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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이 말씀을 가르치라(신명기 11:18-25)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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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가르치라(신명기 11:18-25)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너의 열조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의 장구함 같으리라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부종(附從)하면 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얻을 것인즉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하수(河水)라 하는 하수에서 서해까지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 밟는 모든 땅 사람들로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

 

 

한 어린아이가 공원에서 공을 가지고 놀다가 놓치는 바람에 그만 공이 풀밭으로 굴러들어갔습니다. 공을 주우려면 풀밭에 들어가야 하는데 거기에는 '잔디밭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떡하니 세워져 있었습니다. 아이는 풀밭에 들어갈 수도 없고 공을 주울 수도 없는 안타까운 마음에 혼자 울고만 있었습니다. 어떤 노신사가 지나가다가 이 딱한 모양을 보고는 공을 주워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그 노신사도 풀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의 짚고 다니는 지팡이를 뻗어서 어떻게든 공을 주우려고 애를 씁니다---이 장면은 스위스 제네바에 갔을 때에 본, 그곳 호텔 로비에 걸려 있던 그림의 내용입니다. 평범하기만 한 이 그림 한폭을 유심히 보면서 저는 많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어떠한 선심(善心)이라 해도 불법(不法)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팡이를 뻗어 공을 주우려고 하는 이 그림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얼마나 부러운 모습을 담고 있는 것입니까? 얼마나 이상적인 정경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우리네 의식 속에서는 이런 것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선한 일이라도 불법이면 행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바른 길로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배우지 못하였을 뿐더러 가르치지도 못했습니다.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불행하고,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장래가 없는 것입니다.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사건들이 바로 이러한 것--배우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한 데에 연유합니다.

인간은 배우고 가르치기에 인간인 것입니다. 브라우닝(Browning, E.B.)'무지는 무죄가 아니라 유죄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몰랐으니 상관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존스(Jones, S.)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무지가 고의적인 경우일 때에는 무지 그 자체가 범죄이다.' 그렇습니다.

배우지 않은 것이 죄요, 가르치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마태복음 186,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녀교육에 대하여 힘주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녀들을 실망시키고 있습니까? 자녀들을 위한답시고 부정입학을 서슴지 않습니다. 일생토록 어디 가서 고개 한번 떳떳이 들고 다닐 수 없도록 절망적인 인간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이 정도인데 드러나지 않은 채 감추어진 일들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렇듯 그릇된 자녀사랑이 우리의 자녀들을 세상에 더없이 부끄러운 사람들로 만들고, 씻을 수 없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사람들로 만들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자녀를 실망시키고 실족케 하는 일이 있을 바에는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주님께서 엄하게 말씀하십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무에 가위질을 하는 것은 나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야단맞지 않고 자란아이는 똑똑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옳은 말입니다. 히브리서 128절에서는 "징계는 다 받는 것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징계는 있어야 하고, 우리는 징계 속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교육에 대하여 교육학이니 교육심리학이니 해서 연구가 꽤나 활발합니다만, 그 많은 교육 이론들을 제가 다 알지도 못하지만 그실 다 알 필요도 없는 줄 압니다. '교육'을 몇 가지로 정의해본다면 이렇습니다. 첫째는 생물학적 교육이 있습니다. 'Biological Education'입니다. '교육'이 아니라 '길들이기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노예교육입니다. 훌륭한 도구를 만드는 것입니다. 생산도구를 만드는 것입니다. 단순한 모방을 통한 기술 전수일 뿐입니다.

인간교육이라기보다 한낱 편리한 기구 하나 만드는 수단일 뿐입니다. 길들이기입니다. 옛날 어린아이들은 "너 장차 어떤 사람이 되겠느냐"라고 물어보면 그저 "착한 사람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새는 "필요한 사람이 될래요"하고 대답합니다. 대답은 그럴듯한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 뉘앙스가 이상합니다. 필요하다는 말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필요한 사람, 돈 잘버는 사람이 되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필요치 않으면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사람이면서 생산의 수단이 되어버리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길들이기 운동은 곧 말 잘듣고 유용한 생산 도구로 훈련시키는 일입니다. 결코 교육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수단일 뿐입니다.

