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이 때를 위한 신앙적 결단(에스더 4:10-17)
에스더가 하닥에게 이르되 너는 모르드개에게 고하기를 왕의 신복과 왕의 각 도 백성이 다 알거니와 무론 남녀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아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홀을 내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아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그가 에스더의 말로 모르드개에게 고하매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의 명한대로 다 행하니라
사람의 일생이란 계속적으로 선택하며 결단하는 것입니다.
선택과 결단의 긴장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일 중에서 부득불 하나만을 선택해야 합니다. 또한 그 하나를 선택하기 위하여 여타의 것들은 다 포기하는 결단도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택을 바로 하지 못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은 했는데, 버려야 할 것을 버리는 결단이 없을 때에 또다시 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자기 생을 책임지며 살아갑니다.
'결단에 피라밋 형이 있다'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대단히 흥미 있는 얘기입니다. 피라밋 형의 결단이 있습니다. 첫째로, 일상적인 결단이 있습니다. 흔히들 '오늘 아침에는 무슨 음식을 해먹을까, 점심에는 또 무얼 먹을까?'하며 식사 때마다 메뉴를 고릅니다. 여기에도 상당한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 한국음식은 찬이 많아서, 어떤 때에는 젓가락을 들고 이것 먹을까 저것 먹을까 하며 망설일 때가 있습니다. 이것도 선택하고 저것도 선택한다면 다 먹지 못합니다. 이것을 먹는다면 저것은 포기해야되는 것입니다. 단 두 벌의 옷을 가진 사람도 '이 옷을 입을까, 저 옷을 입을까? 어느 쪽이 더 어울릴까?'하고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이것 역시 선택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둘째로, 일상적 결단보다는 조금 더 중요한 의미의 선택과 결단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여러분이 자동차를 산다고 합시다.
그럴 때에는 '과연 어떤 차를 사야 좋을까'하고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또 부인네들이 냉장고를 선택할 때에도 심사숙고합니다. 한 번 잘못 선택하면 십 년 고생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많은 것 중에서 부득불 하나를 선택했으니 이제는 적어도 십 년 동안은 사용해야 합니다. 잘못 선택했다 하더라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렇듯 한 번 선택한 것이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친구를 사귀는 것, 전공과목을 택하는 것, 직업을 택하는 것, 직장을 택하는 것, 아내를 택하는 것…… 어쩌다 잘못 선택하기라도 한다면 오랫동안 고생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잘 선택하기만 하면 기대 이상의 행복한 삶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에 이런 선택은 중요한 선택입니다. 그렇지만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로, 결정적 선택과 결단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여기에 운명을 겁니다. 명예를 겁니다. 이 한순간의 선택으로 내 영원한 생명이 좌우됩니다. 이렇듯 중요하고도 결정적이고 종말론적인 선택과 결단의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옵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단을 내리게 하는 동기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동물적 동기입니다. 모든 동물은 본능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 본능에 따라 먹어야 하고, 살아야 하고,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동물적 충동에 따라 선택하게 되는 일도 많습니다. 내 육체의 건강에 따라서 식욕이 끌리는 대로 선택하고 결단하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동물은 reaction으로 살고, 인간은 response로 산다'--동물은 모든 부딪히는 사건에 대하여 본능적으로 반응, 반사하면서 살지만 인간은 반사적이기보다는 한번 더 깊이 생각하고 거기에 응답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적 결단입니다.
두 번째는 도덕적 동기입니다. 동물적 충동은 있지만 그것에 그대로 따를 수는 없습니다. 도덕성을 묻는 것입니다. 도덕적 동기를 무시하고 결단할 때에 인간은 비참해집니다. 자, 술을 먹었으면 1차 한 번 갔으면 됐지, 2차 3차는 왜 또 갑니까? 그래놓고 다음날 아침에 보면, 속은 속대로 쓰리고 몰골도 말이 아니어서 망신당하기 십상입니다. 이렇게 되고나서도, 그 다음에 또 반복합니다. 이것은 순간적으로 도덕적 동기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성적 동기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택과 결단이 그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선과 의와 진리와 사랑--이런 것들이 다 도덕적 동기입니다. 사람이라면 이에 따라 선택하고 결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신앙적 동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내 편에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결단합니다. 내 마음에 장시 납득이 가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쪽을 택합니다. 나로서는 혹 불행이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주의 뜻인 고로 주의 뜻대로 하리이다--이 결단, 겟세마네동산에서 주님께서 결정하신 것과 같은, 이 같은 선택과 결단이어야 합니다. 이 같은 신앙적 동기야말로 가장 결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세 가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능력을 믿고, 그 존재를 믿고, 그 사랑을 믿을 때에 그 속에서 얻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존재의 의미를 얻게 됩니다. 내가 구원받기 전까지는 내 존재의 의미를 내가 모릅니다.
