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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일기 예보의 비유(마태복음 16 : 1 - 4)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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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예보의 비유(마태복음 16 : 1 - 4)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고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날이 궂겠다고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2천여 년 전의 이야기인 오늘 본문임에도 예수님께서는 일기 예보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누구나 다 그날의 일기는 물론 앞으로의 날씨를 알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집에 나서는 사람은 오늘은 날이 궂을까? 맑을까? 추울까? 더울까? 바람이 불까? 를 생각하게 되고 멀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여행 중의 일기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예나 오늘이나 이 일기에 대하여 미리 알고 싶은 마음은 똑같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당시에 있던 간단한 상식에 속하는 일기 예보를 비유로 우리에게 귀중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에도 우리 마음의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일기 예보를 듣습니다마는 잘 맞는 것 같다가도 요즈음 같은 장마철에는 곧잘 틀려서 때때로 소나기가 내리겠다고 하였는데도 소나기는커녕 햇빛만 쨍쨍한 것을 보게도 됩니다. 그 때문에 나온 농담이 있지 않습니까? 기상대에 근무하는 한 청년이 장가를 가려고 하여도 그 길이 계속 열리지를 않는데 그 이유인즉 일기 예보를 한 것이 제대로 맞지 않다 보니 거짓말쟁이가 되어서 "자네 매사에 그렇게 거짓말이 많아서야 어떻게 딸을 주겠나?"하고 처녀의 아버지가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일기 예보를 소재로 생겨난 농담은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많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일기 예보란 무엇이냐 할 때에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섭리를 알자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다만 하나의 경험 철학입니다. 그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보니 이렇게 되면 이렇게 되고, 저러한 것의 뒤에는 그렇게 되더라고 하는 그러한 지식들을 모아 이제 잠깐 예고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를 빌어 표현하자면 미래학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지내온 것들을 잘 종합, 정리하여 그것에 비추어 앞의 일을 잠깐 예고해 보겠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미래학은 종말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기 예보라고 하는 것이 무엇에 준하여 이루어지느냐 할 때에 여기에서 적어도 세 가지 기본 생각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 첫째는 현상과 실제를 바로 파악하는 일입니다. 그러한 다음에 이후에는 어떠한 현상이 일어날 것인가를 생각해 내는 것이 일기 예보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과거의 경험을 잘 분석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만약 지난 일을 쉽게 잊어버리는 건망증 환자라면 그는 일기를 예보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는 두 가지의 생각을 더 하여야 합니다. 그 하나는 이 현상을 예의 주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아침이나 저녁, 어느 때이든지 하늘을 보고 그 붉고, 푸르름의 현상을 자세히 파악한 사람이라야 무슨 예고라도 할 수 있는 것이지 아예 하늘을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이 무슨 예고를 할 수 있겠느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때 그때의 현상과 사실을 잘 파악하는 총명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그렇게 되는 어떤 현상을 보면서 그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제 저녁에 날이 붉었으면, 이렇게 붉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더라고 하는 과거를 기억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된 일을 다 잊어버렸다면 그 사람은 예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저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어요. 그렇기에 지난날 우리 생애 있었던 모든 그 경험들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만약 그러지를 않고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면 그 사람은 앞으로의 새로운 일을 대비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또 다시 같은 실수를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잘 아는 대로 한번 실수를 하였으면 그 길로는 이제 안 가야 하는데도 왜 또 가느냐 하면 건망증 환자가 되어서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억력을 두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마는 특별히 노인들의 기억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을 보면 이 노인들은 자기가 말을 하면서도 자기가 한 말을 30분밖에 기억을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말을 하고도 30분 후에는 잊어버리게 되다보니 30분마다 똑같은 말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소위 잔소리가 많아지고 듣는 사람이 복잡해집니다 마는 기억력 없는 본인으로서는 항상 새로운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더욱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쥐는 기억력이 3초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쥐는 고양이에게 쫓겨 구멍 속으로 들어가다가도 밖에 고양이가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3초 후 곧장 나오다가 잡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나간 일들을 잘 기억하고 그 경험들을 종합, 분석하여 거기에서 얻어지는 지혜로 앞으로의 일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경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 보다 멀리 조상적부터 내려오는 전승적 경험이나 지식을 잘 수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어른들이 어떤 상황을 보면서 "그렇게 되었으니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면 "! 그렇구나!"하고 받아들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똑같은 일로 실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술 먹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일로 패가망신하게 된다면 술을 배우지 말라고 하였다며 이 아들은 "그러면 이제 저는 술을 먹지 않겠습니다"하면 되겠는데 "아버지가 한 경험은 믿을 수가 없으니 내가 직접 먹어보아야지"하고 나온다면 그 집안은 다 된 집안이 아니겠습니까? 그저 매일 술독에 빠져서는 계속 같은 실수를 반복하다 말 것이란 말입니다. 적어도 아버지가 실수하고 후회하면서 제발 너는 나와 같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면 그 말씀만은 꼭 따르겠다며 그 길로는 안 가야 하는 것이에요. 이미 아버지께 있었던 일생의 경험이 내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나의 경험은 아니지만 이 아버지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 경험입니까?

