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버림과 경외함이 없는 것이 고통인 줄 알라 렘2:1~19
◑도입 : 예레미야서는 연대순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렘1장에서는, 하나님의 심판, 임박한 멸망을 앞두고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 예레미야에 대해서,
그리고 그 예레미야의 부르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어지는 2~51장까지 내용은, 전부 다 부름을 받은 예레미야가 선포한 메세지들이죠. *52장은 마무리
그런데 예레미야가 선포한 메시지들을 살피기 전에,
한 가지 주지해야(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선포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즉 역사적 흐름 속에서, 역사적 흐름 (연대기) 순으로 선포, 기록된 것이 아니고,
신학적 의미 순으로 기록돼 있다는 거예요.
만약 역사적, 연대기적으로 기록되었다면,
요시야왕 때 하나님께 주셨던 말씀, 여호야김 때, 시드기야 때 주셨던 말씀,
이렇게 시대 순으로 기록되었을 터인데,
예레미야서를 보면, 받은 예언의 말씀과 그로 인해 일어난 사건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서
메시지를 배치해 놨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등장과 함께 예레미야가 처음 선포하는 본문 렘2장의 메시지는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일 것이고, *1장은 서론
하나님이 가장 먼저 말씀하시고 싶은, 그러한 내용이 담겨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제 예레미야의 입이 열리면서 선포되는 이 메시지는
'고통'과 관련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우리에게 하시고 싶어하는 말씀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렘2장의 메세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교훈 몇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첫 번째로, 본문 렘2장에는, <하나님께서 고통 받으시는 이유>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파하신다. 하나님이 고통을 당하신다'
아니 십자가 예수님 죽으신 거 말고, '하나님이 고통을 당하신다' 이러한 개념이 우리에게 부족해요.
'그게 말이 돼? 하나님이 아파하신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 어떻게 증명할 건데?' 이렇게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는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 시대에 아파 하셨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까?
예레미야의 눈물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눈이 진물러질 정도로 울었던, 눈물의 선지자 였습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 속에서, 통곡을 했던 선지자가 바로 예레미야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자신이 지금 얼마나 슬프며, 아프며, 고통스러운지를
예레미야의 흘리는 눈물을 통해서...
짓눌러져 버리고, 시력도 잃어버릴 정도로 울었던 그 예레미야의 눈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이 아파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신 거예요.
▲하나님은 사사 시대에도 이렇게 자신을 표현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은혜로 이집트에서 불러내시고, 가나안 땅에 들여 보내셨어요.
젖과 꿀을 얻고 누리게 하셨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됩니까?
사사 시대는요,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라고 선포 되었음에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던 그 때에
하나님이 자신이 지금 아파 하신다 라는 것을,
한나의 눈물을 통해서 드러내셨어요.
한 여인이 아들이 없어서 울고 있었습니다.
엘리는 그녀가 술 취한 줄 알았어요.
근데 그 여인이 왜 울었어요? 아들이 없어서 울고 있었어요.
남편이 그렇게 잘해 줬는데도, '다른 거 다 필요 없다. 나는 아들이 없다'
그것 때문에 울고 있었어요.
그 한나의 눈물을 통해서 하나님은,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없는 이 상황을 바라보면서,
그 누구도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그 상황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아파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에, 성전이 무너지기 전에 (예레미야서와 대비)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육신을 입혀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본문의 이 예레미야가 울었던 것처럼
예루살렘을 향해서 예수께서 우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보면서 제자들이 '와 이 성전을 보십시오'
그런데 주님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성전을 보고 애통해 하셨어요.
하나님은 로마 시대에도, 예수님의 눈물을 통해서 하나님이 아파하고 계신다 라는 것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1. 그러면 하나님이 지금 왜 이렇게 아파하시나요?
왜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 계시나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눈물의 이유를
'아~ 예수 믿지 않고 죽어갈 그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저렇게 아파하시는구나'
혹은 '악독함으로 예수께 못을 받았던 그 사람들처럼,
지금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는 저 죄인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렇게 아파하시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게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금 통곡을 하시면서, 눈이 상할 정도로 아파 하시며 우시는 이유는
렘2:1~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하나님은 누구 때문에 지금 아파 하신다는 거예요?
