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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자의 궁극적 관심(로마서 4장 16절~25절)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생명에는 언제나 계속적인 개혁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계속 변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변화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죽음에로의 변화로서 계속 부패하고 썩어져서 죽어 가는 변화이고, 또 하나는 계속 성장하고 새로워지는 생명에로의 변화입니다. 후자의 변화를 개혁이라고 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바닷가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눈만 뜨면 바다에 나가 수영도 하고 모래밭에서 뛰어 놀았습니다. 바닷가의 모래사장에는 조개껍질이 많지만 특히 커다란 게딱지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살아 있는 게딱지 같아 주워 보면 빈 껍데기뿐입니다. 왜냐하면 껍질 속에 있는 생명이 자라면 묵은 딱지를 벗어 버리고 새 것을 입고, 또 어느 정도 자라면 묵은 딱지를 벗어 버리고 새 것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게는 아무 때나 먹는 것이 아니라 살이 꽉 차는 때를 잘 맞추어서 잡아야 맛있게 먹을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생명이란 낡은 것, 고식적인 것, 고정적인 것은 자꾸 벗어 버려야 성장하고 새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적으로 개혁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일에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위한 방법과 수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목적을 지향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에 총력을 기울이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목적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정말 누구를 위해 종은 울려야 합니까? 자칫 잘못하면 목적으로부터 멀리 이탈해 가는 경우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즉 방법과 수단이 목적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처음 목적이 무엇이었나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의 필요성입니다.
또한 우리는 언제나 대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식의 대상, 일의 대상, 문제의 대상과 함께 씨름을 합니다. 그래서 이 대상의 필요에 끌려나가다 보면 어느 사이에 주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가령 학교 교사들을 보면, 그들은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어느 사이에 가르치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 가르치는 것과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는 이래라 저래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엉뚱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가르치는 하나의 기계로 전락되어 버렸단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한 다음에 오히려 나는 버림이 될까 두렵다"고 말한 것처럼 주체인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개혁입니다.
그리고 변화하는 문화 양식 속에서 본래적인 의미를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 의미를 되찾아야 합니다. 변화무쌍한 이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또한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 일부러 변화를 일으키는 그것이 개혁입니다. 그래서 고정화되고 경직화되는 것을 막고 늘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개혁의 필요성입니다.
그러면, 개혁이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첫째, 내적인 변화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즉 주체의 변화가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밖을 고쳐서 안을 고칠 생각은 말아야 합니다. 부부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와 남편은 서로 상대에게 이래라 저래라고 변화할 것을 요구합니다. 결혼한 지 20년 동안 서로 변화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아직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변해 주기를 일단 중지하고 내 편에서 먼저 변화되면 저쪽도 서서히 변화됨을 볼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입니다. 나는 부동 자세로 있으면서 저쪽만 고쳐라 고쳐라, 사회가 어떻고 세상이 이래서야 되겠느냐고 떠들어 보았자 시끄럽기만 하고 남는 것은 분쟁뿐입니다.
그러므로 주체인 나 자신이 먼저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관심을 나 자신과 나의 영혼의 문제로 돌릴 때에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혁이 있어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본래성(original point)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가고, 본래적인 진리에로 돌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가끔 부부간에 사느냐 못 사느냐 하고 문제가 복잡하다면서 상담을 하러 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처음에 어떤 마음으로 결혼했습니까? 처음 결혼할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자는 것입니다. 종교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개혁이라고 해서 어떤 새로운 일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원점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고 초대 교회로 돌아가는 그 작업이 바로 개혁입니다. 본래성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셋째, 순수해지는 것입니다. 거추장스럽거나 복잡한 것, 버릴 것 등은 다 버리고 가뿐하고 단순하며 순수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이제 나이가 50이 넘으신 분들은 생각을 단순화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버려야 할 것은 다 버리고 생각을 단순화해서 하나님을 만날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이 어느 시점인데 아직까지 쓸데없는 생각들로 시간을 보내시려 하는 것입니까? 이게 바로 개혁입니다. 순수해질 때 힘이 발동하고 생명력이 발동합니다. 그리고 이 생명력이 나를 변화시켜 가정으로 교회로 사회로 세계로 확대케 되어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처음부터 세상에 대해서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궁극적 관심이 교회 체제나 교리 문제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루터의 관심의 원점은 첫째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이 세대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문제입니다. 나의 일은 등한히 하면서 남에게만 이래라 저래라고 명령하니 시끄럽고 복잡한 것입니다. 우선 조용하게 내가 할 일부터 충실히 해야 합니다. 현대인에게는 불평은 있으나 고민은 없습니다. 고민이라하는 것이 돈을 많이 버느냐 못 버느냐, 주식 값이 올라가느냐 내리느냐 정도입니다. 심지어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까지도 남들이 뭐라고 하나, 즉 명예를 챙기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이런 것은 고민이 아니라 걱정입니다. 