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청년의 시리아 난민 급식 봉사 체험기
♣간단히 자기 소개를 간단히 해 주시죠.
☞ 저는 한국에서 1998년도에 태어나서
아빠의 직장을 따라 인도에 갔다가
인도에서 국제학교를 졸업하고
네덜란드의 대학에 유학을 가서 미술을 전공하고 있는
강엔지 입니다.
저는 인도에 있을 때도
그곳의 한인 선교사님이 개척하신 교회를 다니면서
선교사님을 도와서 현지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교회의 벽화를 그려드린 봉사를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네덜란드에서 유학을 하던 중
(그곳에서는 네덜란드 교회에 다녔습니다)
인도처럼 뭔가 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삶이 좀 공허하던 차에
시리아 난민들 급식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가 연결되어서,
기쁘게 자원봉사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난민 급식 봉사를 한 지역이 어디죠?
☞ 주州 이름은 Gelderland 인데,
난민 캠프는 제가 사는 동네에 남쪽에 있어요
제가 금요일 날 자전거를 타고 약 30분 달리면 거기에 있습니다
(저는 유학생이었고 차가 없습니다)
거기엔 텐트를 쳐서 난민을 수용하는 그런 곳이 아니라
재소자가 거의 없는 교도소를, 난민 캠프로 개조한 곳입니다
페인트도 새로 칠하고 교도소 같은 느낌이 안 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방방마다 화장실도 있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난민 캠프가 네덜란드 전역에 흩어져 있는데, 또 다른 지역에서는
약간 큰 집에서 수 십 명씩 혹은 수 백 명씩 수용되고 있습니다
거기서 평소 그들의 식사는, 재료는 정부가 제공해 주겠지만
요리는 본인들이 직접 해서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의 거처는 ‘Shelter(피난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보통은 네덜란드 주민들이 사는 곳과는 좀 떨어진 시 외곽에 위치해 있습니다
아무래도 서로 간의 문화적 이질감 때문이겠죠
♣ 봉사한 기간은?
☞ 2018년 1월부터 코로나19로 귀국하기 전까지인
2020년 3월까지 계속 봉사했는데, 그러니 2년 가량 했습니다
1주일에 하루를 봉사했는데
코로나 사태가 있고 나서부터는 한 달에 1번꼴로 횟수가 줄어들었습니다
♣ 거기 난민캠프에는 난민들이 몇 분 쯤 계신 곳인가요?
☞ 숫자는 늘 변동되었습니다 있다가 떠나고, 다시 들어오고 하는 거죠
보통은 약 70~80명이 있었습니다 다 시리아 인들이었습니다
♣ 난민봉사단체의 명칭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구성원은요?
☞ 우리는 ‘Spoon (숟가락)’으로 지었습니다
‘누구나 숟가락 하나만 있으면 언제든지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다’는
나눔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단체는 수년 전에 이란에서 네덜란드로 이민 온
이란인 2세, 3세들이 (난민의 사정을 아시는 분들이) 먼저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여기서 시민권을 받아서 수 십 년 전에 정착하신 분들이죠
쉽게 말하면, 지난 세대의 난민들이
이번 세대의 난민들을 돕는 자원봉사입니다
우리 스푼 멤버는 이란 분들 2~3명
그리고 한국인은 저 한 명,
그리고 제 대학교 친구들 네덜란드인 두 세 명을 제가 초대해서 동참시켰습니다
우리는 금요일 오후에 ‘영화보기, 미술감상’등 문화행사를 먼저 하고
금요일 저녁을 같이 식사합니다
♣ 급식 메뉴는 주로 어떤 것입니까?
☞ 하루는 이란식, 하루는 한국식, 하루는 모로코식
이렇게 인터내셔널 음식을 봉사합니다
한국식으로는 제가 먹기 편하게
주먹밥, 깁밥, 떡볶이 그리고 한국식 카레 이런 것들을
제 차례가 되면 준비했습니다
주먹밥에 얼굴 표정을 넣어보기도 했습니다
제가 미술을 전공하니까요
난민들은 매운 것을 좋아하고 잘 먹더라고요
♣ 난민들은 가족 단위로 왔나요, 싱글로 왔나요?
☞ 골고루 있습니다 싱글로 온 친구들은 저녁마다 통화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곤 하더라고요
싱글로 오는 경우 주로 남편이 (남자니까) 먼저 나오고,
아내와 자녀들은 시리아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에게는 가족과 이별한 슬픔과 고통이 있는 거죠
또한 먼저는 싱글로 와서, 가족을 부르는 형식으로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의 탈북자들의 북한 탈출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서로 대화는 무슨 언어로 하는지요?
☞ 서로 영어로 합니다
이들은 여기 와서 서툰 영어로 말하는데,
네덜란드어도 열심히 배우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거기서 난민들은 숙식을 제공받는 이외에
네덜란드어를 가르쳐 줍니다 그 사회에 빨리 적응시키기 위해서죠
♣그들의 탈출 경로는 어떻게 되는지요?
