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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주 안에 있는 형제의 뜻(4장 1절)

by 【고동엽】 2022.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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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 있는 형제의 뜻(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서라.

 

본문 가운데서 우리는 주 안에 있는 형제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주 안에 있는 형제의 뜻'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흔히 인류애, 동포애, 혹은 인간애라는 맥락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애, 인류애라는 것만 가지고는 참사랑을 베풀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형편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소위 '이웃 사랑'이라는 것은 좀더 높은 차원에서 형제애라고 부릅니다.

어째서 형제애라고 할까요? '형제애'는 헬라어로 '필라델피아'라고 합니다. '아델포스'에는 '형제'라는 뜻이 있고 '필리아'에는 '사랑'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말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필라델피아는형제애를 뜻합니다.

필라델피아는 몇 가지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형제는 한부모한테서 태어납니다. 그 뿌리가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가 될수밖에 없는 관계입니다. 한 가지로부터, 즉 한 부모로부터 같은 사랑을받았다는 뜻입니다.

둘째, 형제 관계는 절대적 관계입니다. 친구란 한번 사귀었다가도 얼마든지 헤어질 수 있는 관계입니다. 심지어 부부도 만났다가 헤어질 수있습니다. 그러나 형제는 피를 나눈 사이입니다. 한 부모로부터 태어났기에 헤어지 수 없는 인연입니다. 상대적 관계가 아니라 절대적 사랑의관계입니다.

셋째, 형제는 같은 기업(基業)을 가지고 있는 관계입니다. 요즘은 기업이라는 의미가 많이 흐려졌습니다. 보십시오. 부모의 직업, 부모의 기

D묭뭆TXT~\술을 이어받아서 그것을 계승하는 자녀가 얼마나 됩니까? 독립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각기 제 갈 길로 갑니다. 결혼해서 나가고, 일 찾아서 나갑니다. 성급한 사람은 좀더 일찍 가출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각자 넓은 세상에 나가 삽니다. 그러나 옛날 농경 사회나 유목민 사회에서는 반드시 부모로부터 유업을 이어받아야 했습니다. 땅이 있어야 농사를 짓지 않습니까? 그런데 땅에는 땅 임자가 다 있기 때문에 누구도 땅을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내가 땅을 소유하려고 한다면 어느 집에 가서 머슴살이부터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일생동안 머슴살이한들 땅을 몇 마지기나 얻을 수 있을는지! 그래서 근본적으로 부모로부터 유산을 받지 못한 사람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고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종으로 팔려 갈 수밖에 없고 머슴으로밖에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사회였습니다. 뭐 그리 옛날 일도 아니요 산업혁명바로 이전의 생활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부모의 유산이나 기업이라는것은 이처럼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기업이 없는 자녀는 살아남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는 한 아버지의 유산을 함께 나누어야합니다. 분배 방식은 복잡하나 어쨌든 한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가지게 될 운명입니다. 그러니까 형제는 한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이것을 영적으로 소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았고 예수님의 피로 속량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부 형제입니다. 부부간에도 이 문제에 관한 한 형제요,아버지와 아들도 형제요, 할아버지 손자도 형제입니다. 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는 모두 한 형제라는 말씀입니다. 아주 수평적인 관계에있습니다. 또 우리는 같은 소망을 가졌습니다. 같이 하늘나라에 가서 영

DTXT)원한 기업을 함께 누려야 될 사람들입니다. 고난도 같이하고 신앙 생활도 같이 해야 합니다. 요단 강을 건너는 것도 함께요, 하나님 앞에 가서영원한 기업을 누리는 것도 함께이어야 합니다. '주 안에서의 형제'라는것이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형제애를 가지지 못해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아들을탕자의 비유에서 봅니다. 얼핏 보기에 탕자의 형은 그리 큰 죄를 지은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제애를 배반했습니다. 실은 이것이야말로 큰 죄입니다.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기뻐하고 있는 순간에 그는돌아온 동생을 형제로 영접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탕자로, 버려진 동생으로 대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는 몹시 섭섭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형제간에 다투고 불화하면 슬퍼하는 것은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형이 잘못했다, 동생이 잘못했다 하고 비판하지만 아버지 입장에서는 "왜들 싸우느냐"할 뿐입니다. 동생이 나쁘다고 비난하는 형도 내 아들이요 형이 비판하는 동생도 내 아들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형제간에 다투지 않고 화목한 것이 곧 아버지 앞에 효도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4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아가파테 알렐루스"'아가페의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아가페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이것도 아가페입니다.

