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감동설교 74편

내 삶을 바꾼 칭찬 한마디」 잠언 27:2

by 【고동엽】 2024. 12. 29.

내 삶을 바꾼 칭찬 한마디」                      잠언 27:2                   

                                                                                  <김홍신 외 31인 지음>

 

네가 너를 칭찬하지 말고, 남이 너를 칭찬하게 하여라.

칭찬은 남이 하여 주는 것이지, 자기의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잠27:2

 

 

“좋은 열매는, 천천히 피는 꽃에서 맺히는 거란다” - 소설가 이순원

 

사람들은 지금 내가 소설을 쓰고 있으니까

어린 시절부터 내 안에 문학적 소양 같은 것이 반짝반짝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백일장 같은 곳에 나가 상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그런 상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아주 평범한 소년이었다.

한 학년이 5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시골 초등학교의 작은 교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어쩌다 큰 대회에 나가서도 번번이 떨어지기만 하는 나를

믿어주던 한 선생님이 계셨다.

 

지금은 강릉 어느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을 앞두고 계시는 분이다.

35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친구들은,

언제나 그 선생님 얘기를 할 만큼 다른 친구들에게도 인상이 각별했던 분이다.

 

우리가 그분을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 마을에, 그때 나이로 25 살쯤 된 새신랑 선생님이 전근을 오셨다.

 

지금도 우리 시골 동창들은 그 선생님을 '희망등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에 들어오셔서

저녁마다 등잔이나 남포를 켜놓고 우리의 처진 학습을 지도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중학교를 시험 봐서 들어가던 시절이라

선생님께서는 우리의 밤 공부를 위해 일부러 시골에 들어오신 것이었다.

그때 선생님이 우리에게 준 것은 공부에 대한 자신감만이 아니라

앞으로 어디 나가서도 기죽지 않고 자신의 뜻을 펼칠 자신감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때의 일이다.

교내 백일장에서는 물론이고, 군 대회에 나가서도 나는 아무 상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어린 마음으로 나는 참으로 큰 낙담을 했었다.

 

그런 나를 학교 운동장 가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 앉혀놓고

선생님께선 이런 말씀을 하셨다.

 

"같은 매화나무에도 먼저 피는 꽃이 있고, 나중에 피는 꽃이 있지?

그러면 그 나무에서 핀 꽃 중 어떤 꽃에서 열매가 맺을까?"

 

나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매화나무는 나무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나무란다.

그런 매화나무 중에서도, 다른 가지보다 더 일찍 피는 꽃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그렇지만 이제까지 살면서 선생님이 보기에

그 나무 중에서 제일 먼저 핀 꽃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

 

제대로 된 열매를 맺는 꽃들은 늘 더 많은 준비를 하고 뒤에 피는 거란다.

이번 군 대회에 나가서 아무 상도 받지 못하고 오니까 속이 상하지?

나는 네가 그렇게 어른들 눈에 보기 좋게 일찍 피는 꽃이 아니라

이 다음에 큰 열매를 맺기 위해 천천히 피는 꽃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지금보다 어른이 되었을 때 더 재주를 크게 보일 거야."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는 몰랐지만

선생님의 말씀대로 닥치는 대로 집과 학교에 있는 책을 읽었다.

나는 지금도 어린 시절의 독서가

내 작가생활의 가장 큰 자양분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저마다 방법은 달랐지만

우리 친구들 모두 '희망등 선생님'에 대한 그런 사연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선생님은 우리들 하나하나에게 그런 칭찬으로 용기를 주셨다.

 

나는 21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작가수업을 했는데,

신춘문예만 해도 열 번 넘게 떨어지면서 회의와 불안감이 들 때도 많았다.

그때 다시 힘을 내라는 좋은 얘기들과 격려도 많았지만

이런저런 회의로 불안해져 있는 나를

다시 책상에 불러 앉혀 더 치열한 습작생활을 하게 했던 것은

 

‘너는 제대로 열매를 맺을 큰 꽃이 될 거라’는 어린 시절 은사님으로부터 들은 칭찬 한마디였다.

