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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일과(마가복음 1:35-39)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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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일과(마가복음 1:35-39)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더라

 

신학자 니콜라스 베르자예프는 시간을 그 개념에 따라서 세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자연적 시간이 있습니다. 대자연의 변화에서 느끼는 시간입니다. 춘하추동이 바뀌고 밤낮이 바뀌는 것과 같은 시간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자연적 시간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로 역사적 시간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시간을 이용하여 인간들이 만들어 가는, 사건화 하는 시간입니다. 주어진 환경과 싸우면서 뜻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 일 없이 몇천 년이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적 시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인간의 역사 속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계속 있어왔습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건에 부딪히면서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역사적 시간이라고 합니다. 사건 없는 시간은 진공 시간입니다. 자연적 시간입니다. 그러나 사건이 이루어졌을 때에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 시간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로 실존적 시간이 있습니다. 영원이라는 개념을 주어진 시간 안에서 실증 받는 것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영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만나는 것으로 해서, 그의 생명에 연합되는 것으로 해서 삶의 영원한 가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생은 실존적 시간이 될 것입니다. 나아가 실존적 시간은 창조적 시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구원사역에 연계된 오늘의 시간은 분명 소중한 시간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고, 나를 부르시고, 나를 통하여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그 시간은 곧 하나님의 시간이요 창조적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 삶의 본질적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이 시간을 보내는데 근심과 걱정과 고민을 하면서 보냈다고 합시다. 이것은 버려진 시간입니다.

또 누구를 미워하며 원망하며 증오하느라 며칠 밤을 새워가며 시간을 보냈다고 합시다. 이것은 빼앗긴 시간입니다. 이것은 내 시간이 아닙니다. 내가 미워한 바로 그 사람에게 빼앗겨버린 시간인 것입니다. 드라마나 소설 같은 것을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하고는 복수를 하겠다고 와신상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생을 거기에 다 걸어버립니다. 그리고 복수한 다음에 죽어버립니다. 이 사람은 결국 일생을 모두 빼앗겨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한 시간, 자유한 시간, 기뻐하고 지낸 그 시간만이 내 시간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고, 자유하고, 기뻐하고, 그리고 감사로 충만했던 그 시간만이 바로 내가 산 시간입니다. 무의식의 시간은 죽은 시간입니다.

술을 마시고 몽롱한 채 지낸 시간은 완전히 죽은 시간입니다. 잠을 자며 보낸 시간도 죽은 시간입니다. 잠자는 동안은 일도 할 수 없었고, 의식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시간 역시 죽은 시간인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산 시간에서 빼야 할 시간입니다. 내가 정말로 사랑한 시간만이 내가 산 시간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의미의 창조'를 소중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인에 세 가지 타입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생각하고나서 뛰는 사람이요, 둘은 뛰면서 생각하는 사람이요, 셋은 뛰고 나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입니까? 인생을 정신없이 뛰면서 살고나서 이제 나이 많아져 회고해보니 잘못 살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비참한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좀 불행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는 헬렌 켈러 여사를 보십시오. 귀머거리에 벙어리에 장님으로 평생을 산 그녀는 우리가 보기에 고통스럽게 답답하게 어둡게 세상을 산 것 같습니다마는,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에 남긴 말을 들어보십시오. '나의 인생은 참으로 아름다웠다'라고 자신있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얼마나 값진 생을, 얼마나 의미 있는 생을, 얼마나 창조적인 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자신에게 실존적으로 주어진 시간을 얼마나 창조적으로 사느냐에 인간의 존재가치가 있습니다. 오래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굉장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33년을 사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가끔 우리는 장례식에 참석해서 죽은 사람을 놓고 ", 참 아까워. 아직 한창 일할 나이에 이렇게 세상을 떠나다니"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럴 때에 제가 농담겸 진담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서른세 살이 넘었으면 우리 아무 말도 하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서른세 살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서른세 살 넘은 사람은 다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제 아무 때에 죽어도 할말이 없습니다. 그만하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왜 오래 살려고 그렇게 발버둥을 칩니까? 망상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름답고 귀한 생을 33년으로 끝내셨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짧지만 그 속에는 귀중한 예수님의 일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셨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과의 시작을 보십시오. "새벽 오히려 미명에(35)"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일찍 일어나셨습니다. 부지런하셨습니다. 게으른 자의 시간은 시간이 아닙니다.

