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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충만의 기적(사도행전 2장 37절~47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여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사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덕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상(理想)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이상에 도달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도 이상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보라, 높은 이상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쉬지 않고 일하는 개미떼와 다를 것이 없다'고 한 철학자 헤겔의 말도 백번 옳은 말입니다. 이상이 너무 멀고 높아서, 늘 현실에 얽매여 있는 우리는 자칫 그것을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이상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잃어버려서도 안 되고 변질시켜서도 안 됩니다.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고달파도 우리는 높은 이상, 바른 이상을 꼭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어둡고 캄캄한 밤에도 별은 빛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쓰는 격언 가운데 별로 좋지 않은 격언이하나 있습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일리는 있습니다마는, 저는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거부감을 느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쳐다보지도 않는 나무를 어떻게 올라갑니까? 쳐다보아야 올라갈 마음이라도 먹습니다. 오르다가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오를 생각은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바르고 높은 이상을 분명히 세우고 그것을 앙망해야 합니다. 내 평생 거기에 이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래도 쳐다보아야 하고, 다다를 의욕을 가져야 합니다. 가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그것을 바라고 열심히 나아가야 합니다. 그 방향으로 힘자라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달려가야 합니다. 또 몇 퍼센트밖에 이루지 못하고 끝날지라도 그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풀어진 끈을 다시 여미듯이 이 점을 다시 한번 깊이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이상적 교회상(敎會橡), 이상적 교인상(敎人橡)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교회라야 이상적인 교회라 할 수 있으며, 어떤 교인이라야 이상적인 교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오순절 교회, 성령이 충만한 교회---이것이 바로 이상적 교회상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초대 교인'들---예수님의 살아 계심을 피부로 느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교제를 나누고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이야말로 이상적인 교인상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그런 이상적 교회상, 이상적 교인상의 참 모델을 볼 수 있는 동시에 참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는 사람들은 본문에서 공산주의적인 사회성을 본다고도 합니다. 그렇게 오해할 만한 소지가 없지는 않습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이 두 대목에서 공산주의와 같은 인상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서로 통용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유무상통(有無相通)입니다.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돈 있는 사람은 돈 없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 없는 사람에게 지식을 줍니다. 돈을 주고 지식을 얻거나 지식을 주고 돈을 얻는 식으로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들이 서로서로 필요한 것을 융통해 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모두 그렇게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GNP가 높느니 낮느니, 잘사느니 못사느니 하지만 그런 대로 우리에게 있는 것들을 가지고도 서로 나누어 쓸 수만 있다면 훌륭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제 말씀을 극단적으로 이해하지 마시고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댁에 몇 년이 가도입지 않고 있는 옷가지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장농 속에 처박혀 있다가 말 옷가지들이 있지요? 어서 필요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십시오. 여러분한테는 있으나 마나 일지 몰라도 헐벗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귀한 것들입니다. 만약에 입지도 않으면서 그런 옷가지들을 장농 속에 그냥 처박아 둔 채 하늘나라에 간다면 하나님 앞에서 책망을 듣습니다. 어디 옷가지뿐이겠습니까? 사용치도 않는 가구, 보지도 않는 책, 쓰지도 않는 가전 제품 등등, 그냥놔두면 다 썩어 없어질 것들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나누어 써야 합니다. 유무상통해야 합니다.