내가 이제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그 칭찬이 또 한 번의 희망과 오기를 가지게 했다.

 

멀리 떨어져 살아 자주 찾아뵙지는 못해도

우리들 마음 안에 그 선생님은 지금도 환하게 '희망등'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지난 번 뵈었을 때 선생님은

‘훌륭한 제자들을 두고 있는 너희들의 삶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우냐?’고 하셨지만

정말 ‘훌륭한 선생님을 마음속에 두고 있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성이는 정신력이 훌륭하다. 그런 정신력이면, 앞으로 뛰어난 축구선수가 될 수 있다.”

                                                    -히딩크 감독이, 박지성 선수에게 해준 말

 

지난 월드컵 경기가 있고 나서 사람들은 나와 히딩크 감독님을

부자지간처럼 끈끈한 정이 넘치는 사이쯤으로 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본선 조별 예선전 마지막 경기였던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골을 넣은 내가 멋진 세레모니 대신, 감독님 품에 달려가 안긴 행동이

그런 생각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님은 팀 플레이가 우선인 축구에서

선수 한 명에게 정을 쏟아 팀 분위기를 망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감독님은 다정다감한 쪽보다는, 엄격하고 정확하며

때로는 칼날보다 더 예리할 만큼 냉철하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에게도 편애를 느낄 법한 행동을 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결국 광고에서처럼 미역국을 끓여 소속 선수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감독님의 모습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다만 감독님의 마음은 미역국 한 그릇보다 더 깊고 따뜻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내가 깡다구를 키울 수밖에 없었던 환경>

나는 어려서부터 축구를 했는데,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당장 프로에 입단할 생각만 했다.

그런데 대기업 프로축구단 테스트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프로 입단을 희망하는 수십, 수백 명의 학생들 중에서

계산 빠른 프로 축구단의 감독이나 스태프의 눈에 들려면

뭔가 남들과는 달라도 분명히 달라야 했다.

 

키가 크거나 체격 조건이 좋거나 그것도 아니면 공격이건 수비건 

특별히 잘하는 장기라도 있어야 하는데,

난 그런 조건 중에 하나도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외모도 평범하고 성격도 내성적이라 좌중을 휘어잡는 스타성마저 없었으니

그들이 탐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대학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다 퇴짜를 맡다가

명지대학교 김희태 감독님 눈에 들어 어렵사리 대학에 진학했다.

 

그때까지 내 인생은 늘 그랬다.

남들 눈에 띄지 않으니.. '깡다구' 하나로 버티는 것이었고,

남이 보든 안 보든 열심히 하는 것을 미덕인 줄 알고 살았다.

 

덕분에 허정무 감독님이 사령탑으로 계시던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했고,

얼마 안 있어 일본 교토팀 선수로 스카우트되었다.

그리고 지난해 월드컵 평가전에 우리나라 대표팀에 합류했다.

나는 경험 쌓는 거고 본선 때 한 경기 뛰면 좋겠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평가전에 임했다.

 

그런데 히딩크 감독님은 평가전에서 나에게 예상 외로 많은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평가전이 있을 때마다 꾸준히 나를 시합에 내보낼 뿐, 다른 언질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미국 골드컵 때라고 기억된다.

나는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어 시합에 나가지 못해 텅 빈 탈의실에 혼자 남아 있었다.

잘할 수 있는 기회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여야 할 그 중요한 때에

하필이면 부상을 당했나 싶어 애꿎은 다리만 바라보며 맥이 빠져 앉아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히딩크 감독님이 통역관을 대동하여 나타나서

영어로 뭐라고 말씀하셨다. 무슨 말인지 몰라 통역관을 바라보니,

"박지성 씨는 정신력이 훌륭하대요.

그런 정신력이면 반드시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라고 말했다.

 

얼떨떨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늘 멀리 있는 분 같기만 했는데,

그런 감독님이 내 곁에 다가와 내 정신력이 훌륭하다는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솟았다.