부지런한 자의 짧은 시간과 게으른 자의 긴 시간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안에서 얼마나 충실하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잠을 잡니까? 물론 사람은 잠을 자야 합니다. 잘 때는 완전히 자야 하고 깰 때는 완전히 깨야 합니다. 그런데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마는 나이가 많아지면 할일도 없고보니 앉으면 졸리고 누우면 잠이 안옵니다. 앉아서는 몽롱해 있다가 정작 잠자리에 누워서는 잠이 안와 뒤척거리고 일어나 부시럭거리고 합니다. 여기에 비결이 있습니다. 완전히 깨야 완전히 자는 것입니다. 완전히 자지 않았으니 완전히 깨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깨지 않았으니 완전히 자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몽롱해가지고 비몽사몽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간은 아무리 흘러가봐야 소용없는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는 좀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좀더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셨습니다. 위대한 사람까지 들먹일 필요 없습니다. 무엇인가 이루었다는 사람들 다 일찍 일어났습니다.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 백 명을 상대로 통계를 내본 결과 보통 사람들보다 세 시간 일찍 일어난다고 합니다. 삼십분이 아닙니다. 세 시간입니다. 늦잠자고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른 것은 고사하고 건강도 못지킵니다. 자기의 건강 하나도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면 잠이 많아가지고 "새벽기도 누가 만들어서 이 고생을 시켜"하고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온 세계 어디에도 없는 새벽기도를 왜 하느라고 말썽이냐 합니다. 여러분, 온 세계가 안해도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셨으니까요. 예수님께서는 새벽 미명에 일어나셔서 제일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세상에 가장 큰 죄는 기도하지 않는 죄입니다. 최대의 죄악이 그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교만이 없습니다.

가장 무서운 죄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교만 죄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나는 기도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한다---여기서부터 출발을 해야 합니다.

기도를 중단하는 것은 최대의 불 신앙이 됩니다. 끝까지 기도와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기도를 게을리 하는 것은 바로 그 자체가 실패입니다. 여러분, 무슨 긴 이야기가 필요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누가 기도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기도하지 않음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내 욕망을 이루는 데에 앞서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내게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묻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때문에 새벽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로써 새로운 능력을 얻고, 새로운 지혜를 얻고, 생각과 뜻을 새롭게 가다듬어 가지고 하루하루를 새롭게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무디 선생은 '안일한 생활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고,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여러분, 환경이 달라지기를 위하여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환경 속에서 바르게 진실하게 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위하여 기도할 것입니다. 건강을 위하여 기도하지 마십시오. 병들었든 건강하든 이 형편 속에서 영적으로 강건하게 되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어느 외과의사가 거의 매일 수술을 합니다. 환자를 마취시켜 수술대에 뉘어놓고 수술할 부위만 남겨놓고는 커다란 시트를 뒤집어 씌웁니다. 그렇게 해놓은 환자는 마치 고깃덩어리처럼 보입니다.

그는 그 환자를 동물실험 하듯이 자르고 꿰매고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의사가 매일 아침 열심히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수술을 잘하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의 기도는 간단합니다.

'하나님, 내가 수술하는 그 환자를 고깃덩어리가 아닌 인간으로 보게 해주십시오.'

여러분, '돈을 벌게 해주세요'가 아닙니다. '내가 돈을 벌기 위하여 하루종일 뛰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돈의 노예는 되지 않게 해주세요'할 것입니다. '내가 오늘도 나가서 사람을 만납니다. 칭찬을 듣거나 성공할 때에 교만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내가 억울한 말을 듣거나 잘못할 때에 비굴해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 낙심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으로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이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일이 어떻게 기도 없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물리학자 뉴턴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망원경을 통하여 몇천만 미터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용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동안에는 보다 멀리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나는 뚜렷하게 볼 수가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복잡한 세상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를 관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내 모습을 봅니다. 기도를 통하여 미래의 내 모습을 봅니다.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내 운명의 종말을 봅니다. 이것을 보지 않고 어떻게 내가 오늘을 살 것입니까? 어떻게 내가 오늘을 바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까? 이것을 보지않고 뭐가 됐느니 안됐느니 합니다.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천국은 무릎으로 기어올라가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새벽 미명에 일어나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어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같이 가자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내버려두시고 예수님 혼자 조용히 빠져 나오시어 기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면 저 혼자 기도하면서도 여러 사람을 괴롭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홀로 조용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과를 기도로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이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부터 무척이나 바쁘셨습니다.

