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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택(롬9:1~18)
오늘의 본문에는 하나님의 선택, 다르게 말하면 은혜로운 선택, 혹은 절대주권적 선택에 대한 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택의 교리'라고 하면 대체로 이스라엘사람들은 이 말을 자기들만의 전용용어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민이다, 선택된 백성이다, 라고 자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이 선택적 교리의 근본의 도는 구원받은 사람을 말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사람들의 그 존재의 의미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참 대단히 중요한 교리입니다.
오늘의 본문의 맥락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도 바울에게는 여러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고민이 '왜 유대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아니할까?'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유대사람들이 여간해서는 예수를 믿지 않아요. 바울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고민이에요. 둘째로, 이렇게 기독교를 박해하는 유대사람들, 바로 저들이 받을 죄에 대해서 그는 고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이렇게 걱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그 순간, 못 박힌다고 하는, 예수님 자신한테 주어지는 고통에 대해서 고민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이 받을 형벌에 대해서 고민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죄를 짓고 있으니 저들이 앞으로 얼마나 큰 벌을 받게 될까?-이것을 생각 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바울 역시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핍박받고, 그래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그에게는 이런 일들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오직 이렇듯 무모하게, 이렇듯 악하게 교회를 핍박하고 복음을 핍박하는 저 백성이 받을 형벌을 그는 미리 내다보게 되기에 고민이었어요.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내가 어떤 때에 아주 억울함을 당했어요. 그러면 '나는 억울하다. 너무도 괴롭다'-그것만 생각하고 나를 괴롭히는 저 사람에게 주어질 고통에 대해서는 생각 못하지 않았습니까? 혹 여러분이 얻어맞을 때가 있었습니까? 맞으면서 '아프다, 괴롭다'-이것만 생각했지요? '나를 때리는 저 사람이 며칠 후에는 또 얼마나 후회할까? 이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데…' 그런 아픔에 대해서 여러분이 먼저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런 고민을 합니다.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형벌과 그 심판에 대해서 그는 괴로워하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그는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나?'하고 성경적으로, 성격맥락에 대해서, 또 신학적으로 고민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이 고민에 대한 해답을 얻습니다. 그것이 이제 로마서 9장, 10장, 11장의 무려 석 장에 걸쳐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오늘도 그 본문 중의 일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그는 철저하게 신앙적으로 이 문제를 풀었습니다. 신앙적으로 문제를 풀었다-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믿음 없는 생각을 합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 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엄청나게 빗나가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일단 믿고 보세요. 하나님을 믿고, 그 능력을 믿고, 그 구원을 믿고, 그 지혜를 믿고, 긍정적으로 보세요. 신앙적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보세요. 그러면 새로운 해답이 눈에 보입니다. 이 방법, 이 생활철학을 우리가 꼭 배워야 합니다. 가만히 보세요. 긍정적으로 보면 얼마든지 좋은 방향에서 좋게 보아나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구약의 맥락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구약의 문맥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이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무릇 성경에서 해답을 얻어야 됩니다. 막연하게 '그저 이러니까… 이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예요. 중요한 것은 성경을 읽고, 성경을 상고하며, 성격 속에서, 그 맥락에서 해답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해답을 얻었습니다. 그것을 오늘의 본문에서 잠깐 보게 됩니다. 유대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박해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리스도의 제자인 바울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생각합니다. 신앙적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높은 계획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실패하실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실 수 없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백성을 그렇듯 버리실 이치가 없다-이렇게 생각할 때에 그는 하나님의 높은 구원의 경륜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구구절절이, 하나씩 하나씩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의 본문에서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구원은 단체적인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것이라는 거예요. 이제껏 바울이 잘못 생각한 게 있었어요. 그는 유대사람, 이스라엘, 이방사람… 이렇게 '단체적'으로 생각을 했거든요. 유대 사람은 왜 예수를 안 믿을까, 이방사람은 왜 예수를 믿을까…… 이것이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러분, '보편화'라고 하는 것처럼 무서운 죄가 없습니다.