예루살렘 때문에! 즉 하나님의 백성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 때문에,
하나님은 아파 하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교회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금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라고 말씀하고 계세요.
'저기 죽어가는 불신 영혼들, 아휴 불쌍해!
저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는 저 인간들.. 하나님을 아프시게 하고 있지!' 그게 아니라,
하나님은 지금 예루살렘 때문에 아파하고 계시고,
교회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거예요?
왜 교회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거예요?
2:5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뭘 잘못했길래 너희가 나를 버리느냐?
내가 너희에게 뭘 어떻게 했길래 나를 잊어 버렸느나?'
2:6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너희는 지금 하나님이 어디 있는지도 찾지 않고,
하나님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도 관심 없고,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있지 않느냐? 너희는 지금 나를 잊어버렸다!' 라고 말씀하세요.
2:8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들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율법을 다루는 레위인들,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가르쳐야 되는
그러한 자들도 나를 알지 못하고...
내 백성들을 하나님의 방식대로 관리하라고 세운 관리들도, 하나님께 반역하고,
선지자들도 보냈거든, 선지자들이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르고 있다.'
'내가 세워놓은 지도자들, (백성들 타락의) 안전 장치인 제사장, 선지자,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레위인)이 모두 나를 버리고 나를 잊어버렸다.
백성들도 다 나를 잊어버렸다...'
왜 그랬던 것일까요?
2:7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
하나님이 주신 풍요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 속에서,
그것에 파묻혀가지고, 더 많이 얻고, 더 누리는 것에 눈이 멀어가지고,
'어떻게 하면 더 잘 살까? 어떻게 하면 더 기름진 것들을 얻을까?' 를 도모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그 풍성함 속에서, 하나님은 버린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풍성함 때문에 하나님을 다 잊어버린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없어요.
'지금 여호와는 어디 계시지?'
'와~ 내가 그 구덩이에 있었을 때 나를 끌어 내신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시지?'
'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어떤 상태이지?' 이걸 전혀 생각하지 않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하나님의 백성들, 그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벨론에 멸망하기 전 이스라엘의 상태입니다. 20~40년 전 상황.
BC 586년에 멸망했지만, 그러나 그 20년 전인 BC 605년부터 벌써 붕괴가 시작됐죠.
이때 본문의 예레미야가 본문 2장에서 탄식하며 예언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남유다 패망 40년 전부터(요시아 치세부터) 예언을 시작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면서,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풍요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 속에서,
하나님을 버린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고 그 분이 아파하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못 하시기 때문인 거예요.
아니, 우리가 하나님을 잊었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잊어버리면 되잖아요.
근데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잊지 못하고 계시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예레미야의 예언의 입을 열자마자
그를 통해 가장 먼저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2:2~3절입니다.
2: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3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지금 하나님은, 2장 전체에서, '신랑과 신부의 입장'에서 얘기하고 있어요.
끊을 수 없는 사랑의 관계 속에 있는, 신랑와 신부의 관계 속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너희와 첫 사랑 때, 신혼 때를 기억하신다는 거예요.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2
그 때 청년의 때, 네가 젊었을 때 나를 얼마나 사랑했고,
그 때 네가 어땠냐?
'씨도 뿌리지 못하는 땅, 아무도 살 수 없는 광야, 거기서 내가 너희를 인도해도,
네가 나를 따라 나왔다.' :3
오늘날로 말하자면, '아무것도 없고, 주변이 전부 다 반대하는 데도,
숟가락 하나씩 들고 있는... 그거 밖에 없는데도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니까 그냥 단칸방에 그냥 숟가락 하나만 있어도 돼'
하는 심정으로... 그때는 따라나왔다는 거죠. (그때 티격태격도 했겠지만...)
'내가 지금 그거를 기억하고 있다. 그때 너희가 어땠냐? 나를 사랑하는 너희가 어땠냐?'
