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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근심(고린도후서 7장 8절~11절)

by 【고동엽】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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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이르게 하는 근심(고린도후서 7811)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먹고 배부르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누워 잠만 자는 동물보다는 근심이 있고 고민이 있고 번뇌가 있는 인간이 더 아름답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 걱정도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제 다 살았다' 하는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근심 없는 사람도 없고 근심 없는 사회도 없습니다. 결코 근심 없는 공간도 시간도 없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다만 근심하지 아니할 뿐입니다.

이따금 저는 칠십 평생 감기 한번 앓아 본 적이 없다고 건강에 대해서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분들을 봅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오히려 은퇴 후에 무기력하게 쓰러지는 것은 왜입니까? 일흔까지는 아주 정정하게 사업에 매진합니다. 그러나 은퇴하여 이제는 아무 걱정 없다고 한시름 놓았는데, 정작 걱정거리가 없어지고 나니까 그만 자리에 눕거나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여러분, 많은 걱정거리를 안고 신음하지만 그 걱정에서 벗어날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문제는 걱정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어떤 걱정을 하느냐 입니다. 개중에는 참으로 쓸데없는 걱정도 많습니다. 그래서 걱정도 하다 보면 버릇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걱정할 필요 없는 일곱 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함께 생각해 보고, 여러분의 걱정은 어디에 해당하는지 냉정하게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지나간 일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미 다 지나간 일입니다.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이제는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합니다. 끝난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끊임없이 걱정합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리석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 끝나버린 일을 붙들고 걱정하는 것은 바보짓이요 시간 낭비입니다. 그런데도 여기에서 쉽사리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걱정입니다.

둘째, 기우(杞憂)입니다. '기우'라는 말에는 재미있는 유래가 있습니다. 옛 중국의 기나라에 하늘이 무너질까 땅이 꺼질까 걱정하며 침식을 잊고 근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기우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기나라 사람의 걱정'이라는 뜻이지요.

오지 않을 일, 일어나지 않을 일을 걱정하는 것을 가리켜 '기우'라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 때문에 어쩌나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것이니 얼마나 바보스럽습니까? 그러나 의외로 이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네 걱정의 태반이 기우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셋째,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걱정입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고 교만한 걱정인지 모릅니다. 내가 무엇인데 내 마음대로 되기를 바랍니까? 어떻게 세상 만사가 내 마음대로 된다는 말입니까? '내 마음, 내 뜻대로'를 고집하며 거기에 못을 박고 걱정 근심합니다. 여러분, '내 뜻'이라는 것은 아예 잊어버리십시오. 어떤 부모님들은 자식이 당신들 마음대로 결혼해 주지 않는다고 걱정합니다. 이런 착각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식의 결혼이지 부모의 결혼입니까? 다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어떻게 자식의 일이 부모 마음대로 되기를 바랍니까? '내 마음대로'에는 어쩔 수 없이 한계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 마음 대로를 고집하기 때문에 쓸데없는 걱정거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넷째, 자신-자기 이름을 내세우려 하는 데에 걱정이 있습니다. 이름, 별것도 아닙니다. 누가 내 이름을 기억이나 해주겠습니까? 요즘은 누구 이름인들 소중히 여기지 않는 시대입니다. 한때는 좀 높여 주는 듯하다가 그 다음에는 형편없이 떨어뜨립니다.

사회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이름도 그와 같은데 하물며 내 이름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니 아예 이름 남길 생각은 하지도 마십시오. 이름이 무엇이기에 그처럼 연연해합니까? 옛사람들은 이름 없이도 잘살았습니다. 웬만하면 수원 댁, 무슨 댁하며 살았습니다. 차라리 그렇게 죽 살았더라면 좋을 뻔했습니다. 별것도 아닌 이름 석 자, 별것도 아닌 명예에 왜 그토록 신경 쓰이는지-이것이 괴로운 노릇입니다. 괜한 일에 헛되이 시달리는 것입니다.

다섯째, 완전히 내맡기지 못하는 데에 걱정이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남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고,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저는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서울에서 합승택시를 자주 이용하곤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통행금지가 있던 때라 밤 11시가 넘으면 택시가 마구 내달립니다. 서울역에서부터 인천까지 35분 동안을 막 날아갑니다. 모두가 걱정이 되어서 "기사 양반, 좀 천천히 갑시다" 하면 운전 기사가 한마디합니다. "손님들의 생명은 지금 내가 맡아 있습니다. 여러 말 마시고 가만히 앉아 계십시오." 죽든 살든 운전대를 잡은 기사한테다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마디 덧붙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이지만 저도 처자식이 있는 몸입니다. 제 생명도 중요합니다. 걱정 말고 편히 앉아 계십시오." 옳은 말입니다. 자동차에 앉아 걱정하는 사람-이것 참 바보스러운 사람입니다. 어차피 운전하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 그 사람한테 다 맡겨 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차 남에게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맡기겠으면 전적으로 맡겨 놓고 마음을 푹 놓아야 합니다. 맡겨 놓고 걱정은 왜합니까? 그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남을 믿지 못하는 데서오는 걱정입니다.