또, 필요를 따라 나눠준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능력에 따라 나누어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능력에 따라 나누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분배 방식인데, 여기에 자본주의의 결정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실력 있는 사람, 재간 있는 사람 많이 수고한 사람은 많이 가지고, 능력 없는 사람, 재주 없는 사람은 조금 가져라---이것이 자본주의의 결점입니다. 자, 필요를 따라 나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 교회가 내외분 다 장님된 분들을 위해 성남에다 집을 한 채 마련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우리가 그분들한테 식량을 대어 왔으며, 거처가 문제되어서 이번에 집을 지어 드리기로 한 것입니다. 22세대가 들어갈 수 있는 집인데, 이제 준공을 며칠 앞두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내외분이 다 장님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젊을 때는 안마사로 다녀 보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어서 그 일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한테 능력대로 분배한다고 하면 이들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필요에 따라 나눠주어야 할 분들입니다. 그러니 이 사회가 능력에 따른 분배만 가지고는 절대로 건강한 사회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서 나눠주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상적인 사회입니다. 공산주의 사회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성경 안에 공산주의가 있다'고 단정짓는 것은 섣부른 착각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속에 나오는 초대교회와 공산주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이제부터 두 구조를 비교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말합니다---'나의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네 것은 내 것이다'---이렇게 생각합니다. 보십시오. 이야기가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또 초대교회 사람들은 '내 것을 가져가십시오. 내 것을 갖다 쓰십시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당신 것을 내게 주시오'합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이 뿌리가 되어, 그 사랑 때문에 나누어 줍니다마는, 공산주의자들은 부자를 증오한 나머지 강제로 빼앗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사랑과 동정으로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분노와 증오로 분열과 불신을 낳습니다. 또한 초대교회에서는 말씀과 성령이 그 동인(動因)이 됩니다. 그래서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이데올로기와 투쟁과 혁명이 이것을 가능케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초대교회는 모든 것이 자원적(自願的)입니다. 기쁜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반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강제적입니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주는 자가 주도합니다. 주는 편에서 마음을 열고 기쁜 마음으로 주는 이상적인 사회입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사회는 받는 자가 주도합니다. 받는 편에서 주도하여 이상적 사회를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와 공산주의는 이처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정반대입니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이상적 교회상, 이상적 사회상은 오순절에 근거합니다. 이 오순절은 다시 부활절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오순절 사건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없이 있을 수 없고 이해될 수도 없습니다. 부활절과 오순절은 인과율(因果律)의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은 오순절에 있었던 일을 한마디로 표현합니다.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기사(奇事) 곧 이적(異蹟)은 헬라어로 '테라타'이고, 표적은 '세메이아'인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적은 초자연적 사건이며,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점에 중요한 의미가 있고, 표적이라는 것은 신령한 진리, 신령한 어떤 내용이 오늘의 현실로 나타났다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 이적과 표적이 세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먼저, 앉은뱅이가 걷고, 장님이 눈을 뜨며, 병자들이 안수 기도를 받고 나았습니다. 이것은 신체에 나타난 이적 기사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기적은 모든 사람의 내면적 생명 속에 나타난 중생의 기적입니다. 여러분, 육신이 병에 걸렸다가 낫는 것, 이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속 사람이 변해서 새사람 되는 것, 이것이 큰 기적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사람 하나 바로 되기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이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이적 중에서도 가장 큰 이적은 중생(重生)하는 기적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 되는 것, 이것이 기적 중의 기적이라는 말입니다. 신체에 나타난 이적, 내면적인 중생의 이적 다음으로 세 번째 이적은 사회에 나타난 이적입니다. 중생의 역사가 사회적으로 나타나고 실현되면서 공동체가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교회가 변하고, 인간 관계, 세계관이 모두 변화되어서 이상적 사회, 이상적 교회상을 이루게 되었더라는 말입니다. 좀더 깊이 분석해서 이 말씀을 드리면 그 원인은 이렇습니다. 본문 43절을 보십시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그렇습니다. 두려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사람됨은 그 사람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무서워합니까? 무엇이 두렵습니까? 맹수가 두렵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무섭기는 사람이 더 무섭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정말 무섭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죄악과 증오와 시기야말로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마음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내 마음입니다. 내 마음이 무섭습니다. 내 마음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스스로 깜짝 놀랄 만큼 내게 무서운 마음이 깃 들거든요. 요즘 살인 사건이다 강력 범죄다 하고 엽기적(獵奇的)인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마는,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나 자신에게는 범죄 하는 마음이 없습니까? 어느 가정 주부가 술 취하고 외박이 잦은 남편 때문에 늘 속을 썩였답니다. 어떤 때에 너무 속이 상해서 '차라리 과부가 낫지' 하고 신세 한탄을 할 때도 있었답니다. 여러분, 무심결에 일어난 생각이지만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생각입니까? 그 부인도 그런 생각을 하다말고 본인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남편이 정말 죽고 나 혼자 남게되면 어쩌나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살인하는 사람이 어디 따로 있습니까? 우리가 마음으로 저지르는 살인이 실로 얼마나 많습니까? 가장 무서운 것은 자신의 마음입니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죄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폭력을 두려워하고, 실패를 두려워하고, 병, 전쟁 따위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시한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전에 두렵던 것은 이제 두렵지 않았습니다. 