걱정이나 원망을 하면서 남을 탓합니다. 자신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 실존적 고민, 즉 정말 고민해야 할 문제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자기 죄에 대한 고민이 없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모두가 빠져나갈 궁리만 하지 책임을 지고 나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어서 답답하단 말입니다. 문제는 내 죄요. 나의 잘못입니다. 루터는 자기 죄 때문에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는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살았습니다. 수도원에서 무슨 죄를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남자들만 모여 있으니 간음죄를 짓겠습니까 도둑질을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죄에 대한 고민을 무척이나 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기도도 하고 금식도 하며 갖은 고행을 다하고, 또한 신부님을 찾아가서 고해성사를 열심히 했습니다. "내가 나쁜 마음을 먹었습니다. 질투를 했습니다. 의심도 가졌습니다"라고 하루에도 20번 이상 고해성사를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신부님이 귀찮아서 "루터야, 죄를 모아서 가져오너라"하고 부탁을 할 정도였답니다. 이런 고민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고민이 없기에 평안하지 않고 고민이 없기에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루터는 원래 법과대학을 나왔습니다. 법조계에 꿈을 안고 졸업반에 이르렀는데, 그의 친구 알렉시스가 에르푸르트에서 함께 길을 가다가 벼락을 맞아 새까맣게 타서 죽은 것입니다. 상상을 해 보십시오! 함께 가던 친구가 갑자기 벼락을 맞아 죽어 넘어가는 것을 목격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는 벌벌 떨면서 손을 모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성 안나여, 나를 살려 주옵소서! 그러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그는 경황 중에 이렇게 울부짖었고, 결국 이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해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는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들어가서 영육간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한 때는 중병까지 걸렸으나 아픔이나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죄 때문에 고민했습니다. 사실 정말 고민되는 문제는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결국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것이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루터는 자기 몸이 죽어 가고 있는 상태에서도 죽음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죄에만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 병을 낫게 하셨습니다. 그 후에 그는 로마를 여행하게 되어 유명한 성 계단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이 교회는 콘스탄틴 왕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부탁을 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끌려 올라갔던 28계단을 뜯어다가 로마로 모셔 와 교회를 지은 것입니다. 계단은 교회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고 이 계단을 올라가면 제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리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도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이천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례를 했는지 이 계단은 닳아서 푹 패여 있습니다. 오백여 년 전에 마르틴 루터도 이 계단을 기어 오르면서 계단마다 입을 맞추고 종일 고행을 했습니다. 그래도 그의 마음에는 평화가 오지 않아 괴로워하는 중에 마침내 강하게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그렇다. 이 계단은 구원을 얻는 사다리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데서 눈을 뜨게 됐습니다. 여기서 진정한 평안, 진정한 위로, 진정한 생명적 개혁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성경 연구를 많이 하다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당시의 교회들이 성경에서 떠난 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가 비 성서적인 것을 발견하고 95가지의 질문 사항을 비텐베르그 성당벽에다 갖다 붙였습니다. 그리고는 성경적인가 아닌가를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여 새롭게 되기를 제의했던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생각을 교회가 수용하고 함께 생각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수용은커녕 그를 정죄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파면을 당했고 부득이 본래 원했던 바는 아니지만 종교개혁을 감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 종교개혁적인 사상이 오늘의 칼빈주의를 이루었고 자본주의 정신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알고 보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문화가 루터의 종교개혁적 신앙의 열매인 것입니다. 이 개혁은 종교개혁뿐 아니라 사회개혁까지 이루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루터는 의(義)의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세우기 위해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성경에서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율법과 은혜가 있고,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하심이 함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인간에게 향한 구원이 있습니다. 이 긴장 관계에서 고민을 하다가 마침내 발견한 진리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의로써는 도저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오직 긍휼과 오직 은혜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서 십자가를 바라보니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 위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는 창세기 주석 가운데서도 말하기를 온 인류를 향한 모든 죄가 십자가 위에 떨어지게 될 때에, 주님은 이 아픔을 참지 못하시고 울부짖기를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게 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십자가에서 충족되어 하나님의 율법이 완성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의를 받아들임으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루터의 "진노적 사랑"이라는 유명한 말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적 사랑이 주제가 되므로 내가 행하는 의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의, 즉 전가되는 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내 의를 완전히 포기하고 하나님의 의를 수렴하는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의, 곧 하나님의 자녀됨을 그는 확실히 믿게 된 것입니다.