여섯째, 날씨 때문에 걱정하는 것입니다. 결혼식 날짜 잡아놓고 비오면 어쩌나 애를 태웁니다. 쓸데없는 고생입니다. 비가 오면 오는 것이지 내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비오면 우산 받고 나가면 그만입니다. 결혼을 축복하는 복된 비라고 생각하면 그만입니다. 걱정한다고 올 비가 안 오고 걱정하지 않는다고 안 올 비가오지 않습니다. 날씨 걱정은 사서하는 걱정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내 마음대로 어떻게 하겠다고 걱정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결혼 날짜 봐서 비오고 안 오고를 결정하십니까? 일곱째, 병들까봐 걱정입니다. 사람은 어차피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건강할 때에 병들 것을 걱정하는 것은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죽을까봐 걱정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다고 죽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내 차례가 될 것입니다. 사람은 죽게되어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죽어 갈까, 어떠한 형편에서 죽을까, 걱정할 일입니다. 죽음 자체를 걱정하는 것, 이것은 참으로 바보스러운 걱정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걱정하느냐, 얼마동안 걱정하느냐입니다. 어떤사람은 '나는 몇 월 며칠까지 이 문제를 걱정하고 그 다음부터는 하지 않겠다.' 하고 미리 고민하는 기간을 정해 놓습니다.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무작정 걱정만 하다가 그 문제 하나로 평생토록 걱정하며 죽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얼마나 멍청한 노릇입니까? 결단을 내리십시오. 기왕에 걱정할 일이라면 몇 월 며칠까지만 하고 그 다음부터는 생각하지 않기로 말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더라도 걱정할 일은 걱정하고 걱정 하나마나한 일은 접어두기로 그 한계를 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밑도 끝도 없는 걱정 때문에 건강을 해치고 그 밖의 다른 중요한 일까지 다 망쳐 버리는 사람은 참으로 멍청한 사람이요, 구제 불능입니다.