로마 정권도, 사회 혼란도, 사회의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아무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핍박이나 고난, 죽음까지도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런 가운데서 경건을 찾았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오시는 분들을 보면 무척 겁에 질려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자리에 앉는 것마저도 두려워합니다. '이곳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인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인데……' 이런 외경심(畏敬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 이처럼 두려워하던 마음도 퇴색합니다. 습관적으로 예배를 보게 됩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여감에 따라 더욱 깊어져야할 경건이 없어지고 마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예배드리면서 보면 경건이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주기도문을 외고 있을 때에 어떤지 아십니까? 주기도문이 얼마나 중요한 기도입니까? 그런데 예배 끝에 "주기도문으로 마치겠습니다" 하면 그때부터 보따리 싸는 분들이 있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하나님을 부르기만 해 놓고 집에 갈 채비를 서두르는 것입니다. 손으로는 연신 짐을 챙기면서 습관적으로 입만 중얼중얼…… 여러분, 이것이 어찌 경건입니까! 어떤 시간인데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이때야말로 어느 때보다 경건해야 할 때가 아닙니까? 하나님이 곁에 계셔서 내게 응답하시는 시간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예배하는 자세가 불 경건한 사람들---그런 사람들에게는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당연히 무서워해야 할 것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앞에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제가 구라파의 어느 교회에 갔다가 참 좋은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당 정면에 십자가를 세워 놓았습니다마는 제가 방문했던 교회의 예배당 정면에는 동그랗고 커다란 등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제가 이상하게 여기고 물어 보았더니 그것은 하나님의 눈이라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눈앞에 앉아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시다, 이것을 항상 의식하면서 예배드리자 해서 그런 상징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일리 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여러분, 내가 하나님을 보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나를 보고 계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나의 생각, 나의 뼛속까지 속속들이 다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영으로 현존해 계시다고 믿고 또 믿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순간 주님의 임재를 가까이 느끼며 신령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경건한 모습입니까? 경건이란 원래두려움입니다. 'God's fear'---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이것은 죄 때문만도 아니고, 저주 때문도 아니고, 심판 때문도 아닙니다. 이 두려움은 임재 의식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얻어지는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에는 정반대 현상이 늘 따라다닙니다. 그것은 엄청난 용기입니다. 자,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이제 담대하게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거침없이 이런 말을 합니다. 대단한 용기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니까 그 외에 아무 것도 두려운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 것도 무섭지 않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을 초월했는데 무엇이 무섭겠습니까?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와 동시에 신령한 용기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히틀러가 나치스를 만들어 독일을 독재하고 있을 때입니다. 많은 사람이 핍박받고 고생하는데도 이 독재자 밑에서 모두가 다 무릎을 꿇었답니다. 처음에 아인슈타인(그는 본래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아니라 유대교인이었습니다) 박사는 기대했습니다. 대학 교수들이나 학생들은 의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치에 저항하지 않겠는가 하고요.
그러나 이들도 예외 없이 히틀러 앞에 무릎을 꿇고 아첨하더라는 것입니다. 저술가와 예술가, 그리고 언론인들도 이럭저럭 다 매수되고 말았답니다. 아인슈타인은 크게 낙심했지요. 그런데 오직 교회만은 독재자에게 끝까지 항거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많은 순교자를 내면서도 독재자와 싸우고 항거하는 것을 보자 아인슈타인은 비록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교회를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참된 교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에 하나님 외에는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얻어지는 충만의 기적입니다. 영 딴사람으로 중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딴 사람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 것을 뜻하겠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계시성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와 나와의 관계를 알게 됩니다. 오늘 성경본문에서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십자가 사건을 상기하며 회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내 의(義)를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자신이 이러한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 그들은 모든 지나간 죄와 존재에 관한 문제, 생명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해결을 봅니다. 그리고 십자가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태어납니다. 이래서 경건한 두려움과 참된 용기를 지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십자가를 믿게 되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설명을 들어서 다 알기는 하지만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이치는 맞는데 믿을 수가 없어요.
이처럼 답답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장 어려운 점은 상대방이 나를 믿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안 믿느냐고 따질 수도 없습니다. 안 믿어진다는데야 도리가 없지요. 무슨 말로도 믿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서 십자가가 믿어지고 알아지고, 믿어지고 깨달아집니다. 믿음 안에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믿음으로써 믿는 바를 보게 된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성령의 은혜 가운데에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사랑이 없으면 안됩니다. 보십시오. 베드로가 살아계신 예수님도 믿었고, 부활하신 예수님도 믿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그는 갈릴리 바닷가로 물고기를 잡으러 갑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 때 예수님이 찾아가셔서 원인 분석을 해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습니다.