 

더욱이 그 말은 내 심중을 꿰뚫고 있었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나일지라도, 오래 전부터 내가 믿어왔던 것은

죽는 한이 있어도 버티겠다는 정신력이었다.

 

평발이라는 신체조건도 정신력 하나로 버텼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눈에 띄지 않는 정신력 따위를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다.

당장 눈에 보이는 현란한 개인기와 테크닉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히딩크 감독님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여드름투성이 어린 선수의 마음을 읽고 있기라도 한 듯

'정신력이 훌륭하다.'는 칭찬을 해주셨던 것이다.

그 칭찬을 듣는 순간 머리가 쭈뼛 설 만큼 내 자신이 대단해 보였다.

 

월드컵 내내 감독님이 던진 칭찬 한마디를 생각하며 경기에 임했다.

침착하고 조용한 성격이라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달갑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히딩크 감독님이라면 어디선가 또 나를 지켜보며

조용한 눈빛으로 격려하고 있을 거란 생각에 자신감이 생겨났다.

 

만약 내가 히딩크 감독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라는 것이 유명세를 얻었다거나, 돈을 많이 벌게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전보다 더 내 자신을 사랑하는 '나'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감독님이 던진 채 1분도 안 되는 그 말 한마디는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나머지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영미의 칭찬일기 - 인천 검단중학교 교사 김상복

 

나는 중학교 도덕교사다.

<칭찬일기>는 내가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내주는 숙제다.

매일 부모님께 한 가지씩 칭찬을 해드리고

그 상황과 부모님의 반응을 적어오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이렇게 아이가 먼저 부모님을 칭찬해 드리면,

결국은 부모님이 자기 아이를 칭찬하게 될 것이라는.. 깔린 속셈이었다.

 

몇 년 전 아이들에게 설문조사를 해보니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부모님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물어보니,

아이들은 하나같이 '참 잘했다.'는 칭찬이나 '너를 믿는다.'는 신뢰의 표현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한동안 아내와 내가 참여했던 부부관계 회복 프로그램에서

하루에 한 번씩 부부가 서로를 칭찬하라는 숙제를 하면서

전보다 훨씬 더 서로를 잘 이해하고

서로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가족이 가까워지고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하면

제아무리 밖에서 힘든 일을 겪어도 살아갈 힘이 생긴다.

난 그때 일을 떠올려 아이들에게도 칭찬을 숙제로 내주기로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적어낸 칭찬일기를 보면서

‘내가 무엇을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예상보다 많은 부모님들이 아이들 칭찬에 인색했고,

당신들이 칭찬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오히려 아이들 마음에 상처가 될 만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찬의 힘은 서서히 나타났다.

영미(가명)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과 동생이 둘 있는 평범한 가정이었는데,

영미는 칭찬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처음에는 부모님의 반응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매일 도시락을 싸주시니 고마워요. 건강하세요!’라는 딸아이의 칭찬에

엄마는 "니 엄마가 겨우 도시락 싸주는 사람으로 보이니?"라고 하는 등

매일 이어지는 영미의 칭찬은

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라."라는 식이거나

"공부나 해."라는 대답으로 되돌아왔다.

아니면 부모님은 용돈이 필요해 아양 떠는 정도로만 인식했다.

 

그런 부모님이 너무 밉다고 털어놓는 영미의 칭찬일기는, 두 달째까지도 계속됐다.

그런데 영미의 칭찬일기를 계속 넘기면서.. 부모님이 변하는 것이 보였다.

부모님은 영미의 칭찬에 웃음을 보이기도 했고,

가끔은 아이의 칭찬하는 모습을 칭찬하기도 했다.

 

"칭찬일기를 쓰면서부터 엄마한테 혼나도 대들지 않게 됐어요.

부모님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도 알게 됐고, 내가 부족한 부분도 보이거든요.

내년에 제 후배들도 칭찬일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두 달 동안의 칭찬일기 숙제가 끝나고 나서 영미가 한 말이다.