걱정했으면 그에 따른 결과가 있어야 합니다. 시험 날짜 다가오는 것이 걱정이라면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는 하지 않고 걱정만 한다면 그 걱정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걱정하는 시간에 이미 알았던 것까지도 잊어버릴 것입니다. 바보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So What?)---무엇인가 결과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걱정만 하면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걱정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생산해내어야 합니다.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걱정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비생산적이고 절망적이고 사망에 이르는 염려를 하면서 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 받아들여야 될 것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이 모든 것은 받아들여야 할 일들입니다. 받아들일 것은 냉정하게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그 안에서 최선의 의미를 창조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기 전에 미리 설명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 년 반에 걸친 많은 수고와 어려움 가운데서 고린도교회를 세웠습니다. 특별히 난산(難産) 끝에 세워진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어렵게 세워진 교회에 부도덕한 사건과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사랑한 만큼 또한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참사랑이란 결코 불의에 대하여 침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불의를 보고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끓어오르는 참사랑 때문에 사도 바울은 저들을 책망해야 했고, 견책해야 했고, 분노해야 했으며, 때로는 간절한 마음으로 권면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참사랑은 책망하면서 마음 아파합니다. 여러분은 혹 누구를 권면하든가 책망할 때에 기분이 통쾌합니까? 누군가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서 마음이 기쁩니까? 그것은 죄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의 책망과 권면 속에는 아픈 마음이 있습니다. 저들이 이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쩌나, 오히려 역반응을 보이면 어쩌나 하고 근심 걱정합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바울의 책망과 권면을 무리 없이 잘 받아들였습니다. 편지를 가져온 바울의 동역자를 정중히 영접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에 잃어버렸던 관심을 되찾았습니다. 그리하여 주님 사모하는 마음과 뉘우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회개하며 애통해했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고, 열심을 내어 경건함과 성결과 진실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이제 고린도교회에 그 동안 걱정 끼친 것에 대하여 미안하다고 위로합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의 깨끗하고 사려 깊은 마음씨가 잘 드러납니다. 그 동안 얼마나 아팠느냐?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느냐?-마치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도 같습니다. 부모는 아무리 사랑하는 자녀일지라도 아니,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그 자식이 잘못할 때에 서슴없이 회초리를 듭니다. 그러나 아이가 울며 잘못을 빌면 곧 용서해 줍니다. 그리고는 잠든 아이의 퍼렇게 멍든 다리를 쓰다듬으면서 애처롭고 가엾어서 눈물 흘리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의 아픈 책망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았을 때에 바울은 마음이 기쁜 한편으로 또 너무 아프게 책망하지 않았나 싶어 가엾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오늘의 편지를 통하여 저들의 근심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도 근심이 있었고 너희들에게도 근심이 있었으나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그 근심이 오히려 회개를 이루고 구원을 이루었으니 그저 잘된 일이다"-이것이 편지의 요점입니다. 저들의 근심은 결과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말하면서 매맞은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있습니다. 어버이처럼 따뜻하고 고마운 마음이 여기에 나타나있습니다. 문제는 근심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근심했느냐 입니다. 그리고 그 근심이 잠깐동안으로 아름다운 결과를 보았으니 잘된 일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여러분, 근심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아가페, 그 귀한 사랑의 근본에서 생겨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 중심으로가 아니라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얻어지는 근심, 하나님의 나라와 의, 그 무한한 뜻을 생각하면서 우러나오는 근심, 구원의 약속을 믿기에 생기는 근심이야말로 참된 의미가 있다고 본문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두 가지 근심 세상 근심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나누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 근심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상실과 손해에 대한 근심입니다. 물질의 손해를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증권 사놓고 주식 값 떨어지면 어쩌나, 집 값 떨어지면 어쩌나, 땅값 떨어지면 어쩌나, 내가 투자한 사업이 실패해서 손해를 보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것 말입니다. 또 사랑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배신을 당하면 어쩌나. 인기가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따위의 걱정들이 모두 이기적인 생각에서 생기는 근심, 세상적인 근심입니다. 둘째, 실망에 대한 근심입니다. 바라는 일이 있는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하는 것---이것은 욕망과 자기 이상에 근거한 것이요, 지나친 욕심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불신앙적인 근심입니다. 일이 잘못될까봐, 혹은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남에 대해서 실망하게 될까봐 하는 걱정입니다. 셋째, 죄책에 대한 근심입니다. 이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내가 잘못했다, 분명히 잘못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고 하는 죄책은 있는데 회개가 없습니다. 후회하는 마음은 있는데 되돌아서는 결단이 없습니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고 계속 자책, 절망, 심지어는 자학까지 합니다. 그리고 미래를 어둡게 전망합니다. 나 같은 인간한테 어떻게 밝은 미래가 있겠느냐고, 내가 한 짓이 있는데 어떻게 내 자식이 잘되겠느냐고, 내가 남을 억울하게 해왔는데 어떻게 내 앞에 억울한 일이 없겠느냐고 미래를 어둡게만 전망합니다. 앞이 캄캄합니다.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근심하는 것-이 미지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 세상의 근심입니다. 이것을 좀더 특징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죄에 대하여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한 결과에 대하여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 성찰이 아닙니다. 나와 다른 사람까지 원망하면서 절망적 불안을 느끼는, 그런 근심입니다. 책벌과 형벌만을 생각했지 죄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나에게 벌을 가하시는 그분께 대하여 원망과 저주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우스갯소리입니다. 십계명이라는 것은 10개의 계명이라 해서 십계명인데, 여기에 한 가지 계명이 더 있다고 합니다. 그 열 한 번째 계명인즉 '들키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더라도 들키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죄지은 데 대한 두려움과 죄지은 것 들킬까봐 두려운 것은 성격이 전혀 다른 두려움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근심하고 있습니까? 다윗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지은 것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범죄 사실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사망에 이르는 두려움입니다. 다윗은 죄 자체를 두려워했어야 옳았습니다. 또 가인을 봅시다. 가인과 아벨이 함께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습니다. 그때에 벌써 근심이 있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내 제사를 받지 않으실까?' 하고 고민하며 반성하는 것-이것이 아름다운 근심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대뜸 '왜 동생 녀석의 제사만 받으셨나' 하고 시샘을 합니다. 그리고는 동생을 없애 버립니다. 이번에는 '이거 어쩌다 내가 동생을 죽였나' 하고 걱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웬걸요? 가인은 하나님께서 책망하고 벌하실 때 반성은커녕 저 죽을까봐 걱정입니다. "이제 나는 죄지은 몸이라서 누구든지 나를 만나면 돌로 쳐죽이려 할 텐데 어떻게 하지요?"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과실 자체는 부끄러운 것이고,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를 부끄러워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잘못한 것, 내가 지은 죄는 두려워하되, 죄의 결과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죄 자체를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죄의 결과로 오는 심판, 남들의 따가운 눈총과 질타에 신경 쓰고 두려워하는 이것은 사망에 이르는 두려움입니다. 그러한 두려움은 다시 죄를 짓게 합니다. 조금전보다 더 크고 무서운 죄를 짓게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죄 자체입니까, 죄의 결과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범한 죄를 두려워하여 그분 앞에 무릎꿇고 고해하는 중입니까? 아니면 그 죄 때문에 남들이 나를 비평할 것, 내 명예가 떨어질 것, 내 지위가 떨어질 것, 그리고 그것 때문에 복 받지 못할 것 등을 두려워하는 중입니까?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근심의 초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궁극적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발각될까봐 두려워하는 근심---이러한 근심은 모두 세상적인 근심이요, 그 마지막은 사망일뿐입니다.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그 자체를 근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까봐, 죄 용서받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걱정과는 전혀 성격이 다릅니다.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십자가의 크신 은혜로, 그 피의 공로로 이미 죄 사함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형벌이 두렵고 지옥이 무서워서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기는 가지만 그분 앞에 간구할 것이 없어서 걱정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어서 걱정입니다. 언젠가 제가 어느 장로님의 임종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그 장로님은 고혈압으로 숨이 차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사업 걱정, 자녀 걱정그렇게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정 숨이 차 올라오니까 다 소용없다고, "하나님, 제가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하고 죄에 대해서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옆에서 우리가 기도를 해드리니 믿음을 얻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믿습니다. 이제 죄 사함 받은 것을 믿습니다." 이제는 죄지은 것도 걱정이 아니요, 하나님 앞으로 갈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 가지 걱정이 남았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자꾸 미룬 것,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요리조리 핑계하고 빠진 것, 해야할 일을 하지 않고 게으름피운 것-이 모든 것이 걱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기도하기를 "하나님, 지금 저를 데려가시면 저는 당신 앞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부끄러워서 도저히 당신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저로 하여금 무엇인가 좀더 일을 하고 당신 앞으로 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이처럼 안타깝게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걱정은 무엇입니까? 벌받을까 봐서입니까? 지옥 갈까봐서입니까? 아닙니다. 틀림없이 하나님 앞으로 가기는 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질까 봐 그것이 걱정입니다. 가끔 장례식에 가 보면 이미 세상 떠난 분 앞에서 효도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 생전에 효도 좀 해드려야 했는데" 하면서 웁니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입니다.