아가페 사랑을 내가 네게 한 것같이 너희들도 아가페의 사랑을 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수직적인 사랑과 수평적인 사랑이 같은 차원에서 이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과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이 평행선 상에서 대비되고 있

DTXTrP습니다. 요한복음 1314절에서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바로 이런 관계, 이것이형제애입니다. 형제애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제하고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 뿌리를 둔 형제애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받아서 하는 사랑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결코 쉬운사랑이 아닙니다. 저는 결혼식 때 종종 신랑 신부를 앞에 놓고 사랑을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부부도 아가페의 사랑을하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하여 죽으신 것처럼, 또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 그런 사랑을 하라고 합니다. 따라서 사랑을 너무 쉽게 감상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욕정과사랑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라고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보다 깊고 보다 높은 것입니다. 결론부터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바 없이 이웃 사랑을 한다는 것은거짓말입니다. 적어도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다 하는 감격을 가지고 하는 이웃 사랑이 참 아가페요, 성도의 사랑이요, 형제의 사랑입니다. 저 사람이 나한테 잘하니까 사랑하고, 저 사람하고 친해지면 이로우니까 사랑하고, 매력 있으니까 사랑하는 것은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제애라는 것은 그리스도께로서 받은 사랑을 근거로 하는사랑이요, 형제를 대할 때 그리스도를 대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5-- 양과 염소의 비유에 이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DTXTð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45)." 이 말씀이 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형제애라는 말씀입니다. '형제로 태어났으니까 형제다, 한 집에서 사니까 형제다' 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나와 아무런 혈연 관계도 없는 성도를 형제라고 부르는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바로 그런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 뿌리를 둔 형제애란 그리스도로 인한 중생이 중심이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향한 감사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저를 용서하고,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셨으니 나도 감격해서 누구든지 사랑하게 됩니다.

결혼식이 끝나면 대개의 신랑 신부들이 곧바로 신혼여행을 떠납니다. 그중 어떤 신랑 신부들은 떠나기 전에 잠시 틈을 내어 주례를 서 준 제게인사를 하러 옵니다. 그러면 저는 그들에게 부탁합니다. "오늘은 가장행복하고 좋은 날이니 다니는 것마다 오늘만은 인심을 써라. 택시요금2,000원 나왔으면 3,000원을 내고, 누가 가방 하나를 들어 주더라도 그사람한테 반드시 사례를 해라." 자기 좋은 날 구두쇠 노릇해서 남 섭섭하게 만들면 되겠습니까? 내 마음이 기쁠 때에는 마음문을 열어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은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은혜가 충만한 얼굴로 대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그런데 대개 여기서부터가 문제입니다. 아이들이 부모님 안 계신 동안 싸움도 하고 장난도치고 해서 집을 어질러 놓았단 말입니다. 여러분도 다 어린 시절을 보내봐서 아시겠지만 아이들한테는 그저 뒤지고 늘어놓고 하는 것이 가장 재미있는 놀이입니다. 그러나 아늑해야 할 집이 온통 엉망이 되어 버렸으

DTXT@니 자,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오늘은 은혜를 많이 받았으니"괜찮다. 엄마가 치울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너희들 정신이있느냐 없느냐!" 하고 한바탕 야단을 치면 그 날 받은 은혜는 그만 다쏟아져 버리는 것입니다. 게다가 아이들은 '아이구 우리 엄마는 교회만다녀오시면 저 모양이야' 하고 생각할 터이니 아이들 신앙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좀더 이야기할까요? 그 아버지는 교회에 나오지 않고주일에도 술을 마시는 분이라 합시다. 아버지가 거나하게 취한 얼굴로돌아오면 아이들은 그 기회를 노립니다. 술 기운에 벙긋벙긋하는 틈을이용하여 "아버지 1,000원만" 하면 10,000원짜리가 기분 좋게 나옵니다. 보십시오. 교회에서 은혜받고 왔다는 사람이 술취한 사람 기분 좋아서 인심 쓰는 것만도 못하다면 이것이 과연 문제 아닙니까? 그런고로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구원받은 자의 기쁨과감격이 이웃을 대할 때에 너그럽고 사랑스럽게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바로 형제애라는 것입니다.

