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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엡1:3

by 【고동엽】 2024. 11. 23.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엡1:3        

 

엡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사도바울은, 신약성도가 추구해야 할 복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그게 도대체 뭔가요?

 

참고로,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내면적'입니다.   

'외형적'인 면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내면적'이 일차적 입니다.

 

특히 사도바울이 가르치는 모든 바울서신의 신앙과 신학이 '내면적'입니다.

물론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라' 말씀처럼

외형적인 면이 있지만, 내면을 바탕으로 하는 외형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독교의 내면적(영적) 신앙'을 무시해버린다면,기독교의 본질을 놓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복은, 1차적으로 내면적입니다. 당장 물질, 건강, 승진과는 다르죠.

물론 1차적인 내면적 복을 먼저 추구하다보면, 부차적으로 물질, 건강, 승진이 따라오기 쉽죠.

 

그러나 본문의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그런 것은 제쳐 놓고,구약을 바탕으로 해서

물질, 건강, 승진의 복을 중점적으로 추구한다면,기독교의 정체성 identity 을 잃어버리게 되고 맙니다.

복음의 본질이 약화되고, 그저 '예수 믿으라, 교회 다녀라'는 말밖에 못 하게 돼죠.

 

기독교 신앙 자체를 거의 모르는 것입니다. 그저 복 받아 세상에서 잘 되자는 것 외에는!

그건 기독교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엡1:3절,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이 말씀을 묵상하는 이유는,

우리가 자꾸 성경에 약속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이런 것은 간과하고

세상 사람들, 타종교인들이 추구하는 물질의 복, 건강과 출세의 복을

똑같이 추구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이 무엇인지 한 번 묵상해 봅니다.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이 다른 성경에는 안 나오므로, 일반적으로 이렇게 해석해 봅니다.

 

◑그럼 도대체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이란 무엇입니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여러 가지가 더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항목이, 이 설교문 가운데서, 빠졌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 추가해 보세요.

 

▲1. 평안 peace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면,

제일 먼저 얻게 되는 (하늘의 신령한) 복이 ‘평안’입니다.

 

영혼 구원도 여기에 속하지요.

내 영혼이 구원받았음을 믿으므로.. 영생의 문제에 대해서 ‘평안’합니다.

 

환갑이 지나면, 다들 최고로 염려하는 게 건강이지요.

혹시 암이나 불치병에 걸릴까봐 다들 노심초사하고 초조해합니다.

몸이 약간만 컨디션이 나빠도 ‘암이 아닌가?’하고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습니다.

 

그러나 진정 구원받은 성도는,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하는 주님이, 요단강을 건널 때도 자기 손을 붙잡아 주실 것을 확신하므로

(죽음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은 있지만)

죽음에 대해서 비교적 안정적입니다.

 

이 세상에 살 동안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목숨의 기한을 충분히 누리고

때가 되면 ‘이제 기한이 찼구나.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구나’ 하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의사 가운 붙잡고 늘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의사가 자기 기한을 연장시켜 줄 수도 없는데, 의사를 그렇게 붙잡습니다.

마음이 불안하기 때문인거죠.

 

욥42:17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full of years

창25:8 ‘ 아브라함은 자기가 받은 목숨대로 다 살고, 아주 늙은 나이에 기운이 다하여서,

숨을 거두고 세상을 떠나, 조상들이 간 길로 갔다.’ *새번역

 

△사람들은 그저 ‘돈이 많아야지, 적당한 지위와 명예가 있어야지...’

자기가 평안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부모가 아주 비싼 고급 요리를 사 주었습니다.

아이는 불평합니다. 자기는 떡볶이와 오뎅이 더 맛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비싼 요리의 맛을 모르기 때문이죠.

 

오늘날 신자들이 이럴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마련해 주셨는데,

그런 소중한 것들은 제 발로 차버리고

‘떡볶이, 햄버거’ 혹은 다른 정크푸드가 더 맛있다고 야단법썩입니다.

 

당신은 주님안에서 진정 ‘평안’을 매일 누리십니까?

군대 간 아들이 걱정이고, 남편 사업이 걱정이라고요?

 

물론 걱정거리들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닥치죠.

그러나 성도는 그것을 ‘하나님께 맡길’ 줄 압니다.

‘지금은 고통스러워 보여도, 모두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 압니다.

그래서 늘 평안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고 해도

씹는 밥알이 모래알 같고,

하루를 아침부터 밤까지 스트레스 가운데 지낸다면,

그게 무슨 성공이요, 복입니까?

 

비록 ‘동네 스타’도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주안에서 날마다 평안하게 지내면

그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인 것입니다.