(그때는 첫 사랑의 순수함이 있지 않았느냐? 나는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너희가 어떠하냐?'
하나님은 지금, 하나님을 잊어버린 그들을 여전히 잊지 못하시는 거예요.
첫사랑 때, 그들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기억하면서, 그들을 잊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레미야를 예루살렘에 보내는 거예요.
예레미야를 보내시는데, 하필 그 연약하고 미약한 자(예레미야)를 보내가지고,
저기 저 아나돗 땅(몰락한 제사장 동네)에 있는 그 젊은 청년 한 사람을 보내가지고,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대언의 말씀을 듣게 하시는 거예요.
'너희가 나를 얼마나 사랑 했었는데... 나는 여전히 그거 기억하고 있다.
내가 너에게 뭘 잘못 했기에 너희는 나를 버렸느냐?' 라고 말씀하고 계시죠. :2~3
그래서 하나님이 지금 아파하고 계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못 잊고 계시는 거예요.
(과거에 광야에서 첫 사랑 때) 우리가 쏟아 보았던 그 사랑을, 못 잊고 계시는 거예요.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영웅담처럼 얘기하는 거 있죠?
'내가 옛날에는 뭐 교회에 가가지고 막 종도 치고...
내가 옛날에는 새벽에 한 번도 안 빠지고...
내가 옛날에는 일천 번제를 몇 번씩 했고...
내가 옛날에는 금식 기도도 몇 번씩 하고...
내가 옛날에는... 옛날에는...
근데 그것이 더욱더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거 아십니까?
근데 지금은요?
하나님은 뭘 잘못 하셨기에,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입니까?
옛날에는 이웃 교회에서 부흥회 한다고 그러면,
거리가 멀어도 막 달려가서 하나님 말씀을 듣겠다고 열심을 냈고...
과거에는 말씀을 듣고 또 듣고... 막 카세트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고...
성경책이 헤어지도록 성경책을 펴고, 막 들고 다니고...
무슨 일만 있으면 기도하고, 출근하기 전에 기도하고, 퇴근하기 나자마자 기도하고,
집에서 가정 예배 드리고,
교회에서 무슨 일이 있다 하면 그게 무슨 일이든지 앞장 서서 일하던...
하나님 앞에 그렇게 쏟아 보았던 그 사랑을,
하나님이 지금 그걸 추억하시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더 아픈 거예요.
'아니, 너희들이 나한테 그때는 그렇게 했었는데,
내가 너희들에게 뭘 어떻게 잘못했기에,
지금은 이렇게 너희는 나를 있었느냐?' 하고 하나님은 지금 아파하고 계세요.
△여러분, 고통은 사람을 멈춰 서게 해요.
그래서 딱 멈춰 서는 순간, 우리는 무엇인가 돌아보게 되거든요.
근데 우리는 지금 내 고통을 돌아보기 전에,
주변의 아파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돌아보기 전에,
하나님이 지금 아파하고 계신다 라는 것을 기억해야 돼요.
'하나님, 왜 아파 하십니까?'
우리가 풍요속에서 하나님을 잊었고,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아파하고 계시고, 2:6~8
우리가 하나님께 쏟아부었던 사랑을, 하나님은 여전히 잊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아파하고 계신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3
그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앞두고서
하나님은 지금도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또 한 가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고통 받는 이유>입니다.
사실 본문에는, 하나님의 고통은 이면적으로 드러나요.
자세히 들여다봐야 보인단 말입니다.
그러 하나님이 진짜 말씀하시는 것은, 표면적인 고통이에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어요.
2:14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아니, 애굽에서 종이었던 그들을 끄집어내서 자유인 되게 했고,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게 했고, 열방에 빛이 되게 했다.
근데 이스라엘 종이냐, 씨종 a slave by birth 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지금 이 말은 뭐죠? 지금 포로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1차포로는 완전 멸망 20년 전인 BC 605년에 벌써 시작되었고,
그 이전에도, 강대국 애굽에 벌써 포로가 되는 경험을 했었습니다.
국지전이 있어서, 애굽이나 앗수르에 패하여, 일부가 종으로, 포로로 끌려갔던 거죠.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변 나라에 지금 질질 끌려다니고 있다는 거예요.