 

올해 검단중학교로 전근을 와서 이제는 영미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 학교에서도 칭찬일기 수행평가를 실시하면서

처음에는 부모님에게 실망하고 마음 아파하다가도

결국에는 가족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활짝 피어나는 아이들을 많이 본다.

 

집안에 힘든 일이 있는데도 아이들에게 웃음을 보이려는 엄마에게

한 학생이 말했다.

"엄마, 힘들 땐 울어도 괜찮아요. 엄마는 지금 충분히 우리를 위해 노력하고 계시잖아요."

엄마는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도 웃으셨다.

 

이보다 더 나은 칭찬이 어디 있을까?

이보다 더 큰 위로를 어디에서 받을 수 있을까?

집안의 그 힘든 일을 혼자서 지고 가야 하는 줄 알았는데,

철부지요 어린애 같던 딸이 어느새 친구가 되어

엄마를 이해해주고 무거운 짐을 나눠지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이 가정의 행복을 허물지 못할 것이다.

 

......................................... 

 

▶엄마의 칭찬이 아이의 인생을 바꾸다    - 잭 웰치

 

말을 심하게 더듬는 소년이 있었다. 또래 친구들이 이야기꽃을 피울 때면

소년은 늘 한구석에 외로이 앉아 있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말더듬이’라고 놀림 당할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소년은 점점 소극적으로 변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좀처럼 밖에 나가려고 하지 않는 아들을

안타까이 여기던 엄마가 말했다.

 

“엄마하고 책 읽을까?”

 

“… 시… 시… 싫어요. 나, 채…책…이… 이…읽…느…는…거 싫어.”

 

엄마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네가 왜 너의 장점을 부끄러워하는지 모르겠구나.”

 

소년은 어리둥절했다. 말도 더듬고, 친구들에게도 놀림 받는 자신에게

무슨 장점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소년의 엄마가 말했다.

 

“네가 왜 말을 할 때 더듬는 줄 아니?

그건 너의 말보다 생각의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야.

그만큼 너는 남보다 앞선 생각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그러니 앞으로는 절대로 말 더듬는 것 때문에 기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년은 엄마의 칭찬을 곰곰이 생각하며 자신감을 회복했다.

여전히 어눌하고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동화책도 최선을 다해 읽었고,

친구들을 만나도 더 이상 피하거나 숨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소년의 말 더듬는 습관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소년은

이제 전 세계를 돌며 비전을 제시하는 뛰어난 경영자이자 강연자가 되었다.

그가 바로 세계적인 기업 GE의 CEO를 지낸 잭 웰치다.

어릴 적 자신의 경험을 가슴속에 아로새기며 그는 말한다.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단연 최고의 일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동행’ 중에서)   -이 단락 출처-

 

 

▶사장의.. 직원 칭찬이.. 그의 가정을 재결합 시켰다.

 

최근에 나와 함께 일하게 된 존 캠벨에게

어느 날, 그의 아내로 보이는 사람이, 직장으로 남편을 찾아왔다.

 

남편 존이 고객과 상담하는 동안

그의 아내는 거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사장)는 그녀에게, 간단히 내 소개를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남편께서 이 회사를 위해 일하게 되어, 제가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남편은 사려 깊고 이해심이 많아서.. 우리 회사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자 캠벨 부인의 얼굴엔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남편 존 캠벨은, 아내가 돌아간 뒤 이렇게 말했다.

 

"아내와 6달 전에 헤어졌습니다.

요즘에는 아들 윌에게 갑작스럽게 일이 생겨, 돈이 필요할 때만 만납니다."

 

 

몇 주일이 지난 어느 날, 존 캠벨을 찾는 전화가 왔다.

나는 우연히 지나가다가 존의 대화를 들었다.

 

"그래, 여보, 퇴근하고 나서 그 집에서 만나요."

 

존은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힘든 전투에서 승리한 사람처럼.. 내 손을 잡고 고맙다는 뜻으로 흔들어댔다.