본문 서두에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41절이 3장말씀과 연결됨을 뜻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 그 때에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으로 부활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과 같이 우리도 거룩한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이다 여기에는 종말론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형제애,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는 형제애가 네 가지로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 네 가지 표현을 조용히 음미하고 명상해 보면 마치 낭만이 가득한 고급 연애 편지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여러분은 단 한번이라도 누구

DTXT霞錤× 이렇게 말해 본 적이 있습니까? 누구한테서 이러한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밤낮 사랑, 사랑 말만 했지 언제 사랑을 느껴 보았어야 말이지요. 나의사랑하는 사람, 나의 사모하는 사람,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느끼기는커녕 면류관은 고사하고 굴욕으로 생각하니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네 표현을 하나씩 살펴봅시다. 첫째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랑, 그리스도 동기적인 사랑입니다. 특별히 '나의 사랑'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일대 일의 개인적인 사랑(personal love)을 말합니다. 요즘 어떤 부인들은남편을 소개할 때에 '제 남편'이라고 소개하지 않고 "우리 애 아빠예요"합니다. 당연히 나와의 관계를 기준해서 '내 남편'이라고 해야지, '아빠'라고 합니까? 아이가 없었다면 무엇이라 불렀겠습니까? 내 남편, 내 아내, 이렇게 나와의 관계가 분명해야 합니다. 친구를 말할 때에"내 친구예요" 말하지 못하고 "내 친구의 친구"라고 한다면 그 친구와내가 무슨 관계입니까? 이처럼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도 내 구주, 나를위하여 돌아가신 내 그리스도, 내 소망, 내 생명 이런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하면서 이 사랑을 표현할 때에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리라"고 기꺼이 자기 희생을 각오합니다(2:17). 희생,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있었던 미담(美談)입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영국과 독일 양군 모두 많은 부상병을 냈습니다. 그 때에 한 군목이부상자들을 건지기 위해 빗발치듯 쏟아지는 탄환 속으로 뛰어들어갔습

DTXToM니다. 움푹 패인 구덩이 속에 스무 명의 부상자들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가장 급한 것이 물인데 군목한테는 물이 한 병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한 병을 가지고 조금씩 돌아가면서 마시게 했는데 부상병들은 모두 자기보다 남을 위하여 갈증을 참고 아주 조금씩만 마셨습니다. 그렇게 해서결국 맨마지막 사람까지 물이 돌아갔고, 그 사람이 가장 많은 물을 마시게 되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형제애가 아니겠습니까? 둘째, '사모하는 형제'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모한다는 것은 '에피포데토이' 그리워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사랑과 정성을 주는 것이요, 공간과 시간과 환경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내 몸은 갈 수 없으나 마음은 갈 수 있습니다. 내 간절한 마음은 늘 그 곳에 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움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함께하지 아니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정신적 사랑이 동반되지 않는 행동은 아무리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장하려 해도 참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영적 사랑, 정신적 사랑, 그리고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물질만 왔다갔다하는 사랑이 아니요, 함께 있고자 하는 마음, 끌리는 마음, 간절한 마음,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 사랑입니다.

셋째, '나의 기쁨'이라는 표현을 봅시다. 우리는 '사랑'하면 왜 그런지 눈물이 먼저 생각납니다. 그러나 참사랑이란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기쁨을 생산하지 못하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또한 참사랑은 사랑받는 사람만 기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내게 기쁨을 주는것입니다. 우리가 참사랑을 하고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에곧 내 마음에 기쁨이 옵니다. 그러나 아직 참사랑을 모른다면 사랑하는사람을 생각해도 억울하고 분해서 못 견딥니다. '나는 왜 내가 사랑하는것만큼 사랑받지 못할까?'하고 생각하는 것은 아가페가 아닙니다.

