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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소원을 받아서 희망찬 새해를! 눅24:13~27

by 【고동엽】 2024. 11. 23.

주님의 소원을 받아서 희망찬 새해를!               눅24:13~27                 

 

◑두 종류의 희망

 

▲희망이 없으면 죽습니다.

동물학자들이 실험했는데

쥐를 잡아서 독 안에 넣고, 빛이 안 들어오게 차단했더니

쥐가 3분 만에 바로 죽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독에 쥐를 가두었지만, 뚜껑에 조그만 구멍을 뚫고

빛이 한 줄기 독 안에 들어오게 했더니

아무 음식을 주지 않았어도, 쥐가 36시간동안 생존했다고 합니다.

 

이 실험이 의미하는 바는,

쥐가 죽은 이유가, 체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쥐조차도 -절망하니까- 3분 만에 그냥 죽어버리더라는 것입니다.   註1)

 

그러나 환경이 아무리 어렵고 절망스럽더라도

자기 안에 희망이 있으면, 그 희망을 붙잡고 견디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인데요..

맞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희망을 붙잡아야 합니다.

 

▲새해에는 '희망'를 기원하는 인사가 범람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세요!

부자 되세요!

소원 성취하세요!

 

우리가 이렇게 희망차고, 복된 새해를 기원하는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좋고 덕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입으로는 희망차고 복을 비는 새해인사와 덕담을 주고받더라도

마음속으로는.. 새해에 꼭 명심해야 하는 한 가지가 있는데요...

 

▲문제 제기 : 새해에는 어떤 희망을 붙잡아야 하나요?

‘희망 찬 새해에..’ 라는 말을 잘 쓰듯이, 매년 새해에는 ‘희망’이 화두입니다.

우리가 새해에 반드시 가져야 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우리는 교육을 받으면서, 또 책을 읽으면서

인류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예찬되어진 ‘희망’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희망’이 나쁜 것으로/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희망’도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자체적으로 생산한 ‘희망’입니다. 이기적이며, 망상이 되기 쉽습니다.

-주님이 내게 주시는 ‘참된 희망’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내게 주시는 ‘참된 희망’을 누구나 가지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철저한 자기 절망’(십자가 죽음)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내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본문 설명 : 완전히 절망한 엠마오 길의 제자들

 

▲자기 희망을 모두 예수님께 걸었던 제자들

두 제자가 절망해서 고향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자기 모든 희망을 걸고, 지난 몇 년간 좇았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들어보니.. 아주 권위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불치병자도 고치시는가 하면.. 놀라운 5병2어 기적도 베푸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쫓아다니면.. ‘뭔가가 될 것 같은’ 희망이 있었습니다.

 

특히 그 당시에는 ‘메시야 기대감’이 유대사회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유대가 과거의 놀라운 영화를 회복하리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뵙게 되자..

그들은 자기들이 가졌던 ‘메시야 기대 신앙’을.. 모두 예수님께 걸어버렸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이 그들의 ‘희망의 전부’였던 셈이지요. ‘올인’했습니다.

                                                               *올인 : 도박장에서 자기 가진 돈을 몽땅 다 거는 것

 

▲마치 예수님께 사기 당한 것 같은 제자들

그런데 ‘자기들의 희망의 전부’였던 예수님이

세상에 허망하기 짝이 없게도..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잘 살게/부유하게 될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메시야가 되셔서, 측근인 자기들도 성공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지금은 예수님 따라 다녀봐야 월급도 못 받지만,

아마 앞으로는 ‘쨍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를 노래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런 표현을 쓰면 안 되지만, 가룟 유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마치 사기꾼처럼 보입니다.

5병2어 기적을 보여주시고, 병자를 척척 일으키는 기적을 보여주시고..

