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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제자(요 1:43~51)
앞장에서 안드레가 예수님과 함께 유한 후에 제일 먼저 찾아갔던 사람은 그의 형님이었음을 보았습니다.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생각나는 것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빌립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먼저 찾아간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친구 나다나엘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의 제자 안드레와 빌립은 가만히 앉아 있는 소극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움직이는 적극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복음 자체가 생명력이 있고 능력이 있으므로 복음을 바로 들은 자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끔 필자에게 어떻게 하면 교회가 부흥될 수 있는가를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교회가 교회 되면 부흥됩니다. 그러면, 과연 교회가 교회 되는 길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복음이 있으면 족합니다. 복임이 바로 전해지고 받아들여지면 교인들은 자연히 전도하게 되고 전도가 활발하면 그 교회는 부흥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에게 특별히 전도에 대해 강조할 필요 없이 복음만 바로 전하면 성도들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빌립과 나다나엘처럼 찾아가는 적극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 되는 도리이며, 동시에 복음의 성격입니다. 복음에는 놀라운 다이내믹 파워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는 장면을 보면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1:45)고 대단히 신학적인 내용으로 전도를 합니다. 오래 전부터 성격이 예언해 왔고 꼭 오셔야 할 역사적인 분이 오셨는데, 내가 그 분은 만났노라고 논리 정연하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의 첫 반응은 냉담합니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요 1:46) 나다나엘은 그 분이 나사렛 사람이란 말을 듣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일단 거부하는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강하게 "와 보라"하고 자신감 넘치는 권유를 하고 있습니다. 성격에서 "와 보라"고 말한 것이 세 번 있는데, 이미 요한복음 1:39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공부했고, 지금 본문에서 빌립이 말했으며, 그리고 요한복음 4:29에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야를 만난 기쁨에 동네에 들어가서 "와 보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와서 보는 것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와서 보면, 내가 알았듯이 너도 진실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 말은 설명이 필요 없지만 거짓일수록 설명이 화려하고 늘어지게 됩니다. 본문에 와서 보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예수님께로 가자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전도를 하기 위해서는 성경 공부를 많이 하고 신앙의 경력이 길어야 한다라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전도학에서 보면, 전도를 가장 잘 하는 층은, 예수를 믿은 지 오해되고 신학을 많이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 믿은 지 1년 6개월 미만인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즉, 처음 믿는 사람들이 전도를 잘 한다는 뜻입니다. 이 때는 복음과 나와의 관계가 직선적이어서 깨닫고 감격한 그대로 용감하게 나서는 것입니다. 전도란 반드시 많이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니므로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빌립처럼 "와서 보라"고 쉬운 말로 간단히 해 봅시다. 여러분들의 전도 책임은 교회 문턱까지 한 번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는 것이고, 다음 책임은 교역자들이 맡습니다. 다시 말하면, 한 번 오게 하는 것은 교인들의 책임이고, 두 번 오게 하는 것은 교역자들의 책임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 위에 있어야 함은 두말 할 것도 없습니다. 어쨌든 우리들의 수고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고, 나머지는 성령이 그를 감화시키시고 마음 문을 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을 잘하고 설득력이 있어야 전도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는 "와서 보라"고 말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사람을 만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말씀에게로 인도할 뿐이지, 그를 구원하거나 설득할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와 보라"는 빌립의 말에 일단 거절을 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그가 의심을 하게 되는 데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그는 누구보다도 나사렛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으로 유대 나라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곳으로서 아주 위축된 곳입니다. 게다가 사투리가 심하여 같은 민족인 예루살렘에서도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외진 장소이며, 또한 이방 사람들이 사는 마을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순수한 유대 문화를 갖지 못하는 지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서도 절반만 유대 사람들이라고 무시를 당하는 실정이었으며, 심지어는 자신들까지도 스스로 무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곳에서 메시야가 나시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너무 그 마을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러한 곳에서 훌륭한 메시야가 태어날 리가 없다고 일단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아는 자를 높이 보기가 어렵습니다. 마치 자기 자식을 바로 알기가 어려운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의심을 가진다고 해서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일단 의심이 깨어지면 강한 확신으로 변할 수도 있으니까요. 좋은 예로, 예수님의 제자 중 도마를 보면, 그는 열 두 제자 중에서 제일 의심이 많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른 제자들이 다 만나 보았다고 해도 그는 자신이 직접 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강한 의심이 확고한 확신으로 변하여 제자 중에서 가장 멀리까지 가서 전도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의심이란 것도 있을 만한 것입니다. 나다나엘도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의심을 했다가,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임금이로소이다"(요 1:49)라고 고백하며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제자된 동기가 의심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의 특이한 점은 의심을 하면서도 몸을 움직여 예수님께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의심을 하고 그대로 주저앉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지만 의심하면서도 계속 앞으로 나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우리들도 혹시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들을 때에 의심나는 부분이 있습니까? 의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의심에서 앞으로 전진하지 못 하고 의심 자체로 끝나버리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나다나엘은 비록 의심을 했지만, 와 보라는 빌립의 말에 나아갔습니다. 