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친밀함과 예배회복 시25:14
여주봉목사
시편25:14절입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예배의 회복의 필수성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거짓된 예배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예배에 대해서 살피고, 찬양과 경배, 부흥과 예배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지금은 예배회복의 필수성을 살피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신앙에서 가장 핵심인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와 예배의 관계를 살펴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해 어떻게 예배가 회복되어야할 것인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말씀을 삶의 관점에서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삶을 살지 않으면 꽝입니다.
설교를 수십번 들어도 삶을 실제로 살지 않으면 껍데기일 뿐입니다.
따라서 삶의 관점에서 자신을 비추어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기를 바랍니다.
◑1.하나님과 친밀함은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입니다.
그것이 핵심이요 본질이요 가장 중추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이 우리 신앙의 모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제 책 십자가의 복음을 복습하고자 합니다.
1)하나님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아담이 타락한 후에 아담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가족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창3장 8-10절입니다.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친밀한 교제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수시로 임하셔서 아담과 대화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낯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갔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보면 그처럼 죄를 지어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인간을 찾아나서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피조물을 찾고 계십니다. 어디로?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에로.
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을지 몰라도 적지 않은 성도들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몇 가지 의식은 행할지 모르지만 인격체이신 살아계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전혀 거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열망을 안다면
우리는 우리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바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가족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 창조하셨습니다.
2)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신 가장 주된 목적도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입니다.
인류가 이렇게 타락하자 인류를 구원할 한 계획을 세우십니다.
타락이전부터 하나님은 이미 아시고 그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실행해 가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만 보아도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가지고 계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계획을 가지시고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십니다.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신 주된 목적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이 그를 통해서 열방이 복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기 위한 계획 가운데 세웠는데 그 백성이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세우신 가장 주된 목적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였습니다.
출19장 3-4절 이하입니다.
“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지신 가장 주된 이유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입니다.
가나안 땅을 주기 위함이 우선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게로 인도하셨음을 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시기 위한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온 인류를 구할 것입니다. 가장 주된 목적이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거했다면 가나안 땅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왜냐면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행하면 그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동참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복은 저절로 따라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초점이 가나안에 있고 가나안에 들어간 다음에도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서 떠나고
세상적인 것이 될 때 그곳에서 그들은 쫓겨났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합하여 한 백성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기 위해서 10가지 재앙과 광야의 기적을 행하셨지만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과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셨고 죄와 사망과 사단의 권세를 멸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이런 엄청난 일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를 세우셨는데
교회를 세우신 가장 주된 목적도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입니다. 이 구절이 말해줍니다.
그런데 심각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록된 것은 또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교훈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저들에 대한 기록을
우리가 다 알고 저들이 왜 실패했는지도 알고 우리를 위한 교훈으로 기록된 줄도 알면서
신약시대의 우리도 저들과 똑같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만 우리의 온갖 관점과 관심이 세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보다 잘 살고 성공하고 부자되는 것이며 이것을 위해 하나님이 수단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아니고 거짓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주된 목적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함 안에 있을 때 가나안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오늘까지도 우리는 그 실패를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신 가장 주된 목적도 하나님과 교제를 위해서입니다.
3)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보다 우선입니다.
신30:15절입니다.
“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한쪽에는 생명과 복을 한 쪽에는 사망과 화를 두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리 생명과 복을 원하셔도
우리의 자세와 태도에 따라 사망과 화가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다 둔 것입니다.
“16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세 가지를 말합니다.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말은 신6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주 여호와는 하나이신 여호와시니 다음에 하나님의 모든 길로 행하라.
다음에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여러분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서 떠나면 우리 삶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 시대건 이사야 시대건 너희가 내 율법을 버렸다 나를 버렸다고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내 말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교리적으로 하나님의 안믿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의 생각이나 말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믿는가를 드러내지 않고
우리의 행동이 드러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서 떠나면 교리적으로는 성경말씀을 다 믿지만
우리의 실제 삶에서 사업에서는 직장생활에서는 우리 생활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서 떠난 것을 하나님을 법을 버린 것과 연결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상황은 매우 심각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첫 번째로 가면 문제가 됩니다.
저와 여러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법도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우리 자원으로, 안됩니다. 해보세요. 안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지키려고 노력했다가 엎어지고 넘어지고 코 깨지고 합니다.
또 일어나서 노력하다가 넘어집니다. 그래서 결국 적당히 포기하고 타협합니다.
그리고 선별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만 행합니다.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을 철저히 떠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냐면 거꾸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나
이것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의 교제가 되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하는 하나님과 친밀함이 되어야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으로 능력으로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쉬운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불가능하게 느껴집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서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있을 때에도 해결책은
우리의 노력으로 해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노력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해결책은 하나님을 전심을 다해서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을 알기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를 구해야 합니다.
