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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물을 내게 주소서(요한복음 4 : 7~19)
인간은 사회 혹은 가정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서로 연결되어져서 살아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웃으로부터 소외당한다는 것은 삶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 소외당한 삶을 살아가는 한 불행한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 여인은 물을 길러 우물가에 나왔다가 우연히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큰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적 은혜 가운데서 되어진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요한복음을 좀더 성서신학적 입장에서 살펴 보면 이 편집에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3장과 4장에서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두 사람이 예수님과 만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장에서는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과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은 당시에 종교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귀족이며 고관의 한 사람입니다. 이런 지체 높은 귀인이 예수님과 만나는 그런 장면입니다. 4장에는 그와 반대로 천한 신분의 사람이요 부도덕한 사람이요 그로 인하여 소외당한 한 여인이 예수님과 만나게 됩니다. 너무나 대조적인 두 만남의 장면입니다.
니고데모는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것도 밤에 찾아왔습니다. 아마도 자기의 높은 신분과 예수님의 신분의 차이가 문제가 되어서 낮에 오질 못하고 밤에 찾아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스스로 영생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우물가에 물 길러 나왔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물 좀 달라고 하는 청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대화를 요청했던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의 결과로서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그것도 모르느냐고 하는 책망의 말씀을 듣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메시아 되심을 깨닫고 기뻐하며 자기 동네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정반대의 사람으로서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중생해야 되겠다" 즉 "거듭 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을 듣고 니고데모는 "사람이 나이가 많으면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갈 수 있습니까?"하는 말을 함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여인은 한번 먹으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다는 물이 그 얼마나 좋을까 하여 그런 물 좀 달라고 구하였던 것입니다.
두 사람 다 말 귀를 못알아 들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는 영 마음이 통하지 않는 참으로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지식이 있으나 없으나 신분이 높으나 낮으나 성령이 그 마음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진리를 깨달을 수 없는 데는 마찬가지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이 여인은 제6시에 물을 길러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간으로서는 아침 해 뜰 때가 1시요, 해 질 때가 12시입니다. 그러므로 제6시라는 것은 햇볕이 강한 정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뜨거운 사막 지방에서 이렇게 정오에 이 여인은 혼자서 물을 길러 나왔던 것입니다.
여기는 필유곡절입니다.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풍속으로는 대낮에 물 길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 아침저녁 서늘할 때 물을 길러 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 우물은 동네에서 약 오릿길쯤 되는 거리에 있기 때문에 동네 아낙네들이 함께 모여서 떼를 지어 물 길러 가고 오고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왜 이렇게 햇볕 뜨거운 시간에 혼자서 물 길러 나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반드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짐작할 수 있 대로 이 아낙네들이 아침 저녁 떼를 지어 다니면 그 입들이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온통 동네 이야기를 다 하게 되는 뉴스 통인 것입니다. 그것도 좋은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좋지 못한 온갖 흉을 다 보게 되는데 이제 남의 말에 오르내리기가 쉬운 부끄러운 신분의 이 여인은 이 아낙네들 사이에 끼어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뜨거운 시간에 혼자서 물 길러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주 힘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릿길에 물을 길러 다닌다는 그 일 자체도 힘든 일이지만 그것만이 아니고 그는 자랑스럽지 못한 수고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가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수고와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마는 가장 큰 고통은 부끄러운 고통일 것입니다. 