☞ 그들이 시리아에서 두 경로로 통해서 탈출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시리아에서 <육로>로는 터키로 가서, 유럽이나 네덜란드까지 걸어오기도 하고
지나가는 차를 얻어타기도 한답니다
<바다>를 통해서는 시리아 가까운 지중해 항구로 가서 배로 이집트로 가서,
이집트에서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가서 유럽이나 네덜란드로 온다고 합니다
이렇게 올 때 보통 3개월이 걸리기도 한답니다
오는 길에 브로커에게 돈을 줘서 몰래 탈출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리아에서 전 재산을 팔아서 와도,
오는 길에 돈을 다 쓰고 빈털터리가 되어서 네덜란드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돈이 없으면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네덜란드 정부에서 숙식 제공 말고도 한 달에 1인당 약 3백 유로를
개인 잡비로 지급한다고 합니다
난민들은 이 용돈을 가지고, 캠프에만 있으면 지루하니까
가끔 쇼핑몰도 방문합니다
♣특별히 느낀 점이 있다면?
☞ 제가 처음에는 매우 놀랐어요
뉴스에서만 보던 시리아 난민들을
실제로 보고, 난나고, 그들과 친구가 되니까
그들이 난민이든, 이방인이든
나와 똑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모두와 친구가 되고 싶다 그것 점을 많이 느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난민입니다
저도 여기에 이방인으로 온 셈이니까요
그리고 저들도 무조건 일방적인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시리아 음식을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그들도 캠프에서 자기들 고유 음식을 만들어
우리를 대접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무래도 수용되어 있으니까) 닫혀져 있었던 그들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는 것을 보고서 그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기생충’ 영화도 보여줬다던데...
☞ 그들이 멀리 떨어진 나라 한국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을 보았습니다
특히 2019년 11월에는 한국의 ‘기생충 Parasite’ 이란 영화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는데
여기 네덜란드에서도 그 영화가 아주 유행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빔 프로젝트를 가져가서
난민 캠프에서 ‘기생충 Parasite’ 이란 영화를 보여드리고 (영어자막)
영화가 끝난 후에 여러 가지 주제로 같이 토론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완전히 이질적인 두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소통과 서로 대화하는데, 그 영화가 좋은 소재가 되었습니다
♣시리아 난민들이 그곳에서 기독교 교회를 다닐 수도 있나요?
☞ 난민들이 제가 다니는 교회에 친구로서 찾아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앙을 목적으로 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외국인 친구(나)를 만나러 오는 것인지,
아니면 일요일에 딱하게 할 일이 없어서 시간 보내기로 오는 것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이 제가 다니던 네덜란드 교회에 자발적으로 찾아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네덜란드 정부 차원에서
난민들이 교회를 다니면
영주권을 빨리 내주는 그런 정책이 있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에서 정착을 잘 하고 있다고 좋은 점수를 주는 모양입니다
그런 이유로도 난민들이 시리아에서는 회교도였지만
네덜란드에서 기독 교회로 찾아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난민들과 함께 미술전시회 등도 관람한 적이 있었다면서요?
네 저희 봉사자들 중에 미술전공자들이기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런 쪽으로 안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민들 중에 시리아에서 겪었던 끔찍한 전쟁과
사람들이 다치거나 살해되는 일을 직접 목격한 관계로
그 악몽같은 과거로 인해, 현재 정신적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물론 내색은 잘 안 하지만요
그런 분들에게 미술관람이나, 따뜻한 위로의 말 한 마디,
이런 것들이 어쩌면 한 끼 식사 대접보다 훨씬 더 중요한
어떤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쉬운 점이 혹시 있었다면?
☞ ‘시리아 문화의 날’ 이런 것을 만들어서 축제를 더 했으면...
한국에 들어온 후 요즘은 그들과 가끔 영상통화로 만납니다
♣거기에 따르는 비용 충당은?
☞ 저와 제 친구들은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가끔 저희 작품들을 전람회로 보여드리기도 합니다
그때 방문해서 관람하시는 시민들에게
싼 가격으로 가벼운 음료를 제공하고, 거기에 따른 후원금을 모았습니다
자연히 기부금을 받은 셈이 되었습니다
난민들에게 제공하는 음식 식재료 값은 그 기부금으로 충당하고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또 한국의 가족들이 다 기독교인들이니까 얼마 정도 자발적으로 참여해 주셨습니다
♣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시리아 내전으로 너무 혼란스러웠는데
그들이 네덜란드에 와서 평화를 찾아서
정서적으로 안정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강엔지 자매님, 자랑스런 한국인으로서
머나먼 이국 땅 네덜란드에서 정말 유학생으로 사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매 주말, 또는 두 주간에 한 번씩
자전거를 타고 가서, 또 직접 음식을 만들어서
시리아 난민캠프를 찾아가서, 그들과 교제하고, 그들을 대접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무언의 전도를 해 주신 것을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셨다고 믿습니다
이웃에게 냉수 한 그릇 주는 것도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하셨는데
하늘의 상급과 위로가 자매님께 풍성히 임하신 줄 믿습니다
귀한 간증을 나눠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 간증이 한국 청년들에게 많은 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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