이 일기 예보도 그와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일기 예보라는 것은 가능한 긴 세월을 두고 관찰해 온 기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단순히 금년에 되어진 현상이나 짧은 한동안의 기류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기 예보를 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하는 "예년"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은 예년 기온보다 높다, 낮다"라고 하는 이 예년 온도가 무엇입니까? 수십 년에 걸쳐 내려오면서 해마다 그날 그날의 온도가 오르고 내린 것을 관찰해 온 결과의 평균 온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이 723일이면 723일의 예년 온도는 얼마라는 것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결정지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수십 년을 두고 관찰한 기록에서 나와야 믿을 만한 예년 온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계 기상대에서 권장하는 대로는 자그마치 30년을 단위로 하라는 것이며 이에 우리 나라 서울 지방의 예년 온도는 19511980년까지 30년간의 평균치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껏 작년의 온도와 금년의 온도를 비교한 것이라면 그것은 예년 온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년 온도라는 이 말 한 마디가 나오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십 년이 넘는 경험의 축적이 있었으며, 그 결과 723일의 예년 온도에 얼마인데 1987723, 현재의 온도는 그보다 높다, 혹은 낮다고 비교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인간의 지식도 그렇게 축적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때마다의 현상을 알고 그 현상에 대한 지식을 경험으로 받아들이며 거기에 전승적 지식을 더하게 될 때에 이제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지식이 축적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지식을 발판으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일기 예보이며, 나아가서는 이 일기 예보가 가르쳐 주는 진리입니다.

다음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일기 예보란 하나의 표적을 읽는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녁 하늘이 붉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아침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무엇을 의미하느냐 할 때에 과학적으로 설명할 말도 많겠지만 적어도 그 사인(sign), 표적을 읽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의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중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집에 돌아오는 남편의 표정, 곧 기분의 기상도를 읽는 일입니다.

어떤 고집 센 장로님의 사모님이 제게 들려주신 바에 의하면 그 장로님은 밖에서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있는가 보다 싶은 날에는 이 사모님이 두 가지의 말만 하게 되면 화를 벌컥 내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은 "피곤하지요?"하는 것과 "무슨 어려운 일이 있어요?"하는 말인데 "피곤하지요?"하면은 "뭘 피곤해" 하면서 피곤하다는 말을 그렇게 싫어하고, "무슨 어려운 일이 있어요?" 하면은 무슨 쓸데없는 참견이냐며 한 마디 밖에 안한 말을 가지고도 크게 역정을 낸다는 것입니다. 그게 왜냐 하면 지금은 밖에서 일어난 일을 잊어버리고 싶은데 왜 다시 생각나게 만드느냐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들어서는 표정이 벌써 무슨 문제가 있었겠구나 하고 느껴지거든 빨리 분위기를 바꾸어 그것을 잊어버리게 해주어야 잘하는 것이지 오히려 하루 종일 있었던 힘들고 불쾌했던 일들을 다시 기억하게 만든다면 그처럼 괴로운 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남편이 들어서는 것을 척 보자마자 오늘은 이렇구나하고 표정을 읽을 줄 알아야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의 일기, 하늘의 기상을 볼 수 있어서 이렇게 되면 비가 오고, 저렇게 되면 눈이 온다는 것을 척척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 기어이 비가 올 때 가서야 비로소 비가 오는가 보다 하거나 아니면 벼락이 떨어진 다음에야 떨어지는가 보다 한다면 그 결국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에 표적을, 징조를 읽을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혜를 다하기 위하여 소위 말하는 천문학을 연구하고 기상학을 연구하면서 여기에 대한 징조들을 읽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징조를 읽는 지혜와 그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생각할 것은 징조를 보고 미래를 준비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일기 예보에 대한 연구와 관심은 앞으로의 대책을 강구하고자 함에 그 의의와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미래를 염려하는 사람은 반드시 일기 예보를 참고하는 것입니다. 오늘 집을 떠나 여행을 하거나 비행기를 탈 사람은 부득불 일기 예보를 자세히 듣게 되어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항상 집안에서 맴도는 사람은 비가 오면 어떻고 또 안 오면 무슨 상관입니까? 흔히 말하는 대로 그저 한 시간 놀고, 한 시간 자고, 한 시간 쉬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그러기에 일기 예보는 밖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요,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입니다. 