같은 수고라도 자랑스러운 수고, 나는 이렇게 수고하노라. 이런 일을 하노라 라고 할 수 있는 수고라면 그 수고는 수고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끄러움이 있는 고통, 이런 수고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사람, 이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소외당한 여인은 모든 사람 사이에 낄 수 없는 그런 여인으로서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물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혼자서 이런 땡볕에 물 길러 나왔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뜨거운 햇볕 아래 앉아 있던 한 낮선 청년이 물 한 모금 달라고 청할 때 이 사람에게 물 한 그릇 선뜻 내어 주지 못하고 불평을 할만큼 짜증스러운 삶을 사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만나서 물 좀 달라고 했을 때 그는 "당신은 유대 남자로서 왜 천한 이방 여자인 나에게 물 달라고 하는 겁니까?"라고 했습니다. 왜 이 말을 해야 합니까? 이 여인은 남에게 물 한 그릇 쉽게 선심쓸 수도 없을 만큼 콤플렉스가 있는 여자입니다. 그저 불평스럽고 만사에 짜증스러운 그것뿐입니다. 죽을 수 없는 생을 그저 이렇게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좀 달라고 했을 때 그는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다시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렇듯이 귀한 영적인 샘물을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이 여인은 그 뜻도 모르고 "이런 물을 나에게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마술적인 물, 한번 마시면 다시 마시지 않아도 기갈이 없는 물, 그래서 나로 하여금 이 짜증스럽고 귀찮은 물 길러 다니는 일을 좀 안 하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안일하고 수고를 덜게 하고 편하게 해 달라는, 다시 말해서 인간적이요 세속적인 소원 성취를 위해서 구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처럼 답답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만사에서 그 깊이를 생각합니다.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물질을 보면서 상징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신령한 진리를 들으면서 속된 것을 생각합니다. 여기에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비교적 좀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설교를 하시는데 앞에 앉은 할머니 한 분이 설교를 들으면서 계속 울고 계셔서 예배가 끝난 후 목사님이 얼마나 은혜를 받아서 저럴까? 해서 "할머니 무슨 말씀에 은혜를 받고 우셨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말씀에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목사님이 소리지를 때마다 며칠 전에 죽은 우리 집 송아지 생각이 나서 울었습니다"라고 하시더랍니다.
지금 우리는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신령한 진리를 들으면서 세속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나 아닙니까? 보이지 않는 진리를 들으면서 보이는 물질을 생각하는 것이나 아닙니까? 어떤 분은 설교를 들으면서 잘 기억해 두었다가 회사에 가서 사원들에게 훈시할 때 써야겠다고 하시더랍니다. 다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물, 대체 어떤 물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러한 물, 예수님 하시는 말씀과는 아무 상관없는 그러한 물, 정말 뜻 모르는 소리입니다. 영 말귀가 통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물을 나에게 주어서 힘들고 하기 싫은 물 길러 다니는 일을 하지 아니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물이 아니라 저런 물을 주시려고 했습니다.
보다 더 근본적이고 영원하고 참된 신령한 물을 주시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그 어리석음을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말귀도 못 알아듣고 거룩한 것을 속된 것으로 풀이하며 자기 욕망에 매여서 진리를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물을 달라고 하는 이 안 통하는 답답한 사람을 놓고도 책망하시지 않고 이제 하나의 조건을 묻습니다. 진실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이란 거짓 혹은 허위의 반대입니다. 사실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너는 네 진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실을 시인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 오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아픈 곳을 찔렀습니다. 그리고 반응을 보신 것입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 핵심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남편이 없는 것이 아니요 있습니다. 그런데도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여자는 다섯 번 결혼했습니다. 정말 팔자가 기구해서 남편이 다섯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같이 사는 남편은 자기 남편이 아니라 남의 남편입니다. 아마도 남의 남편을 빼앗아서 같이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는 남편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법적으로도 엄연히 남편이 있습니다. 그런 남편이지만 내 남편이라고 얼마든지 변을 늘어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양심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남편이 있으나 그의 양심으로는 남편이 없었습니다.