DTXT긝랑받지 못함으로 인한 원망, 내가 사랑하는 것보다 받는 것이 적고 손해보는 것 같아서 느끼는 피해 의식 -- 이것들은 모두 나의 사랑이 참사랑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랑을 흔히 에로스라고 합니다. 아가페는 받는 사랑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만 가지고도기쁘고 행복합니다. 내게 사랑의 대상이 있다는 것으로 흥분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아가페 사랑이요, 사도 바울은 이것을 '나의 기쁨'이라고합니다. 사랑 자체가 그에게 큰 기쁨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빌립보 교인을 생각할 때마다 기뻤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3,4절에서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만일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에울적함이 있고, 섭섭함과 원망스러운 기분이 있다면 그 사랑은 무엇인가문제가 있습니다. 내 사랑이 참사랑인가 아닌가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아가페 사랑에는 질투가 없습니다. 사랑이 병드는 이유는 질투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할 때에는 기쁨이 있는데 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는 기쁨이 없습니까?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동생을 칭찬하면 형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내를 칭찬해도 남편이 싫어합니다. 그러나 아들을 칭찬하면 아버지가 좋아하고, 딸을 칭찬하면 어머니가 좋아합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아들이 아버지보다 훨씬 잘났구나"하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실례가 되지 않지만 형더러 "형보다 동생이 훨씬 잘났군"하는 것은 큰 실례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질투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본성입니다. 왜 사랑에 기쁨이 없습니까? 시기와 질투가 있는 속된 사랑이요 타락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질투는 뿌리깊은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가인은 어떠한

DTXT>상황에서도 아벨을 아끼고 감싸줘야 할 친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을 때에 그는 형으로서 "내 제사는 받지 않아도 네 제사를 받으셨으니 고맙구나. 동생아 잘했다. 내 마음도 기쁘다" 했어야옳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굴이 상하고, 이그러지고, 마침내 동생을 죽여 버렸습니다. ?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파울이 말하는 사랑은질투가 없는 사랑입니다. 그저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절대 고독해하지 않는 것, 이것이 성도의 형제애입니다.

넷째,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랑의 대상으로부터 내가 영광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고, 자랑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면류관'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두 가지가 있는데, 왕관을 뜻하는 '디아데마'와 면류관을 뜻하는 '스테파노스'가 그것입니다. 스테파노스에는 또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운동경기에서 일등한 사람한테 주는 월계관, 요즘 말로 하면 금메달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잔치자리에서 귀한 손님을 높이 치하하기 위해 씌워 주는 면류관인데, 지금으로 말하면 가슴에 큰 꽃을 달아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본문의 스테파노스는 축제의 면류관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나의 면류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희들이 바로 내 승리의 표상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종으로 수고하는데 너희들이 내 면류관이요 영광이라고 자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어린 양 잔치에 초대받아 함께 누릴 영광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대상으로부터 영광을 얻는 그런 사랑이 참사랑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영광을 얻고 저쪽은 되도록 낮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높여서 상대방의 영광이 곧 나의 것으로 전달되고 수용될 때 그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끝에서 "주 안에 서라"고 했는데 이것은 군사 용어입니다. 싸움에는 공격적인 싸움이 있고 방어적인 싸움이 있습니다. "서라"

이것은 방어적인 싸움을 의미합니다. 워치만 리(WatchmanLee)의 말에 따르면 공격적인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방어적인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시험을 이겨야 하고 죄를 이겨야 합니다. 유혹을 이겨 나가야 합니다. 이처럼 방어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서라"

굳게 서라, 흔들리지 말라, 이대로 위치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방어적인 싸움의 승리를 전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깊이 상고해 보면 그렇게 은혜로운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이같이 귀한 은혜가 있었습니다.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안에 서라." 이 같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애가 있을 때에 그 자신에게 은혜가 있고 영광이 있으며 또한 그 사랑 안에 하나님의 크신 뜻이 이루어질 줄로 압니다.  