이제 와서 쓸데없는 이야기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런가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죽은 사람 앞에서 자기 걱정을 합니다. 남편이 죽었으니 이제부터 나는 어떻게 사나,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어떻게 하나내내 자기 걱정뿐입니다. 그러나 제가 장례식 때마다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은 이제 이 걱정 저 걱정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먼저 갈 사람은 먼저 가고, 나중 갈 사람은 나중 가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먼저 가든 나중 가든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는지, 그것을 걱정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궁극적인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가서 어떠한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인지 그것이 걱정입니다. 하나님 마음을 너무도 많이 아프게 해드렸습니다. 하나님말씀을 너무도 많이 거역했습니다. 하나님께로 그 많은 사랑을 받아 누리면서도 그 사랑에 대하여 너무도 많이 배신을 일삼았습니다. 이것이 걱정스러운 것입니다. 말씀을 알고도 행치 않았고, 성령의 감화를 받으면서도 말씀대로 살아가지 아니한 것에 대한 죄송스러운 마음---그것이 문제입니다.

본문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의 편지를 받고 나서 간절하게 되고, 변명하게 되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분하게 되고, 경건하게 되고, 두렵게 되고, 사모하게 되고, 열심을 내게 되고, 악 자체에 대해서 벌하게 되고,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근심의 결과로 생산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큰사랑, 내가 입은 많은 사랑을 생각하면서 이제는 그분의 자녀된 바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죄송한 마음-여기에 우리의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걱정 없기를 바라지 말고 차라리 열심히 걱정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 열중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쓸데없는 걱정으로부터 자유 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회개가 있고, 구원이 있고, 무한한 자유가 있습니다. 여기에 능력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근심을 하고 계십니까? 걱정해야 할 것을 걱정하십시오. 그리할 때에 참으로 회개와 구원과 친절, 그리고 성숙함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근심(고린도후서 7811)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먹고 배부르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누워 잠만 자는 동물보다는 근심이 있고 고민이 있고 번뇌가 있는 인간이 더 아름답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 걱정도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제 다 살았다' 하는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근심 없는 사람도 없고 근심 없는 사회도 없습니다. 결코 근심 없는 공간도 시간도 없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다만 근심하지 아니할 뿐입니다.