여기가 먼저 되어야 다음에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앞에 생명과 복 사망과 화를 두었다 하면서
이 세 가지를 차례대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보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보다 우선임을 알 수 있습니다.
4)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의식보다 우선입니다.
호세아6장 6절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입니다.
원하지 않는 것은 번제와 제사입니다. 여기서 원하지 않는다는 말은 진짜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의 의미는 내가 너희에게 원하는 가장 우선적인 것 핵심적인 것 본질적인 것은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장 원하는 본질적이고 핵심적이고
중심적인 것은 너희가 나를 알고 사랑하는 친밀한 사랑의 교제라는 말씀입니다.
의식이 중요하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핵심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의식은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 그분을 사랑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의식이 아무리 많아도 그들의 삶속에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참된 신앙의 본질이 없으면 그 모든 의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사야 시대에 그 많은 헌신 예배 제물 기도가 있었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호세아 시대에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너희가 나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배회복을 시리즈로 살펴보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원래 예배는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는 행위를 예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주일날 교회에 와서 열한시부터 열두시까지 순서에 따라 진행하는 것을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의식입니다.
이 의식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 위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의식이 아무리 화려해도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친밀한 교제가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지난 성턴절에 한 분이 케익을 선문로 주었어요. 직접 만들었데요. 맛있었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케익을 구워서 가져왔는데 만일 겉에는 멋있게 포장했는데
속은 비었다면 제가 어떻게 생각했겠어요. 놀리는 거야 뭐야 하면서 쓰레기통에 버렸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예배가 아무리 화려해도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추구되지 않으면 껍데기 뿐입니다. 쓰레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 시대나 예레미야 시대나 바리새인들의 예배를 헛되게 예배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의식보다 우선입니다. 의식은 하나님과 친밀함을 위한 수단입니다.
포장지입니다.
5)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사역보다 우선입니다.
마가복음 3장 13-15절입니다.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사도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가장 귀중하게 사역한 사람들입니다.
가장 많이 섬기고 가장 많이 희생한 사람들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을 감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세우실 때도 주님은 사역을 위해 먼저 세우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사역을 위해서도 세웠지요.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전도와 귀신 쫓아내는 것입니다.
전도는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성령의 전반적인 사역을 말합니다.
여기를 보아도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똑같은 사역을 위해 부르셨어요.
즉 전도와 귀신을 쫓아내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보다 우선적인 것은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열둘을 세우셔서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려고' 부르셨어요. 교제가 사역보다 우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역보다 교제를 먼저 힘썼음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 15절이하입니다.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공생애 사역을 할 때 말씀을 선포하시고 전인적인 치유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왔어요. 말씀을 듣고 치유받기 위해서 왔습니다.
예수님이 하러 오신 사역을 위해서 왔습니다. 그랬는데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어요.
16절입니다.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영어성경을 보면 '항상'이라는 말이 더 있습니다. 이 말을 보면 예수님은 사역보다
교제를 먼저 우선시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지난 연말을 지나면서 또 송구영신예배를 지나면서 개인적으로 회개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사역을 위해서도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나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역보다 친밀한 교제가 먼저인데 제가 사역에 바빠서
친밀한 교제를 등한시한 것을 회개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우리의 삶과 사역에 있어서 가장 핵심입니다.
가장 중요하며 근간입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모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장 우선적으로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추구해야 합니다.
여기서도 그럽니다. 설교하는 저나 듣는 여러분이나 어떤 분을 이 설교를 여러번 들었을 것이고
제 책을 여러번 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들었고 설교를 할지라도
또 많이 알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얼마나 핵심적이고 중요한가를 보아야
그분을 우선적으로 찾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지라도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우선적으로 직장보다 우선적으로 사업보다 우선적으로 심지어 사역보다 우선적으로
그리고 우리의 모든 오락보다 우선적으로 심지어 우리 자녀나 부모의 일보다 우선적으로
찾지 않는 이유는 우리 삶에서 그렇게 안한다면 실제로는 못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아는 것을 가장 고상하다고 했는데, 예수님 안에 있는 보화를 안다면,
우선적으로 무엇보다 찾을 것인데, 이론적으로는 찾아야 한다고 알지만
실제로 그 가치를 못보면 머리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못보면
우리 삶에서 우선적을 주님을 알기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텔레비전 연속극 나오니까 연속극 끝아면 찾아야지 합니다.
