는 모두「아멘」의 신앙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아멘」은 내 뜻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멘은 한마디로 신적언어(the Word of God)이다. 기독교인의 삶이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사랑의 모델인 예수를 좇는 삶이라 할 때, 예수의 삶 자체가 「아멘」의 삶이었음은 성경이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밧모섬의 요한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할 때 주님을 가리켜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계 3:14)라고 소개하고 있다.

 

왜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아멘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예수의 삶과 죽음 전체가 하나님의 약속과 뜻을 이루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구약의 말씀 전체가 오실 메시야 곧, 예수에 대한 예언이었다면, 오신 메시야인 예수는 예언 성취로서의 열매 곧 「아멘」인 것이다.

 

이 예수는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아멘이 되신다. 아멘의 삶이야말로 예수의 삶에 가장 근접한 삶이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생활 속의 기도로 이끌어주는 지팡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인격(total humanities)은 예수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오늘, 이 땅에서 「아멘」으로 드러나야 한다.

 

「아멘)(αμην)은 구약과 신약에서 고루 사용된 몇 안되는 단어 중의 하나이다.

 이 단어는 '굳건히', '믿을 수 있는', '확실히', '진실로'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단어가 감탄사로 사용될 때에는 '그렇게 되옵소서'라는 뜻도 가진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오늘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의 끝을 맺으며 「아멘」하는 것은 단순한 내적 바램이 아니라 바라고 믿는 모든 것들의 실상을 미래의 것이 아닌 현재적 차원으로 가져오는 신비의 언어이며, 말씀의 육화(肉化). 하나님 뜻의 현재적 실현, 하나님 존재의 충만(充滿)을 느끼게 하는 신앙의 신비에 대한 확신과 고백인 것이다.

 

「아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확신과 깊은 신뢰를 표현하는 신앙언어이지만 이 신앙언어는 자기 삶은 물론 형제와의 관계적 측면에서도 동시에 긍정의 삶으로 이어져야 신앙의 외연(外延)으로서의 구도적(求道的) 삶이 균형을 이루게 된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한다'고 할 때 이 말은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꺾어 굴복한다는 말이지 금욕과 고행, 자기학대, 세상에 대한 이원론적 생각을 따라 산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부정(否定)의 언어가 아니라 오히려 확장된 의미에서의 긍정(肯定)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를 부인(否認)한다는 것은 자기 존재를 비움이고, 낮춤이며 동시에 '남'을 '나'보다 낳게 여기는 사랑의 결단이고, '세상'으로 대변(對辯)되는 이웃에 대한 사랑 즉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의 철저한 이타적(利他的) 삶에의 촉구에 복종하는 제자도의 길이며, 확장된 사유(思惟)를 따라, 생태학적 의미에서의 피조된 세계가 정복되어질 대상이 아닌 다듬어지고 가꾸어져야 할 삶의 '터'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신앙 안에는 절망의 자리가 없다. 모든 부정적인 말과 생각이 긍정적 실천과 고백, 의지적 결단으로 바뀌는 자리가 바로 「아멘」의 시간이요, 「아멘」의 시간이 곧 하나님의 때(時)가 되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언제나 「아멘」이신 하나님, 압바(abba)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다함없는 사랑과 신뢰의 언어「아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때때로 우리 자신조차 자기를 속이고 절망케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아멘」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일으키신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개역한글 성경)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기독교 최근 개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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