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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 (마 5:1-12)

by 【고동엽】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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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 (마 5:1-12)

 

사람의 사람됨은 그 소유에 의해 서 평가 될 수 없습니다. 많이 가 졌다고 그 사람이 훌륭
한 사람이고 못 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결코 천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그의 지 식에 의
해서 평가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많이 안다고 그 사 람이 높은 인격의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흔히 불학무 식하다고 해도 그 사람은 사람대로 높은 격의
사람임을 우리가 보게 됩 니다. 지위에 의해서도 평가할 수 가 없습니다. 문제는 사람을 사
람 으로 평가하게되는 평가 기준은 극 단적으로 둘이 있다고 늘 생각됩니 다. 하나는 그가
무엇을 즐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쁨을 기뻐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게 첫째 고 둘
째는 어떠한 성격의 고난을 당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에 의해서 사람은 평
가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욕 구 충족에 불과하는 그런 생리학적 기쁨을 추구
하는 그런 정도의 인간 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동물 성을 지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물은 아닙니다. 동물적 욕구 충 족 그것만을 기쁨으로 생각하고 그 것을 위하여 모든 것
을 기울이는 그 러한 인간을 흔히 저질 인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게 생리학적 인간입 니다.
또 하나는 자기 실현의 세계 에서 기쁨을 얻는 그런 사람이 있습 니다. 이것은 철학적 기쁨
입니다. 공부하는 기쁨, 깨닫는 기쁨 그리고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며 그 합리적 인 진리 속
에서 기쁨을 얻는 이러한 철학적 인간이 있습니다. 또 하나 는 신학적 기쁨을 즐기는 그러
한 기 쁨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 자신의 세계에 매이지 않고 적어 도 그의 생각과
뜻과 이상과 꿈은 항상 하나님의 세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 하나님의 뜻 그 나라
와 그 의를 생각하며 그 속에 있는 나 자신의 하나님의 자녀된 정 체를 기뻐하는 겁니다.
계속 하나 님의 역사를 기뻐하고 하나님의 사 랑 받는 나 된 것을 계속 깨달아 가 면서 기
뻐하는 이런 신학적 기쁨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어차피 고난을 당 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고난은 필수입니다. 필연입니다.
문제는 그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성격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흔히 페
러독스, 역설적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세요 핍 박당하는 자가 복이 있다 이건 역설
적인 겁니다. 핍박은 고통입니다. 그런데 왜 그가 복이 있다는 얘기입 니까? 어째서 핍박 없
는 세계가 복 이 있는 것이지 핍박당하는 자가 복 이 있다는 얘깁니까? 이것이 성경 이 말
씀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요 그리스도인의 운명이요 그리스도인 의 행복입니다.
핍박이라는 말은 원문대로 자세 히 살펴보십시다. 이것은 천재가 아닙니다. 인재(人災)를 말
하는 겁 니다. 비가 오지 않는다 그걸 핍박 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진이 났 다 전쟁이 났
다 그거 핍박 아닙니 다. 핍박은 어디까지나 인재요 또 하나는 자기 잘못으로 인해서 당하
는 고통을 핍박이라고 하지 않습니 다. 내 잘못 없이 참으로 100% 억 울하게 당하는 고난,
이것이 핍박입 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이 핍박은 과거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현재와 미래에
걸쳐서 점점 죄어드는 고통 입니다. 다시 말해서 몸만이 아니 라 우리 마음을 괴롭히는 겁
니다. 심령적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겁니 다. 이러한 고통, 계속되는 고통, 이걸 당하고 있는
사람을 복되다.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의를 위 하여 핍박당하는 자가 복되다. 왜 요? 여
기서 한 번 분석해 봅시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한 번 분 석하면은 베드로전서 2장 18절 이하 에 분명하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애매하게 고난을 당한다. 그래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아름다우리라,
다른 말로 은혜롭다 고 했습니다. 애매한 고난이 뭡니 까? 왜 고난을 당해야 되는지 모르
는 부당한 고난입니다. 내 잘못도 없이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 을 당한 결과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은 그러한 고난, 애매한 고난이 있습니다. 가 령 옆집사
람이 불조심하지 하지 않 아서 내 집이 불타버리는 거예요. 그 애매한 거죠. 나는 잘못이 없
는 데 저 집에서 잘못하므로 내 집까지 타 버릴 때 이거 애매한 거 아닙니 까? 여러분 운전
하시다가 가끔 애 매한 일 당하죠. 나는 정당하게 운 전했는데 이 정신 빠진 사람 때문에
내 차가 찌그러지잖아요. 아 이거 속상합니다. 더구나 새 차면 더 마 음이 아픕니다. 왜 이
런 일을 당해 야 하나? 이거를 가지고 하늘을 우 러러 뉘 죄 때문입니까? 하고 물어 보겠
습니까. 도대체 이 결과는 무 엇입니까? 하나님 이 차 찌그러진 다음에 무슨 복을 줄렵니
까? 말 됩 니까? 이게 애매한 고난이라는 거 예요.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 많 이 있어요.