너무너무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있다는 말이에요.
2:15 '어린 사자들이 그를 향하여 부르짖으며 소리를 질러 그의 땅을 황폐하게 하였으며
그의 성읍들은 불타서 주민이 없게 되었으며'
'어린 사자'
앗수르를 지칭합니다. 주1)
'그의 땅을 황폐하게 하였으며'
어린 사자가 앗수르를 상징한 것으로 본다면,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멸망상을 묘사한 것입니다. 주2)
'그의 성읍들은 불타서 주민이 없게 되었으며'
앗수르는, 정말 강포한 백성들이었거든요.
그러니 앗수르가 (국지전적으로) 쳐들어와서 이스라엘 땅을 황페하게 한 것은
이거 보통이 아닌 거예요. 성을 다 불태우고, 주민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가고,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는지요... (*그 후손인 IS가 최근에도 난리를 쳤죠)
2:16 '놉과 다바네스의 자손도 네 정수리를 상하였으니'
'놉과 다바네스'는 애굽의 도시들입니다. 주3)
그러니 예레미야가 예언할 당시,
이스라엘은 북쪽으로는 앗수르, 남쪽으로는 애굽에게
이렇게 동네북처럼 양쪽에서 이리 저리 두들겨 맞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 정수리를 상하였으니'
이는 B.C.609 애굽과의 므깃도 전투에서 요시야왕이 죽은 비참한 결과를 당하게 된
사건을 암시합니다.
'정수리'라고 했으니, 이스라엘 왕을 암시하는 거죠.
이때는 1차포로 B.C.609 의 4년 전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큰 고통 가운데에 있는지 몰라요.
누군가에게 종이 되고, 뭔가를 잃어버리고, 주민들은 죽고,
정수리가 상할 정도로 고통 가운데 있다... 는 것입니다.
만약 '정수리'가 왕을 상징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이 다른 치명적인 자기 급소를 가격당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근데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겁니까?
그들이 앗수르보다 더 약하기 때문입니까? 주변 민족들보다 약하기 때문입니까?
아니에요. 그들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약해서 고통 받지 않습니다. 그건 세상 논리죠.
하나님의 백성들은 약할 때 오히려 강해집니다. 하나님이 더 도와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은, 약함이 아니라 악하기 때문이에요.
여기 13절에 이스라엘의 2가지 악이 나옵니다.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이스라엘의 악은,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적질하고... 이런 행위적인 악함 이전에,
벌써 그들은 생수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13
이게 가장 큰 악이에요. 하나님을 버린 것!
그런데 이스라엘은 당시에도 계속 성전 제사를 드리고 있었어요.
나라가 완전히 망하기 전까지는, 한 번도 예배를 끊은 적이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세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확하게 보고 계세요.
우리가 헌금을 얼마를 하든.. 우리가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든..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지.. 우리가 새벽예배를 빠지든 안 빠지든 그거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고 계세요.
그런데 그들은 또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렸다'고 하십니다. :13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13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집으로 지음 받았어요.
하나님이 내주해서 사시기 위해 지음 받았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처음 지으실 때, 우리 속에 영을 두셨어요.
그 우리 속의 '지성소(영)' 안에, 하나님이 거주해 사시려고 인생을 지으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 지성소 가장 깊은 곳에 들어와 내주해 계신다'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 우리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이 빈 지성소 안에는 뭐가 있을까요? 그냥 비워 놓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떠나신 자리, 하나님이 쫓겨난 자리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대신하는 또 다른 웅덩이를 우리가 파게되어 있단 말입니다.
다른 우상을 추구하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우상숭배는 다른 게 아니에요.
목말라서 내가 찾고 있는 그것이 우상숭배 예요.
하나님을 버린다는 게 뭐예요?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거죠.
하나님 한 분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 기가 막힌 상황을,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말씀하세요.
▲2:10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 이같은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깃딤은 구브로(사이프러스)섬을 뜻하고
게달은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에 거주하는 족속입니다.