그래서 제자들이 생업 다 팽개치고 예수를 따르게 해 놓고서, 그것도 몇 년 씩이나..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 지도자가 없어져버렸습니다.(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완전히 사기당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라지자,

자기들의 희망도.. 순식간에 물거품처럼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IMF때, 사기꾼들에게 자기 퇴직금마저 사기당해 빼앗긴 것처럼

지금 제자들은 ‘멍~ 하게 두 손 다 놓고’ 있습니다.                                  *허탈하다는 뜻

 

▲예를 들어,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을 살펴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  눅24:17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분이라고 바랐노라 24:21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그 어떤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그들은 철저히 절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일단은) 그들에게 참 희망을 주지 못하고

도리어 완전한 절망을 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절망을 안겨 주시는 분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시요,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절망을 안겨주신 사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할 것은,

예수 안에서 참 희망은.. 절망/십자가/죽음을 통과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기독교인들도 다들 ‘희망’을 말합니다. 특히 새해에는요..

그런데 그것이 ‘십자가 죽음’을 통과하지 못한 희망이라면

공자, 플라톤, 카아네기가 말한 ‘희망’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무늬와 겉포장만 기독교인 셈이지.. 내용은 샤머니즘과 똑같지 않습니까?

물론 ‘신년축복성회’때 처럼, 기독교도 '세상 복'을 추구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것도 좋은 것이니까요) 

문제는.. 더 중요한 것(영생/믿음/복음의 복)은 팽개쳐 놓고, 항상 차선(세상 복)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엠마오 길의 제자들.. 절망이 있는 곳(십자가, 예루살렘)으로 다시 되돌아갔습니다.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눅24:33

 

아니,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이

자기 살길을 찾아가야지..

왜 절망의 자리로 다시 되돌아갔는가요?

 

그들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일은 ‘필요했습니다.’

이 세상의 희망이 모두 사라진 그곳에서라야

하늘의 소원이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주시고자 했던 것은 ‘이 세상의 부자되고 성공하는 희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이 주시는 ‘참된 복음의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들이 가졌던 ‘세상 희망을 버리고 절망함’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아직 ‘엠마오로 내려가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체험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그것을 환영 못하니까

예수님은 강제적으로 우리를.. 나락(엠마오)으로 떨어뜨릴 때가 있습니다.

세상 희망(또는 ‘세상 줄’)을 다 손놓고, 버리라는 것이죠. 

 

 

◑‘참된 새해 희망’을 갖기

 

새해에 새 희망을 갖기 원한다고 하면서.. 세상 희망/자기 욕망을 가지는 것은..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것들입니다.

 

이제 참된 새해 희망을 갖기 원한다면

그 전제조건/선결조건인 '세상 희망/자기 욕망'을 버리고,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게 버렸다고 가정하고..

그렇다면 이제 새해에는 어떻게 '주님이 주시는 참된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의 뜻을 조용히 기다립시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신 것처럼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립시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사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1:4

 

‘이러다가 큰 일 나겠다’ 하면서 내 방법 동원하고, 내 계획 세워서 분주하게 뛰어다니지 마시고,

그냥 내 삶 전체를 송두리째 하나님께 모두 다 맡겨 버립시다.

 

(그러다가 혹시 환란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모면하려고 하지 마시고,

환란을 주신 하나님의 속뜻/숨은 목적을 헤아려 봅시다. 그것도 주님의 뜻입니다.)

 

▲2. 새해에 하나님이 주시는 ‘그 해의 비전’이 있습니다.

여러분, 2009년도는 무슨 말씀/비전/꿈을 붙잡고 지난 12개월을 살아오셨습니까?

2009년 1월에 받은 말씀/꿈을.. 12월 달까지 기도로 계속 끌고 오셨다면

당신은 금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2010년 초에도, 주님이 나에게 주실 ‘한 해의 소원’을 우리 모두 받아야 합니다.

새해의 소원을 가지되, 그 출처가 ‘내’가 아니라, 반드시 ‘주님’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겸허히 사모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가르쳐 주십니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는가?  창18:17

 

-그것을 주로 성경을 읽을 때, 소위 ‘레마의 말씀’으로 받을 때가 있습니다.

-‘꿈과 환상’으로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를 할 때 ‘내적 음성/강한 확신’으로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방언과 방언통역(자기 방언을 자기가 통역함)으로 받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3. 대개의 경우, 내 생각대로 안 됩니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인생은, 사역은, 결혼은.., ‘내 생각/계획/소원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주님의 생각/계획/소원대로 되었는데..

