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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 상실의 위기(히브리서 3장 7절~14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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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 상실의 위기(히브리서 3714)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세상이 변했다고 하지만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바로 지난 78일 새벽, 일본 동경에서 열네 살난 중학교 2학년 남학생이, 성적이 좀 떨어졌다고 꾸중하는 어머니에게 앙심을 품고 칼과 쇠망치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70세 된 할머니를 살해했습니다. 검시를 해 본 결과, 단번에 죽인 것이 아니라 40여 군데나 찔러서 죽였다고 합니다. 이 소년은 정신 이상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 사건을 감행한 후에 자기 친구들을 불러서 태연하게 사실을 설명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벌어진 입이 닫혀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학교 성적으로 인하여 중고등 학생들의 투신 또는 약물 자살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금년에 들어와서 20여 명이 넘는 학생들의 명단이 발표되었고, 보도되지 않은 숫자까지 합치면 50여 명이 넘는다고 하니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것입니까? 아니, 내 앞이 무사하니 무사한 것입니까? 이 말세적인 무서운 징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인간성의 위기가 경종을 울리는 데 무감각해 있지나 않은지 묻고 싶습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 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역시 인간 문제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성 문제이고, 인간성 문제는 인간 존재 자체의 문제입니다. 인간 존재의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형상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결코 잘살고 못사는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지위가 높고 낮은 명예문제도 아닙니다. 부하고 가난하고 높고 낮음의 문제에서 완전히 떠나, 정말 인간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겠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 일류대학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인간성이 파괴되고 있는 이 마당에 지식과 학력이 무슨 대단한 이야기 거리가 되는 것입니까? 소유, 능력, 기술,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성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냉철하게 돌아가서 사람됨의 그 자체를 물어야 하겠습니다.

창세기 6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홍수로 온 인류를 진멸하시기 전에 심판하시기를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즉 육체만 남은 고기덩어리이기에, 이는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홍수로 쓸어서 장례하여 심판을 내리신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악한 존재입니까, 선한 존재입니까? 사람은 천사일 수도 있고 악마일 수도 있습니다. 천사나 악마가 특정한 다른 인물로 구별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인물이 어느 순간에는 악마도 되고 어느 순간에는 천사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가 다 가능합니다. 문제는 그 속에 있는 영혼이 어떤 상태냐 하는 것입니다. 헬라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가 어느 날 골목길을 지나가는데, 한 청년이 갑자기 나타나서 몽둥이로 소크라테스의 어깨를 여러 번 내리쳤다고 합니다. 그는 어이없이 때리는 매를 그대로 맞았습니다. 조금 후에 또다른 청년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선생님, 저런 나쁜 놈에게 그냥 매를 맞습니까? 같이 때리시든지 아니면 욕이라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하며, 오히려 그 청년이 흥분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껄껄 웃으면서 "자네는 길을 가다가 당나귀에게 채이면 돌아서서 당나귀를 발길로 걷어차나?"하고 대답하더랍니다. 사람 아닌 사람하고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 아닌 그에게 충고는 해서 무엇하며, 미워해서 무슨 소용이냐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귀한 고백을 할 때, 주님은 높이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베드로라는 좋은 이름을 주시면서,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라 하시고 천국 열쇠까지 맡기셨습니다. 얼마나 큰 칭찬이고 복입니까?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십자가 지심을 만류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크게 칭찬하시던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엄하게 나무라십니다. 여기서 '사단'이란, 베드로의 얼굴이나 그의 인격이나 그의 지식을 보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그 속에 있는 영혼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의 영혼이 마귀와 함께 하면 마귀요, 성령과 함께 하면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나도 그 누구도 이 사람만은 예외라고 말하지 맙시다. 그 사람이야말로 이만한 수준이니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나도 악마일 수 있고 저도 악마일 수 있습니다. 나도 천사일 수 있고 저도 하나님의 자녀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두시고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선악과를 먹는 순간에 벼락이라도 맞아 죽었다면 ",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면 죽는구나"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대로 살아 있었으니, 우리는 산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착각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는 순간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들의 속사람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들이 선악과를 먹고 나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부끄러워했고 변명을 했습니다. 