내가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내 생명과 존재의 의미를 모릅니다. 불 신앙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앙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내 존재의 의미를 얻게 됩니다.
두 번째는 사명의 의미를 얻게 됩니다. 세상사람들이 다 나를 필요치 않다고 하고, 내가 나를 보기에도 너무나 초라하고 쓸모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쓸모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는 사람은 자기 존재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런데 보아하면 여기서 문제가 됩니다. 특별히 여자 분들 보면, 결혼을 하고 나면 자기의 할 일이 다급합니다. 잘하든 못하든 사랑하는 남편과 어린아이를 위하여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죽느니 사느니 그렇게 한숨쉬고 앉아 있을 겨를이 없습니다. 언뜻 보면 독신인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아 보입니다. 그 사람이 죽는다 해도 그를 위해 울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정말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해야 할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간에 독신생활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간혹 독신자들이 자기 존재의 의미와 진정한 사명감을 잘 느끼지 못하고 스스로 허무주의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비록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필요가 없을지라도 적어도 하나님께는 내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는 내가 필요하다 하는 사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 존재의 가치가 고귀하고, 자기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하여 엄청난 의미를 느끼며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세 번째는 현실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세상은 부조리합니다. 모순되고, 불확실하고, 불안하고, 뜻대로 안 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으로서 느끼는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에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도 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도 내가 직면한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이루시고 계십니다. 모름지기 이 같은 우주적 의미를 느끼면서 현실을 타개해나갈 것입니다. 현실 안에서 모든 창조적 의미를 새롭게 깨달아갈 것입니다. 신앙인의 눈으로 볼 때에는 뜻 없는 현실이 없습니다. 버려진 사건도 없습니다. 크고 작고도 없습니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현실 그대로, 그 속에 엄청난 우주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간혹 이런 분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다는 것에 대해서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때 저런 때 하나님께서 분명히 나를 위하여 역사 하셨다--잘 알고 있습니다.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또한 미래에 대한 약속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운명은 물론이고 앞으로 하나님나라에 갈 때까지 모든 것을 인도해주실 것이다, 하는 미래에 대한 약속을 어렴풋이 나마 믿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당한 이 현실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오늘 내가 당면한 이 현실, 여기에 의미가 있음을 알면서부터 비로소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에스더라고 하는 한 여인을 볼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유대사람입니다. 디아스포라입니다. 유대사람이면서 유대 나라가 아닌 바사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옛날, 소수의 유대민족이 남의 나라에 가서 살면서 얼마나 구박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고향을 떠나 남의 땅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으레 그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그 유대여인의 미모와 지혜가 눈에 띄어 바사 나라 아하수에로 왕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앞날의 영광을 보장받았습니다. 이제 그녀의 생은 한 여자로서가 아닌, 그야말로 한 나라의 왕후로서 일생동안 왕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어이없는 시기와 질투로 말미암아 그 유대민족이 수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큰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하만이라고 하는 아주 사악한 사람 하나가 자기 나라에 있는 온 유대백성을 다 없애려고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말살시킬 수 있는 건의안을 만들어 가지고는, 왕으로부터 그 허락의 표시로 인(印)을 받아내었습니다. 그 법령이 시행되면 이제 유대사람은 다 죽게 됩니다. 바사 나라의 수산 성(城)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사람들의 운명이 말살될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어이없는 고난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민족 전체가 큰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 모르드개와 그 조카되는 에스더를 보십시오. 큰공을 세워서 위기에 처한 유대민족을 건져냅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 백성이 바사 나라에서 큰 영광을 얻는, 새로운 역사를 전개시킵니다. 이방 땅에서 하나님께 높이 영광을 돌리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이 직면하는 위기, 이것이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새로운 역사 창조의 새 기회가 된 것입니다. 위기가 기회로 바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숨은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역사를 진행시키고 계셨습니다. 