주 안에 있는 형제의 뜻(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서라.

 

본문 가운데서 우리는 주 안에 있는 형제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주 안에 있는 형제의 뜻'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흔히 인류애, 동포애, 혹은 인간애라는 맥락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애, 인류애라는 것만 가지고는 참사랑을 베풀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형편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소위 '이웃 사랑'이라는 것은 좀더 높은 차원에서 형제애라고 부릅니다.

어째서 형제애라고 할까요? '형제애'는 헬라어로 '필라델피아'라고 합니다. '아델포스'에는 '형제'라는 뜻이 있고 '필리아'에는 '사랑'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말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필라델피아는형제애를 뜻합니다.

필라델피아는 몇 가지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형제는 한부모한테서 태어납니다. 그 뿌리가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가 될수밖에 없는 관계입니다. 한 가지로부터, 즉 한 부모로부터 같은 사랑을받았다는 뜻입니다.

둘째, 형제 관계는 절대적 관계입니다. 친구란 한번 사귀었다가도 얼마든지 헤어질 수 있는 관계입니다. 심지어 부부도 만났다가 헤어질 수있습니다. 그러나 형제는 피를 나눈 사이입니다. 한 부모로부터 태어났기에 헤어지 수 없는 인연입니다. 상대적 관계가 아니라 절대적 사랑의관계입니다.

셋째, 형제는 같은 기업(基業)을 가지고 있는 관계입니다. 요즘은 기업이라는 의미가 많이 흐려졌습니다. 보십시오. 부모의 직업, 부모의 기

D묭뭆TXT~\술을 이어받아서 그것을 계승하는 자녀가 얼마나 됩니까? 독립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각기 제 갈 길로 갑니다. 결혼해서 나가고, 일 찾아서 나갑니다. 성급한 사람은 좀더 일찍 가출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각자 넓은 세상에 나가 삽니다. 그러나 옛날 농경 사회나 유목민 사회에서는 반드시 부모로부터 유업을 이어받아야 했습니다. 땅이 있어야 농사를 짓지 않습니까? 그런데 땅에는 땅 임자가 다 있기 때문에 누구도 땅을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내가 땅을 소유하려고 한다면 어느 집에 가서 머슴살이부터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일생동안 머슴살이한들 땅을 몇 마지기나 얻을 수 있을는지! 그래서 근본적으로 부모로부터 유산을 받지 못한 사람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고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종으로 팔려 갈 수밖에 없고 머슴으로밖에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사회였습니다. 뭐 그리 옛날 일도 아니요 산업혁명바로 이전의 생활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부모의 유산이나 기업이라는것은 이처럼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기업이 없는 자녀는 살아남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는 한 아버지의 유산을 함께 나누어야합니다. 분배 방식은 복잡하나 어쨌든 한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가지게 될 운명입니다. 그러니까 형제는 한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이것을 영적으로 소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았고 예수님의 피로 속량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부 형제입니다. 부부간에도 이 문제에 관한 한 형제요,아버지와 아들도 형제요, 할아버지 손자도 형제입니다. 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는 모두 한 형제라는 말씀입니다. 아주 수평적인 관계에있습니다. 또 우리는 같은 소망을 가졌습니다. 같이 하늘나라에 가서 영

DTXT)원한 기업을 함께 누려야 될 사람들입니다. 고난도 같이하고 신앙 생활도 같이 해야 합니다. 요단 강을 건너는 것도 함께요, 하나님 앞에 가서영원한 기업을 누리는 것도 함께이어야 합니다. '주 안에서의 형제'라는것이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형제애를 가지지 못해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아들을탕자의 비유에서 봅니다. 얼핏 보기에 탕자의 형은 그리 큰 죄를 지은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제애를 배반했습니다. 실은 이것이야말로 큰 죄입니다.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기뻐하고 있는 순간에 그는돌아온 동생을 형제로 영접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탕자로, 버려진 동생으로 대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는 몹시 섭섭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형제간에 다투고 불화하면 슬퍼하는 것은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형이 잘못했다, 동생이 잘못했다 하고 비판하지만 아버지 입장에서는 "왜들 싸우느냐"할 뿐입니다. 동생이 나쁘다고 비난하는 형도 내 아들이요 형이 비판하는 동생도 내 아들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형제간에 다투지 않고 화목한 것이 곧 아버지 앞에 효도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4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아가파테 알렐루스"'아가페의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아가페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이것도 아가페입니다.