그래도 잘 참고 견디면 은혜가 됩니다.
또 하나는 죄를 짓고 매를 맞으 면 무슨 칭찬이 있겠느냐? 내가 잘 못해서 내가 당하는 고
난, 어쩌면 모든 고난이 대부분 이런 것이지요. 아니라고 변명하지만은 깊이 생각해 보면 원
인은 내게 있었습니다. 내 잘못으로 내가 고난 당합니다. 내 가 잘못해서 내가 병듭니다. 내
가 잘못해서 사업이 잘못됐습니다. 원 인은 분명 내게 있습니다. 자 이럴 때 이거야말로 무
슨 상이 있겠습니 까? 그러나 우리 깊이 생각할 문젭 니다. 이런 따위의 고난이 있고 또 하
나는 의를 위해 당하는 고난이 있 습니다. 이것은 꼭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자원적이요 자
발적이요 선택 적이란 겁니다. 피해가다가 도망가 다가 어떻게 하든간 면해보려고 요 리저
리 몸부림치다가 할 수 없이 당 하는 거 그건 아니요. 약해서 당하 는 것도 아니고 몰라서
당하는 것도 아니고 어리석어서 당하는 게 아닙 니다. 일부러 스스로 자취하는 그 러한 고
난의 성격을 말합니다. 의 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 아무래도 이것을 위해서는 가장 대표적인
예 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 입니다. 뭐 모든 고난이 다 그러했 습니다만은 결정
적으로 십자가 사건 하나를 놓고 생각해 봅시다. 복음 서가 계속 증거하는 건 뭐냐하면 십
자가의 고난은 불가피 한 게 아니라 는 거죠. 그것은 억지로 당한 게 아니라는 거죠. 얼마든
지 아니 당 할 수 있었던 것이라는 겁니다. 원 해서 스스로 자취해서 당했다는 것 을 성경
은 강하게 강하게 거듭거듭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유 월절에 예수님께서 지금 예루
살렘에 자기를 죽일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 다는 걸 다 알고 계십니다. 유월절 에 예루살렘
에 올라가지만 않았더라 도 십자가를 면할 수 있구요, 또 하 나,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이
했습 니다. 늘 출입하는 성전 그 더러워 진 거 늘 보았습니다만은 오늘 따라 와서 그것을
정면적으로 충돌하면서 성전을 깨끗이 합니다. 만민의 기 도하는 집을 어찌하여 강도의 굴
을 만드느냐? 이렇게 대결했는데요 이 사건만 없었더라도 십자가를 지지 않으실 수 있을 겁
니다. 또요, 빌라 도 재판 앞에서 지금 재판을 받으시 는데 보세요. 빌라도는 어쨌든 예 수
님이 죄가 없는 것을 알고 또 특 별히 능력이 있고 인기도 높은 분이 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 님을 석방하려고 무죄 석방하려고 갖은 방법으로 모색을 하고 있습니 다. 이때
에 예수님께서 거짓말도 아니요 사실, 진실된 말 한 마디만 했으면 예수님을 십자가를 안
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제사장과 바리새교인 저 사람들이 나를 질투 해서 여기에
끌고 온 겁니다. 거 사실이 그래요. 이 한 마디만 하셨 더라도 예수는 십자가를 안 지실 수
있었는데 침묵합니다. 입을 딱 다 물고 그대로 십자가를 질 생각을 합 니다. 빌라도는 이해
할 수가 없어 서 마침내
"이 사람을 보라."
그 유 명한 말 아닙니까?