또한 동산에서 쫓겨나서는 그들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이 서로 다투어 살인 사건까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형상이 떠난 결과입니다. 다만 그 결과로서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 표출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됨이란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평가도 그 속사람의 상태에 의해 평가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을 닮은 심성(image of God, likeness of God)을 말합니다. 사람 속에 이 심성이 없어지면 남는 것은 동물성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많은 인간 관계에서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식도 있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심성이 없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둘째, '영원성'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영원 지향적 속성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가 비록 땅에 살지만 하늘을 바라보고, 비록 순간에 사는 것 같지만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형상이 있습니다. 셋째,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랑을 알고 받아들이고 행하도록, 즉 사랑을 중심으로 하는 속성을 가진 것입니다. 넷째, '자유성(또는 자율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는 스스로 이것을 택할 수도 있고 저것을 버릴 수도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선택에 따른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선택했으니 내가 책임져야 하는 책임적 존재인 것입니다. 다섯째는 '주관성(다스림)'입니다. 사람은 먼저 내 인격을 다스리고 내 마음을 다스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주관자란 말입니다. 마음은 곱게 정결하게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내 형제를 다스리고 가정을 다스리고 이웃을 다스리며 물질을 다스리고, 나아가 만물을 다스리는 그러한 책임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런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이 있을 때에만 사람인 것입니다. 인도주의만으로는 인간됨이 모자란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하게 되는가"를 오늘 본문은 네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불 신앙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즉 불신앙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바에서 떠날 때에 인간은 인간의 존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경건함이 우선 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 하나님을 느끼는 마음, 즉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성령이 충만할 때에, 항상 주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했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에도 함께 하시고, 감옥에서나 교회에서도 함께 하심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좀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만 하나님이 계실 때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20여 년 전에 젊은 신학자들이 여러 가지 이유에서 사신론(死神論)으로 떠들썩했습니다. 하나님이 있다 없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살았느냐 죽었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 때에 한 경건한 신학자가 하나님이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하나님이 죽었다고 말하기 그 이전에 이미 당신이 죽었습니다"라고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그 순간에 내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없는 순간에 나는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를 너무나 많이 보아 왔습니다. 하나님을 알고서야 나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없이는 내 지식이 성립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고서 어찌 나를 알겠습니까? 십자가를 통하여 계시하신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알고서야 나의 나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우리는 이만큼 하면 되었겠거니, 또한 믿는 집에서 태어났으니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이다 하는 착각을 하기 쉽습니다. 흔히 "나는 모태 신앙이다"라고 자기의 신앙 경력을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뱃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내가 언제부터 그리스도를 알았는지 분명해야 합니다. 또한 정말 신앙 안에 살고 있는지 늘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서두에서 이야기했습니다만 내 아들만은 자살 소동에서 예외라고 안심할 수 있습니까? 나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면서 말씀과 함께 조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요한복음 155절에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늘 하나님에게서 혹시나 떨어질까,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질까를 조심해야 합니다. 