아가페 사랑을 내가 네게 한 것같이 너희들도 아가페의 사랑을 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수직적인 사랑과 수평적인 사랑이 같은 차원에서 이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과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이 평행선 상에서 대비되고 있

DTXTrP습니다. 요한복음 1314절에서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바로 이런 관계, 이것이형제애입니다. 형제애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제하고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 뿌리를 둔 형제애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받아서 하는 사랑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결코 쉬운사랑이 아닙니다. 저는 결혼식 때 종종 신랑 신부를 앞에 놓고 사랑을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부부도 아가페의 사랑을하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하여 죽으신 것처럼, 또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 그런 사랑을 하라고 합니다. 따라서 사랑을 너무 쉽게 감상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욕정과사랑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라고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보다 깊고 보다 높은 것입니다. 결론부터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바 없이 이웃 사랑을 한다는 것은거짓말입니다. 적어도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다 하는 감격을 가지고 하는 이웃 사랑이 참 아가페요, 성도의 사랑이요, 형제의 사랑입니다. 저 사람이 나한테 잘하니까 사랑하고, 저 사람하고 친해지면 이로우니까 사랑하고, 매력 있으니까 사랑하는 것은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제애라는 것은 그리스도께로서 받은 사랑을 근거로 하는사랑이요, 형제를 대할 때 그리스도를 대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5-- 양과 염소의 비유에 이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DTXTð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45)." 이 말씀이 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형제애라는 말씀입니다. '형제로 태어났으니까 형제다, 한 집에서 사니까 형제다' 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나와 아무런 혈연 관계도 없는 성도를 형제라고 부르는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바로 그런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 뿌리를 둔 형제애란 그리스도로 인한 중생이 중심이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향한 감사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저를 용서하고,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셨으니 나도 감격해서 누구든지 사랑하게 됩니다.

결혼식이 끝나면 대개의 신랑 신부들이 곧바로 신혼여행을 떠납니다. 그중 어떤 신랑 신부들은 떠나기 전에 잠시 틈을 내어 주례를 서 준 제게인사를 하러 옵니다. 그러면 저는 그들에게 부탁합니다. "오늘은 가장행복하고 좋은 날이니 다니는 것마다 오늘만은 인심을 써라. 택시요금2,000원 나왔으면 3,000원을 내고, 누가 가방 하나를 들어 주더라도 그사람한테 반드시 사례를 해라." 자기 좋은 날 구두쇠 노릇해서 남 섭섭하게 만들면 되겠습니까? 내 마음이 기쁠 때에는 마음문을 열어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은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은혜가 충만한 얼굴로 대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그런데 대개 여기서부터가 문제입니다. 아이들이 부모님 안 계신 동안 싸움도 하고 장난도치고 해서 집을 어질러 놓았단 말입니다. 여러분도 다 어린 시절을 보내봐서 아시겠지만 아이들한테는 그저 뒤지고 늘어놓고 하는 것이 가장 재미있는 놀이입니다. 그러나 아늑해야 할 집이 온통 엉망이 되어 버렸으

DTXT@니 자,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오늘은 은혜를 많이 받았으니"괜찮다. 엄마가 치울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너희들 정신이있느냐 없느냐!" 하고 한바탕 야단을 치면 그 날 받은 은혜는 그만 다쏟아져 버리는 것입니다. 게다가 아이들은 '아이구 우리 엄마는 교회만다녀오시면 저 모양이야' 하고 생각할 터이니 아이들 신앙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좀더 이야기할까요? 그 아버지는 교회에 나오지 않고주일에도 술을 마시는 분이라 합시다. 아버지가 거나하게 취한 얼굴로돌아오면 아이들은 그 기회를 노립니다. 술 기운에 벙긋벙긋하는 틈을이용하여 "아버지 1,000원만" 하면 10,000원짜리가 기분 좋게 나옵니다. 보십시오. 교회에서 은혜받고 왔다는 사람이 술취한 사람 기분 좋아서 인심 쓰는 것만도 못하다면 이것이 과연 문제 아닙니까? 그런고로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구원받은 자의 기쁨과감격이 이웃을 대할 때에 너그럽고 사랑스럽게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바로 형제애라는 것입니다.

