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이제 용서하소서(창세기 50장 15절~21절)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소설이나 연극 영화 등을 보면 일반적으로 그 성격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비극이요, 또 하나는 희극입니다. 한 작품이 비극이냐 희극이냐를 가름하는 데는 그 작품의 마지막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가령 착한 주인공이 마지막에 가서 죽어버리면 비극이요, 아무리 어려운 사건들이 전개되더라도 주인공이 해피 엔드로 끝나면 그것은 희극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 중에서 모세를 보면 그는 참 아름답게 시작이 됩니다만 마지막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는 그의 라스트신이 우리 마음을 섭섭하게 하여 그의 생애 전체가 아름답게 보이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습니다. 솔로몬 역시 21세에 왕이 되어 지혜의 왕으로서 40년 동안 화평 가운데 영광과 부귀를 누린 사람입니다만 그의 마지막 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도 석연치 않고 섭섭하게 끝나고 맙니다. 지혜의 왕이 지혜롭지 못하게 그의 일생을 끝낸 것이 자못 아쉬운 것입니다. 문제는 마지막입니다.
여러분, 지난날을 어떻게 살아 왔는지에 의해 여러분이 평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앞에 남은 시간이 중요합니다. 오늘과 내일에 의해서 여러분의 생애가 평가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의해서 여러분의 생의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아름답고 귀하고 그리고 영광스럽게 끝났을 때에 우리는 그 지난날을 재조명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생을 지나왔더라도 마지막이 좋다면 아름답고 의미 있었다고 추억하게 될 것이며, 아무리 뼈아픈 생을 살아 왔더라도 마지막이 잘 마무리되었다면 그 모든 것들이 다 귀한 일들이었고 필요한 일들이었다고 재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참한 일들도 아름답게 설명할 수 있고 때로는 정당화시켜 보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요셉은 그의 생애가 대단히 비참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너무나도 아름답게 끝났으므로 그의 생애는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열한 번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야곱은 노년에 얻은 요셉을 다른 형제들보다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형들로부터 질투를 받게 됩니다. 요셉이 열일곱 살쯤 되었을 때 이 시기와 질투는 극에 이르러 마침내 형들이 동생을 죽이려고 계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구덩이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계획을 바꾸어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 버립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친형들이 동생을 이렇게 팔아버릴 수 있는 것입니까? 이런 일이 정말 있을 수 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때로는 억울한 일들이 있습니다만 요셉만큼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재산을 독차지했다든지 어떤 이권 문제가 개입되어 미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다만 형들의 질투와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연히 사랑해야 할 동생을 자신들의 시기와 질투로 죽이려고 계획하기도 하고, 팔아버리는 것은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뿐입니까? 여기서 요셉은 다시 애굽으로 팔려가서 노예가 됩니다. 그는 노예의 신분으로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진실 되고 거룩하며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보람도 없이 다시 감옥으로 가는 신세가 되기도 합니다. 진실하게 사는 것이 이유가 되고 믿음의 정절을 지키겠다는 것이 이유가 되어 감옥으로 가게 되다니 말이 됩니까? 아무튼 그는 13년 동안 죽을 고생을 다 치르고, 그리고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이 영광의 날이 있기까지 그는 왜 고생을 해야만 하는지를 전혀 몰랐습니다. 왜 형들로부터 팔려야만 했고 견디기 어려운 노예 생활을 했으며 감옥까지 가야만 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어떤 고난을 당하든지 하나님을 믿고 진실하고 옳게 살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요셉은 어딜 가나 진실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서 애굽 전역의 권세를 한 손에 쥐는 영광의 인물이 됩니다. 잘 아시는 대로 그 후에 형님들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옵니다. 그리고 동생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정을 했습니다. 물론 형들은 벌벌 떨고 두려워했지만 요셉은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이 용서가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계속 불안했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이 지극한 효자이므로 아버지의 마음을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 생전에는 자기들을 죽이지 않겠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그 때 가서 본격적으로 복수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난 뒤의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아버지는 생전에 너의 형들이 잘못한 행위를 용서하라고 유언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유언을 생각해서 용서해 달라고 말을 전하며, 또한 친히 요셉 앞에 엎드려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라고 용서를 빕니다. 이 때에 요셉은 가슴이 뜨거움을 느끼며 울었습니다.