사랑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생산성이 제로입니다. 비생산적입니다. 사랑함으로써만 새로운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이올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특권입니다. 비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이라는 것은 구원받기 위한 노력입니다. 하지만 구원이 어디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입니까? 때문에 그들의 선행은 허무와 절망으로 끝나 버립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의 자세입니다.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감격한 가운데 특권이라 생각하며 봉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피곤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도 성령이 아니면 실천할 수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사랑이 감상(感傷)으로 끝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있고 '아이고 안됐다' 싶어 도와야 한다는 마음도 있지만 이것을 베풀 수 있는 용기가 없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실천력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의 역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할 때에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마음이 열리고, 이기심이 사라지고, 벽이 무너집니다. 이웃을 돕는 길, 저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게 되고, 그 필요한 것을 주려는 마음을 가지게됩니다. 그러니까 이웃의 필요를 알게 되고, 필요한 바를 줄 수 있는 힘, 그 용기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한 영국인 여 선교사의 간증을 들어봅시다. 그녀는 미모와 지성미를 갖추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선교사가 되기 전에 그녀 자신은 만사에 자신이 없고 무기력했습니다. 좋은 옷을 입어도 남들은 다 예쁘다고 칭찬하지만 자신은 늘 불평스럽고, 아무리 좋은 것을 가져도 짜증스러워 못견디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불평 불만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그 여자 자신도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중생하는 체험을 합니다. 그러자 성령으로 중생을 체험하는 그 순간부터 이야기가 백 팔십도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누더기를 걸쳐도 아름답게 보이고, 자기가 전에 불만스러워했던 형편에 비추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형편을 이해하며 도울 마음이 생겼습니다.
전에는 나만 못 가지고 남들은 많이 가진 것처럼 생각되었는데, 이제는 내가 많이 가졌고 다른 사람들은 못 가졌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을 도와야겠다, 가르쳐야겠다, 베풀어야겠다 라는 마음이 생겨서 선교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가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저 여 선교사의 말을 들어보면 "나는 공주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왕자 같고 공주 같은 마음으로 충만할 때 이제는 베푸는 마음으로 여유를 주고 사랑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제의 기적입니다. 교제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 만나는 것이 꺼려집니까? 사람 만나는 것이 불편합니까? 다시 한번 엎드려 회개하십시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입을 때, 성령이 충만함을 받을 때, 그 능력으로 인해 사람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또한 교제에는 성찬이 있어야 합니다. 성찬 없이는 교제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예배를 드릴 때, 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만남을 가지게 될 때 비로소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없으면 성찬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말씀과 성령 안에서라야 베푸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이웃을 형제로 대하게 되며 원수도 사랑하게 되고, 어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칼빈은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집행되고, 성도들이 교제하며 말씀으로 훈련받는 곳이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흔히 교회는 '케뤼그마,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 아가페' 이 네 가지로 말합니다. '케뤼그마'란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고, '코이노니아' 란 fellowship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친교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디아코니아'는 서로서로 봉사하는 것, '아가페'는 서로 떡을 떼며 깊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신령한 교제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졌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들의 옛날 죄, 과거의 일들을 어떤 것이라도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안에 못박아 버리고 깨끗이 청산해 버렸습니다. 이제 과거의 것들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곧 주님이 재림하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현재 자기가 갖고 있는 소유가 무의미함을 압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쓰고 남을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사람들은 팔아서 나누어주었던 것입니다. 철저한 종말론적 신앙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이 저들의 굳은 마음을 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사람들은 현재 살아서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믿었습니다. 옥에 들어갔을 때 옥문을 열어 주시고, 내가 병중에 있을 때 일으켜 주시며, 때로는 옥문을 닫아 순교하게 하시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주시는 주님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믿었습니다. 이처럼 현실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저들은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는 이상적 교회상, 이상적 교인상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함의 기적입니다.