두 번째는 철학적 교육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존재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지성을 주고 지식을 주고 정보를 공급하고 합리주의적 논리성을 키워서 그로 하여금 생각할 줄 아는 존재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은 상당히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성은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못되어졌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이상적 교육이라고 생각하는바 인격적 교육이 있습니다. 전인교육이라고도 합니다. 인간이 가진 본래의 잠재력을 계발해보겠다는 것입니다. 'I and It'이 아니라 'I and Thou'라는 인격적 관계에서 가르쳐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설득해야 할 때에는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고, 친절하게 사랑을 베풀어서 가르쳐야 한다고 합니다. 자녀들이 가지고 있는 지능과 잠재적인 능력을 잘 계발할 수 있도록 우리가 협력하는 것--여기까지가 인격교육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교육을 해왔는데도 세상은 점점 더 어지러워집니다. 공부도 많이들 하였습니다. 옛날보다 얼마나들 많이 압니까? 얼마나들 똑똑합니까? 얼마나들 유능합니까? 하지만 사람은 점점 못돼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육이 손들었다, 도저히 어떻게 해볼 길이 없다'라고 탄식할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남은 길이 있습니다. 바로 신학적 교육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율이요 계명이요 명령입니다. 가라, 먹지 말라, 오라, 행하라, 떠나라, 사랑하라--명령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십계명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설명이 없습니다.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말씀으로 스스로를 다스리게 하고, 말씀과 성령 안에서 성장하게 하고, 말씀을 심고, 그리고 온유 겸손한 마음으로, 믿음으로 기다리게 하는 것--이것이 신학적 교육입니다.

저는 언젠가 청교도 교육법에 관한 철학서를 읽어보았습니다.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간 청교도가 미국을 건설하였는데, 도대체 이 청교도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가르쳐진 것일까?' 궁금해져서 여러 권의 책들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래서 발견한 그들의 교육철학은 단 세 가지였습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곧 청교도 교육이라고 저는 이해하였습니다.

첫째로, '어린이는 내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철학입니다. 내가 낳았으니 내 자식이고, 내 소원을 이루어야 하고, 내게 효도하고,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자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보면 가정에서 문제되는 것들이 이런 유입니다. '내 자식이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 내가 공부하지 못했으니 너는 공부해야 한다'라고 아예 못박아놓습니다. 내 마음대로 될 줄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처음부터 착각입니다. 어린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요, 선물이요,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맡아 내가 키워가고 봉사하고 있는 것일 뿐 내 생명도 아니요 내 생명의 연장도 아니요 내 소유가 아닌 것입니다. 철저하게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사람일뿐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선생은 내가 아니고 성경뿐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르치겠습니까? 내 능력으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내가 가르쳐서 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청교도 교육법 중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것을 가르칠 때의 교육방법입니다. 어른들은 대부분 "거짓말하지 말아라. 거짓말하면 벌받는다. 맞는다"라고 아이들에게 말합니다만 청교도 교육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성경을 가지고 오라 해서 어느 책 몇 장 몇 절을 펴보라 해서 읽게 합니다. 아이는 "거짓말하지 말라. 어찌하여 성령을 속이느냐"라는 구절을 읽습니다. "그래, 어떠냐?"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제야 "그러면 거짓말하지 말아라"하고 가르칩니다. "내가 명하노니……"가 아닙니다. 내 행복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성경이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만이 선생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철저합니다. 이것이 청교도의 교육입니다.

세 번째로, 교육은 설득이 아니고 계율이요 훈련이라는 것입니다. '교육은 철저한 훈련이다. 생각하는 것, 마음먹은 것, 뜻하는 것, 행하는 것 모두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훈련받는 것이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훈련받는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청교도의 교육철학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성경은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4:2)"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40일 금식하시고 배가 고픈 바로 그 시각에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4)." 여기에 기독교 교육이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때때로 우리는 어떤 처지에 부딪히게 되면 '할수없지'라고 체념하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요사이도 부정입학 문제로 온 나라가 참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신문을 보시는 분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하고 말하지 않고 ", 권력 있고 돈 있고 길이 있으면 나도 하겠다"라고 말합니다. 전부 그 마음입니다. 다 같은 마음이더라는 말입니다. 무슨 사람들이 이 모양입니까? '돈 있고 길이 있으면 나도 하겠다'라니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입니까? 자녀는 키워야 하겠고 당장에 대학은 보내야 하겠는데 어떡하겠느냐고요?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40일을 굶으셨습니다. 그 절박한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십니다. 말씀이 먼저입니다. '굶었으니 도둑질해도 된다.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안될 말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말씀이 먼저입니다. 진리가 먼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너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뜻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내 뜻이 곧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항상 보게 하고 항상 느끼게 하고 항상 생각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경건한 분위기 속에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스퍼젼(Spurgeon)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지배될 때에 천사들이 그들과 동거하며 그들의 가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에 천사가 그 일원이 될 것이다.' 경건한 가정 분위기를 먼저 만들어야 교육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가르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봅시다. 누가 가르치는 것입니까? 부모님이 가르칩니다. 부모님이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어디에서 가르칩니까? 가정에서 가르칩니다. 무엇을 가르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먼저 행하고 본을 보여주며 가르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저에게 이제 효도할 길이 남았다면 이것밖에 없기에 말씀을 드립니다. 일전에 평양에 가서 알아보았더니, 저희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연세가 날짜를 계산해보니 94세더군요. 북한에 오래 계시면서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그 어머니께서 마흔한 살에 저를 낳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가르친다고 무척이나 애쓰신 어머니에 대한 제 기억은 이렇습니다. 어릴적 잠들 무렵이면 어머니께서 머리맡에 앉아 성경을 읽어주셨습니다. 1년에 신구약 통틀어 세 번쯤은 될까요? 더운 때나 추운 때나 가릴 것 없이 잠자리에 들 때에는 꼭 성경을 읽어주십니다. 그런데 언젠가, 제가 좀 크면서는 짓궂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 그 성경말씀 알고 읽는 거예요, 모르고 읽는 거예요?" 그랬더니 어머니께서는 "성경은 알고 읽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 되니까 읽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여러분, 다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너무 따지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입에서 말씀이 떠나지 않게 읽으십시오. 언젠가는 알게 될 것입니다.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많이 읽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특별히 성경 구약에 대해서는 스스로 읽어서 아는 것보다 어머니로부터 들어서 아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렇도록 읽어주셨습니다.