 

바울도 풍랑속에서, 감옥안에서, 먹지도 자지도 못할 때가 있었지만

그는 ‘늘 평안’했습니다.

 

요셉도, 다윗도 마찬가지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이 평안해서 평안한 게 아니라,

주안에서 늘 평안한 것입니다.

주님과 개인적, 인격적 교제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평안입니다.

주님이 그러셨듯이, 풍랑속에서의 평안입니다.

 

그런데 성도라도, 유혹에 넘어지면,

세상을 좇아가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좇는다면

제일 먼저 평안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구원의 즐거움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잃어버렸던 다윗은 절규했습니다.

시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래서 성도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소중한 줄 알고,

아끼고, 사랑하고, 그 복을 추구합니다.

 

그걸 알았던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또한 후대의 모든 성도들이

그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나는 오늘 그 복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2. 자유

예수님 말씀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2

 

여기 ‘자유’에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되죠.

-죽음의 공포로부터의 자유

-죄와 마귀의 속박, 중독에서부터의 자유

-명예로부터의 자유

-인간관계의 얽힘으로부터의 자유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시선으로부터의 자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두 번째로 ‘자유’인데

특별히 명예, 지위, 남의 시선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특별히 한국은 경쟁사회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 심하고, 치열합니다.

아마 국토의 70% 이상이 산이고, 그렇다보니 좁은 지역에서 서로 맞부딪치며 삽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유행’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남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행에 뒤지지 않고 싶어합니다.

 

이런 현상은 중고등학생일수록, 나이가 어릴수록 더 심하다고 합니다.

핸드폰, 패딩잠바, 운동화, 컴퓨터 등

아이들은 경쟁적으로, 또래 친구들에게 뒤지기 싫어하며, 언제나 최신 제품을 원합니다.

그것은 대학생이나 어른들도 마찬가지죠.

 

남이 유학가면, 자기도 유학 가야되고,

남이 자동차를 바꾸면, 자기 차가 멀쩡해도 바꾸어야 속이 편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은 성도는

‘남의 시선’에서 자유합니다.

그것보다는 ‘주님의 시선’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은 성도는

자기 정체성이 뚜렷해집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다’라는 것입니다.

 

명문대를 나오면 좋지만, 비록 못 나왔다 하더라도

명품 핸드백을 들면 좋겠지만, 무리해서 들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최신 컴퓨터나 자동차를 갖고 싶기는 하겠지만, 자기 필요에 의해서 구입하지,

남들이 쳐다볼까봐 시선이 뜨거워서... 그렇게 무리해서 구입하지는 않습니다.

 

일부 성도는, 헌금을 낼 때도 남들 눈치를 본다고 합니다.

‘남들 얼마 내나?’

많이 내면 아깝고, 적게 내면 욕먹으니까.. 남들 내는 만큼만 적당히 내려고 합니다.

 

물론 사람이 살다보면, 사람인지라, 남들 눈치를 전혀 안 보고 살 수는 없지만

문제는, 그것이 내 ‘자유’를 빼앗는다는데 있습니다.

내 삶을 무지 부자연스럽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남 눈치 보면서, 남에게 책잡히지 않고, 남에게 얏보이지 않으려고 살다보니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복’,

‘복음의 은총과 복’을 누리지 못하고,

부자연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교회에서 기복주의, 성공주의를 강조하다 보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만 교회에서 기를 펴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는, 병원 주방에서 일하는 조리원 여집사님이나

아파트 경비원, 편의점 점주인 남집사님 등

모든 계층의 모든 성도가, 모두 균등하게 누릴 수 있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인데,

 

그걸 꼭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만 누리는 것처럼 얘기하다 보면,

본의아니게, 교회가 자꾸 복음의 문을 닫아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성공 못한 사람은,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아서란 말인가?’

 

그래서 미국의 척 스미스 목사님 같은 분은,

교회에 올 때, 양복이나 양장 입지 말고, 그냥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오라고 했답니다.

 

교회 나올 때, 사람들이 너무 다른 사람에게 신경쓰고,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봐 거기에 너무 신경쓰다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가 자꾸 잃어져가고

다른 바리새주의, 외식주의가 점점 득세하기 때문이라는데요.

 

일주일 내내 부부싸움 하며 언성을 높이던 부부가

주일에는 양복과 양장 입고 젊잖게 교회에 나와서 앉아 있지 말고,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처럼요.

 

예수 믿지 않고, 거듭나지 않으면

절대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정신병자가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진정 거듭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는 자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하늘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해주시고, 알아주시니까요.