바닷물은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욱 심해집니다. 아무리 마셔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성령의 샘물, 참 샘물은 마실 때에 내가 시원함을 얻고, 배에서 솟아 나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시원하게 만들어 줄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의 역사요, 이상적 사회를 이루는 바른 길임을 깊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은혜가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의 기적(사도행전 2장 37절~47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여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사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덕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상(理想)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이상에 도달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도 이상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보라, 높은 이상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쉬지 않고 일하는 개미떼와 다를 것이 없다'고 한 철학자 헤겔의 말도 백번 옳은 말입니다. 이상이 너무 멀고 높아서, 늘 현실에 얽매여 있는 우리는 자칫 그것을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이상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잃어버려서도 안 되고 변질시켜서도 안 됩니다.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고달파도 우리는 높은 이상, 바른 이상을 꼭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어둡고 캄캄한 밤에도 별은 빛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쓰는 격언 가운데 별로 좋지 않은 격언이하나 있습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일리는 있습니다마는, 저는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거부감을 느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쳐다보지도 않는 나무를 어떻게 올라갑니까? 쳐다보아야 올라갈 마음이라도 먹습니다. 오르다가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오를 생각은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바르고 높은 이상을 분명히 세우고 그것을 앙망해야 합니다. 내 평생 거기에 이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래도 쳐다보아야 하고, 다다를 의욕을 가져야 합니다. 가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그것을 바라고 열심히 나아가야 합니다. 그 방향으로 힘자라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달려가야 합니다. 또 몇 퍼센트밖에 이루지 못하고 끝날지라도 그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풀어진 끈을 다시 여미듯이 이 점을 다시 한번 깊이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이상적 교회상(敎會橡), 이상적 교인상(敎人橡)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교회라야 이상적인 교회라 할 수 있으며, 어떤 교인이라야 이상적인 교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오순절 교회, 성령이 충만한 교회---이것이 바로 이상적 교회상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초대 교인'들---예수님의 살아 계심을 피부로 느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교제를 나누고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이야말로 이상적인 교인상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그런 이상적 교회상, 이상적 교인상의 참 모델을 볼 수 있는 동시에 참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는 사람들은 본문에서 공산주의적인 사회성을 본다고도 합니다. 그렇게 오해할 만한 소지가 없지는 않습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이 두 대목에서 공산주의와 같은 인상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서로 통용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유무상통(有無相通)입니다.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돈 있는 사람은 돈 없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 없는 사람에게 지식을 줍니다. 돈을 주고 지식을 얻거나 지식을 주고 돈을 얻는 식으로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들이 서로서로 필요한 것을 융통해 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모두 그렇게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GNP가 높느니 낮느니, 잘사느니 못사느니 하지만 그런 대로 우리에게 있는 것들을 가지고도 서로 나누어 쓸 수만 있다면 훌륭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제 말씀을 극단적으로 이해하지 마시고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댁에 몇 년이 가도입지 않고 있는 옷가지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장농 속에 처박혀 있다가 말 옷가지들이 있지요? 어서 필요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십시오. 여러분한테는 있으나 마나 일지 몰라도 헐벗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귀한 것들입니다. 만약에 입지도 않으면서 그런 옷가지들을 장농 속에 그냥 처박아 둔 채 하늘나라에 간다면 하나님 앞에서 책망을 듣습니다. 어디 옷가지뿐이겠습니까? 사용치도 않는 가구, 보지도 않는 책, 쓰지도 않는 가전 제품 등등, 그냥놔두면 다 썩어 없어질 것들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나누어 써야 합니다. 유무상통해야 합니다.