그러다가 예들이 와서 숙제도 도와주세요 하면 숙제 도와주다가 밤이 늦었으니까 잡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직장에 가야 하니까 일찍 잡니다. 그리고 교회 와서는 제가 주님을 찾기를 열망합니다.
주님을 사모합니다. 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 행동이 하는 소리는 주님을 아는 것이 연속극보다 못하고요.
주님을 아는 것이 자녀의 숙제보다 못하고요, 직장보다 못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아는 것은 별것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왜? 우리 행동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는가를 드러내니까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가치를 안다면,
진실로 안다면 우리는 우선적으로 찾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보셔서
보화의 가치를 보게 하시고 우선적으로 주님을 찾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친밀함의 의미
어떤 분이 인터넷으로 제 설교를 들었나봐요. 질문을 보냈어요. 친밀함이라는 말이 도대체 뭡니까?
인격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했어요. 친밀한 교제가 무엇이냐?
인격체이신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있다고 합니다. 시25:14
그 언약을 그에게 보이시겠다고 합니다.
친밀함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쏘드'라는 말입니다. *council
하나님이 그런 자들과 상의 council 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친밀함이라는 말 대신에 상의한다고 했어요.
KJV은 하나님의 비밀 secret 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밀한 것들
즉 하나님 자신의 성품, 목적과 길들을 계시하시는 가까운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친한 관계에 있을수록 그에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은밀한 일들을
자신과 목적과 길들을 계시하시는 친한 관계를 말합니다.
그것을 '상의하신다 council' 혹은 '하나님의 비밀 secret'이라고 표현합니다. *시25:14 '여호와의 친밀함'
예를 들면, 출애굽기 32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 금송아지가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낸 신이라고 예배합니다.
여호와의 절일의 예배였습니다.
하나님께 한다고 하면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금송아지에게 합니다.
그리고 금송아지의 방법대로 광란의 파티를 엽니다. 신앙이 타락하면 예배가 혼합주의가 됩니다.
우리가 예배회복을 살펴보는 이유도 우리 신앙이 타락하면
우리의 예배도 혼합주의 신앙, 혼합주의 예배가 됩니다.
자 그런데 이런 상황에 있을 때 모세는 시내산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자 하나님이 멸하시려합니다.
그러면서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여기를 보면 친밀함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출32장 9절 이하입니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10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나님은 주권자 하나님이십니다. 주권자라는 말은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그분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하실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는 말입니다.
성령님만 해도 바람이 임의로 부른 것처럼 임의로 행하십니다. 그분이 주권자이기 때문입니다.
롬1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에 관한 바울의 노래를 보셨지요.
그분은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고 상의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모세에게 허락을 받는 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모세에게 하나님의 의중을 알리십니다. 계획을 알리십니다. 상의하십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회개하면서.
출32:11-13절입니다.
“11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2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이렇게 회개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약속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14절을 보면 뜻을 돌이키시고 화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이런 자리로 부르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그저 오늘날 일반적으로 그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몇 가지 의식을 행하면
하나님이 복주시겠지 열심히 했으니까 사업 잘되게 하겠지 열심히 했으니까
내 아들이 수능 대박나서 좋은 대학에 가게 하겠지 합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말 자체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신앙생활 자체가 불상 앞에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비는 대상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결국 신이 이 경우에 하나님이 자기들의 세상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해 달라고 봉사하고 희생하고 헌신합니다. 기복주의 율법주의가 짬뽕되어 있습니다.
가짜 신앙입니다. 우리 신앙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 창조되었어오.
그리고 그 모든 의식들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기 위한 수단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만 해도 보세요. 하나님의 목적과 의중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느헤미야가 그렇게 기도했고요.
바울이 그렇게 기도했어요. 모세가 사무엘이 예레미야가 그렇게 기도했어요.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했어요.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 금년에 내 사업
두배로 확장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지 않았어요. 그저 수능 40일 앞두고
아침마다 나와서 기도하지 않았어요.
우리 신앙은 성경이 기준인데 성경의 모든 사람들은 아무도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을 붙잡고 기도했어요. 이것은 친밀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 자리로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몇 년 전에 제가 필리핀 바기오에 가서 집회할 때 하나님이 뚜렷하게 말씀하셨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고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친밀함을 구하면, 하나님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부분적으로 행하시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중보기도입니다.
친밀함의 정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3.친밀함의 중요성
제가 아까 이 말씀을 들을 때 삶의 관점에서 듣자고 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복음만 해도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수없이 많이 들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실제로 살면 우리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열매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 집회를 통해서도 보았지만 우리가 전혀 삶의 영역에서 살고 있지 않음이 드러났잖아요.