잠들 때에는 성경을 듣고 일어날 때에는 어머님의 기도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뜹니다. 아침에도 성경, 저녁에도 성경--이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북녘땅에 가보았더니 그쪽사람들, 자기들 말대로 인민들을 새빨갛게 공산주의자로 바꾸어 놓았습디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여러분, 세뇌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간단한 것입니다. 집집마다 조그마한 라디오가 하나씩 있는데 이것이 유선 스피커입니다. 이 라디오는 마음대로 끄지도 켜지도 못합니다. 중앙방송국에서 방송이 시작되어 나올 때부터 끝나는 10시까지는 귀에서 욍욍소리가 나도 다 '들어 모셔야' 합니다. 신문도 아무나 읽는 것이 아닙니다. 공산당원 아니고는 신문도 못 봅니다. 이런 상태에서 스피커소리만 40년을 듣고 사는 것입니다. 새빨갛게 될 수 밖에요. 이것 말고는 들은 것이 없으니까요. 어떤 것을 많이 듣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달라집니다. 보고들은 대로입니다. 여러분은 자식에게 무엇을 보이고 무엇을 듣게 하고 싶습니까? 그리고 무엇이 되기를 바랍니까?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작가 어빙(Irving, washington)'어린이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보금자리는 나의 집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어버이는 훌륭한 어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정이 가장 따뜻하고 가장 아름다운 보금자리라는, 이 하나의 인상을 심어주었다면 성공한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한 분은 늘 자식 자랑을 하십니다. 그저 "우리 아이들, 우리 아이들……"하면서 조금 지나칠 정도로 자랑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녀들이 일류대학을 나왔고 지금은 장로가 둘, 목사가 하나, 대학교수 하나,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국민학교도 못나왔다고 합니다. 가끔 권사님인 그 부인에게 물어봅니다. "권사님, 어떻게 자녀들을 그렇게도 잘 키우셨습니까?" "내버려두어도 그렇게 크던데요." "평소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제가 본디 배운 것 하나 없이 무식한데 가르치기는 무엇을 가르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그 어머니의 교육비결을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별것 있나요? 저는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이 그저 너무도 고맙고 너무도 미안해서, 아이들 공부할 때에 옆에 앉아서 성경을 읽었지요. 아이들이 공부할 때에는 절대로 자본 일이 없어요. 열두 시든 한 시든 밤을 새우든 간에 꼬박 앉아서 성경을 읽고 뜨개질을 합니다. 뜨개감을 떴다 풀었다 떴다 풀었다 했어요. 눈이 아프면 뜨개질하고 또 눈이 온전하면 성경 읽고, 이렇게 함께한 것뿐이에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정작 부모인 자기들은 따로 무엇을 하면서 ", 가서 공부해"라고 말합니다. 그 공부가 잘될 리 있겠습니까? 도대체 분위기는 엉망으로 해놓고서 공부는 잘하기를 바라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우라는 것입니까? 안될 일입니다.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아이들 공부하는데 옆에 앉아서 성경 읽는 어머니는 국민학교도 못나왔지만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냈습니다.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합니다. 요새 공부 많이 한 사람들, 문제가 있습니다. 매양 바쁘다고만 합니다. 무엇이 바쁩니까? 무엇을 위해서 바쁘다는 이야기입니까? 도대체 너무나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이러한 점을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여호수아 17,8절은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샬(Marshall,P.L.)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들은 구원을 상속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의 약속을 상속받았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약속을 상속받았습니다. 이제 아이들 자신이 믿음을 가지고 지켜 행할 때에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장수하는 비결, 형통하는 비결, 강대해지는 비결, 성공하는 비결,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뿐이요, 말씀주도적인 인간이 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바른 길일진대 우리는 자녀들에게 그것 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주어서는 안되고, 줄 필요도 없고 무엇을 기대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이 말씀을 강론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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