이따금 저는 칠십 평생 감기 한번 앓아 본 적이 없다고 건강에 대해서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분들을 봅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오히려 은퇴 후에 무기력하게 쓰러지는 것은 왜입니까? 일흔까지는 아주 정정하게 사업에 매진합니다. 그러나 은퇴하여 이제는 아무 걱정 없다고 한시름 놓았는데, 정작 걱정거리가 없어지고 나니까 그만 자리에 눕거나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여러분, 많은 걱정거리를 안고 신음하지만 그 걱정에서 벗어날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문제는 걱정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어떤 걱정을 하느냐 입니다. 개중에는 참으로 쓸데없는 걱정도 많습니다. 그래서 걱정도 하다 보면 버릇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걱정할 필요 없는 일곱 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함께 생각해 보고, 여러분의 걱정은 어디에 해당하는지 냉정하게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지나간 일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미 다 지나간 일입니다.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이제는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합니다. 끝난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끊임없이 걱정합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리석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 끝나버린 일을 붙들고 걱정하는 것은 바보짓이요 시간 낭비입니다. 그런데도 여기에서 쉽사리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걱정입니다.

둘째, 기우(杞憂)입니다. '기우'라는 말에는 재미있는 유래가 있습니다. 옛 중국의 기나라에 하늘이 무너질까 땅이 꺼질까 걱정하며 침식을 잊고 근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기우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기나라 사람의 걱정'이라는 뜻이지요.

오지 않을 일, 일어나지 않을 일을 걱정하는 것을 가리켜 '기우'라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 때문에 어쩌나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것이니 얼마나 바보스럽습니까? 그러나 의외로 이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네 걱정의 태반이 기우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셋째,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걱정입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고 교만한 걱정인지 모릅니다. 내가 무엇인데 내 마음대로 되기를 바랍니까? 어떻게 세상 만사가 내 마음대로 된다는 말입니까? '내 마음, 내 뜻대로'를 고집하며 거기에 못을 박고 걱정 근심합니다. 여러분, '내 뜻'이라는 것은 아예 잊어버리십시오. 어떤 부모님들은 자식이 당신들 마음대로 결혼해 주지 않는다고 걱정합니다. 이런 착각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식의 결혼이지 부모의 결혼입니까? 다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어떻게 자식의 일이 부모 마음대로 되기를 바랍니까? '내 마음대로'에는 어쩔 수 없이 한계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 마음 대로를 고집하기 때문에 쓸데없는 걱정거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넷째, 자신-자기 이름을 내세우려 하는 데에 걱정이 있습니다. 이름, 별것도 아닙니다. 누가 내 이름을 기억이나 해주겠습니까? 요즘은 누구 이름인들 소중히 여기지 않는 시대입니다. 한때는 좀 높여 주는 듯하다가 그 다음에는 형편없이 떨어뜨립니다.

사회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이름도 그와 같은데 하물며 내 이름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니 아예 이름 남길 생각은 하지도 마십시오. 이름이 무엇이기에 그처럼 연연해합니까? 옛사람들은 이름 없이도 잘살았습니다. 웬만하면 수원 댁, 무슨 댁하며 살았습니다. 차라리 그렇게 죽 살았더라면 좋을 뻔했습니다. 별것도 아닌 이름 석 자, 별것도 아닌 명예에 왜 그토록 신경 쓰이는지-이것이 괴로운 노릇입니다. 괜한 일에 헛되이 시달리는 것입니다.

다섯째, 완전히 내맡기지 못하는 데에 걱정이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남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고,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저는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서울에서 합승택시를 자주 이용하곤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통행금지가 있던 때라 밤 11시가 넘으면 택시가 마구 내달립니다. 서울역에서부터 인천까지 35분 동안을 막 날아갑니다. 모두가 걱정이 되어서 "기사 양반, 좀 천천히 갑시다" 하면 운전 기사가 한마디합니다. "손님들의 생명은 지금 내가 맡아 있습니다. 여러 말 마시고 가만히 앉아 계십시오." 죽든 살든 운전대를 잡은 기사한테다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마디 덧붙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이지만 저도 처자식이 있는 몸입니다. 제 생명도 중요합니다. 걱정 말고 편히 앉아 계십시오." 옳은 말입니다. 자동차에 앉아 걱정하는 사람-이것 참 바보스러운 사람입니다. 어차피 운전하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 그 사람한테 다 맡겨 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차 남에게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맡기겠으면 전적으로 맡겨 놓고 마음을 푹 놓아야 합니다. 맡겨 놓고 걱정은 왜합니까? 그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남을 믿지 못하는 데서오는 걱정입니다.