음식 잡수실 겨를도 없이 바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나타나 있듯이 몹시 바쁘게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리셨습니다. 어디를 가시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결코 피하시거나 물리치시지 않았습니다. 저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귀신들린 여인을 보시고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불러주실 정도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펴주셨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먹이시고, 병든 사람은 고치시고, 죽은 사람은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에 여념이 없으셨습니다. 때로 그 바쁜 중에 잠깐 기도하시기 위하여 저들을 피하시기도 했지만, 저들은 그곳까지도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물리치시지 아니하고 저들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과 중에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의식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하여 바쁘게 일하셨습니다.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때로는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고, 때로는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죠셉 얼라인이라는 사람은 늘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일찍 일어나서 기도를 하는데 그 때에 장사를 나서는 상인들의 떠드는 소리가 창 밖에서 들려오면 ", 이것은 수치다. 나의 주님이 어떻게 저들의 주님보다 덜 대접받을 수 있단 말인가"하면서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돈벌기 위하여 새벽부터 애쓰는 것보다 내가 주님을 섬기는 것이 뒤질 수는 없다고 안타까워했다는 것입니다. 귀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시되, 그 일에 빠져드시지는 않았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시고, 저들을 위하여 수고하시되, 그 일에 빠져드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38)"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전도하는 일이 예수님의 주목적이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도 하셨고, 병도 고치셨지만 결코 거기에 빠져드시지는 않았습니다. 기도하시고 역사 하심으로 사람들을 보호하셨지만 결코 그 일에 의존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사랑하셨기에 저들이 배척한다고 괴로워하시거나, 저들이 당신을 멀리한다고 해서 섭섭해하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칭찬하는 데에도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이렇듯, 기도하시고 일하시는 것이 바로 주님의 일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바로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 다음 일은, 믿음을 지키는 일은 제자들이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실 일만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뒤에 숨을 거두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아직 할 일은 많습니다마는 예수님께서 하셔야 할 일은 다 하셨습니다. 나머지 일은 제자들에게 부탁하시고, 하나님께 의탁하셨습니다. 여러분, 내가 모든 일을 다 하려고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할 일은 이것뿐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자녀들을 키울 때에도 그렇습니다. 내가 할 일은 이것뿐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내가 모든 일을 다 떠맡으려고 하기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3년 동안 당신을 따르던 철없는 제자들을 그대로 놓아두고 가실 때에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셨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딱 의탁해놓으시고 그냥 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일과였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목적과 일치한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여러분의 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모름지기 우리는 목적과 일치하는 생을 살아야 합니다. 한치의 외도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섬기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섬기기를 다하셨습니다. 도중에 섬김받으려는 마음으로 바뀌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끝까지 주시기만 하셨습니다. 받으려는 마음으로 바뀌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일과였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목적과 일치한 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은 분명 성공적인 생이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교회봉사도 그렇고, 가정봉사도 그렇습니다. 몇년 동안 수고를 잘하다가도 마지막에 가서는 삐끗해서 섭섭하다느니 어떻다느니 합니다. 섬기기로 시작했으면 끝까지 섬기고 말아야지요. 주기로 했으면 주는 것으로 끝나야지요. 조금이라도 무엇을 받으려고 하지 맙시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적에 일치한 직선적인 생을 사셨습니다. 여러분, 목적과 일치한 생만이 진정한 생이요 값진 생입니다. 나머지 생은 버려진 생입니다. 잘라버려야 할 생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행동적으로 사셨습니다. 사랑 없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주는 일 없이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대속물(代贖物)이 되시어 주는 것으로 일관된 생을 사셨습니다. 목적이 있는, 그에 따른 목표가 있는 생을 일직선적으로 사셨습니다. 그러니 일생을 미리 다 생각하면서 성공이니 실패니 하고 걱정하지 말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일과가 중요합니다. 하루하루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것이 중요합니다. 창조적인 시간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속한, 영원에 잇닿은 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루를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맡은 바 사명에 충실한 하루를 살고, 다시 저녁에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이어질 때에 우리의 생은 하나님 앞에 값진 것으로 드려지는 온전한 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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