아예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일기 예보를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미래지향적인 마음이 일기 예보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미래에 사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항상 저 미래에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 예고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그저 갈대로 가고, 될 대로 되어 라는 그러한 사람하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적어도 미래를 생각하여 1020, 아니면 100년 후에, 보다는 내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그때까지를 미루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지난 경험을 불신하는 사람은 예보를 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타난 예보를 알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표적을 읽을 수 있는 지혜가 없는 사람은 예고할 지혜도 없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한 염려와 진실한 걱정이 없는 사람은 예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2천여년 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생활 풍속 속에 있는 일기 예보를 비유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당시에 있어서 일기의 변화에 제일 관심이 많고 민감했던 사람들은 어부였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겠습니다마는 특별히 갈릴리 바다를 끼고 사는 어부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겠습니까? 이러한 현상은 예나 오늘이나 다를 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한 이 일기에 대하여 매우 민감했던 사람들이 다름 아닌 목자들입니다. 목자는 집에서 양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넓은 들에 나가 방목을 하게 되므로 그만큼 목자의 책임이 큰 것입니다. 만약 갑자기 벼락을 치거나 하여 놀라게 되면 죽기도 하고, 병이 나거나 미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뱃속에 든 새끼가 유산이 되는 등 많은 손해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험상궂어 오는 것을 보게 되면 빨리 양들을 안전한 우리 속으로 몰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늘이 맑고 날씨가 좋아지면 다시 몰고 나가 풀을 뜯기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목자는 일기의 변화에 민감했던 것인데 그것은 목자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양을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보살피는 이치와도 같은 것입니다. 아이들은 모르고 있지만 이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님들로서는 하찮은 작은 것에서부터 모든 문제에 있어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매일 매일, 순간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살피며 대비하는 것이 부모요, 특별히 어머니입니다.

이제 이 목자들이 오랜 경험과 전승을 수렴하여 가능한 한 정확하게 하루 앞, 혹은 이틀 앞의 일기를 알고자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하여 저들에게는 일기에 대한 이러한 노래가 있다고 합니다. "저녁 붉은 하늘은 목자의 즐거움이요! 아침 붉은 하늘은 목자의 경고이다!" 참으로 옳은 이야기이지요. 저녁 붉은 하늘은 목자의 즐거움이다! 이제 저녁 노을이 벌겋게 지면은 내일 아침에는 틀림없이 날이 맑겠으니 즐거움이요, 반면에 아침 하늘이 붉어서 해가 흐릿흐릿하면 오늘은 날이 흐리고 비가 오겠으니 이것은 경고요, 따라서 거기에 맞추어 준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특별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고 있는 것에 대한 그 대답으로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여기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라는 이 두 부류의 신분들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그리고 그들의 성격상으로 보아 전혀 서로 화합할 수 없는 두 단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은 물론 구전과 전승으로 기록된 말씀을 다 믿습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을 비롯한 성경의 기록만을 믿습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천사를 믿고 부활을 믿는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이 두 가지 다를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으나 사두개인은 메시아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은 비정치적이었으나 사두개인들은 정치적이어서 로마 사람들에게 쉽게 협력을 하고 타협을 하는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이어서 서로 만나기만 하면 싸우게 되는 정반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핍박하여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는 완전히 야합을 하게 됩니다. 이 점 또한 우리가 깊이 생각하여야 할 문제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표적을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기중심적 생각 때문에 완전히 영적인 장님이요, 영적인 귀머거리였습니다. 그렇게 되고 보니 일기 예보를 알 리가 없는 것이지요.