가끔 연애하다가 실연을 당한 아가씨가 저한테 찾아와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남자들은 다 늑대예요. 남자들은 다 나쁘다고요." 이 말을 너무도 강조하기에 제가 그렇게 말을 했지요. "날 좀 쳐다보시오. 나도 남자요." 그랬더니 "목사님은 빼고요"라고 대답합니다. "어쨌든 나도 남자요. 도대체 몇 남자나 만나보고 하는 소리요? 도대체 몇 남자에게 배신을 당했기에 남자들은 다 그렇다고 말을 하는 거요?" 그실 자기가 만난 남자는 단 한 사람이에요. 그 한 남자한테 배신당했다고 해서 '남자들은 다 나쁘다'-이게 되는 말입니까? 바울은 믿지 않은 사람을 전도하느라 무던히 애를 썼어요. 꽤 많은 사람에게 핍박을 받았어요. 물론 여러 사건을 당한 것도 사실이에요. 그러나 직접적으로 바울을 핍박한 사람은 단 몇 사람이에요. 이 몇 사람 때문에 유대사람은 다 나쁘다, 할 수 있습니까? 단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사람 가운데도 예수 믿는 사람이 있지 않아요? 바울 자신이 예수 믿고 있지 않아요? 베드로가 믿었고, 요한이 믿었고, 초대교회 삼천 명이 회개하고 믿었고…… 더우기 저들은 예수 믿고 나서 지금 핍박을 받아 부득이하게 사방으로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유대사람은 다 안 믿는다, 유대사람은 교회를 핍박한다-이렇게 말할 수 있느냐 이 말이에요. 이는 개인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유대사람 가운데도 믿는 사람이 많아요.
제가 1963년 처음 미국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LA는 지금보다 훨씬 작았는데, 하루는 다운타운 한가운데에 있는 Open door church라고 하는 교회를 나가봤어요. 그날 저는 아주 깜짝 놀랐어요.
무려 이천 명이 모여 성경공부를 하는데 강사분이 성경을 얼마나 잘 가르치는지 참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 정말 이 교회는 훌륭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 교회는 수요일 저녁에 안 모이고, 목요일 저녁에 모여요. 왜 목요일 저녁이냐고 물어보니 교인들이 이렇게 대답합디다. "다른 교회에서 보통 수요일에 모이기 때문에 우리는 목요일에 모여요. 다른 교회 교인들도 성경공부 하러 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 공부를 지도하는 강사분이 유달리 키가 작은 목사님이었는데 그 분의 사도행전 강해가 너무도 좋았어요. 그래서 그 다음 목요일에 또 그 교회에 갔었어요. 그 목사님은 Dr.맥이라고 하는 분이었습니다.
이 분이 그 교회를 시작했어요. 유명한 바이올라대학도 세우신 분이에요. 그는 철저한 유대사람이에요. 그런데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습니다. 참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본인 자신도 유대사람인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어느 민족, 어느 단체, 어느 공동체…… 이렇게 밀어붙이려고 하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는 언제나 개인적인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어느 나라 사람은 어떻고, 어느 나라 사람은 어떻고, 합니다마는 이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 역시 개인적인 것이에요. 누가 그렇게 통계를 내보았습니까? 누가 그렇다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여기서 생각합니다. 구원의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도 생각해야 됩니다. 아버지가 예수 믿었다고 해서 그 아이들도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예요. 아내가 교회 다닌다고 해서 그 남편까지 구원받는 것이 아니예요. 언젠가 예수 믿는 아내와 20년을 살면서도 교회 나오지 않는 남편을 만나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이제는 본인도 교회에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목사님, 과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분명히 천당에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주일날 집을 봐주거든요. 아내한테 헌금도 주고요. 토요일에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먹지만 주일날 하루종일 집을 봐줍니다. 내가 아니면 교회에 못 가잖아요? 목사님, 이만하면 천당에 가지 않을까요?" 아주 짓궂은 사람이지요. 그래서 제가 안 된다고 그랬어요. 아내가 믿고, 아이들이 믿는다고 해서 내가 자동적으로 되는 게 아니예요. 설사 부모님이 다 교인이라고 해도 내가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에요. 그런고로 어느 민족, 어느 민족…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잘못이에요. 바울이 '유대사람은 안 믿고, 이방사람은 믿고…' 이렇게 생각한 것은 잘못된 거예요. 이 판단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구원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에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예요. 공동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문제입니다. 구원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진다, 개인적인 신앙고백에 의해서 구원받는다-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대로 구원은 혈통적인 것이 아닙니다. 흔히들 혈통에 너무나 치우쳐서 생각합니다. 특별히 우리네가 그렇게 좁은 생각을 합니다. 정신적 차원에서, 좀더 넓은 의미에서, 좀 더 높은 의미에서 우리 가족을 생각했으면 좋겠는데 '가족' 혹은 '사랑'이라고 하면 그렇게 혈통적으로 생각해요. 핏줄을 생각해요. 이것은 우리가 좀 시정해야 될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특별히 구원문제는 혈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7절)"-중요한 말씀입니다. 육체적으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그 씨가, 그 민족이, 그 동족이 이스라엘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에는 아니예요.