또, 필요를 따라 나눠준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능력에 따라 나누어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능력에 따라 나누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분배 방식인데, 여기에 자본주의의 결정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실력 있는 사람, 재간 있는 사람 많이 수고한 사람은 많이 가지고, 능력 없는 사람, 재주 없는 사람은 조금 가져라---이것이 자본주의의 결점입니다. 자, 필요를 따라 나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 교회가 내외분 다 장님된 분들을 위해 성남에다 집을 한 채 마련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우리가 그분들한테 식량을 대어 왔으며, 거처가 문제되어서 이번에 집을 지어 드리기로 한 것입니다. 22세대가 들어갈 수 있는 집인데, 이제 준공을 며칠 앞두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내외분이 다 장님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젊을 때는 안마사로 다녀 보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어서 그 일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한테 능력대로 분배한다고 하면 이들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필요에 따라 나눠주어야 할 분들입니다. 그러니 이 사회가 능력에 따른 분배만 가지고는 절대로 건강한 사회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서 나눠주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상적인 사회입니다. 공산주의 사회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성경 안에 공산주의가 있다'고 단정짓는 것은 섣부른 착각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속에 나오는 초대교회와 공산주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이제부터 두 구조를 비교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말합니다---'나의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네 것은 내 것이다'---이렇게 생각합니다. 보십시오. 이야기가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또 초대교회 사람들은 '내 것을 가져가십시오. 내 것을 갖다 쓰십시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당신 것을 내게 주시오'합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이 뿌리가 되어, 그 사랑 때문에 나누어 줍니다마는, 공산주의자들은 부자를 증오한 나머지 강제로 빼앗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사랑과 동정으로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분노와 증오로 분열과 불신을 낳습니다. 또한 초대교회에서는 말씀과 성령이 그 동인(動因)이 됩니다. 그래서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이데올로기와 투쟁과 혁명이 이것을 가능케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초대교회는 모든 것이 자원적(自願的)입니다. 기쁜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반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강제적입니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주는 자가 주도합니다. 주는 편에서 마음을 열고 기쁜 마음으로 주는 이상적인 사회입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사회는 받는 자가 주도합니다. 받는 편에서 주도하여 이상적 사회를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와 공산주의는 이처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정반대입니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이상적 교회상, 이상적 사회상은 오순절에 근거합니다. 이 오순절은 다시 부활절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오순절 사건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없이 있을 수 없고 이해될 수도 없습니다. 부활절과 오순절은 인과율(因果律)의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은 오순절에 있었던 일을 한마디로 표현합니다.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기사(奇事) 곧 이적(異蹟)은 헬라어로 '테라타'이고, 표적은 '세메이아'인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적은 초자연적 사건이며,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점에 중요한 의미가 있고, 표적이라는 것은 신령한 진리, 신령한 어떤 내용이 오늘의 현실로 나타났다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 이적과 표적이 세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먼저, 앉은뱅이가 걷고, 장님이 눈을 뜨며, 병자들이 안수 기도를 받고 나았습니다. 이것은 신체에 나타난 이적 기사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기적은 모든 사람의 내면적 생명 속에 나타난 중생의 기적입니다. 여러분, 육신이 병에 걸렸다가 낫는 것, 이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속 사람이 변해서 새사람 되는 것, 이것이 큰 기적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사람 하나 바로 되기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이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이적 중에서도 가장 큰 이적은 중생(重生)하는 기적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 되는 것, 이것이 기적 중의 기적이라는 말입니다. 신체에 나타난 이적, 내면적인 중생의 이적 다음으로 세 번째 이적은 사회에 나타난 이적입니다. 중생의 역사가 사회적으로 나타나고 실현되면서 공동체가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교회가 변하고, 인간 관계, 세계관이 모두 변화되어서 이상적 사회, 이상적 교회상을 이루게 되었더라는 말입니다. 좀더 깊이 분석해서 이 말씀을 드리면 그 원인은 이렇습니다. 본문 43절을 보십시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그렇습니다. 두려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사람됨은 그 사람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무서워합니까? 무엇이 두렵습니까? 맹수가 두렵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무섭기는 사람이 더 무섭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정말 무섭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죄악과 증오와 시기야말로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마음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내 마음입니다. 내 마음이 무섭습니다. 내 마음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스스로 깜짝 놀랄 만큼 내게 무서운 마음이 깃 들거든요. 요즘 살인 사건이다 강력 범죄다 하고 엽기적(獵奇的)인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마는,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나 자신에게는 범죄 하는 마음이 없습니까? 어느 가정 주부가 술 취하고 외박이 잦은 남편 때문에 늘 속을 썩였답니다. 어떤 때에 너무 속이 상해서 '차라리 과부가 낫지' 하고 신세 한탄을 할 때도 있었답니다. 여러분, 무심결에 일어난 생각이지만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생각입니까? 그 부인도 그런 생각을 하다말고 본인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남편이 정말 죽고 나 혼자 남게되면 어쩌나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살인하는 사람이 어디 따로 있습니까? 우리가 마음으로 저지르는 살인이 실로 얼마나 많습니까? 가장 무서운 것은 자신의 마음입니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죄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폭력을 두려워하고, 실패를 두려워하고, 병, 전쟁 따위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시한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전에 두렵던 것은 이제 두렵지 않았습니다. 