 

‘당신은 성공했습니까. 대단히 잘 된 일입니다. 존경합니다.

그런데 나도 성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의식이 있는 사람은,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나도... 자유합니다. 자신감이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가 중요하고, 소중하고, 존귀한 사람이라는 자의식(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10년 이상 다니고도, 이런 자의식이 없고,

그래서 늘 다른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불편하게 살기도 하고, 외식적으로 살기도 합니다.

 

죄송하지만, 아직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제대로 확실히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걸 귀로 들어서 머리로만 알고 있지, 자기 마음속에 믿음으로 고착되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새해에, 모두가 복 받기를 바라고 염원하는 이런 시기에

성경이 약속하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아서,

이미 받은 분은 앞으로 더욱 확실히 더 두 배로 받아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자유’의 복을 풍성히 누리시게 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내팽개쳐 버리고

떡볶이, 정크푸드를 달라고 하나님께 졸라서는 안 되겠습니다.

 

▲3. 사명 감당에서 오는 자기 삶의 만족감

성도가 평안을 누리고, 자유한다고 해도.. 만족스럽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자기 삶에 감사와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감사와 만족은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사명’, 그것을 감당할 때, 비로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자기 직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직업을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 여기는 사람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서.. 또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조용히 묵상하면서 하루를 정리해 봅니다.

 

‘내가 오늘도 주님이 주신 과제, 사명을 잘 감당했구나’

비록 삶은 힘들고, 땀도 나고, 벌이가 시원치 않을수도 있습니다만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다 감당했다는 생각이 들면... 자기 스스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비록 구두수선공이라 할지라도, 고급관리가 부럽지 않은 것입니다.

그 만족감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주어진 과제를 다 해내지 못했다면,

일과 후에 잔업을 하든지, 아니면 내일 아침에 평소보다 더 일찍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좋은 학벌을 가지고, 좋은 직장에 다니며,

남보기에 좋은 배우자와 결혼해서, 집도 사서 별 탈 없이 사는 것 같은데,

어쩌면 남부럽게 사는 것 같은데,,,

자기 스스로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자기 삶에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은 어뚱한

곳에 가서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직종에 종사하든지, 저녁에 그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시간이 되면,

자기 삶에 만족감이 있어야 됩니다.

 

‘나는 오늘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했어!’

‘나는 가련한 사람들을 도울만큼 도왔어’

‘나는 아이들을 성심껏 잘 가르치고 돌보았어’

‘나는 상업을 통해, 꼭 양질의 물건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양심적으로 잘 공급했어’

 

△소명과 사명은 90% 비슷하고, 10%만 약간 다릅니다.

둘 다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뜻인데요,

소명은 ‘부르심’을 뜻하고, calling

사명은 ‘그 일’을 뜻합니다. mission

 

그럼 언제 성도가 소명이나 사명을 받는가 하면,

그가 진정 거듭났을 때입니다.

회개하고 진정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즈음에 ‘사명’을 주십니다.

 

‘이 일을 위해 내가 너를 불렀노라’

‘이 사명을 내가 네게 맡기노라’

 

행9:15 ‘가라 이 사람(사울)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렘1:5~6 ‘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물론 사명과 소명이, 처음에 받은 이후에도 계속 새롭게 업데이트 되겠지만

처음에 한 번은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성도가,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의 일을 감당할 때,

그의 직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의 수입이 얼마이든지 간에,

그의 근무여건이 어떻든지 간에... 그는 만족하며 하루를 끝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나는 예수 믿은 지 5년이 지났는데, 아직 사명이 뭔지 모르겠어요’

하는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정확하게 인격적으로 못 만난 사람입니다.

그저 ‘문화적 크리스천’이란 말이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다시 말해 ‘구원의 복’을 받은 성도는

날마다 감사와 감격 가운데 삽니다.

자기 삶에 뚜렷한 만족과, 거기에서 오는 여유가 풍겨납니다.

자기는 사는 이유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위해, 내가 이 세상에 보내졌구나’를 자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인, 회교도들이 구하는 똑같은 것 구하려하지 말고

우리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다른 종교로서는 결코 받을 수 없는 (그들은 주님과 인격적 관계가 없고, 그저 ‘성공 추구’ 뿐이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게 되는, 받되 흔들어 넘치도록 받는 새해가 되기 바랍니다.

 

▲4. 성도의 권세와 능력

 

여러분, 성도가 진정 예수님을 영접하고,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면

한 마디로 머리 뒤에 아우라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가지는 신적인, 성령의 권세와 능력입니다.

