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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순종의 가정〈창세기 15장 1~7절〉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理常)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無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後嗣)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으로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주셨습니다. 그 가정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사랑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가 아닙니다. 서로 취미가 달라서도 아니요, 요새 흔히 일어나는 경제 문제로도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의 관계가 그토록 어긋나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께 범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무너지면 부부의 사랑도 함께 무너진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고 하겠습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며 귀애 하였던 사이입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께 범죄를 하고 나니 이야기는 생판 달라지고 맙니다. "저 사람 하와 때문입니다"----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던 그 여자를 어찌 이렇게 팔아먹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내가 저 사람 때문에 불행합니다"라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부부 사이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모자라서라거나 사랑이 잘못되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부부 사이에 금이 가고 가정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둘이 열심히 사랑하고, 경제적인 문제를 비롯하여 모든 여건이 잘 갖추어졌다면, 이런 가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가정의 문제는 그런 상대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인격이든지 신앙적인 인격으로 돌아갈 때에야 비로소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통하여 그런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한걸음 나아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의 가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가정이라는 것은 본디 부부 당사자만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둘이서 잘살자, 둘이서 행복하자, 서로서로 위로가 되고 서로서로 힘이 되자 ---- 이런 동반자적인 관계를 이루어서 평화롭게 산다고 하는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은 그것을 통해서 지엄한 사명이 이루어지는 그릇입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가정에는 큰 사명이 있습니다.
가정은 하나의 집입니다. 거기에 기업이 있고, 거기에 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둘이 합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아주 귀한 일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통해 이루고자 계획하시는 일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많은 손님을 대접하게 하십니다. 나그네 대접도 가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불쌍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도 가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하나님의 자비가 베풀어지는 '자비의 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손님 대접을 잘한 덕으로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가 천사들을 대접하지 않습니까? 천사인 줄 알고 짐짓 대접을 한 것이 아닙니다. 전혀 낯선 사람들이 멀찍이서 지나갑니다. 그런 사람들을 대접합니다. 대접하고 보니 천사들입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에서 열린 교역자 수련회에 알래스카에서 오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 목사님 내외분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알래스카 최대의 도시인 앵커리지에는 워낙 사람이 귀하다고 합니다. 특히 긴 겨울에는 아침 9시에 해가 떴다가 오후 3시에 지는 곳이고 보니 그곳 사람들은 거의 늘 컴컴한 데서 사는 셈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여름에는 그와 반대로 밤이 없는 이른바 백야(白夜)의 날들이 계속됩니다.
겨울은 몹시 춥고 여름은 서늘한데, 여름장 몇 달 동안이 여간 아름답고 깨끗하지 않다고 합니다. 한번 놀러 오라고 합디다마는, 아무튼 그런 곳인데, 워낙 사람이 귀하다보니 그곳처럼 인심 좋은 데가 없다고 합니다.
인종 차별하는 사람도 없어서, 흑인이나 황인을 멸시하고 차별하기 잘하는 백인들도 거기서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자연은 넓고 춥고 괴로운데 사람이 워낙 귀하다보니 흑인이건 황인이건 사람을 만나면 그저 반갑다고 합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의 때에도 사람이 귀했습니다. 드넓은 벌판에 사람이라고는 어쩌다 눈에 띌 정도로 드물게 살 때였으니까요. 그러니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반가워했겠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다 아브라함의 가정은 워낙 손님 대접 잘하는 가정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가정의 아름다운 덕목(德目)이었습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스스로만 누릴 것이 아니요,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기관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 이것이 가정이 지녀야 할 귀중한 덕목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은 이렇게 덕있는 가정이었습니다.
우리네 옛 어른들도 그러했지 않습니까? 손님 많이 대접하는 가정을 보고 복 받은 가정이라고 했습니다. '사랑방'은 으레 손님 대접하는 여관방 구실을 했습니다. 낯모르는 나그네도 머물고 가게 했습니다.
비록 여관이라는 게 따로 없어도 어느 동네에나 하룻밤 묵어 갈 집은 으레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길손들도 먼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가정이라는 것은 선한 사업을 하는 '기관'으로 존재해야 한다 --- 우리는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이러한 사명적 의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찾아내야 할 가장 큰 의미는 바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은 철저한 믿음의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정이란 어디까지나 안정(安定)을 필요로 합니다.
이사(移徙) 자주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됩니다.
평생을 두고 이사를 수십 번했다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을 보면 참 딱합니다.
국민학교 6년 동안에 열 번이나 이사를 하는 바람에 전학(轉學)을 열 번이나 했다는 맹랑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사 자체도 어려운 일인데 그렇게 자주 옮겨 다녔으니 공부인들 제대로 해냈겠습니까?
내 나라 안에서도 그런데 하물며 남의 나라에 가서 살아야 한다면 더욱이나 안정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느닷없이 고향 땅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랜 세월 대대로 정착했던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생판 산설고 물설은 미지의 세계로 나그네길 떠나기가 쉬운 일입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군말 없이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은 '방랑하는 가정'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의 아내 사라 또한 묵묵히 아브라함을 따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사라는 아브라함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6절은 사라의 그러한 믿음과 덕성을 높이 사고 있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그렇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아브라함 가정의 특징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었기에 갈 바도 알지 못하는 채 길을 나섭니다.