그 강한 증거로 바울은 아브라함의 가정을 예로 듭니다. 자, 아브라함이 여기 있어요. 그에게는 아들이 둘 있는데 하나가 이스마엘이고 하나가 이삭이에요. 이 둘을 놓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에요. 분명히 아브라함의 아들이에요. 그들의 어머니가 다를 뿐이지요. 아브라함의 씨인 것은 분명해요. 이삭 역시 아브라함의 아들이에요. 따져보면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열네 살 위입니다.
혈통적으로 볼 때에는 그가 형님이요 장자입니다. 동생이 이삭이라고 볼 수 있어요. 자, 그러면 이 둘이 다 아브라함의 씨이니 이스마엘도 이스라엘이 아니냐, 선민이 아니냐,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히 선민이 아니예요.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됩니까?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7절)"-이삭만이 아브라함의 씨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것은 핏줄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혈통의 문제가 아니예요. 결국 이것은 육체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육체적인, 혹은 세속적인, 민족적인 차원에서 이스라엘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참이스라엘이 무엇이냐---믿음의 전통을 이어야 합니다. 신앙적 전통을 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스라엘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에 다닐 때에 무척 존경하던 마팻 목사님은 원래 평양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고, 좀 큰 다음에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고,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한때 프린스턴신학교 총장 물망에도 올랐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오래 일하던 분이 갑자기 자기 일을 다 정리하고 한국에 선교사로 들어왔었어요. 그래, 한국말로 못하는 가운데서도 통역을 세워가면서 설교하던 모습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마팻 목사님은 유머러스하게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이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평양신학교 교장을 하고 있을 때, 어린 저는 종종 신학교 에 들어가서 놀았었어요. 강의실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정신없이 노니까 아버지가 저한테 자꾸 "Get away. Go home!(여기서 놀지 말고 집으로 가라)"하고 야단치셨지요. 그 옛날 그렇게 아버지는 나에게 집으로 가라고 명령을 했건만 저는 이 시간 미국을 버리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그것은 정말 대단한 희생이었어요. 이 분은 한평생 한국교회를 위해서, 신학교를 위해서 일하셨어요. 은퇴하신 지금도 프린스턴대학에가 계시는데 지난번에도 가서 뵈었더니 얼마나 반가워하시는지 몰라요. 한마디 더하자면, 제가 두 번째 유학을 갔을 때에 그 분으로부터 3년 동안 장학금을 받았었어요. 아무튼 이제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이 효자가 아니겠어요? 우리는 혈통만 생각을 해요. 그래서는 그저 내 자식, 내 새끼, 하고 챙기기에만 바빠요. 그러나 실은 마팻 목사님 같은 분이 진짜 효자입니다. 아버지가 한국을 위해서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래 그 아들이 공부하고 경험을 쌓은 다음, 그 가장 귀한 시간에 아버지의 대를 이어서 한국에 와 한국을 위해서 평생을 바치겠다고 했으니 이 마음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뜻을 이어야 자식이지, 핏줄만 이었다고 자식입니까? 안 그렇습니까?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종자인 것은 분명해요. 혈통적으로는 그래요. 그러나 그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가지도 못했고, 아브라함의 뜻을 이어가지도 못했고, 아브라함의 영적 기업을 이어가지 못했어요.
그런고로 이스마엘은 이방이에요. 서자예요.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 21절 이하에서는 길게 설명합니다.
'참자녀는 영적으로 되는 것이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이라는 말 자체도 조심해야 한다, 혈통적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라고 부를 것도 없다, 이 말씀이에요. 선민이라고 부를 것 없다, 선민적 신앙이 있고, 선민적 정체감이 있어야 그게 선민이다, 하는 의미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육체적인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다, 혈통적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만이 참이스라엘이다, 함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스라엘남자와 이스라엘여자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태어난 2세는 이스라엘입니다. 자동적으로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나 가령 이스라엘남자와 이방여자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그는 이방이에요.