믿음이란 확신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교회에 나오는 것이다라고 생각해도 좋겠습니다. 물론, 교회에 자주 나온다고 나올 때마다 깨닫고 감격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말씀을 듣는 기회가 많고 보면 언젠가는 말씀 앞에 부딪치고 은혜에 접하는 것입니다. 마치 공부하는 학생이 공부가 안 된다고 자리를 들고일어나서 포기하면 다시 기회를 갖기가 힘이 드는 것과 같습니다. 공부가 안 되더라도 참고 앉아 있으면 어려운 문제도 풀릴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의심하면서도 예수님께 나왔을 때, 예수님은 그의 노력과 수고를 인정하시고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흔히, 생각을 한 다음에 행동하겠다고 말하는데, 생각이 많으면 행동력이 약해집니다. 행동하면서 생각해야 합니다. 결론이 난 다음에만 움직이겠다고 벼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 배워서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나오면서 알게 되고 나오면서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신앙적인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례 요한의 이후로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라는 말을 옛 번역에서는 "힘쓰는 자가 빼앗는다"라고 되어 있는데,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힘쓰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앞뒤를 재고 머뭇거릴 것이 아니라, 다만 명령에 순종해서 온 정력을 기울여 앞으로 전진하는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적극적인 자세로 나아오면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의 믿음을 인정해 주십니다. 기록상으로 보아서는 나다나엘이 특별히 믿음이 강한 자였거나 대단한 어떤 것을 가진 자는 아니었는데, 단지 예수님 앞에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주님은 그 자체를 높이 평가하시고 그의 믿음을 인정해 주고 계십니다. 이처럼 오로지 예수님께 가까이 나온 것으로서만 그 믿음을 크게 칭찬하신 사건이 성경의 몇 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군중 속을 비집고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고자 애썼던 이야기나 지붕을 뚫고 들것에 환자를 실어 예수님 앞으로 내린 이야기는 좋은 예화입니다. 어떤 역경과 조건을 무릅쓰고 예수님 가까이 가려고 하는 그 마음을 높이 인정해 주셨고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진짜 이스라엘인이라고 참으로 귀중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간사한 것이 없으므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이란 야곱의 이름인데, 야곱이라는 말은 간사하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은 본래 간사한 사람인데,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면서 기도한 결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스라엘이란 축복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축복 받고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대단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는데, 이름만 귀할 뿐 진짜 이스라엘다운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시자 참 이스라엘이라고 그의 진실성을 높이 평가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대개 합리적인 이해가 있은 다음 믿으려고 하는데, 나다나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의심하는 가운데서도 예수님 앞에 나오고 있습니다.
합리적인 것은 배우고 불합리한 것은 믿어야 합니다. 불가능한 것이라면 가능케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인 나다나엘은 이러한 깨끗한 마음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에게 향한 주님의 말씀에 놀라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하고 묻게 됩니다. 이 때에 주님께서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무화과나무는 높이보다 옆으로 퍼지는 숲과 같은 나무로서 가지가 많습니다. 마치 우리 나라의 느티나무와 흡사해서 그늘이 많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서 조용히 앉아 명상도 하고, 성경도 읽고, 특별히 메시야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장소로 이용했습니다. 아마,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기 바로 직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셨으므로, 나다나엘이 주님을 뵙기 전에 주께서 먼저 그를 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다나엘은 너무 기뻐서 당장 말하기를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 자리에서 굴복했다는 뜻입니다. 다소 짓궂은 생각입니다만, 나다나엘에게도 명상이나 의로운 일 외에 죄짓는 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네가 술집에 있는 것을 보았다든지 또는 실수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다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가장 경건하고 아름답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그 순간을 보아주셨으므로 그는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최고의 장점을 보는 것입니다. 물론, 잘못하는 일이 많지만, 그러나 제일 잘하는 것만 보고 싶고 인정하고 말해 주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 가령, 나의 좋은 점은 다 가려 놓고, 하필이면 가장 나쁜 것, 잘못된 것만 들추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경건의 절정, 즉 경건 중에도 제일 높은 그 시간을 알아 주셨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엎드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많은 부족이 있고 실수도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것을 보지 않으시고 제일 중요하고 귀하고 아름다운 시간을 보아주시고 인정해 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기 전에 먼저 주가 나를 사랑하셨고, 내가 주를 만나기 전에 먼저 주께서 나를 찾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께 알려졌고 그리스도께 알려졌을 뿐 아니라, 벌써 인도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도 자기 진실을 알아주는 바로 거기에 사랑이 있음을 알고 그는 일생을 예수님께 바칩니다. 나다나엘이라고 하는 이름은 본래 요한복음에만 있고, 다른 복음서에서는 바돌로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12제자 중에 바돌로매가 요한복음에 기록된 나다나엘과 동일 인물임을 모든 성서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주께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비록 의심을 하여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부정했지만, 주님을 만나는 순간에 지금까지 가졌던 생각은 단번에 버렸습니다. 아니, 180도로 전환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우리들도 부족한 것이 있어도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끊을 것은 끊으면서 앞으로 전진하는 신앙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의 믿음을 보시고 더 큰 일을 보리라고 본문 5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50-51). 이 말씀은 앞에서 나다나엘에게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벧엘에서 돌베개를 하고 누웠을 때 하늘이 열리고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과 소통하는 장면으로써, 바로 그런 것을 네가 참 이스라엘로서 보게 될 것이라는 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진실한 제자에게는 이런 영광이 있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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