그에게 발붙일 만큼도 땅을 주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는 평생을 안정 없이 살았습니다. 이 나라에도 가고 저 나라에도 갑니다. 애굽에도 두 번이나 갑니다. 이렇게 기약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게다가 사라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그 남편을 믿어 주라 칭하면서 전적으로 따를 뿐입니다. 사라의 믿음과 순종에 대해서는 생각할 점이 참 많습니다. 특별히 그들이 기근을 피하여 애굽에 갔을 때의 일을 봅시다.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라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창12 : 11-13)."
요새 같으면 남편의 이런 태도 앞에 고분고분 순종할 여자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붙잡혀서 남의 노리개가 되어도 좋다는 건가요? 나야 어찌되든 당신만 무사하면 그만인가요? 도대체 무슨 남자가 이토록 무책임하단 말입니까? 날 사랑한다고 하더니 말짱 헛소리군요" 하고 덤벼들 일입니다. 쉽게 말해 '너 죽고 나 살겠다'는 태도라고 손가락질한대도 아브라함은 할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그럽시다'하고 순순히 따릅니다.
참 대단한 여자입니다.
사라의 온전한 순종에 대해서는 그밖에도 들어 이야기 할 것이 많습니다마는, 그 중에서도 압권은 외아들 이삭을 바칠 때의 순종입니다. 여기까지도 순종한 것을 보면 그 밖의 무엇인들 순종하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결국 사람은 둘이서 한 몸으로 살아야 하니 둘 중의 하나가 순종을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의견을 다 맞추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에서 기쁨을 얻고, 순종을 안정의 기본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자아가 너무 세고 자신의 의견이 지나치게 강한 여자, 요새말로 해서 '수탉 같은 여자'니까 순종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일단 순종하는 형(型)으로 돌아가면 순종처럼 좋은 것이 없는데 말입니다.
"당신의 생각이 내 생각입니다" ---- 얼마나 편하고 좋습니까? 참으로 내가 온전히 내 의견을 맡겨 버리고 살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그처럼 좋은 일이 없을 것입니다. 다 믿어 버리니까요.
그렇더라도 사라에게는 아무래도 간과하기 어려운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라에게 이삭이 어떤 아들입니까? 늘그막도 한참 늘그막인 아흔 살에 얻은 금지옥엽(金枝玉葉)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아들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이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제물'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향해 집을 나섭니다.
이 경우,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보다도 더욱 심각한 상태에 빠집니다. 굳이 따져보자면 아브라함으로서는 이삭을 바친다 해도 아들이 또 하나 있습니다.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산술적으로는 이 아들을 바쳐도 저 아들은 남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사라에게는 아들이 이삭 하나뿐입니다. 사라가 고분고분 순종할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사라는 순종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함께 따라 나선 것도 아니고 다만 아버지에게 아들을 동행시켜서 묵묵히 모리아산으로 보내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라의 이 믿음, 참으로 엄청난 믿음입니다. 이 여인은 모든 것을 다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남편 아브라함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에 있는 이삭을 믿었습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아들을 순순히 내어주는 구체적인 신앙입니다. 그리고 기다립니다.
모리아산까지의 사흘 길과 제사, 그리고 돌아오는 길 ---- 근 한 주일 동안을 사라는 덕성스럽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라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위대한 여인입니다.
거듭 강조합니다마는 사라는 철저한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남편을 믿고 아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가정을 '믿음의 가정' 이라 일컫습니다.
이 믿음의 가정을 볼 때에 특별히 상고(詳考)해야 할 것은, 이 가정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가정이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서로를 믿을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방황하는 어려움도 그러한 믿음 때문에 겪어 냈습니다. 믿음 때문에 애굽에서의 고난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믿음 때문에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 했습니다. 철저한 믿음 때문에 겪어 낼 수 있는 일들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지금 몹시 두려운 가운데에 있습니다.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십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왔더라(창 14 : 14-16)."
이 같은 조처에 대항하여 저 사람들이 보복을 해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언제 쳐들어올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전혀 무방비 상태입니다.
저들이 동맹을 맺어 가지고 군사를 몰아 쳐들어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훈련된 군사 하나 없는 아브라함은 꼼짝없이 멸종의 화를 입고 말 형편입니다. 당연히 전전긍긍할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런 위급존망의 두려움에 싸여 있을 그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아브람아" - 부드럽고 영원한 목소리로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 내가 너를 지킬 터이니 아무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울타리도 없고 군사도 없습니다. 전혀 무방비입니다. 다만 낯선 땅에 고아처럼 뎅그러니 떨어져 있는 맨손의 일가족일 뿐입니다.
지켜 주신다는 하나님의 그 말씀 한가지를 믿고 마음을 놓기에는 너무나도 절박한 현실이 피부에 닿아 있습니다.
여느 가정이었다면 이런 때에 아마도 주부가 경망스럽게 나서서 '바가지'를 긁어 대었을 것입니다.