종자는 분명히, 혈통은 분명히 이스라엘이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이 아니예요. 왜요?-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사람의 몸으로는 이스라엘로 낳지만, 이스라엘사람으로 키우는 것은 어머니예요. 어머니가 신앙을 가르치고 이스라엘사람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로부터 이스라엘의 혼을 교육받은 자라야 비로소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핏줄만 같다고 이스라엘이 아니예요. 반대로, 이스라엘여자와 이방남자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그는 이스라엘이에요. 여자분들, 긍지를 가지세요. 이것은 모계(母系)입니다. 육체적으로는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부계입니다. 그러나 신앙적 차원에서, 영적 차원에서는 모계예요. 어머니의 역할이 이렇듯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거예요.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야 아브라함의 자손이다-그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생각할 것은 '약속의 자녀'입니다. 약속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나서 자녀가 있는 것이에요. 저는 이 문제를 이렇게도 생각합니다. 우리가 '효도'를 말하고 효자가 되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효는 근본적으로 세상에 생명이 태어났다는 것 자체에 대한 감사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내가 너를 낳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기도했는지 아느냐? 하나님께 너를 바친다는 서원까지 했단다. 그 다음에 네가 태어난 거야"-이렇게 되어야 약속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너를 안 낳으려고 이렇게 저렇게 애를 썼는데, 어쩌다가 실수로 그만 네가 생겼지. 그래, 태아를 떼자니 그렇고 해서 너를 그냥 낳았단다. 그런데 낳아 놓고 보니 역시 너 때문에 골치가 아프구나. 너는 늘 말썽이야"-자, 이 자식이 효자 되겠어요? 이제는 자식노릇 하기는 틀렸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슬슬 그런 얘기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 말을 아이들이 못 알아들으니 다행이지, 알아듣고 나면 일은 끝난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그리고나서 어쩌다 한번 아이를 때리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때리는 거지'하고 가출하지 않겠어요?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 자체도 가만히 보면 기도가 먼저예요. 하나님 앞에의 서원이 먼저입니다.
제가 효도하는 마음으로 한마디하겠습니다. 제가 어머니를 무서워해요. 어머니는 철저하게 나를 사랑하셨지만 굉장히 무서우셨어요.
저를 41세에 낳으셨는데 그 전에 하나님 앞에 10년을 기도하시며 하나님께 저를 바치기로 맹세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너를 어떻게 낳았는데, 내가 너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했는데…"하는 말씀만 나오면 저는 꼼짝을 못했어요. 아무 말도 못해요. 쳐다보지도 못해요. 너무도 무서워서. 자, 이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약속이 먼저예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실 때에 자그마치 25년을 기다리게 하셨어요. 25년-아브라함이 그 동안에 얼마나 기도하고, 얼마나 서원하고,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겠어요? 그리고 나서 그 약속이 이루어진 거예요. 이 약속이 먼저입니다. 그래야 이스라엘입니다. 약속이 없이 어쩌다가 이방여자와 하룻밤을 자서 태어난 이스마엘은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거예요. 핏줄이야 틀림없지요. 그러나 이스마엘은 약속이 없습니다. 약속을 바지 못한 자녀-그는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 약속을 여러 번 더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 가서도 '내년에 낳으리라'하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약속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생기고, 그 다음에 태어나고-이것이 진짜 이스라엘이다, 약속의 그 증거를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선택의 말씀은 행위 이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대단히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무릇 '선'이란 우리의 선행이 있고 그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이 먼저 있고, 선행이 있는 것입니다. 좀더 말하면 이것은 의식 이전의 일입니다. 내가 아무개의 자녀된 것이 내가 선택한 것입니까? 제아무리 똑똑해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자기가 선택해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없어요. 낳아줬으니까 태어났지요.
이것은 내 의식의 문제가 아니예요. 내가 그 자녀 됨이라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깨달아요. 내가 이 가문의 아들이구나, 이 가문의 딸이구나-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 태어났구나-훨씬 뒤에야 아는 거예요. 특별히 재미있는 것은 사람은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네 살 이전의 일은 기억하지 못한답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젖먹던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다섯 살 때까지 어머니 젖을 먹었어요. 그런데 아주 중요한 사랑은 전부 네 살 이전에 받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 그 얼마나 사랑을 받습니까? 얼마나 어머니의 손이 많이 가고, 얼마나 정성을 들이게 됩니까? 그토록 귀한 사랑을 다 받았지만 나는 잊어버렸어요. 심리학자들은 잠재의식 속에 다 간직되어 있다고 해요. 물론 있을 테지요. 그러나 내 기억에는 없어요. 이제 커가면서 자식은 생각해요. '나는 이렇게 사랑을 받았다. 저렇게 사랑을 받았다'-그리고 나의 나됨을 깨닫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런고로 이건 윤리 이전의 일이에요. 내가 선하게 살고,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 그게 문제가 아니예요. 부모가 낳아놓았으니까 내가 자녀지,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적극적 구원을 말하는 것이에요. 오히려 자녀로 낳아놓고, 자녀되도록 키우는 것이에요. 여기에 창조적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먼저 내 자녀로 낳아놓고, 그 다음에 자녀답게 그 가풍에 맞도록 키워 가는 것입니다.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적 사랑입니다. 내가 먼저 선택했다던가, 하는 생각은 있을 수 없어요.