셋째, 그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권위나 권세에서 완전히 떠나 오직 성경으로만 이야기했습니다. 성경 이외의 것은 다 일축해 버리고 "말씀의 선포가 없는 것은 무상이다. 말씀을 전파하지 않고 행하는 성례는 미신이다, 오직 말씀으로"라고 그는 선명하게 가르쳤습니다.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믿고 출발한 것입니다. 오직 성경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성경에 따라서 구원을 받고 성경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성경의 권위요 약속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구약성경에서부터 읽어 내려오는 중에 특히 아브라함의 예를 찾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죄인이지 결코 의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대로 그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 하나를 보시고 그를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이나 십계명이 있기 훨씬 이전의 일로서, 이미 그 때에 벌써 은혜의 약속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아브라함은 나이가 100세요, 그의 아내 사라는 90세 된 노인들이었습니다. 단산한 지가 오래되었기에 인간의 생각으로는 아들을 낳는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엄청난 약속을 주십니다.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대로 그는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 오히려 자기 지식을 십자가에 못박고, 즉 지식을 완전히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합니다. 마침내 그는 백 세에 아들을 얻는 사람이 됩니다. 누가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로 방향을 돌려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죽은 것과 같이 아무 소망도 없는 존재인 나를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사랑하시기에 나는 삽니다. 그리고 나는 의로울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성경과 성령이 확증하고 있습니다.
넷째, 루터는 하나님과의 수직 관계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누가 대신 기도하고 누가 중보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직접 제사장직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신 헌금을 하고 대신 봉사하는 등 누군가가 대신해서 공로를 세워 주거나 속죄권을 팔아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수직적 관계를 이루어야 함에 그의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요즘도 해외 여행을 하다보면 큰 성당에는 구석구석 촛불을 켜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촛불이 켜져 있는 동안에는 촛불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가 해야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제사장으로서 남을 위하여 기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할 책임이 보편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루터의 관심사였습니다.
여러분 개혁을 원하십니까? 이제 침묵하고 나 자신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변수는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을 상실한 채 죄에 대한 무감각으로, 모든 잘못을 사회에 전가하면서 원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인 관계에 관심을 두고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아갈 때 진정한 개혁이 계속 이루어질 것입니다.
종교개혁자의 궁극적 관심(로마서 4장 16절~25절)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생명에는 언제나 계속적인 개혁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계속 변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변화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죽음에로의 변화로서 계속 부패하고 썩어져서 죽어 가는 변화이고, 또 하나는 계속 성장하고 새로워지는 생명에로의 변화입니다. 후자의 변화를 개혁이라고 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바닷가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눈만 뜨면 바다에 나가 수영도 하고 모래밭에서 뛰어 놀았습니다. 바닷가의 모래사장에는 조개껍질이 많지만 특히 커다란 게딱지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살아 있는 게딱지 같아 주워 보면 빈 껍데기뿐입니다. 왜냐하면 껍질 속에 있는 생명이 자라면 묵은 딱지를 벗어 버리고 새 것을 입고, 또 어느 정도 자라면 묵은 딱지를 벗어 버리고 새 것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게는 아무 때나 먹는 것이 아니라 살이 꽉 차는 때를 잘 맞추어서 잡아야 맛있게 먹을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생명이란 낡은 것, 고식적인 것, 고정적인 것은 자꾸 벗어 버려야 성장하고 새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적으로 개혁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일에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위한 방법과 수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목적을 지향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에 총력을 기울이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목적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정말 누구를 위해 종은 울려야 합니까? 자칫 잘못하면 목적으로부터 멀리 이탈해 가는 경우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즉 방법과 수단이 목적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처음 목적이 무엇이었나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의 필요성입니다.
또한 우리는 언제나 대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식의 대상, 일의 대상, 문제의 대상과 함께 씨름을 합니다. 그래서 이 대상의 필요에 끌려나가다 보면 어느 사이에 주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가령 학교 교사들을 보면, 그들은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어느 사이에 가르치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 가르치는 것과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는 이래라 저래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엉뚱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가르치는 하나의 기계로 전락되어 버렸단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한 다음에 오히려 나는 버림이 될까 두렵다"고 말한 것처럼 주체인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개혁입니다.
그리고 변화하는 문화 양식 속에서 본래적인 의미를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 의미를 되찾아야 합니다. 변화무쌍한 이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또한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 일부러 변화를 일으키는 그것이 개혁입니다. 그래서 고정화되고 경직화되는 것을 막고 늘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개혁의 필요성입니다.