여섯째, 날씨 때문에 걱정하는 것입니다. 결혼식 날짜 잡아놓고 비오면 어쩌나 애를 태웁니다. 쓸데없는 고생입니다. 비가 오면 오는 것이지 내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비오면 우산 받고 나가면 그만입니다. 결혼을 축복하는 복된 비라고 생각하면 그만입니다. 걱정한다고 올 비가 안 오고 걱정하지 않는다고 안 올 비가오지 않습니다. 날씨 걱정은 사서하는 걱정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내 마음대로 어떻게 하겠다고 걱정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결혼 날짜 봐서 비오고 안 오고를 결정하십니까? 일곱째, 병들까봐 걱정입니다. 사람은 어차피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건강할 때에 병들 것을 걱정하는 것은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죽을까봐 걱정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다고 죽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내 차례가 될 것입니다. 사람은 죽게되어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죽어 갈까, 어떠한 형편에서 죽을까, 걱정할 일입니다. 죽음 자체를 걱정하는 것, 이것은 참으로 바보스러운 걱정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걱정하느냐, 얼마동안 걱정하느냐입니다. 어떤사람은 '나는 몇 월 며칠까지 이 문제를 걱정하고 그 다음부터는 하지 않겠다.' 하고 미리 고민하는 기간을 정해 놓습니다.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무작정 걱정만 하다가 그 문제 하나로 평생토록 걱정하며 죽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얼마나 멍청한 노릇입니까? 결단을 내리십시오. 기왕에 걱정할 일이라면 몇 월 며칠까지만 하고 그 다음부터는 생각하지 않기로 말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더라도 걱정할 일은 걱정하고 걱정 하나마나한 일은 접어두기로 그 한계를 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밑도 끝도 없는 걱정 때문에 건강을 해치고 그 밖의 다른 중요한 일까지 다 망쳐 버리는 사람은 참으로 멍청한 사람이요, 구제 불능입니다.