2:11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어느 나라가 자기들의 신들을, 다른 신과 바꾼 일이 있느냐?
다른 나라는 각자 다 자기 신을 가지고 있는데,
근데 그거는 진짜 신도 아니고, 잡신인데도,
그들 이방은, 한 번 선택한 자기들의 신을 바꾸지 않는데, 그런 나라가 없는데,
그런데 어떻게 너희 이스라엘은, 그 신을 다른 것으로 바꾸었느냐?' :11
여호와를 통해서 구원받고, 여호와를 통해서 광야를 지나고,
여호와를 통해서 기업을 받아서 가나안 땅에 들어와 놓고,
이제는 물질을 신으로 대신 세우고,
쾌락을 신으로 대신 세우고,
다른 어떤 자기가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우상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바꾸어버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북쪽으로는 앗수르(나중에는 바벨론), 남쪽으로는 애굽(놉, 다바네스)에
지금 계속 시달리면서 이스라엘이 황폐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가 막힌 상황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17~18절도 보십시오.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어요.
다른 신과 바꿨어요. 그리고 지금 어떻게 하고 있어요?
▲2:17~18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시흘의 물'
'시흘'은 문자적으로 '검은'이란 뜻으로 나일강을 가리킵니다.
우기 때 흙탕물이 상류에서 흘러내려와서 물이 검게 보이죠.
'시흘의 물을 마시려 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지 않고, 애굽의 도움을 구하려고만 한다..는 뜻입니다.
남쪽(애굽)에서 고통을 당하면, 북쪽(앗수르)으로 기대어 의지하려 하고,
북쪽에서 고통을 당하면, 남쪽으로 기대어 의지하려 하는 자세를 책망한 뜻으로 봅니다.
(남유다 각료 중에, 친애굽파, 친앗수르파가 있었습니다. 구한말 한국 상황과 비슷하네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죠.
'아 지금 돈이 모자라네... 그럼 어디가서 돈을 구하지? 저금리로 대출해 주는 데가 어디지?'
'아 지금 병이 났네... 그럼 어느 병원, 어느 의사가 용하다고 소문이 났지?'
여러분, 고통이 있으면, 이곳에 기웃, 저곳에 기웃 할 게 아니라
'아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구나' 하는 신호라고 아시면 돼요.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고통을 당하면서도, 애굽으로, 앗수르로
도움을 구하려고 찾아가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기가 막힌 거예요.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고통을 받을 때, 고통의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
-네 반역 때문이다.
-네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2:19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러분, 성도들의 인생에 있어서, 고통은 나 때문인 거예요.
그래서 자꾸 다른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못 박아야 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아나돗에서 부르셔서, 예루살렘에 보내서 외치고 계십니다.
또한 성경말씀인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지금도 우리에게 외치고 계십니다.
뭐라고 외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너희가 나를 버렸다. 하나님의 백성인 너희가 나를 떠났다.
그래서 네 삶에 고통이 있다.
그리고 너로 인해 내가 고통받고 있다.'
예레미야의 눈물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고통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라고 설명해 주십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또한 우리 공동체를 돌아보면서
지금 주변이 정리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어지럽습니다?
그런 내/공동체의 영적인 상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금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 라는 증거 예요.
지금 내/공동체가 지금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기웃 기웃 거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건 하나님이 '간음'으로 여기시는 아주 큰 죄입니다.
지금 내 마음 속에 분이 일어나고, 누군가와 자꾸 다투고 있습니까?
누가 나에게 도발해 옵니까?
내가/공동체가 하나님께 올바르지 않다 라는 증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우상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
주1) 15절을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2:18절에 앗수르가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앗수르는 여전히 세계 최강국의 위치에 있었으며,
그렇다면 본절은 앗수르의 붕괴 조짐이 나타나기 전인
예레미야 사역 초기에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 *요시야 왕 때
앗수르의 붕괴는 B.C.626년 앗술바니팔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주2)
디글랏 빌레셀 3세로부터 시작해서 살만에셀5세, 사르곤 2세, 산헤립, 에살핫돈,
앗술바니팔의 이스라엘 점령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황폐는, 배도의 길을 걷고 있는 유다에게 충분한 경고가 될 만했습니다.