본문 서두에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41절이 3장말씀과 연결됨을 뜻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 그 때에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으로 부활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과 같이 우리도 거룩한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이다 여기에는 종말론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형제애,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는 형제애가 네 가지로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 네 가지 표현을 조용히 음미하고 명상해 보면 마치 낭만이 가득한 고급 연애 편지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여러분은 단 한번이라도 누구

DTXT霞錤× 이렇게 말해 본 적이 있습니까? 누구한테서 이러한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밤낮 사랑, 사랑 말만 했지 언제 사랑을 느껴 보았어야 말이지요. 나의사랑하는 사람, 나의 사모하는 사람,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느끼기는커녕 면류관은 고사하고 굴욕으로 생각하니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네 표현을 하나씩 살펴봅시다. 첫째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랑, 그리스도 동기적인 사랑입니다. 특별히 '나의 사랑'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일대 일의 개인적인 사랑(personal love)을 말합니다. 요즘 어떤 부인들은남편을 소개할 때에 '제 남편'이라고 소개하지 않고 "우리 애 아빠예요"합니다. 당연히 나와의 관계를 기준해서 '내 남편'이라고 해야지, '아빠'라고 합니까? 아이가 없었다면 무엇이라 불렀겠습니까? 내 남편, 내 아내, 이렇게 나와의 관계가 분명해야 합니다. 친구를 말할 때에"내 친구예요" 말하지 못하고 "내 친구의 친구"라고 한다면 그 친구와내가 무슨 관계입니까? 이처럼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도 내 구주, 나를위하여 돌아가신 내 그리스도, 내 소망, 내 생명 이런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하면서 이 사랑을 표현할 때에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리라"고 기꺼이 자기 희생을 각오합니다(2:17). 희생,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있었던 미담(美談)입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영국과 독일 양군 모두 많은 부상병을 냈습니다. 그 때에 한 군목이부상자들을 건지기 위해 빗발치듯 쏟아지는 탄환 속으로 뛰어들어갔습

DTXToM니다. 움푹 패인 구덩이 속에 스무 명의 부상자들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가장 급한 것이 물인데 군목한테는 물이 한 병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한 병을 가지고 조금씩 돌아가면서 마시게 했는데 부상병들은 모두 자기보다 남을 위하여 갈증을 참고 아주 조금씩만 마셨습니다. 그렇게 해서결국 맨마지막 사람까지 물이 돌아갔고, 그 사람이 가장 많은 물을 마시게 되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형제애가 아니겠습니까? 둘째, '사모하는 형제'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모한다는 것은 '에피포데토이' 그리워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사랑과 정성을 주는 것이요, 공간과 시간과 환경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내 몸은 갈 수 없으나 마음은 갈 수 있습니다. 내 간절한 마음은 늘 그 곳에 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움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함께하지 아니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정신적 사랑이 동반되지 않는 행동은 아무리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장하려 해도 참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영적 사랑, 정신적 사랑, 그리고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물질만 왔다갔다하는 사랑이 아니요, 함께 있고자 하는 마음, 끌리는 마음, 간절한 마음,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 사랑입니다.

셋째, '나의 기쁨'이라는 표현을 봅시다. 우리는 '사랑'하면 왜 그런지 눈물이 먼저 생각납니다. 그러나 참사랑이란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기쁨을 생산하지 못하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또한 참사랑은 사랑받는 사람만 기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내게 기쁨을 주는것입니다. 우리가 참사랑을 하고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에곧 내 마음에 기쁨이 옵니다. 그러나 아직 참사랑을 모른다면 사랑하는사람을 생각해도 억울하고 분해서 못 견딥니다. '나는 왜 내가 사랑하는것만큼 사랑받지 못할까?'하고 생각하는 것은 아가페가 아닙니다.