 

"사장님, 아내와 재결합하기로 했습니다.

지난번 아내가 사무실에 왔다가

사장님의 말씀을 들은 후부터.. 저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된 모양입니다."

 

나는 단지 캠벨 부인에게

내가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남편에 대해

몇 마다 칭찬해 준 것밖에 없었다.

 

내가 곧잘 인용하는 '항상 친절하라. 누구나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 는 말을

다시 한 번 입증한 셈이다.   -이 단락 출처-

 

 

▶비난받기보다 칭찬받기를 선택했던 링컨 대통령.

 

언젠가 미국 국회 도서관에서, 오래 동안 공개하지 않아왔던

어떤 상자를 공개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은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했던 1865년 5월 14일 밤에,

그가 죽은 직후에 대통령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유품을 보관하던 상자였다.

 

그것이 오래 동안 공개되지 않다가

다니엘 부스틴 박사의 책임 하에 TV 카메라 앞에서 한 점씩 공개되었다.

 

링컨 대통령이 서거하시던 날, 그가 몸에 지닌 물건들은,

- A. Lincoln 이라 수를 놓은 손수건 한 장,

- 펜을 깎을 때 쓰는 소형 문구용 칼 한 개, (당시는 깃털 펜으로 글을 썼다) 

- 실로 묶어서 고쳐놓은 안경집,

- 5달러 지폐 한 장이 든 지갑이 나왔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공개된 유품이 가장 주목을 끌었다.

- 그것은 어떤 신문 기사를 스크랩한 조각이었다.

 

그 신문 기사는 존 브라이튼의 연설문이었는데, 내용인즉,

‘링컨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다!’ 라고 연설한 내용이었다.

 

   오늘날 미국 국민들에게 설문조사로 물어보면,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존경받는 분은 단연코 아브라함 링컨이다.

   (그 다음은 최근 작고한 레이건 대통령이다.)

 

   지금은 링컨 대통령을, 미국 민주주의의 표상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떠받들지만,

   링컨 대통령이 재직할 당시에는 얼마나 논란이 많고 시끄러웠는지 모른다.

   수 백, 수 천만 국민들이 링컨 대통령을 욕했던 것이었다.

 

   미국 역사상, 재임 중, 그토록 논란과 시비의 표적이 되었던 대통령은 없었다고 한다.

   남북전쟁이 일어났던 상황이니 오죽했으랴!

   국민의 절반 이상은 그 전쟁에 반대했고, 그래서 링컨 대통령을 원수로 여겼다.

 

   그 외에도 링컨이 심하게 비난받았던 이유 중에

   그의 못생긴 외모도 한 몫 했었다.

   그래서 그의 외모만 보고도 사람들은, ‘원숭이, 바보, 괴물, 허풍쟁이, 사기꾼’

   이런 별명을 붙이면서 대통령을 욕했다.

 

   남부 사람들은, 자기를 뽑아준 유권자들을 배신했다고 그를 욕했고,

   북부 사람들은, 남북 분리주의적 행동을 엄단하겠다고 선언한 링컨을 싫어했다.

 

   그런 걱정 말고도, 자기를 비난하는 글과 인신 공격적 연설들로 인해

   그는 재직 시에 큰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이례적으로 링컨을 칭찬해 준 존 브라이튼의 연설문 한 장(신문 스크랩)은

링컨에게 얼마나 큰 힘과 격려가 되었을까!

 

그래서 링컨은 그 신문기사를 오려서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수많은 비난을 들을 때마다 그것을 꺼내 읽으면서

그 고통을 극복하려고 혼자 몸부림 쳤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링컨 대통령 처럼, 비난도 듣고, 칭찬도 듣는다.

그런데 링컨 대통령은, 자기를 칭찬해 주는 말에 더 귀를 기울일 줄 알았다.

'그 신문 기사를 오려서, 자기 주머니에 넣고 다닐 정도로!'                                      

출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