걱정했으면 그에 따른 결과가 있어야 합니다. 시험 날짜 다가오는 것이 걱정이라면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는 하지 않고 걱정만 한다면 그 걱정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걱정하는 시간에 이미 알았던 것까지도 잊어버릴 것입니다. 바보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So What?)---무엇인가 결과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걱정만 하면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걱정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생산해내어야 합니다.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걱정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비생산적이고 절망적이고 사망에 이르는 염려를 하면서 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 받아들여야 될 것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이 모든 것은 받아들여야 할 일들입니다. 받아들일 것은 냉정하게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그 안에서 최선의 의미를 창조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기 전에 미리 설명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 년 반에 걸친 많은 수고와 어려움 가운데서 고린도교회를 세웠습니다. 특별히 난산(難産) 끝에 세워진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어렵게 세워진 교회에 부도덕한 사건과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사랑한 만큼 또한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참사랑이란 결코 불의에 대하여 침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불의를 보고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끓어오르는 참사랑 때문에 사도 바울은 저들을 책망해야 했고, 견책해야 했고, 분노해야 했으며, 때로는 간절한 마음으로 권면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참사랑은 책망하면서 마음 아파합니다. 여러분은 혹 누구를 권면하든가 책망할 때에 기분이 통쾌합니까? 누군가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서 마음이 기쁩니까? 그것은 죄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의 책망과 권면 속에는 아픈 마음이 있습니다. 저들이 이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쩌나, 오히려 역반응을 보이면 어쩌나 하고 근심 걱정합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바울의 책망과 권면을 무리 없이 잘 받아들였습니다. 편지를 가져온 바울의 동역자를 정중히 영접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에 잃어버렸던 관심을 되찾았습니다. 그리하여 주님 사모하는 마음과 뉘우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회개하며 애통해했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고, 열심을 내어 경건함과 성결과 진실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이제 고린도교회에 그 동안 걱정 끼친 것에 대하여 미안하다고 위로합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의 깨끗하고 사려 깊은 마음씨가 잘 드러납니다. 그 동안 얼마나 아팠느냐?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느냐?-마치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도 같습니다. 부모는 아무리 사랑하는 자녀일지라도 아니,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그 자식이 잘못할 때에 서슴없이 회초리를 듭니다. 그러나 아이가 울며 잘못을 빌면 곧 용서해 줍니다. 그리고는 잠든 아이의 퍼렇게 멍든 다리를 쓰다듬으면서 애처롭고 가엾어서 눈물 흘리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의 아픈 책망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았을 때에 바울은 마음이 기쁜 한편으로 또 너무 아프게 책망하지 않았나 싶어 가엾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오늘의 편지를 통하여 저들의 근심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도 근심이 있었고 너희들에게도 근심이 있었으나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그 근심이 오히려 회개를 이루고 구원을 이루었으니 그저 잘된 일이다"-이것이 편지의 요점입니다. 저들의 근심은 결과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말하면서 매맞은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있습니다. 어버이처럼 따뜻하고 고마운 마음이 여기에 나타나있습니다. 문제는 근심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근심했느냐 입니다. 그리고 그 근심이 잠깐동안으로 아름다운 결과를 보았으니 잘된 일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여러분, 근심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아가페, 그 귀한 사랑의 근본에서 생겨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 중심으로가 아니라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얻어지는 근심, 하나님의 나라와 의, 그 무한한 뜻을 생각하면서 우러나오는 근심, 구원의 약속을 믿기에 생기는 근심이야말로 참된 의미가 있다고 본문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두 가지 근심 세상 근심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나누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 근심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상실과 손해에 대한 근심입니다. 물질의 손해를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증권 사놓고 주식 값 떨어지면 어쩌나, 집 값 떨어지면 어쩌나, 땅값 떨어지면 어쩌나, 내가 투자한 사업이 실패해서 손해를 보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것 말입니다. 또 사랑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배신을 당하면 어쩌나. 인기가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따위의 걱정들이 모두 이기적인 생각에서 생기는 근심, 세상적인 근심입니다. 둘째, 실망에 대한 근심입니다. 바라는 일이 있는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하는 것---이것은 욕망과 자기 이상에 근거한 것이요, 지나친 욕심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불신앙적인 근심입니다. 일이 잘못될까봐, 혹은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남에 대해서 실망하게 될까봐 하는 걱정입니다. 셋째, 죄책에 대한 근심입니다. 이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내가 잘못했다, 분명히 잘못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고 하는 죄책은 있는데 회개가 없습니다. 후회하는 마음은 있는데 되돌아서는 결단이 없습니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고 계속 자책, 절망, 심지어는 자학까지 합니다. 그리고 미래를 어둡게 전망합니다. 나 같은 인간한테 어떻게 밝은 미래가 있겠느냐고, 내가 한 짓이 있는데 어떻게 내 자식이 잘되겠느냐고, 내가 남을 억울하게 해왔는데 어떻게 내 앞에 억울한 일이 없겠느냐고 미래를 어둡게만 전망합니다. 앞이 캄캄합니다.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근심하는 것-이 미지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 세상의 근심입니다. 이것을 좀더 특징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죄에 대하여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한 결과에 대하여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 성찰이 아닙니다. 나와 다른 사람까지 원망하면서 절망적 불안을 느끼는, 그런 근심입니다. 책벌과 형벌만을 생각했지 죄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나에게 벌을 가하시는 그분께 대하여 원망과 저주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우스갯소리입니다. 십계명이라는 것은 10개의 계명이라 해서 십계명인데, 여기에 한 가지 계명이 더 있다고 합니다. 그 열 한 번째 계명인즉 '들키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더라도 들키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죄지은 데 대한 두려움과 죄지은 것 들킬까봐 두려운 것은 성격이 전혀 다른 두려움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근심하고 있습니까? 다윗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지은 것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범죄 사실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사망에 이르는 두려움입니다. 다윗은 죄 자체를 두려워했어야 옳았습니다. 또 가인을 봅시다. 가인과 아벨이 함께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습니다. 그때에 벌써 근심이 있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내 제사를 받지 않으실까?' 하고 고민하며 반성하는 것-이것이 아름다운 근심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대뜸 '왜 동생 녀석의 제사만 받으셨나' 하고 시샘을 합니다. 그리고는 동생을 없애 버립니다. 이번에는 '이거 어쩌다 내가 동생을 죽였나' 하고 걱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웬걸요? 가인은 하나님께서 책망하고 벌하실 때 반성은커녕 저 죽을까봐 걱정입니다. "이제 나는 죄지은 몸이라서 누구든지 나를 만나면 돌로 쳐죽이려 할 텐데 어떻게 하지요?"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과실 자체는 부끄러운 것이고,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를 부끄러워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잘못한 것, 내가 지은 죄는 두려워하되, 죄의 결과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죄 자체를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죄의 결과로 오는 심판, 남들의 따가운 눈총과 질타에 신경 쓰고 두려워하는 이것은 사망에 이르는 두려움입니다. 그러한 두려움은 다시 죄를 짓게 합니다. 조금전보다 더 크고 무서운 죄를 짓게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죄 자체입니까, 죄의 결과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범한 죄를 두려워하여 그분 앞에 무릎꿇고 고해하는 중입니까? 아니면 그 죄 때문에 남들이 나를 비평할 것, 내 명예가 떨어질 것, 내 지위가 떨어질 것, 그리고 그것 때문에 복 받지 못할 것 등을 두려워하는 중입니까?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근심의 초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궁극적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발각될까봐 두려워하는 근심---이러한 근심은 모두 세상적인 근심이요, 그 마지막은 사망일뿐입니다.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그 자체를 근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까봐, 죄 용서받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걱정과는 전혀 성격이 다릅니다.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십자가의 크신 은혜로, 그 피의 공로로 이미 죄 사함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형벌이 두렵고 지옥이 무서워서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기는 가지만 그분 앞에 간구할 것이 없어서 걱정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어서 걱정입니다. 언젠가 제가 어느 장로님의 임종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그 장로님은 고혈압으로 숨이 차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사업 걱정, 자녀 걱정그렇게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정 숨이 차 올라오니까 다 소용없다고, "하나님, 제가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하고 죄에 대해서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옆에서 우리가 기도를 해드리니 믿음을 얻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믿습니다. 이제 죄 사함 받은 것을 믿습니다." 이제는 죄지은 것도 걱정이 아니요, 하나님 앞으로 갈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 가지 걱정이 남았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자꾸 미룬 것,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요리조리 핑계하고 빠진 것, 해야할 일을 하지 않고 게으름피운 것-이 모든 것이 걱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기도하기를 "하나님, 지금 저를 데려가시면 저는 당신 앞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부끄러워서 도저히 당신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저로 하여금 무엇인가 좀더 일을 하고 당신 앞으로 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이처럼 안타깝게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걱정은 무엇입니까? 벌받을까 봐서입니까? 지옥 갈까봐서입니까? 아닙니다. 틀림없이 하나님 앞으로 가기는 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질까 봐 그것이 걱정입니다. 가끔 장례식에 가 보면 이미 세상 떠난 분 앞에서 효도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 생전에 효도 좀 해드려야 했는데" 하면서 웁니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입니다.