겉으로 드러남이 없이 숨은 가운데서 당신께서 친히 역사 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의 경륜이 있고,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절박한 위기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높이시고,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위기가 창조적인 기회로 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신앙적 응답과 신앙적 결단이 요구됩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선택과 새로운 신앙적 결단을 통하여 당신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캐나다와 미국 사이에 걸쳐 있는 것으로, 세계적으로도 굉장한 장관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나이아가라 폭포의 깎아지른 듯한 양 절벽 사이에 쇠줄을 매어놓고 줄타기를 시도하였습니다. 너도나도 이 줄타기를 구경하려고 수만 명이 운집했습니다. 특히나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건넌다 못 건넌다 내기까지 하였습니다. 모두들 '저 사람이 과연 건널 수 있을까'하는 마음에 조마조마하였습니다. 드디어 줄타기하는 사람은 긴 막대기 하나만을 손에 쥐고 줄 위를 한 발짝 한 발짝 내딛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손에손에 땀을 쥐었습니다. 마침내 그 사람이 무사히 줄타기를 끝낸 순간, 지켜보던 사람들은 일제히 '와'하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자, 그런데 이 사람이 이번에는 다른 방법으로 줄타기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퀴가 하나밖에 없는 조그마한 손수레를 끌고 건너겠다는 것입니다. 줄타기하는 사람은 마이크에 대고 큰 목소리로 자기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여러분, 과연 제가 이 폭포 위를 무사히 건널 수 있을까요?" 그러자 관중 속의 어떤 사람이 그 말에 대답하듯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빈 몸으로 건넜을 때 무사했던 사람이 그까짓 조그만 수레 하나 끌고 가지 못할까?" 다른 사람들도 모두가 너나없이 여기에 동의했습니다. 그러자, 줄타기하는 사람은 정중하게 한마디 더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제가 여기를 건널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신다면, 아무나 한 분 이 손수레에 올라타십시오. 제가 끌고 건너겠습니다." 순간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아무도 올라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 사람이 무사히 건너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믿는다 했지만, 자기들이 직접 수레에 올라타기는 꺼려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요. 그런데 갑자기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손을 번쩍 들면서 "내가요! 내가 타보겠어요!"하며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줄타기하는 사람은 그 어린아이를 손수레에 태우고는, 줄을 타고 폭포 이쪽에서 저쪽까지 무사히 건너갔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별 희한한 어린애도 다 보겠다'라고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막 수레에서 내리려는 그 아이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너, 어디서 그런 용기를 얻었느냐?" 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용기요? 저 분은 우리 아버지세요. 저는 아버지를 믿거든요."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아, 그럴 거야. 그래, 맞아'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멘을 백번 하면 무엇합니까? 문제는 여기에 운명을 걸어야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에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감상적인 생각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정한다고 해서 그 지식이 신앙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란 분명한 결단입니다.
오늘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얼마나 귀중한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모르드개가 왕후인 조카 에스더에게 말하는 것의 내용을 눈여겨보십시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13,14절)"---'우리민족은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이제 모두가 말살당할 엄청난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너는 왕궁에 있는 몸이다. 이러한 때에 네가 왕에게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문다 해도, 우리 백성은 다른 방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백성을 버려두지 않으실 테니까. 누구를 통해서든지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반드시 구원해주실 줄로 나는 믿는다. 그러나 네가 왕궁에 있다 해서 우리 백성이 처한 이 위기를 너 홀로 면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말아라. 우리 민족이 다 죽으면 너도 함께 당할 것이고, 만일에 네가 이 때에 잠잠하면 우리는 다른 데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겠으나 너와 네 아비 집은 망하리라'하는 무서운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에스더 왕후는 왕에게 나가겠다고 대답합니다. 에스더가 하나님의 큰 섭리 안에서 자기가 해야 할 현실적 사명의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입니다. 오늘날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 당면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에스더가 기도와 금식 중에, 자기 존재의 이유를 하나님의 큰 섭리 안에서 깨달으려 했던 것입니다. 지금 결정적 시간이 왔습니다. 여기에 용기가 필요하고, 여기에 새로운 믿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봅시다. 모르드개는 에스더 왕후에게 또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14절)." 왕후가 된 것이 바로 오늘을 위하여, 바로 이 순간을 위하여, 바로 이 사건을 위하여 예비된 일이 아니겠느냐, 그래서 네가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중요한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과거는 어떠했습니까? 그것은 다 지나간 얘기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오늘은 어떻습니까? '바로 이 순간, 내 앞에 놓여 있는 이 사건을 위하여 내가 세상에 존재한다'라고 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가장 성공적이고 가장 용기 있는 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가장 큰 의미의 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곧 '이 때를 위함이라' 함입니다. 에스더, 네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함이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네가 존재한다, 라는 말입니다.