선택은 행위나 선행 이전의 일이다-이것을 오늘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택이 먼저 있고, 구원이 뒤에 있다는 얘기입니다.
다섯 번째로, 오늘의 본문은 '선택과 부르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선택과 믿음과 부르심이 어떻게 관계되어 있느냐, 그 말입니다.
자, 어떤 때에 보면 나 스스로 믿은 것 같아요.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래요.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믿게 하신 거예요. 하나님의 자유의지가 강하게 역사하고 계세요. 나는 그 의지에 끌려간 것뿐이에요. 은혜가 먼저고 내가 있는 거예요. 부르심이 먼저고 내가 있는 거예요. 이것을 우리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고로 나의 선행이나 나의 공로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니예요. 아무 의미도 없는 거예요. 이보다 훨씬 먼저 주님의 선택적 자유의지, 경륜적 의지가 계십니다. 그리고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지난번에 제가 여러분한테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지금 추수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하나의 곡식을 거두어들인다-오늘 나는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있지만, 이렇게 거둬들이기까지 그 전에 얼마나 많은 수고가 있었습니까? 씨를 심고, 가꾸고, 김매고, 거름 주고, 그리고 비가 오고, 태양 볕이 쬐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셔서 오늘에야 비로소 거두는 것이에요. 오늘날의 하나의 사건이 거저 이루어진 것이 아니예요. 특별히 어느 한 사람이 예수 믿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주변에 있습니까? 이런 사건, 저런 사건…… 어떤 사람은 만신창이가 되어 가지고 교회에 나와요. 마치 끌려나오는 것처럼 나온 거예요. 자기가 나온 것이 아니예요. 그 많은 시간 동안 실패도 하고, 병들기도 하고, 얻어맞기도 하고, 엎치락뒤치락 많은 것을 겪고…… 그리고 이제야 마음을 열고, 주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오늘 내가 주님 앞에 나왔지마는, 바로 이 시간이 있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역사가 있었고, 얼마나 많은 투자가 있었습니까? 이것을 잊어서는 안돼요. 우리가 조그마한 진리를 깨닫는 것도, 사람됨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거저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이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입니까? 얼마나 많은 은혜가 거기에 있었습니까?
그런고로 신앙인의 고백으로 볼 때, 내가 한 일이란 아무 것도 없어요. 오히려 나는 계속 하나님의 뜻을 떠나려고 했어요. 하나님을 거절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 하셨어요. 그런고로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내 귀에 들리는 음성만이 아니예요. 부르심은 곧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이것이 있어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선행이나 공로…… 이런 것은 다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에 이유 있습니까? 저는 결혼식을 주례할 때에 늘 그런 얘기 합니다마는, 사랑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러니까 사랑하고, 저러니까 사랑 못하고…… 그것은 사랑의 본질이 아니예요.
사랑은 의지예요. 사랑은 감성이 아니예요. 사랑은 분위기가 아니고, 기분이 아니예요. 그리고 사랑하는 눈으로 보니까 좋게 보여요. 사랑하고 보니까 기쁨으로 받아들여요. 여기에 다른 이유가 없어요. 그래서 가만히 보면 아주 사랑 받을만한 사람인데 사랑 못 받아요. 그런가하면 사랑할 것 같지 않는데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도 있지 않아요? 이것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의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우리가 사랑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했노라'하시니 사랑하신 것이고 '사랑하노라'하시니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여기에 있으니 사랑하시는 거예요. 아무 것도 묻지 마세요.
또하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제 사랑 받을만한 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사랑 받을만한 존재로 그 작품을 만들어나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생애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입니다. 이는 절대적이요 근본적인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선택이 있어요. 오늘의 성경에 보니 에서와 야곱을 놓고 말씀하기를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13절)"합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좀 지나친 얘기 같지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절대주권적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 없어요. 할 말이 있다면 다윗처럼 말할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사랑하시나이까.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돌보시나이까.
내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나이까'-이 외에 아무 말도 할 것 없어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있고, 그 사랑으로 나를 인도하셨고, 또 사랑을 알게 하셨고, 사랑 안에 살게 해주셨어요. 이제 우리가 무슨 말을 또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는 창조적 사랑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바울은 유대사람 중에 구원이 있는 것을 보았어요. 신령한 이스라엘을 보았어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보았어요. 그런고로 그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절대 낙심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당신의 사람을 부르실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부르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역사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 귀하디 귀한 앞을 바라보면서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선교사역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직 감사, 오직 은혜, 오직 충성만이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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