로마 정권도, 사회 혼란도, 사회의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아무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핍박이나 고난, 죽음까지도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런 가운데서 경건을 찾았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오시는 분들을 보면 무척 겁에 질려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자리에 앉는 것마저도 두려워합니다. '이곳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인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인데……' 이런 외경심(畏敬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 이처럼 두려워하던 마음도 퇴색합니다. 습관적으로 예배를 보게 됩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여감에 따라 더욱 깊어져야할 경건이 없어지고 마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예배드리면서 보면 경건이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주기도문을 외고 있을 때에 어떤지 아십니까? 주기도문이 얼마나 중요한 기도입니까? 그런데 예배 끝에 "주기도문으로 마치겠습니다" 하면 그때부터 보따리 싸는 분들이 있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하나님을 부르기만 해 놓고 집에 갈 채비를 서두르는 것입니다. 손으로는 연신 짐을 챙기면서 습관적으로 입만 중얼중얼…… 여러분, 이것이 어찌 경건입니까! 어떤 시간인데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이때야말로 어느 때보다 경건해야 할 때가 아닙니까? 하나님이 곁에 계셔서 내게 응답하시는 시간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예배하는 자세가 불 경건한 사람들---그런 사람들에게는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당연히 무서워해야 할 것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앞에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제가 구라파의 어느 교회에 갔다가 참 좋은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당 정면에 십자가를 세워 놓았습니다마는 제가 방문했던 교회의 예배당 정면에는 동그랗고 커다란 등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제가 이상하게 여기고 물어 보았더니 그것은 하나님의 눈이라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눈앞에 앉아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시다, 이것을 항상 의식하면서 예배드리자 해서 그런 상징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일리 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여러분, 내가 하나님을 보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나를 보고 계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나의 생각, 나의 뼛속까지 속속들이 다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영으로 현존해 계시다고 믿고 또 믿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순간 주님의 임재를 가까이 느끼며 신령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경건한 모습입니까? 경건이란 원래두려움입니다. 'God's fear'---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이것은 죄 때문만도 아니고, 저주 때문도 아니고, 심판 때문도 아닙니다. 이 두려움은 임재 의식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얻어지는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에는 정반대 현상이 늘 따라다닙니다. 그것은 엄청난 용기입니다. 자,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이제 담대하게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거침없이 이런 말을 합니다. 대단한 용기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니까 그 외에 아무 것도 두려운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 것도 무섭지 않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을 초월했는데 무엇이 무섭겠습니까?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와 동시에 신령한 용기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히틀러가 나치스를 만들어 독일을 독재하고 있을 때입니다. 많은 사람이 핍박받고 고생하는데도 이 독재자 밑에서 모두가 다 무릎을 꿇었답니다. 처음에 아인슈타인(그는 본래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아니라 유대교인이었습니다) 박사는 기대했습니다. 대학 교수들이나 학생들은 의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치에 저항하지 않겠는가 하고요.
그러나 이들도 예외 없이 히틀러 앞에 무릎을 꿇고 아첨하더라는 것입니다. 저술가와 예술가, 그리고 언론인들도 이럭저럭 다 매수되고 말았답니다. 아인슈타인은 크게 낙심했지요. 그런데 오직 교회만은 독재자에게 끝까지 항거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많은 순교자를 내면서도 독재자와 싸우고 항거하는 것을 보자 아인슈타인은 비록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교회를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참된 교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에 하나님 외에는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얻어지는 충만의 기적입니다. 영 딴사람으로 중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딴 사람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 것을 뜻하겠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계시성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와 나와의 관계를 알게 됩니다. 오늘 성경본문에서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십자가 사건을 상기하며 회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내 의(義)를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자신이 이러한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 그들은 모든 지나간 죄와 존재에 관한 문제, 생명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해결을 봅니다. 그리고 십자가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태어납니다. 이래서 경건한 두려움과 참된 용기를 지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십자가를 믿게 되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설명을 들어서 다 알기는 하지만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이치는 맞는데 믿을 수가 없어요.
이처럼 답답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장 어려운 점은 상대방이 나를 믿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안 믿느냐고 따질 수도 없습니다. 안 믿어진다는데야 도리가 없지요. 무슨 말로도 믿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서 십자가가 믿어지고 알아지고, 믿어지고 깨달아집니다. 믿음 안에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믿음으로써 믿는 바를 보게 된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성령의 은혜 가운데에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사랑이 없으면 안됩니다. 보십시오. 베드로가 살아계신 예수님도 믿었고, 부활하신 예수님도 믿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그는 갈릴리 바닷가로 물고기를 잡으러 갑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 때 예수님이 찾아가셔서 원인 분석을 해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습니다.