주3)
'놉'은 하애굽(Lower Egypt)의 고대 수도였던 멤피스를 말하는 것으로서,
오늘날의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13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합니다.
'다바네스'는 오늘날 '텔 데프네'로 알려진 곳으로서
애굽 북동부의 만절레 호수 근처에 위치해 있었죠.
.....................................
◑절별 해석 (참고 자료)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분명한 것은 이 메시지가 선지자와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영적 교제로부터 말미암았다는 사실이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21).
2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네 청년 때의 인애'
이는 이스라엘이 오래 전 애굽에서 나와 여호와의 주권을 받아들이며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던 때를 가리킨다. 여호와께서는 그 당시 정치적으로 유아기에 있던
이스라엘의 순수했던 신앙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네 신혼 때의 사랑'
이는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언약을 받아들이며 신혼의 기쁨 속에서 충성을 맹세하였던 것이다(출24:6-8).
한편 이스라엘에는 유월절, 장막절, 초실절 등 많은 종교 축제가 있었는데,
이는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와 언약, 이적 등을 상기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호1-3장에 언급되고 있는 호세아와 고멜 사이의 관계를 상기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상징한다.
3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은...소산 중 첫 열매이니'
여기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성물(聖物)', '소산', '처음 열매' 등으로 지칭되어 있다.
'성물'이란 것은 오직 거룩한 목적으로만 사용하도록 따로 구별된 것을 말한다.
그러나 현재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에 따르면, 수확의 첫 소산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께 할당되어야 했다(출23:19).
이는 모든 토지의 소산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게 하였다.
수확 중 첫 열매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의 증표인 것처럼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몫으로서 하나님께 속한 백성다운 거룩한 자태를 나타냄이 마땅하였다.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예레미야 당시 북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 군대의 침입으로 멸망당했고(B.C. 722년),
그 백성의 대부분은 포로로 잡혀갔다.
그러나 히스기야 이후 남유다 역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었으며,
특히 기나긴 므낫세 왕 통치 기간에는 엄청난 배도(背道)를 자행했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소유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자에게는 여호와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이는 선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섭리를 깨달은 데서 비롯되었다.
4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모든 족속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5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이 표현은 선지자들의 특성있는 상투어로서, 그들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에
의거한 것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배교(背敎)를 지적하가기 시작하는데.
최근 므낫세 치하의 배교뿐만 아니라(왕하 21장)
멀리 가나안 정복 때부터 계속되어온 배교 행위까지 거론한다.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헛된 것'의 원어는 '헤벨'인데 원래는 '증기', '김', '숨'이란 뜻으로 쓰였다.
전도서 1장에 나오는 ‘헛되고 헛되니’ 할 때도 같은 ‘헤벨’이다.
한편, 본문에서 이 말은 가나안 종교의 주신(主神)이었던 '바알'을 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당시의 국제 조약 문헌을 참고하면, 본문에서 쓰이고 있는 '따라 행하다'란 말은
'어떤 군주를 봉신으로 섬기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신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섬긴 것을 뜻하는 것이다.
6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이 말은 8절에서 한 번 더 반복되고 있는데,
아마 종교행사나 제사 때에 사용되던 공식적인 기도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절에는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내시고 광야 길을 통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주신
여호와의 구속 사역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런 은혜를 망각한 것은 배도 때문이라고
선지자는 책망하고 있다.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헛된 것을 좇는 행위는
지난 날 감격스러웠던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망각해 버리는 것과 같다.
7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
'기름진 땅' 이 말의 원어는 '에레츠 하카르멜'으로서 '그 갈멜의 땅'이란 뜻이다.
이 '갈멜'이란 것은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을벌인 산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그 부근의 기름진 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하였던 것 같다. 아마 청중들은
이 말을 듣고 그 당시 기름진 땅, 곡창지였던 갈멜 산 일대를 상기하였을 것이다(암1:2, 9:3, 미 7:14).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
'역겨운 (개역엔 가증히)'에 해당하는 원어 '토에바'는 유다 왕 아하스 당시
이방인들의 종교 행사를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한 일을 가리킬 때
사용된 말이기도 하다(왕하 16:3).