DTXT긝랑받지 못함으로 인한 원망, 내가 사랑하는 것보다 받는 것이 적고 손해보는 것 같아서 느끼는 피해 의식 -- 이것들은 모두 나의 사랑이 참사랑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랑을 흔히 에로스라고 합니다. 아가페는 받는 사랑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만 가지고도기쁘고 행복합니다. 내게 사랑의 대상이 있다는 것으로 흥분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아가페 사랑이요, 사도 바울은 이것을 '나의 기쁨'이라고합니다. 사랑 자체가 그에게 큰 기쁨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빌립보 교인을 생각할 때마다 기뻤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3,4절에서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만일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에울적함이 있고, 섭섭함과 원망스러운 기분이 있다면 그 사랑은 무엇인가문제가 있습니다. 내 사랑이 참사랑인가 아닌가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아가페 사랑에는 질투가 없습니다. 사랑이 병드는 이유는 질투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할 때에는 기쁨이 있는데 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는 기쁨이 없습니까?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동생을 칭찬하면 형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내를 칭찬해도 남편이 싫어합니다. 그러나 아들을 칭찬하면 아버지가 좋아하고, 딸을 칭찬하면 어머니가 좋아합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아들이 아버지보다 훨씬 잘났구나"하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실례가 되지 않지만 형더러 "형보다 동생이 훨씬 잘났군"하는 것은 큰 실례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질투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본성입니다. 왜 사랑에 기쁨이 없습니까? 시기와 질투가 있는 속된 사랑이요 타락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질투는 뿌리깊은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가인은 어떠한

DTXT>상황에서도 아벨을 아끼고 감싸줘야 할 친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을 때에 그는 형으로서 "내 제사는 받지 않아도 네 제사를 받으셨으니 고맙구나. 동생아 잘했다. 내 마음도 기쁘다" 했어야옳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굴이 상하고, 이그러지고, 마침내 동생을 죽여 버렸습니다. ?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파울이 말하는 사랑은질투가 없는 사랑입니다. 그저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절대 고독해하지 않는 것, 이것이 성도의 형제애입니다.

넷째,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랑의 대상으로부터 내가 영광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고, 자랑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면류관'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두 가지가 있는데, 왕관을 뜻하는 '디아데마'와 면류관을 뜻하는 '스테파노스'가 그것입니다. 스테파노스에는 또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운동경기에서 일등한 사람한테 주는 월계관, 요즘 말로 하면 금메달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잔치자리에서 귀한 손님을 높이 치하하기 위해 씌워 주는 면류관인데, 지금으로 말하면 가슴에 큰 꽃을 달아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본문의 스테파노스는 축제의 면류관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나의 면류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희들이 바로 내 승리의 표상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종으로 수고하는데 너희들이 내 면류관이요 영광이라고 자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어린 양 잔치에 초대받아 함께 누릴 영광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대상으로부터 영광을 얻는 그런 사랑이 참사랑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영광을 얻고 저쪽은 되도록 낮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높여서 상대방의 영광이 곧 나의 것으로 전달되고 수용될 때 그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끝에서 "주 안에 서라"고 했는데 이것은 군사 용어입니다. 싸움에는 공격적인 싸움이 있고 방어적인 싸움이 있습니다. "서라"

이것은 방어적인 싸움을 의미합니다. 워치만 리(WatchmanLee)의 말에 따르면 공격적인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방어적인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시험을 이겨야 하고 죄를 이겨야 합니다. 유혹을 이겨 나가야 합니다. 이처럼 방어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서라"

굳게 서라, 흔들리지 말라, 이대로 위치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방어적인 싸움의 승리를 전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깊이 상고해 보면 그렇게 은혜로운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이같이 귀한 은혜가 있었습니다.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안에 서라." 이 같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애가 있을 때에 그 자신에게 은혜가 있고 영광이 있으며 또한 그 사랑 안에 하나님의 크신 뜻이 이루어질 줄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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