이런 것처럼 이 지금 친밀함의 중요성은 다른 말로 하면 친밀함의 열매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과 친밀함이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인데 이런 삶을 살면, 이런 열매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중요성이면서 열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친밀함에 대한 설교를 수많이 들었거나 또 했다고 해도 실제로
이런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열매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제는 친밀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세하게 살펴볼 수 없어요. 예배의 관점에서 친밀함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1)하나님과 친밀한 가운데 거해야 우리가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의 실제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당시 신앙생활할 때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어 하나님이 안계시면 어떻게 천지가 있겠어.
하면서 당시 전통을 따라 의식을 행하면 복주시겠지 하면서 살았나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실제였어요. 눈에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을 경험으로 알았어요. 여러분 이삭을 드렸지요. 드릴려고 할 때 말리시고
수염소를 준비하셨어요. 그리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만났어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교리적으로 안 것이 아니라 실제 경험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안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에게 실제였습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성품과 길을 보이셨어요.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그의 기도를 들으셨어요.
소돔을 멸망시키려는 비밀을 아브라함에게 알리셨어요. 친밀함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거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의인 50명이 있어도
같이 멸하시렵니까? 혹시 40명... 그러면서 10명까지 내려갔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뜻에 동의할 수 밖에 없는 상황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기도는 헛되지 않았어요. 아브라함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이 롯의 식구들을 구원하셨지요. 저는 거기에 아브라함의 기도가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실제였습니다. 실제로 그의 삶 속에서 앞서가시고 인도하셨어요.
그런데 이 하나님의 실제가 언제 있느냐?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 거해야 있습니다.
개인이건 교회이건. 이 생명이 걷히면 이론만 남습니다. 이론은 있지만 생명이 없어요.
실제가 없습니다. 모양만 있는 종교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이 있어야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신30장 19절부터 보면 나옵니다.
“19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이시다는 것입니다.
요14장 6절입니다.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내가 바로 곧 그 생명이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복주리라 세상 모든 사람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모든 것이
아브라함이 복주시옵소서 하나님 열방의 근원으로 삼아주세요 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락한 신앙입니다.
창15:1절 이하를 보세요.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가 네 상급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네 복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그분이 생명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삶에도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상급된 삶을 살아야 우리에게 상급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복주세요 능력주세요 역사해주세요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락한 신앙입니다.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복이 되는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상급이 되는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유일함 힘이 되고 산성이 되고
피난처가 되는 삶을 살 때 그분이 우리의 피난처이며 생명입니다.
다윗을 보세요.
시18:1-절입니다.
“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다윗은 세상의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어요.
다윗은 하나님 그분이 자기의 산선이요 그분만이 자기의 힘이고 반석이요 생명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런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보호함이든지 인도함이든지 지키심이든지.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수단 삼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구절을 가져다가 인용합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힘이시고
의지시며 노후보장입니다. 보험이 아니라 자식이 아닙니다.
이 가운데 설 때 하나님과 친밀함이 열리고 하나님의 생명이 넘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생명이 넘칩니다.
제가 나머지는 제목만 읽겠습니다. 시간이 지나가서.
하나하나가 너무나 중요한 부분인데 시간이 없어서.
2)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 있어야 거기에 진정한 안식이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만군의 여호와가 나의 아버지시며
나를 하나님의 모든 존재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큰 안식과 만족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안에서 나오는 안식이 있어야 우리의 섬김도 올바로 섬길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을 사랑함도 올바로 사랑할 수 있어요. 부부관계도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중심적으로 대하니까
심지어 기독교인 가정도 수없이 깨지고 있는 것입니다.
3)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전적인 순종도 가능합니다.
4)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참다운 믿음도 가능합니다.
5)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올바른 기도도 가능합니다.
6)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진정한 섬김이 가능합니다.
7)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영적인 분별력이 열립니다.
8)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영적전쟁에서 승리합니다.
9)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10)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주의 형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11)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말씀도 올바로 전할 수 있습니다.
12)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올바른 예배도 가능합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 아닙니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
이것중에 단 하나도 친밀한 교제 없이는 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고 했나요? 이 하나하나가 다른 한편으로는 열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 대한 설교를 수없이 들었다 해도
내 삶속에서 실제로 이런 열매가 없다면 나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나는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차원에서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알기를 구해야 합니다.
◑4.예배와 하나님과의 친밀함
이처럼 하나님과 친밀함은 우리 신앙에서 가장 핵심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함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양방향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친밀함이 있어야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참된 예배가 하나님과 친밀함을 고취시켜 줍니다.
양분을 공급해줍니다. 길러줍니다. 배양합니다. 고양시키주고 증진시켜줍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 다음에 참된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드립니다.