그 성도가 세상 직장에서 혹시 ‘말단직’이라 하더라도,

그 성도는 그 조직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 됩니다.

 

왜냐면 성도는, 그 직장을 위해서 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과 도우심을 받기에

마치 요셉이 감옥에 가면, 감옥이 형통하고,

보디발의 집에 가면, 보디발의 집이 다 형통한 것입니다.

요셉 한 사람 때문에!

 

요셉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바로 서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요셉을 보호해주시고, 요셉을 지켜주시고, 그와 함께 해주시는 바람에,

요셉의 주변 환경과, 주위의 모든 사람이 다 요셉과 함께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엔 ‘비밀’이 숨어있었는데,

말단직 요셉이 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늘 중보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복은 꼭 머리가 되어서 받는 것은 아닙니다.

다니엘, 에스더, 느헤미야처럼 높이 올라갈 수도 있죠.

그러나 직위에 관계 없이,

참 하나님의 성도는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자기 3차원적 육신의 힘으로 일하는 직원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물론 성도도 똑같이 육신의 능력으로 일하지만,

거기에 성령님이 주시는 지혜, 권세, 능력, 통찰력, 판단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지위가 높다고, 참 성도를 자기 지위로 꺾어 누르려고 한다면,

반드시 주님의 응징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주님이 보호해주시고, 그의 뒷배(빽)가 되어 주시죠.

 

만약에 참 성도가,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정리 해고를 당했다면...

하나님이 그를 ‘다른 임지’로 옮겨가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은데 불이익을 당했다면,

참 성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저 문화적인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빽, 하나님의 뒷배가 자기에게 적용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참 하나님의 성도는, 진정 회심한 성도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행합니다.

그래서 열매도 남다릅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 사람들이 그를 못 당해냅니다.

다니엘과 그 세 친구의 예에서 보듯이요.

 

그는 직장에서 두려움이나 불안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확신과 담대함과 능력으로 일합니다.

자기가 이 직장에 다니는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를 이곳에 보냈기 때문이고,

자기는 직장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현상을 일일이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우니까,

그냥 쉽게 ‘아우라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에스더서에 보면, 하만과 모르드개의 피치 못할 대결이 나옵니다.

당대의 실력자, 실세, 권력서열 2위인 하만이

말단 하급 공무원이었던 모르드개를 결코 꺾지 못했습니다.

그는 모르드개의 ‘권세와 능력’을 우습게 보고, 얏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당당합니다.

교만이 아니라, 성령의 권세를 가졌기 때문에...

무슨 일을 처리하든지 성령의 권세와 능력으로 행할 것이기 때문에,

결코 주눅 들지 않습니다. 9급이라도 3~4급 앞에서 당당합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보면,

결국 직장의 주위 사람들은 성도를 보면서,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가 가지는 권세와 능력입니다. authority & power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늘 권세와 능력으로 행하셨습니다.

예수님만 특출나지 않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지위고하, 빈부귀천에 관계 없이, 하나님이 권세와 능력을 주십니다.

 

사실 그것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중에 한 가지요,

우리가 사모해야 될 복입니다.

무조건 금년에는 대박! ... 이게 아니라요.

 

▲5. 회개의 은총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복 중에 최고의 복은 회개하는 복이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늘 회개하고, 더 깊이 회개할 때,

나는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고,

위에서 말한 4가지 복을 100% 빵빵하게 받아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무엇인지를 잘 배워서 알아도,

아무리 과거에 내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은 적이 있다 하더라도,

 

만약 오늘 내가 회개하지 않고, 그래서 오늘 내 영혼에 싱싱함이 사라져 버렸다면,

위에서 말한 복들이, 공기 빠진 튜브나 김빠진 콜라처럼

그 복들이 작동을 잘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작동하는 둥 마는 둥 하는 거죠.

 

만약 내게 영적인 싱싱함이 사라져버렸다면,

만약 안일한 가운데, 기도는 하지만, 안일하게 기도하고 말씀사역 한다면

분명히 뭔가 ‘회개할’ 거리가, 내게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년에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님께 매일 구하고,

그래서 그 내면적인 복을 풍성하게 받아누리고서

외적으로도 당당하고 열매맺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이 배설해 주시는 진수성찬은 다 거절하고 손사래치고,

주님께 그저 떡볶이와 정크푸드 사달라고, 애원하는 어린아이는 혹시 아닙니까?

우리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더 깊이, 더 구체적으로 하나 하나 체득해가는

복된 한 해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 외 '성도와 교제의 기쁨, 예배하는 기쁨, 안전과 보호 security 등도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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