이제 와서 쓸데없는 이야기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런가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죽은 사람 앞에서 자기 걱정을 합니다. 남편이 죽었으니 이제부터 나는 어떻게 사나,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어떻게 하나내내 자기 걱정뿐입니다. 그러나 제가 장례식 때마다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은 이제 이 걱정 저 걱정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먼저 갈 사람은 먼저 가고, 나중 갈 사람은 나중 가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먼저 가든 나중 가든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는지, 그것을 걱정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궁극적인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가서 어떠한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인지 그것이 걱정입니다. 하나님 마음을 너무도 많이 아프게 해드렸습니다. 하나님말씀을 너무도 많이 거역했습니다. 하나님께로 그 많은 사랑을 받아 누리면서도 그 사랑에 대하여 너무도 많이 배신을 일삼았습니다. 이것이 걱정스러운 것입니다. 말씀을 알고도 행치 않았고, 성령의 감화를 받으면서도 말씀대로 살아가지 아니한 것에 대한 죄송스러운 마음---그것이 문제입니다.

본문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의 편지를 받고 나서 간절하게 되고, 변명하게 되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분하게 되고, 경건하게 되고, 두렵게 되고, 사모하게 되고, 열심을 내게 되고, 악 자체에 대해서 벌하게 되고,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근심의 결과로 생산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큰사랑, 내가 입은 많은 사랑을 생각하면서 이제는 그분의 자녀된 바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죄송한 마음-여기에 우리의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걱정 없기를 바라지 말고 차라리 열심히 걱정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 열중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쓸데없는 걱정으로부터 자유 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회개가 있고, 구원이 있고, 무한한 자유가 있습니다. 여기에 능력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근심을 하고 계십니까? 걱정해야 할 것을 걱정하십시오. 그리할 때에 참으로 회개와 구원과 친절, 그리고 성숙함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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