구약 창세기 45장에 보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이 자기 형님들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난날, 형님들은 열 일곱 살난 동생 요셉을 팔아먹었습니다. 그것도 처음에는 죽이려고 했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팔아먹은 것입니다. 갖은 고생을 한 끝에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된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애굽왕 바로의 꿈이 요셉이 해몽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애굽은 물론 다른 온 나라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요셉의 형님들은 양식을 구하려고 애굽으로 오게 됩니다. 애굽의 총리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런데 저 앞에 있는 총리가 누구입니까? 자기들이 노예로 팔아먹은 요셉입니다. 이것을 알게 된 저들은 벌벌 떱니다.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 싶습니다. 요셉은 형님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음으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45:5)"---'당신들이 나를 팔았다고 해서 혹여 내가 보복할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먼저 저를 애굽으로 보내신 것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요셉은 자기가 팔린 것이 아니라 보냄을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현실관입니다. 그실 사건은 그렇게 이루어졌던 것이 아닙니다. 형들은 그를 분명히 팔아먹었고 그는 팔려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팔려온 자로 살지 않았습니다. 보냄 받은 자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받아들이는 현실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가정이 있습니까? 직장이 있습니까? 어떤 처지에 놓여 있습니까? 내가 처한 현실이 어떻습니까? 그저 팔자와 운명이 기구해서 이렇게 살아갈 뿐입니까? 할 수 할 수 없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겠지'하고 있습니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팔려 가는 생이 아니고 끌려가는 노예도 아닙니다. 보냄 받은 사명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사명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7,8)"---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보내셨다, 나는 보내심을 받은 것이지 당신들의 손으로 팔려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이자 순교자인 본훼퍼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값싼 은혜를 구하므로 문제가 많다.' 우리가 하나님의 어떤 요구에 대하여 진실의 응답이 없고, 무엇인가 희생의 값은 지불하지 않고, 오로지 싸구려 은혜만을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때로는 헌신을, 때로는 인내를, 때로는 겸손을, 때로는 희생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요구에는 단 한마디도 응답이 없고, 싸구려 은혜만 구하고, 그것만을 달라고 소리지르고 있는 우리입니다. 어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싸구려 은혜를 구할 생각은 마십시다. '복을 주십시오. 잘살게 해주십시오' 따위의 소리는 잠깐 멈추십시다.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생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오늘날 내게 비장한 선택과 비장한 결단을 요구하시고 계십니다. 자기희생 없이 되어진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시고 계십니다.
에스더의 말을 잘 새겨 들어보십시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이리이다(16절)"---'내가 사흘 동안 기도하겠습니다. 당신들도 기도하세요. 내가 왕궁의 규례를 어기고 왕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죽게되면 기꺼이 죽겠습니다'라는 다짐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런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오늘도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여기에는 이기주의가 없습니다. 이성적 판단도 없습니다.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이다 하는 순간입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과거에도 보호해주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미래의 약속도 믿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현재 내가 당한 처지, 바로 여기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믿고, 내게 분담하시고 맡겨주신 사명을 믿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이 믿음과 이 지식과 이 신앙 안에서 새로운 결단을 합니다. 나를 버리고, 죽으면 죽으리라 다짐합니다. 우리가 다 에스더도 아니고 요셉도 아닙니다. 그러나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절박한들 이 두 사람이 당했던 것 만하겠습니까? 억울한들 이만큼 억울하겠습니까? 지금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향하여 지금도 무엇인가 요구하시고 계십니다.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시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바른 선택, 바른 결단이 있을 때에 바로 당신을 통하여, 바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실 것입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체의 비결(빌립보서 4:10-13) (0) | 2024.03.19 |
---|---|
이 말씀을 가르치라(신명기 11:18-25) (0) | 2024.03.19 |
유쾌하게 하는 사람(디모데후서 1:15-18) (0) | 2024.03.19 |
예수님의 일과(마가복음 1:35-39) (0) | 2024.03.19 |
인간성 상실의 위기(히브리서 3장 7절~14절) (0)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