이제는 보고도 모르고 듣고도 모르며 심지어는 이적과 기사를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쳐 들려주어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들려주시는 그 말씀을 듣고, 그 이적과 기사를 보며 깜짝 놀라고서도 그 뜻은 몰라 또 다른 표적을 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합니다마는 이는 표적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보지 못했던 것이요,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르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 자신이 이미 자기들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은 상태란 말입니다. 그리고서 이 시간 예수님 앞에 나와 또 표적을 구하노라는 것인데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요나의 표적밖에 보일 것이 없다고 하신 뜻은 앞서 요나의 비유에서 설명을 드렸기 때문에 여기에서 다시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의 시간을 통하지 않고는 이 표적에 대한 지혜의 문이 열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 말씀에 보면 "너희가 천기(天氣)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하시는 예수님의 강하신 어조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날이 궂을 것이라며 거기에 대한 대비를 하고,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내일은 날이 맑은 것이라며 안심하고 좋아할 줄 아는 정도로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이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줄 모르느냐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시대의 일기예보를 똑똑히 들을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바른 역사 의식을 가지고 내 과거의 경험은 물론 조상들의 경험과 성경적인 그 모든 사건들을 통하여 분명한 지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게으르면 배고프고 놀면 후회합니다. 속였으면 속아야 하고 불신하면 무지해집니다. 무지해지면 교만해지고 교만해지면 이제는 망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만이 있는 곳에 다툼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회개가 없으면 끝난 인생이요,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사회는 저주는 받으며 무죄한 자의 피가 땅에 흐르면 그 땅은 황폐해지고 맙니다. 이것은 곧 역사가 증명하는 바요, 성경에 말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시대, 이 땅에 억울하게 고난 당하는 의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면 이것은 하나의 분명한 예고요, 멸망의 징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위험한 순간에 이르고 있음이며 이제 이 마지막 기회의 회개가 없다면 이것으로 끝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하여 염려할 수 있어야 하고 당연히 그리하여야 합니다. 이제 하늘을 한번 보세요! 저녁 하늘이 붉은 것입니까? 아침 하늘이 붉은 것입니까?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우리 눈앞에는 아침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보를 읽을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을 통하여 분명히 우리에게 들려 오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표적을 보면서 이 후에 있을 무서운 심판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도 읽으셨겠지만 언젠가 한번 중국에서 큰 지진이 날 것을 예고한 일이 있는데 그 예고의 근거가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면 개미가 이동하는 것을 보고 알아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즈음에는 지진계를 사용하는 등의 과학 기술이 동원되어지겠지마는 중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저들은 개미의 이동을 통하여 읽어 온 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지진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렸을 때에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많이 듣기도 하고 직접 보기도 한 것으로 여름철에 들에 나갔다가 개미가 떼를 지어 새까맣게 이동을 하는 것을 보게 되면 반드시 홍수가 납니다.

또 어떤 때에는 보통은 사람을 피해 숨어 다니는 것이 뱀인데도 이것들이 마구 나돌아 다니거나 특별히 구렁이 같은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 장마지겠구만!"하고 한 마디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미물인 동물들도 장마와 홍수가 가까운 것을 피부로 느끼며 이에 대처하여 자신이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곳을 찾아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실은 이 인간들만 멍청하게 모르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도 반드시 느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는 이 시대가 어떠합니까? 아마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이 시대가 마지막임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대로는 안 되지!" "이러고서도 안 망할 수가 있나!"하고 빤히 보면서도 그저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울 것이 못되요. 이미 아침 하늘이 붉었어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무엇인가 대비책이 있고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란 말입니다. 예고에 대한 민감한 의식이 있어야 하겠어요. 그리고 신령한 감각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미래를 내다보면서 염려하고 걱정하며, 회개하고 기도하며 준비함으로 곧 가까이 다가오는 심판과 멸망을 피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천기를 분별할 줄 알면서도 이 시대의 표적은 어찌하여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하십니다. 이 순간도 내 앞에 계속 전개되고 있는 이 징조들을 바로 보면서 그 이후에 있을 사건을 걱정할 줄 아는 믿음의 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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