사랑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생산성이 제로입니다. 비생산적입니다. 사랑함으로써만 새로운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이올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특권입니다. 비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이라는 것은 구원받기 위한 노력입니다. 하지만 구원이 어디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입니까? 때문에 그들의 선행은 허무와 절망으로 끝나 버립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의 자세입니다.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감격한 가운데 특권이라 생각하며 봉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피곤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도 성령이 아니면 실천할 수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사랑이 감상(感傷)으로 끝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있고 '아이고 안됐다' 싶어 도와야 한다는 마음도 있지만 이것을 베풀 수 있는 용기가 없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실천력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의 역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할 때에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마음이 열리고, 이기심이 사라지고, 벽이 무너집니다. 이웃을 돕는 길, 저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게 되고, 그 필요한 것을 주려는 마음을 가지게됩니다. 그러니까 이웃의 필요를 알게 되고, 필요한 바를 줄 수 있는 힘, 그 용기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한 영국인 여 선교사의 간증을 들어봅시다. 그녀는 미모와 지성미를 갖추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선교사가 되기 전에 그녀 자신은 만사에 자신이 없고 무기력했습니다. 좋은 옷을 입어도 남들은 다 예쁘다고 칭찬하지만 자신은 늘 불평스럽고, 아무리 좋은 것을 가져도 짜증스러워 못견디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불평 불만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그 여자 자신도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중생하는 체험을 합니다. 그러자 성령으로 중생을 체험하는 그 순간부터 이야기가 백 팔십도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누더기를 걸쳐도 아름답게 보이고, 자기가 전에 불만스러워했던 형편에 비추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형편을 이해하며 도울 마음이 생겼습니다.
전에는 나만 못 가지고 남들은 많이 가진 것처럼 생각되었는데, 이제는 내가 많이 가졌고 다른 사람들은 못 가졌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을 도와야겠다, 가르쳐야겠다, 베풀어야겠다 라는 마음이 생겨서 선교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가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저 여 선교사의 말을 들어보면 "나는 공주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왕자 같고 공주 같은 마음으로 충만할 때 이제는 베푸는 마음으로 여유를 주고 사랑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제의 기적입니다. 교제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 만나는 것이 꺼려집니까? 사람 만나는 것이 불편합니까? 다시 한번 엎드려 회개하십시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입을 때, 성령이 충만함을 받을 때, 그 능력으로 인해 사람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또한 교제에는 성찬이 있어야 합니다. 성찬 없이는 교제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예배를 드릴 때, 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만남을 가지게 될 때 비로소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없으면 성찬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말씀과 성령 안에서라야 베푸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이웃을 형제로 대하게 되며 원수도 사랑하게 되고, 어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칼빈은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집행되고, 성도들이 교제하며 말씀으로 훈련받는 곳이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흔히 교회는 '케뤼그마,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 아가페' 이 네 가지로 말합니다. '케뤼그마'란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고, '코이노니아' 란 fellowship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친교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디아코니아'는 서로서로 봉사하는 것, '아가페'는 서로 떡을 떼며 깊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신령한 교제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졌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들의 옛날 죄, 과거의 일들을 어떤 것이라도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안에 못박아 버리고 깨끗이 청산해 버렸습니다. 이제 과거의 것들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곧 주님이 재림하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현재 자기가 갖고 있는 소유가 무의미함을 압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쓰고 남을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사람들은 팔아서 나누어주었던 것입니다. 철저한 종말론적 신앙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이 저들의 굳은 마음을 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사람들은 현재 살아서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믿었습니다. 옥에 들어갔을 때 옥문을 열어 주시고, 내가 병중에 있을 때 일으켜 주시며, 때로는 옥문을 닫아 순교하게 하시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주시는 주님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믿었습니다. 이처럼 현실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저들은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는 이상적 교회상, 이상적 교인상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함의 기적입니다.
바닷물은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욱 심해집니다. 아무리 마셔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성령의 샘물, 참 샘물은 마실 때에 내가 시원함을 얻고, 배에서 솟아 나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시원하게 만들어 줄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의 역사요, 이상적 사회를 이루는 바른 길임을 깊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은혜가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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