"Behold this man"
이 사람 도대체 이해할 수 없 는 사람이다. 서른세살에 왜 죽으 려고 하느냐, 능력도 많고
인기도 많고, 아 이런데 서른세살 젊은이가 왜 억울하게 죽으려고 하느냐는 거 죠.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의를 위하여 당하는 고 난입니다. 남은 아무도 모릅니
다. 예수님 만이 아시는 깊은 의미가 있 는 것이올시다. 바로 이런 고난이 의를 위하여 당하
는 고난이란 말입 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고난 을 당하고 계십니까? 고난 당한다 당하
지 않는다의 문제가 아니라 내 가 당하고 있는 고난의 성격이 문제 요, 그 의미의 문제요,
그리고 도대 체 무엇을 생각하시며 무슨 목적으 로 이 고난을 당하고 있느냐? 어떤 자세로
임하느냐? 그것만이 문제입 니다. 거기에 따라서 복된 자가 될 수도 있고 저주받은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고난 없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의를 위
하여 고난을 당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 어떤 복입니까? 의를 위하 여 핍박받는 자에게 왜 복이 있다는 겁니까? 가장 중요한
말씀은 악으 로부터 핍박당함으로써 내가 의롭다 는 것을 증거해 주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
상에 살면서 잘살면 그 사람 옳은 사람 아닙니다. 악인으로부터 칭찬 받으면 그 사람 결코
선한 사 람 아닙니다. 이같이 불의한 세상 에서 정직하게 살면서 손해 안 볼 수 없어요. 의
롭게 살면서 핍박 없 을 수가 없어요. 그런고로 핍박은 당연한 것이에요. 어쩌면 핍박을 받
음으로써 비로소 내가 옳고 내가 바르게 살고 개가 진실함을 증명하 게 되는 것에요. 악한
세상으로부 터 칭찬 받으려고 해선 안됩니다. 가끔 우리의 마음을 좀 섭섭하게 하 는 일이
있습니다. 요새 이 현대에 와서 너무 여론에 치우쳐요. 여론 이 어떻고 몇 %가 어떻고 몇
%가 어떻고…… 언제부터 여론 듣고 합 니까? 지도자란 여론에 끌리는 것 이 아니에요. 유
명한 지도자 처칠 이 말한 것이 있습니다.
"백성으로 부터의 칭찬은 2년 후에 받도록 하 라"
지금 당장 백성들에게
"자 이럴 까요? 저럴까요?"
물어가면서 할 것 입니까? 여러분 아시는대로 한때 군사 독재자라고 그렇게 성토를 하 고
온 백성이 욕을 하더니 이제는 일등 대통령이라며 그 분이 잘한 것 이지요. 그 당시에는 얼
마나 많은 지탄을 받았습니까? 그러나 오늘 와서 이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존경 받는 인물
이 되고 있잖아요. 지도 자란 이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당 석에서 지지받고 아우성 치고 만
세 불렀다고 그런 소리나 듣기를 원해 서는 안되는 거예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야 되
요. 당연히. 어쩌 면 핍박을 받아야 영웅이에요. 뿐 만 아니라 유명한 문학가 유명한 예 술
가 유명한 철학가들 보세요. 당 대에 지지받은 사람이 없어요. 제 가 실례가 되서 어느 철학
가라고 말 은 안합니다만은 저 60년대의 그 철 학가가 온 세상의 많은 학생들이 열 심히 읽
는 책이었어요. 그런데 내 가 어느 책을 보다보니까 그분이요, 당대에는요 미친놈이라는 말
을 들었 대요. 정신병자라는 말을 들었대요. 그런데 오늘은 그 책이 불후의 명작 이 되더라
구요. 이것이 당연한 것 이에요. 당대의 여론에 끌려서 뭐 칭찬들으려고 눈치보는 이거는 아
니 에요.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다는 것은 바로 내가 그리스도인들을 말 하고 내가 의로움을
증거해 주기 때 문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 래서 요한복음 15장 18절 이하에 보 면
예수님 말씀하십니다요.
"세상 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함인 줄을 알라"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욕을 당할 때 나보 다 먼저 예수님이 욕당했다는 걸 잊 지 말아요.