"여보, 그만 고향으로 돌아가요! 이렇게야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이에요? 당장에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잖아요?"하고 남편을 채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사라도 또다시 하나님을 믿고 그곳에 머무릅니다. 그렇더라도 아브라함의 마음은 답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내게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無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하고 자식이 없음을 몹시 불안해합니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음성으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하시고 그를 이끌어 밖으로 나가게 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떤 행동을 취했습니까? 흉년 한번 든 것에 그만 애굽으로 '살길'을 찾아 피해 떠나갔습니다. 가나안 땅을 약속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만을 믿고 순례의 생도 마다않고 살아온 그가 말입니다. 바로 이 실수 때문에 하나님께서 엄히 조처하십니다.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의 때부터 모세의 때까지, 장차 4백 년에 걸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것을 경고하시고, 나아가 출애굽의 구원까지 약속하십니다.
무슨 변이 닥치더라도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지켰어야 합니다. 흉년이 들건 전쟁이 나건 하나님께서 그 땅을 업으로 주시겠다고 하셨으므로 마땅히, 그 기업을 끝까지 지켰어야 합니다.
눈앞의 흉년을 겁내어 그 땅을 떠났다는 사실이 그토록 크나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축복이었습니다.
그 땅을 업으로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도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축복이었습니다.
'너와 네 후손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신 약속을 믿는 믿음과, 약속의 땅을 끝까지 지키는 믿음 - 이와 같은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가정이 성립될 수 있었습니다.
무릇 가정이라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가정의 문제는 두 사람만의 행복이나 수평적으로 이웃을 향해 이루어지는 관계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수직적 관계입니다. 바로 자손을 연면히 이어간다는 점입니다.
예로부터 며느리를 얻을 때에는 당자의 생김새나 살림솜씨 같은 것을 따지기 전에 먼저 아이를 잘 낳을 수 있겠는지의 여부를 헤아렸습니다.
후손 문제는 그만큼 중요했습니다. 두 사람이 얼마나 금실 좋게 잘살았는가 -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축복은 자자손손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본인들보다도 자녀들이 더 잘되어야 그 가정이 잘된 가정입니다. 부모는 굉장히 잘살았는데 그 자식 대에 가서 엉망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 가정을 어찌 복된 가정이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가정의 문제라고 하면 곧 자식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식의 문제는 그만큼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의 가정도 이 자식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처음에는 자식이 없어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자식을 얻은 후에는 누구를 후사(後嗣)로 하느냐가 문젯거리로 나타납니다. 일찍이 자식이 없을 때에 아브라함이 하녀인 하갈의 몸을 빌려 얻은 아들 이스마엘 때문이지요.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부부싸움이 있었다면 바로 이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파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고 사라가 90세 되는 그런 때에도 자식이 있으리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브라함도 믿고 사라도 믿었습니다.
자자손손이 복을 주리라 하신 말씀도 두 사람은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복을 주신다고 할 때에는 자자손손으로 복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그 복이 나에게만 머물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을 가리켜 '복의 근원'이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시는 복이 오늘에 그치는 것이 아니요, 나의 생애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은 연면히 이어집니다. 곧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자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요즈음의 우리네 가정을 들여다보면 자녀에 대한 문제를 너무도 소홀히 여기는 것 같습니다.
지난날에는 너무도 소중히 여겨서 걱정이 되었는데 요새는 소홀히 다루어져서 걱정입니다. 어린 자식을 쓰레기 버리듯 내다버리지 않나, 고아원에 팽개치고 개가를 하지 않나, 자식을 학대하는 끔찍한 이야기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젊은 부부들은 자식의 장래보다도 두 사람의 행복을 먼저 챙기기에 바빠 보입니다.
일찍이 우리네 가정이 결코 이렇지 않았습니다. 자녀를 위해 이사를 하고, 자녀를 위해 직업도 바꿉니다. 자녀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려고 들었던 게 우리네 가정의 본디 모습입니다. 자녀를 위해서는 부모 된 자신들의 행복을 서슴없이 희생했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입니까? 미국 같은 나라에서 큰 문제 거리로 나타나는 현상들이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미국에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자녀들이 전체의 3분의 1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토록 많은 자녀들이 끝내 '아버지' '어머니'를 한번 제대로 불러보지 못하고 성장하는 셈이 됩니다. 5분의 1은 제 아버지의 이름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만한 인구가 그런 상태로 성장하자니 범죄가 들끓을 수 밖에요. 거듭 강조하거니와, 자녀를 소홀히 하는 가정은 절대로 복된 가정이 아닙니다.
오늘 아브라함의 가정을 살펴보는 뜻은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 두 사람이 하나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늘의 별처럼 많이 주시겠다고 하신 자손, 영원히 이어지는 그 기업을 그들은 바라봅니다. 그래서 그 가정이 이루어집니다.
오늘도 이와 마찬가지올시다. 가정은 두 사람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명심해야 합니다.
모름지기 자식으로 이어질 축복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가지고 가정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가정은 복의 근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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