8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
'제사장들...율법 다루는 자들...관리들...선지자들'
네 종류의 지도자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백성들의 인도자가 되어야 할 이들이
도리어 우상 숭배와 같은 악영향을 미치는 일에 앞장 섰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제사장들'은 제사 직무를 맡았을뿐만 아니라 율법 해석자 역할을 하였고
또 우림과 둠밈을 적절히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일을 하였다(출28:30, 민27:21)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율법에 능숙한 자'란 뜻으로 레위인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들의 직무 중에도 율법 해석의 일이 포함 되는데(말2:5-8),
본절에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알다'에 해당하는 원어 '야다'(*)는 단순한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체험을 통해 획득하는 보다 깊은 차원의 의미를 내포하는 말이다.
'관리들'의 히브리어 '로에'는 '목자'란 뜻으로서 정치적 지도자를 주로 의미한다.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였다.
그래서 아사 왕이나 히스기야 시대의 종교 개혁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가나안 종교의 신과 의식을 뒤따랐다.
예레미야는 그의 전 사역 기간에 이들 바알 선지자들과 싸워야 했다.
9 그러므로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싸우고...싸우리라' 본절은 소송 용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여호와께서 이 백성의 언약 파기를 문제 삼아 제소하는 내용이다.
당시 근동 국가에서는 조약을 파기하는 봉신들은 그들의 주권 군주들로부터 엄격한 처벌을 받았다.
따라서 청중들은 예레미야가 의도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잘 이해했을 것이다.
B.C.597년,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징벌하러 온 것도
유다의 정치적 변절에 대한 심판이었다(왕하 24:1,2).
10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 이같은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깃딤 섬들에...게달에도 사람을 보내어'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본문의 '깃딤섬'은 오늘날의 키프로스(구브로) 섬을 말한다.
'게달'은 팔레스틴 동쪽의 아라비아 사막 지역에 거주하던 아랍 부족을 뜻한다(49:28-33).
11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법적 절차(종주권 조약 어김에 따른 처벌)를 밟고 있다는 점을 선언한 후에(9절)
이스라엘 주변 나라 중 그 어떤 나라에도 유례가 없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한다.
즉, 고유의 민족 신으로 섬겨 왔던 신을 바꾼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이 신들은 참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일관되게 섬김을 받아 왔지만,
정반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를 버리고 살아계시며 그들의 영광이신 하나님을
'무익한 것'과 바꾸어 버린 것이다. 한편, '무익한 것'에 해당하는 원어 '벨로 요일'이란 말은
'바알'을 언어 유희로 표현한 것이 분명하다.
12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 하늘이...떨어지다' 이 백성의 행위가 참으로 악하기 때문에 하늘이나 땅조차도
그런 방탕스럽고 부정한 일을 바로 보지 못할 정도라는 뜻이다.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생수의 근원...웅덩이를 판 것' 이스라엘의 두 가지 심각한 죄악성이 지적되고 있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되시는 여호와를 버린 것이요, 다른 하나는 물을 담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판 것이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구원 혹은 하나님(그리스도)께서 생수에 비유된 예는 종종 나타난다(사12:3, 55:1, 요4:10-14, 7:37-39).
그리고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물이 귀했으므로 수원(水源)을 확보해 놓기 위해
저수지를 만들거나 빗물을 모아두기 위해 웅덩이에 석회를 발랐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그 석회에 균열이 가서 속에 든 물이 새어 나가 버리는 경우가 흔했다.
본문에서 유다 백성이 스스로 웅덩이를 팠다는 것은 결국 터져 버리고 말,
즉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우상을 섬긴 사실을 가리킨다.
14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씨종이냐' '씨종'은 주인의 집에서, 노예의 부모 사이에 태어난 종을 말하며
그렇기 때문에 주인의 개인적인 재산 취급을 당했다.