그게 훨씬 더 잘 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55:9

 

그래서 우리는.. 특별한 새해 계획/소원이 없는 것입니다. 내 계획은 없어야 합니다.

성도에게 새해 계획과 소원이 만약에 있다면 ‘주님께 그것을 받는’ 것입니다.                ▣ 꿈, 비전, 소명    

 

 

▲관련 글

 

1. 내 계획보다, 주님의 인도를 따릅니다. 네 팔을 벌리라

 

2. 너무 바쁘게 뛰어다니지 않습니다. 안식이 사역보다 먼저다

 

3.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에 닻을 내린 기도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기도

 

4. 깊이 기도하고.. 결과가 그 무엇이든지 다 맡겨버립니다. 밤새워 기도하신 이유

 

 

 

註1)

 

▲심장전문의 레빈 박사는 2가지 ‘희망’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좌심방환자인 여자 환자를 진료하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대체로 우심방이기 때문에, 좌심방 환자는 희귀한 사례입니다.

그래서 그는 수련의들을 불러서, 청진기를 대고 좌심방 환자를 진찰하게 했습니다.

 

수련의들은 청진기를 대어보고는 “잘 들린다. TS환자네.”(좌심방 환자네)

하고 수근 거렸습니다.

이 환자는 심한 환자가 아니므로.. 간단한 처방을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환자가 며칠 후에 응급실에 실려 왔습니다.

병이 아주 악화되어서 생명이 경각에 달렸습니다.

 

레빈 박사는 놀라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환자는 레빈 박사를 향해서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하고 말했습니다.

 

레빈 박사는 자세하게 상황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환자는 수련의들이 진찰하고 나서 “잘 들린다. TS환자다!”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 환자는 가망이 없다!’는 말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수련의들은 TS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좌심방환자’라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환자는 그 말을 들으면서 Terminal State

(절망적인/가망이 없는/말기 상태)라고 스스로 오해해서

‘나는 가망이 없다. 나는 죽게 된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희망이 사라질수록 그녀는 더욱 나빠져서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왔습니다.

레빈 박사는, 그 환자의 오해를 바로잡고 안심시켰지만,

그러나 그 환자는, 의사가 자기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거짓말을 한다고 말하면서

자기는 ‘가망이 없는 환자’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레빈 박사는 다른 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심장이 극도로 악화되어, 죽음을 앞에 둔 환자였습니다.

대개 사람들의 심장은 “쿵덕, 쿵덕!”하고 박동하는데

이 환자는 심장이 너무 악화되어서 “쿵덕, 가르릉, 쿵덕 가르릉!”하고 박동하였습니다.

 

레빈 박사는 수련의들에게, 심장이 악화된 환자의 심장박동을 듣게 하려고

수련의들을 불러서 청진기를 대고 그 환자의 심장박동을 듣게 하였습니다.

수련의들은 그 환자의 “쿵덕, 가르릉, 쿵덕 가르릉!”하는 심장소리를 들으면서

서로 간에 “(심장 박동이) 잘 들린다. 잘 들린다!”하고 수근 거렸습니다.

 

레빈 박사는 가족들에게 장례준비를 하라고 말하고, 이 환자가 임종하기를 기다렸는데

환자는 상태가 점점 좋아져서, 호흡이 정상화되고 안색도 환해지고

가르릉 거리는 소리도 사라졌습니다.

 

레빈 박사는 놀라서 그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심장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의사선생님이 자신의 심장이 좋아진다는 말에 힘을 얻었고

그 후 실제로 좋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가르릉”하는 심장박동소리가 ‘잘 들린다’는 수련의들의 말을

자기 심장이 좋아져서 박동 소리가 잘 들린다는 소리로 알아듣고

자기가 나을 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얼마 후 나아서 퇴원하였습니다.

 

여러분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 믿고 절망한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나아진다고 믿고 희망을 얻은 사람은.. 생명을 얻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 일은.. 좋은 일이고,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참 소망/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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