그러면, 개혁이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첫째, 내적인 변화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즉 주체의 변화가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밖을 고쳐서 안을 고칠 생각은 말아야 합니다. 부부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와 남편은 서로 상대에게 이래라 저래라고 변화할 것을 요구합니다. 결혼한 지 20년 동안 서로 변화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아직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변해 주기를 일단 중지하고 내 편에서 먼저 변화되면 저쪽도 서서히 변화됨을 볼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입니다. 나는 부동 자세로 있으면서 저쪽만 고쳐라 고쳐라, 사회가 어떻고 세상이 이래서야 되겠느냐고 떠들어 보았자 시끄럽기만 하고 남는 것은 분쟁뿐입니다.
그러므로 주체인 나 자신이 먼저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관심을 나 자신과 나의 영혼의 문제로 돌릴 때에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혁이 있어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본래성(original point)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가고, 본래적인 진리에로 돌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가끔 부부간에 사느냐 못 사느냐 하고 문제가 복잡하다면서 상담을 하러 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처음에 어떤 마음으로 결혼했습니까? 처음 결혼할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자는 것입니다. 종교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개혁이라고 해서 어떤 새로운 일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원점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고 초대 교회로 돌아가는 그 작업이 바로 개혁입니다. 본래성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셋째, 순수해지는 것입니다. 거추장스럽거나 복잡한 것, 버릴 것 등은 다 버리고 가뿐하고 단순하며 순수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이제 나이가 50이 넘으신 분들은 생각을 단순화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버려야 할 것은 다 버리고 생각을 단순화해서 하나님을 만날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이 어느 시점인데 아직까지 쓸데없는 생각들로 시간을 보내시려 하는 것입니까? 이게 바로 개혁입니다. 순수해질 때 힘이 발동하고 생명력이 발동합니다. 그리고 이 생명력이 나를 변화시켜 가정으로 교회로 사회로 세계로 확대케 되어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처음부터 세상에 대해서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궁극적 관심이 교회 체제나 교리 문제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루터의 관심의 원점은 첫째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이 세대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문제입니다. 나의 일은 등한히 하면서 남에게만 이래라 저래라고 명령하니 시끄럽고 복잡한 것입니다. 우선 조용하게 내가 할 일부터 충실히 해야 합니다. 현대인에게는 불평은 있으나 고민은 없습니다. 고민이라하는 것이 돈을 많이 버느냐 못 버느냐, 주식 값이 올라가느냐 내리느냐 정도입니다. 심지어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까지도 남들이 뭐라고 하나, 즉 명예를 챙기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이런 것은 고민이 아니라 걱정입니다. 걱정이나 원망을 하면서 남을 탓합니다. 자신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 실존적 고민, 즉 정말 고민해야 할 문제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자기 죄에 대한 고민이 없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모두가 빠져나갈 궁리만 하지 책임을 지고 나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어서 답답하단 말입니다. 문제는 내 죄요. 나의 잘못입니다. 루터는 자기 죄 때문에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는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살았습니다. 수도원에서 무슨 죄를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남자들만 모여 있으니 간음죄를 짓겠습니까 도둑질을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죄에 대한 고민을 무척이나 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기도도 하고 금식도 하며 갖은 고행을 다하고, 또한 신부님을 찾아가서 고해성사를 열심히 했습니다. "내가 나쁜 마음을 먹었습니다. 질투를 했습니다. 의심도 가졌습니다"라고 하루에도 20번 이상 고해성사를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신부님이 귀찮아서 "루터야, 죄를 모아서 가져오너라"하고 부탁을 할 정도였답니다. 이런 고민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고민이 없기에 평안하지 않고 고민이 없기에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루터는 원래 법과대학을 나왔습니다. 법조계에 꿈을 안고 졸업반에 이르렀는데, 그의 친구 알렉시스가 에르푸르트에서 함께 길을 가다가 벼락을 맞아 새까맣게 타서 죽은 것입니다. 상상을 해 보십시오! 함께 가던 친구가 갑자기 벼락을 맞아 죽어 넘어가는 것을 목격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는 벌벌 떨면서 손을 모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성 안나여, 나를 살려 주옵소서! 그러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그는 경황 중에 이렇게 울부짖었고, 결국 이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해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는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들어가서 영육간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한 때는 중병까지 걸렸으나 아픔이나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죄 때문에 고민했습니다. 사실 정말 고민되는 문제는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결국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것이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루터는 자기 몸이 죽어 가고 있는 상태에서도 죽음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죄에만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 병을 낫게 하셨습니다. 그 후에 그는 로마를 여행하게 되어 유명한 성 계단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이 교회는 콘스탄틴 왕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부탁을 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끌려 올라갔던 28계단을 뜯어다가 로마로 모셔 와 교회를 지은 것입니다. 계단은 교회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고 이 계단을 올라가면 제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리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도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이천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례를 했는지 이 계단은 닳아서 푹 패여 있습니다. 