15 어린 사자들이 그를 향하여 부르짖으며 소리를 질러 그의 땅을 황폐하게 하였으며 그의 성읍들은 불타서 주민이 없게 되었으며
'어린 사자들이' 이것을 앗수르 군대로 해석하는 것이 주석가들 사이의 지배적인 견해이다.
이 구절을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18절에 앗수르가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앗수르는 여전히 세계 최강국의 위치에 있었던 것 같으며,
그렇다면 본절은 앗수르의 붕괴 조짐이 나타나기 전인 예레미야 사역 초기에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
앗수르의 붕괴는 B.C.626년 앗술바니팔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네 땅을 황무케 하였으며' 어린 사자가 앗수르를 상징한 것으로 본다면,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멸망상을 묘사한 것이며, 디글랏 빌레셀 3세로부터 시작해서
살만에셀5세, 사르곤 2세, 산헤립, 에살핫돈, 앗술바니팔의 이스라엘 점령을 뜻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배도의 길을 걷고 있는 유다에게 충분한 경고가 될 만했다.
16 놉과 다바네스의 자손도 네 정수리를 상하였으니
'놉'은 하애굽(Lower Egypt)의 고대 수도였던 멤피스를 말하는 것으로서,
오늘날의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13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다바네스'는 오늘날 '텔 데프네'로 알려진 곳으로서
애굽 북동부의 만절레 호수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네 정수리를 상하였으니'
이는 B.C.609 애굽과의 므깃도 전투에서 요시야왕이 죽은 사건(왕하23:29, 대하35:20)을 암시한다.
그런데 본절에는 애굽 대신에 그곳의 두 도시인 놉과 다바네스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아마 한때 애굽이 앗수르의 속국으로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이곳 두 도시가
에살핫돈과 앗술바니팔이 이끄는 앗수르 원정군에 의해 가장 처참하게 정복되었던 일이 있음을
상기시키려는 의도에서인 것 같다.
17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
'네가 나를 떠남으로' 유다가 여호와의 언약을 파기하고 다른 신들과 야합함으로 고난 받는다는 것이
본서 전체에 흐르는 주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는 거듭 이 점을 상기시킨다.
물론 이미 멸망한 북이스라엘의 참변도 자기 백성에게 내리는 여호와의 심판인 것이다.
18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시홀의 물’
'시홀'은 문자적으로 '검음'이란 뜻으로 나일강을 가리킨다(수13:3, 대상13:5).
'시흘'이라는 명칭은 우기(雨期) 때 흙탕물을 흘려보내는 애굽 '와디'(wadi)의 특성을 보여주며,
여기서는 아마도 우상 숭배국인 애굽의 부패성을 암시하려는 의도를 내포한 말인 듯하다.
실제로 이 나일 강은 애굽의 주요 신들 중의 하나로 인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수' 이는 유브라데 강을 뜻하는데, 구약 성경 곳곳에 이 유브라데 강을 '큰 강'
또는 '하수'로 지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신1:7, 11:24, 왕상4:21, 느2:7, 사7:20등).
예레미야는 여기서 애굽이나 앗수르 또는 다른 나라에 의지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이런 주제는 다른 선지자들도 곧잘 지적하던 내용이다(사30:1-5).
선지자는 유다 내 애굽파와 앗수르파가 정치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국내 사정을 반영하고 있으며,
두 강대국이 근동 지방에서 이처럼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예언의 말씀은 그의 사역 초기의 것임을 한번 더 확인할 수 있다.
19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 악...네 반역'
'반역'에 해당하는 '메슈바'는 '돌아가다', '물러서다'의 뜻을 가진 '슈브'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돌아섬', '배도'의 뜻을 가지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본서만큼 '이스라엘의 배도'를 자주 지적하는 책도 없다.
(2:19, 3:6-8,11,12,14-22, 5:6, 8:5, 14:7, 31:22).
앞으로 닥칠 유다의 참변은 궁극적으로 유다가 자초한 것이며
앗수르 등의 열강은 단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뿐이다.
결국 유다는 언약 파기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고
여호와를 버린 결과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쓰라린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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