경외함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오늘말씀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친밀함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자신을 보이십니다. 자신의 비밀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이 상의합니다.
같은 말들입니다. 그러니까 예배가 회복될 때 하나님과 친밀함이 부어집니다. 회복됩니다.
포도나무 교회나 저 개인적인 경험을 보아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중과 목적과 행하심과
성품을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성경에 나와있는데 성경은 이론이고
실제가 우리에게 비추어집니다 이것이 성령의 조명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추어지는 가장 주된 통로가 무엇이냐면, 예배와 중보기도입니다.
예배가 회복되어야할 절실한 필요중 핵심적인 요소는
예배가 하나님과 친밀함을 배양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두 가지만 제가 추가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선순환과 악순환입니다.
영적분별력에서도 마태13장에 보면, 이런 법칙이 있어요.
보는 자는 저 보게 되고 보지 못하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긴다. 빈인빈 부익부입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병폐인데 영적으로는 법칙입니다.
예배도 그렇습니다. 선순환 악순환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의 형식이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의 자리에 앉아있다 갔다고 예배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당만 밟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이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 그분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회복되는 것이 예배입니다.
여러분이 예배에 와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가면 마당만 밟고 간 예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갔으면 자신이 마당만 밟았음을 알고 껍데기 예배만 할 뿐임을 알고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면서 자신의 심각성을 깨닫고 애통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예배인 것처럼 아무런 사모함도 애통함도 없이 예배 잘 드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감각이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있어요. 주님을 추구하면 주님이 더 자신을 계시합니다.
주님을 아니까 주님을 더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주님이 자신을 계시해주십니다.
더 예배하게 됩니다. 이것이 선순환입니다.
반대로 신앙을 잘못 이해해서 예배순서만 바치고 돌아가면 예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배드렸으니까 복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예배를 통해서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단지 순서를 마치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찬양과 경배만 해도 주님을 구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주님을 모릅니다. 그러니 예배가 올바로 드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계시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예배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선순환 악순환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안순환의 고리를 끊고 선순환으로 전환하는 것은 여러분만이 할 수 있어요.
아무도 할 수 없어요. 여러분만이 할 수 있어요. 여러분이 예배가 안드려지면,
그래서 하나님과 만남이 안이루어지면, 그저 주일날 예배드리고 왔어도
마당만 밟는 예배라는 것을 인식하면, 내 예배가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
껍데기 뿐인 예배임이 인식되면, 이제는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합니다.
주님을 어떻게 해서든지 만나고 보고 어떠하든지 주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도록 애통해하며
주님을 찾고 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해야할 일입니다.
아무도 여러분을 위해 해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찾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기 시작합니다.
그 고리를 여러분이 끊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친밀한 교제를 위해 예배가 핵심이라 말할 때,
예배가 친밀함을 부양시켜 준다고 할 때 한 가지는 마음을 토로하고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보세요. 친밀함의 한 부분이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친해야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하나님과 친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의중을 우리에게 알리십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친밀함안에 있으면 우리의 속마음을 하나님께 털어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체면을 차리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의 자녀가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침마다 여러분의 문 앞에서 서서 ‘아버님 문의 여쭙니다 잘 주무셨습니까?’
직장에 다녀오면 ‘아버님 오늘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하면서 마음은 전혀 열지 않습니다.
마음은 열지 않고 격식만 갖추어요. 그러면 친한 관계가 되겠어요. 아이가 징그럽겠지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갈 때 이렇게 대하고 있다니까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속에 갈등 미움 아픔 두려움 상처를 가득안고 있으면서도.
마음을 열지 않고 격식만 갖추고 나갑니다. 오늘도 문의 여쭙나이다.
그런데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오픈하지 않아요.
여러분 다윗을 보세요. 하나님이 친히 마음에 합한 자라로 하신 다윗을 보세요.
다윗의 시편들을 보세요,. 얼마나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 앞에 털어놓던가요.
아픔, 고민, 낙심, 좌절, 불안 등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되려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제가 가끔 말씀드린대로 저는 예배로 나갈 때 찬양과 경배시간에는 목사로 나가지 않습니다.
설교할 때나 교회를 인도할 때 목사로 나가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저는 자녀로 나갑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나갈 때 자녀로 나가십시오. 마음을 열어놓고
중심에 있는 모든 것을 쏟아놓으세요. 마음을 토로하세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모함으로 나오세요. 그럴 때 하나님의 만지심과 위로와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게 되고
하나님의 약속도 알고 계획과 의중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배회복을 살펴보는데 가장 주된 이유중에 하나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하나님과 친밀함이
증진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선순환의 자리로 나가기를 결단하고
나가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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