그런고로 예수의 제자 는 당연히 핍박을 받고 손해를 받아 야 되요. 그런 거예요. 그게 당연
한 거예요. 이걸 당연하게 받아 들 여야 되요. 이상할 거 하나 없어요. 그래서 유명한 요절
이 있지 않습니 까.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보면
"무릇 그리스도안에 경건하게 살고 저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 리스도 안에 경건하게 살자고 하면 핍박을 받아요. 가정에서도 핍박받 아요 내외간에도
핍박을 받아요. 친구에게도 핍박을 받아요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바로 그 사람 이 복
된 사람이요. 슬퍼할 것도 탄 식할 것도 나약해 질 것도 없습니 다. 여기에 긍지가 있고 자
랑이 있 는 것이올시다.
또한 중요한 것은 핍박을 받으면 서 우리는 악으로부터 자유하게 되 고 악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거 이상한 것입니다. 핍박을 받으면 점점 더 의로워지고 의가 강해지는 겁니다. 그
걸 알아야 되요. 그래서 핍박받는 자에게는 유혹이 없습니 다. 시험에 빠질 이유가 없습니
다. 그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 리 순교사에 보면 어떤 사람이 순교 하게 되는데 예수
를 잘 믿는 사람을 죽이게 되는데 그 재판관이 저놈을 화평에 처하라고 소리를 지르니깐요
그 옆에 있던 사람이
"재판장님 저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 화형 에 처하면 순교자가 된다고 좋아합 니다"
"아 그래, 그러면 매질을 좀 해라"
그러니까
"재판장님 저 사람 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매맞는다고 더 좋아합니다"
"아 그럼 정배보내 라"
"정배보내면 조용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시간 얻었다고 더 좋아 합니다"
"그럼 어떻하면 좋으냐?"

"정말로 저 사람을 핍박하고 싶습니 까? 그렇다면 돈을 많이 주고 예쁜 여자들을 줘 가지고
타락시키시오. 저 사람들은 타락되는 거 외에는 무 서워하는 게 없습니다"
그래요. 그리스도인들 초대교회에 더욱 그랬 어요. 핍박받으면 받을수록 더 강 해지고 더 순
수해졌어요. 그 당연 한 것이에요. 강해집니다. 좀 미안 한 말씀입니다만은 제가 중학교 다
닐 때에 얘깁니다. 이 공산당들이 들어 와 가지고 저희 마을을 전부 이제 공산화 해 나갈려
고 할 때에 이 중학생들 뭘 안다고 이걸 꼭 주 일날만 되면 소집을 합니다. 그런 데 갔다
온 아이들 얘기 들어보니까 마당 한번 쓴 것 밖에 없데요 그냥 마당에서 놀다 왔대요. 그래
도 저 희 마을이 한 60%가 교인이거든요. 좌우간 5일장을 서도 주일날이면 장 이 스질 않
아요. 이 정도로 교인이 많으니까 이걸 교회 못 가게 하기 위해서 주일날은 학교 오라 이겁
니 다. 그래 부릅니다. 소집을 해요. 난 안 갔지요. 안 가고 나면 월요 일날 가서 계속 벌섭
니다. 때로는 매도 맞습니다. 욕도 당합니다. 또 어떤 때는 파출소 그 뭐예요 구치소 에다가
집어넣기도 하고 뭐 그러더 라구요. 그런데 매 월요일마다 그 고생을 합니다. 그 주일날은
하루 종일 교회에서 놉니다. 자 그런데 내가 얼마간 나가면서 생각한 게 있 습니다. 이게 내
가 신앙적으로 하 는건가 재미로 하는 건가? 그 말을 생각하니깐 그거 내 딴에는 거 어리
지만은 이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요 만큼 핍박을 받는다 하는 게 말이에 요 굉장히 신바람
나는 일이더라구 요 이게. 그래서 아 이거 나는 주 일날마다 이렇게 교회에 나오고 월 요일
날 가서 기합 받고 했더니 다른 아이들이 부러워하더라구요. 내가 꼭 그걸 신앙적인 일이라
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저들이 자꾸 핍박하 니까 나는 점점 강해지는 거예요. 마지막엔 '죽
일 테면 죽여라' 거기까 지 나가는 거예요. 아 그래서 이게 참 묘한 거다 그리 생각을 해
보았 습니다. 철없는 얘기지만 말입니다.