괴로움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합법이 통하지 않는 양심의 가책을 지니고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항상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누구도 변명할 수 없고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고민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이것을 묻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편이 없다고 대답한 여인의 말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이 참됨, 이 마지막 진실, 이 진실이라고 하는 하나의 그릇은 있어야만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적인 선도 아니요 구제도 아니요 업적도 아닙니다. 다만 진실, 그 깊은 진실 이것 하나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네 남편을 데려 오라" "없습니다" "네 말이 옳도다. 지금 있는 남편은 네 남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크신 복을 내려 주십니다. 이 여인의 그리스도에 대한 인상은 계속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 유대의 청년으로 만나서 대화를 합니다. 유대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이 상종하지 않는 풍속 때문에 유대 남자로서 왜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라고 말할 정도였으나 그 다음에는 능력을 행하시는 분, 즉 한번 마시면 영원히 목 마르지 않는 물을 주실 수 있는 마술사 같은 분 혹은 자기의 부끄러움을 덜어 주실 수 있는 그런 분으로서 예수님을 인식합니다. 예수님께 가면 내 고통이 없어지고 예수님께 가면 내 병이 낫고 예수님께 가면 내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이런 정도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라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그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된 동기를 구체적으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됨을 아는 사람, 나의 진실을 아는 사람, 내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사실을 아는 분, 그가 메시야입니다. 나와 개인적 관계를 맺고 나의 깊은 중심을 알아주는 그분 말입니다. 동시에 그분은 이 더러운 나를 알고도 나를 만나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와 대화해 주셨고 나를 사랑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나의 이 처지를 알고도 사랑해 주신 분 그 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림과 사람은 멀리서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멀리서 볼 때 좋습니다. 가까이 가면 변변치 못합니다. 그 진실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내 장점도 내 단점도 내 거짓됨도 내 추함도 다 알면서 그러고도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 그분을 만나고 싶은 게 아닙니까? 그에게라면 우리 온 마음 온 정성을 다 바치고 싶은 게 아닙니까? 그런데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모든 부끄러운 것을 그대로 다 알고도 사랑해 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그 진실을 다 아는 자가 누구며 그러고도 사랑해 줄 수 있는 분이 누구냐는 말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용서란 피상적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여인의 부족함과 더러움을 다 알고 그리고 일대일의 개별적으로 사랑해 주신 것같이 우리들도 이렇게 영접해 주십니다. 이 여인은 자기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주셨을 때 그는 주님께 온 생을 바쳤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내가 너를 보았다"하는 주님의 그 말 한 마디를 듣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끓었습니다. 무화과나무 밑에서 잠깐 기도하고 있을 때, 즉 내 경건을 알아 주셨다는 그 마음 때문에 예수님께 자기의 생명을 바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그의 일생을 바쳤습니다.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와 같고 죄인의 괴수요 핍박자요 가장 작은 자 중에서도 또 작은 자인 나를 예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그대로 사랑하셨습니다. 모습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온 생을 그리스도께 바쳤던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어떤 조건을 걸었다면 이 사람은 주님께 나올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셨기에 그는 너무 감격해서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뛰어 들어가서 온 동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 메시야를 만나고자 떼를 지어 예수님 앞으로 와 몰려듭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보시면서 너무 너무 기뻤습니다. 마침 때가 점심 식사 때이므로 제자들이 먹을 것을 준비해 가지고 돌아와서 예수님께 잡수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벌써 식사 다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고 그 여인이 기뻐하며 나가서 증거하는 모습을 보는 동안 시장기가 다 없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는 아주 신비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한심한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고서로 말했다고 했습니다. 항상 예수님과 함께 다녔지만 그들은 예수님과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심령이 기뻐하며 좋아하는 것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신 것으로서 양식을 삼았던 것입니다. 이제 이 여인은 더 이상 목마르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움도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건 여섯이건 문제가 안되었습니다. 모든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온 동네에 다니면서 예수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부끄럽고 추한 삶을 사는 나를 예수님께서 개인적으로 만나 주셨고 사랑해 주신 이 한가지 사건 때문에 그는 이처럼 즐거웠습니다. 아마도 지난날의 고독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자랑했을는지도 모릅니다. 남달리 불행했기 때문에 남달리 큰 은혜와 영광을 얻었다고 간증했을는지도 모릅니다. 남달리 부끄러움을 가졌기 때문에 나는 혼자서 물 길러 갔다가 이런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되었노라고 두고두고 간증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물을 나에게 주시옵소서."어리석은 소원이었으나 꾸짖지 아니하시고 예수님께서는 그 소원을 높은 차원에서 채워 주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기쁨이요 영광인 것입니다.
기도 : 한 미천한 여인을 만나 그를 구원하시고 기뻐하시던 주님, 세상에서 안일만을 구하여 이런 물을 달라고 하는 한심스러운 소원을 가지고 나왔으나 꾸짖지 아니하시고 더 높은 차원에서 저 영광스럽고 영원한 가장 귀한 생수로 채워 주신 주님, 오늘 우리에게도 이같은 생수로 채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한 가지만으로 만족하고 모든 어려움과 부끄러움을 다 극복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증인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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