오백여 년 전에 마르틴 루터도 이 계단을 기어 오르면서 계단마다 입을 맞추고 종일 고행을 했습니다. 그래도 그의 마음에는 평화가 오지 않아 괴로워하는 중에 마침내 강하게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그렇다. 이 계단은 구원을 얻는 사다리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데서 눈을 뜨게 됐습니다. 여기서 진정한 평안, 진정한 위로, 진정한 생명적 개혁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성경 연구를 많이 하다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당시의 교회들이 성경에서 떠난 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가 비 성서적인 것을 발견하고 95가지의 질문 사항을 비텐베르그 성당벽에다 갖다 붙였습니다. 그리고는 성경적인가 아닌가를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여 새롭게 되기를 제의했던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생각을 교회가 수용하고 함께 생각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수용은커녕 그를 정죄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파면을 당했고 부득이 본래 원했던 바는 아니지만 종교개혁을 감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 종교개혁적인 사상이 오늘의 칼빈주의를 이루었고 자본주의 정신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알고 보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문화가 루터의 종교개혁적 신앙의 열매인 것입니다. 이 개혁은 종교개혁뿐 아니라 사회개혁까지 이루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루터는 의(義)의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세우기 위해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성경에서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율법과 은혜가 있고,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하심이 함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인간에게 향한 구원이 있습니다. 이 긴장 관계에서 고민을 하다가 마침내 발견한 진리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의로써는 도저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오직 긍휼과 오직 은혜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서 십자가를 바라보니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 위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는 창세기 주석 가운데서도 말하기를 온 인류를 향한 모든 죄가 십자가 위에 떨어지게 될 때에, 주님은 이 아픔을 참지 못하시고 울부짖기를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게 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십자가에서 충족되어 하나님의 율법이 완성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의를 받아들임으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루터의 "진노적 사랑"이라는 유명한 말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적 사랑이 주제가 되므로 내가 행하는 의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의, 즉 전가되는 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내 의를 완전히 포기하고 하나님의 의를 수렴하는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의, 곧 하나님의 자녀됨을 그는 확실히 믿게 된 것입니다.
셋째, 그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권위나 권세에서 완전히 떠나 오직 성경으로만 이야기했습니다. 성경 이외의 것은 다 일축해 버리고 "말씀의 선포가 없는 것은 무상이다. 말씀을 전파하지 않고 행하는 성례는 미신이다, 오직 말씀으로"라고 그는 선명하게 가르쳤습니다.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믿고 출발한 것입니다. 오직 성경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성경에 따라서 구원을 받고 성경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성경의 권위요 약속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구약성경에서부터 읽어 내려오는 중에 특히 아브라함의 예를 찾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죄인이지 결코 의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대로 그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 하나를 보시고 그를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이나 십계명이 있기 훨씬 이전의 일로서, 이미 그 때에 벌써 은혜의 약속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아브라함은 나이가 100세요, 그의 아내 사라는 90세 된 노인들이었습니다. 단산한 지가 오래되었기에 인간의 생각으로는 아들을 낳는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엄청난 약속을 주십니다.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대로 그는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 오히려 자기 지식을 십자가에 못박고, 즉 지식을 완전히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합니다. 마침내 그는 백 세에 아들을 얻는 사람이 됩니다. 누가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로 방향을 돌려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죽은 것과 같이 아무 소망도 없는 존재인 나를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사랑하시기에 나는 삽니다. 그리고 나는 의로울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성경과 성령이 확증하고 있습니다.
넷째, 루터는 하나님과의 수직 관계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누가 대신 기도하고 누가 중보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직접 제사장직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신 헌금을 하고 대신 봉사하는 등 누군가가 대신해서 공로를 세워 주거나 속죄권을 팔아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수직적 관계를 이루어야 함에 그의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요즘도 해외 여행을 하다보면 큰 성당에는 구석구석 촛불을 켜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촛불이 켜져 있는 동안에는 촛불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가 해야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제사장으로서 남을 위하여 기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할 책임이 보편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루터의 관심사였습니다.
여러분 개혁을 원하십니까? 이제 침묵하고 나 자신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변수는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을 상실한 채 죄에 대한 무감각으로, 모든 잘못을 사회에 전가하면서 원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인 관계에 관심을 두고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아갈 때 진정한 개혁이 계속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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