여러분 또 한 가지는 핍박을 당 하게 되면 내가 믿는 바가 확실해 집니다. 이것을 신학화라
고 합니다. 복음을 변증하면서 내가 믿는바가 점점 더 분명해 집니다. 핍박이 없 으면 믿기
는 믿어도 내가 뭘 믿는지 안 믿는지 믿는지 희미 합니다. 핍 박 속에서 내 믿는 바가 확실
해 지 고 체계화되고요. 또 있습니다. 지 혜가 생기지요. 더 큰 것은 핍박 속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가 까이 듣습니다. 긴 기도가 필요 없 어요. 하나님 아버지라고만 불러도
벌써 하나님의 응답이 가까이 옵니 다. 저는 기억합니다. 핍박 속에 있을 때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 서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행하시옵 소서. 교회에서 찬송 한 절만 불러 도 하나
님이 가까이 가까이 말씀하 시는 것을 체험 할 수가 있어요. 이게 핍박받는 자들의 복이요.
또 뿐만 아니라 성경도 핍박 중에 읽게 되면은 그 성경의 엄청난 의미를 깨 닫게 됩니다.
보세요 건강 할 때 읽는 성경과 병들었을 때에 읽는 성 경이 달라요. 평안할 때에 읽는 성
경과 핍박 중에서 환난 중에서 성경 을 읽을 때에 성경 한 구절 한 구절 을 통해서 하나님
은 엄청난 것을 내 게 말씀하십니다. 사도바울은 그래 빌립보 감옥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매
를 맞고 죽을 지경이 됐을 때에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찬 송을 부르며 이렇게 하
나님의 무궁 무진한 깊은 뜻을 거기서 깨닫게 되 고 감사하게 된 것이에요. 자 이것 이 핍
박을 통한 핍박자의 복이요.
그 뿐만 아니라 핍박을 받을 때 는 세계가 나 중심에서 하나님의 세 계로 생각이 달라집니
다.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를 바라보게 됩니다. 빌립보 1장 12절에 보면 내게 당한 일이 복음
의 진보가 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바란다. 내가 지금 감옥에 있음으로 해서 밖에 있는 사람
들이 용기를 얻어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하게 되고 내가 여기 있음으로 해서 친위대 사람들
을 만나서 복음을 전 하게 되고 조용히 조용히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것을 깨달으
면서 그는 여기서 기뻐하고 있습니 다. 이게 핍박당하는 자의 복이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가 나를 통해 서 나의 이 적은 희생을 통해서 이 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엄청
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또 한가지 핍박당하는 자는 결과 에 대해서 연연하지 않습니다. 여 러분 사업을 하나 공부
를 하나 뭘 하나 이게 잘 되는 걸까? 자 결혼 을 해도 이게 잘하는 걸까 못하는 걸까? 장
차는 어떻게 되는 건까? 우리 모든 행위에 대해서 다음 스테 이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요. 다음 후속 결과를 걱정하지 않을 수 가 없어요. 그러나 핍박당하는 바 로 이 시간에는
아무 걱정도 없습니 다. '나는 여기서 죽습니다. 하나 님 맘대로 하십시오. 나는 여기서 핍
박을 당합니다. 다음 일은 하나 님께 맡깁니다.' 내 마음은 완전히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이
행복은 누 구도 모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 당하는 자는 걱정거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다
맡기고 마음은 깨끗합 니다. 자유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오늘 말씀은 천국이 저희 것이다.
물론 죽어 하나님 나라에 가지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고로 종말론적 종말
적 축복이 있고 오늘도 순교자가 누리는 영광 을 누립니다. 오늘 현재에도 기쁨 과 자유로
충만합니다. 자기 양심 이 자기를 칭찬하고 하나님과 나만 이 아는 엄청난 행복이 함께 하
는 것입니다. 칼빈 선생은 세상 떠날 때 마지막으로 성경 요절을 외웠습 니다. 로마서8장 18
절,
"생각컨대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 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 요 절을 열여섯번 외우다가 마지막 못 외우고 세상을 갔다고 합니다. 장 차 나타날 영광,
오늘 내가 당하는 고난, 비교할 수 없도다. 떠나는 세 상이 아쉬운 게 아니라 다가올 하나
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거기에 흡수 되면서 만족한 기쁨으로 사선을 넘 습니다. 이것이 의를
위하여 핍박 당하는 자의 복입니다. 여러분 내 가 지금 어떤 성격의 생을 살아가고 있습니
까?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 할 때 그에게만 주시는 엄청난 축복 이 영광이 항상 함께 하시
는 것입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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