구원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결정되는 일은 바로 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주장하는 의로움이란 자가 당착에 빠집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죄는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가 없는 곳에는 교만과 아집이 기승을 부려 결국 무서운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피차 권면해야 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서로 권면하고 권면받기도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특정인이 없습니다. 권면이라 하면 반드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권면하고, 아들도 아버지에게 권면할 수 있습니다. 피차 권면하자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대구에 갔다가 수요일 저녁이라 어느 교회를 갔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신학대학 시절에 저의 설교학 강의를 들으신 분이었습니다. 예배 후에 잠깐 시간을 내어 사택에서 차대접을 받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설교 평을 부탁하기에 저는 극구 사양했지만 간절히 원하시므로 반 농담으로 한마디했습니다. 목사님은 다 좋으신데, 말씀 사이사이에 "--"라는 소리가 너무 잦으니 고쳤으면 좋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모님께, 그런 충고는 벌써 해 드렸어야 하지 않았느냐고 사모 역할까지 평가를 했습니다. 그 때 사모님은 목사인 자기 남편이 아내의 말을 절대로 듣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서로 권면하고 권면을 받아야 합니다. 때로는 권면할 가치조차 없다고 포기한다든지, 혹시나 권면해서 욕을 먹을까 하여, 권면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권면하는 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 안에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피차 권면하고 권면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혼자서 믿음을 지키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누군가의 충고가 있어야 하고, 누군가의 기도가 있어야 하며, 그리고 누군가의 협력을 얻어야 합니다. 즉 공동체의 도움을 받아야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죄의 유혹을 조심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죄란 기만성입니다. 어떤 죄이든 죄는 반드시 거짓을 동반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뿌리가 거짓이니까요. 죄를 한번 짓고나면 다시 반복하게 되고, 또한 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려는 또다른 죄를 더불어 짓게 됩니다. 생각에 죄가 있고, 말에 죄가 있으며 행동에 죄가 있습니다. 이제, 죄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살피겠습니다. 첫째는 "나만 죄인인가?" 둘째는 "환경이 그렇고 사회가 그렇고 세대가 그렇다"고 발뺌을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결과에 의해서 방법을 정당화하려는 것입니다. 시작과 방법에는 다소 모순이 있어도 결과만 좋으면 괜찮다는 위험한 생각입니다. 넷째는 필요악입니다. 이 정도의 악은 불가불 있을 수밖에 없다는 합리화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다섯째는 잘못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고 싶은 유혹입니다. 나는 비록 이렇게 했어도 네가 조금만 달리 생각했더라면 이런 잘못은 없었을 것이라고 상대에게 원인을 돌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회개를 연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하되 오늘 하지 말고 내일 하라"는 식으로 회개의 시간을 미룸으로 회개할 기회를 놓치게 하는 것입니다. 아직 젊었고, 아직 시간이 많으니 회개는 조금 뒤에 하자는 생각은 악마의 소리입니다.

이렇게 해서 회개하지 못하면 자유성을 잃게 되고 강퍅케 됩니다. 또한 타의에 의해서 또 다른 죄를 범하게 되고 드디어는 돌아올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아가라 폭포 상류에 가면 뱃놀이를 할 수 있는 호수와 같은 큰 강이 있습니다. 물론 이 강물은 계속해서 나이아가라 폭포로 흐르는 물입니다. 여기서는 노를 젓지 않아도 보트가 하류로 하류로 흘러 내려갑니다. 그런데, 어느 지점까지 내려오면 빨간 줄을 그어놓고 위험에 대한 제 1경고문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위험하니 되돌아가라는 것이므로, 노를 저어서 상류로 올라가야 합니다. 1경고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제 2경고가 있고, 여기서부터는 되돌아가기가 조금 더 어려움을 알려줍니다. 마지막 세 번째 경고에서는, 이 경계선을 넘어가면 아무리 노를 저어도 상류로 올라가지 못하는 지점입니다. 그대로 폭포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위험한 지점인 것입니다. 인간성 상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경고를 알아차렸을 때에는 살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2, 3경고를 무시하면 그 때 가서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미 악마의 노예가 되었기에 그대로 떨어져 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마지막 경고까지 물리친 결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여러 번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왕은 그 많은 경고를 받고도 고민하다가 마음이 경직되어 죽었고, 가룟 유다도 예수님의 충고를 물리치더니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그 많은 이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아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들이여"하는 엄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기피하고 포기하면, 스스로 회개할 수 없는 회개 불능의 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미 인간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도 아닙니다. 오직 악마의 도구로만 남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교훈하고 있기를, 오늘이라 하는 때에 피차 권면해서 바로 이 시간에 회개하여 내 영혼의 현주소를 깨끗하게 지켜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강퍅케 됨을 면하여 깨끗한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들리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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