그러면, 요셉이 이같이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근거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첫째, 형들의 회개에서 진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2장을 보면 형들이 맨 처음으로 요셉 앞에 왔을 때에, 그들은 총리대신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감히 바로 쳐다볼 수 없었기에 동생이 총리대신인 것을 몰랐습니다. 물론 요셉도 이 사실을 감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초라한 형들을 향하여 너희는 정탐꾼이거나 수상한 사람들이라고 호통을 칩니다. 이 말을 듣고 형들은 자기들의 신분을 소개하나 요셉이 받아들이지를 않고 막내를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이 때에 그들은 요셉이 못 알아듣는 줄 알고 히브리말로 자기들끼리 후회를 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값을 내게 되었도다 하니"(창 42:21-22). 그들은 원점으로 돌아가서 옛날의 잘못을 생각하면 이만큼의 억울한 일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셉의 굳은 마음이 녹여지고 진실 앞에서 그의 한이 풀리는 것입니다. 13년 동안이나 겪었던 고난과 고통이 참된 회개 앞에서 다 풀어져서 그는 목을 놓아 울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 요셉은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와 축복에 대해서 믿음을 새롭게 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고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선하든 악하든 하나님이 알아서 판단하실 것이니 요셉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다만 용서하고 사랑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과 내가 할 일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내가 어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고 자신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들은 내가 할 일은 제쳐놓고 다른 사람이 할 일까지 지나치게 염려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나는 그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그가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원망입니다. 그가 나를 용서하든 안 하든 그것은 하나님과 그에게 맡겨야 합니다. 그 문제는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일 뿐 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할 일은 내가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윤리나 도덕 생활까지 내가 원망하고 탓할 것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요셉은 하나님의 경륜적 은총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었기에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45:4이하에 보면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판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 온 백성들을 살리기 위하여 나를 앞서 이 곳으로 보내었다"고 엄청난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형들이 그를 팔았고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괴로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뜻이 있었음을 요셉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넷째,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어 합동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임을 믿었기에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역경을 축복의 과정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보며 새로운 역사 의식으로 형들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초월성을 인정하며 합동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근거하여 그들을 용서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요셉은 자신이 당한 그 고통은 아름다운 종말을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라고 이해함으로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옛날이 오늘을 위한 과정이요, 오늘을 위해서 필요 불가결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불신앙적으로 보면, 하필이면 왜 나이어야만 하느냐(Why me?), 내가 왜 이 속죄의 재물이 되어야 하고, 내가 왜 이 고통을 치러야 하느냐고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만 요셉은 놀라운 신앙으로 이것을 잘 수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구원하시고 살리시기 위한 큰 역사에 나를 들어 쓰셨고, 나를 통하여 이 귀한 역사를 이루게 하심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찌해서 나를 쓰셨나이까? 왜 하필이면 나를 통하여 이 역사를 이루고 계시느냐고 자신에게 주신 특별한 은총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오히려 형들을 간곡하게 위로하며 먹이고 후하게 대접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장면인지 모르겠습니다. 1946년 독일에 지슬로 카돌로스키라는 불량 청년이 있었는데, 어느 날 한 농장에 들어갔다가 별일 아닌데도 농장 가족 열 명을 향하여 총을 난사하는 일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아홉 명이 죽고 농장 주인 하멜만씨만 간신히 살아났습니다. 물론 이 청년은 감옥에 들어가서 20년 동안 징역을 살았고 복역 기간이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견인이 없어 감옥에서 나오지를 못하는 실정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하멜만씨는 자원해서 후견인이 되겠다고 당국에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 내용 중의 한 부분을 소개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내가 그를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하면서 자기 가족을 죽인 원수의 보증인이 되어 가족처럼 돌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용서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같이 우리도 저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는 용서할 능력도 없습니다. 십자가만이 용서의 근본적 근거인 것입니다.
장난기가 매우 심한 한 소년이 있었는데, 그는 하루도 무사하게 보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릇을 깨거나 남의 유리창을 깨든지 아니면 다치든지 때리거나 하여 그가 가는 곳에는 항상 사고가 따랐습니다. 이러다가 불량배가 될까 걱정하던 아버지가 하루는 제의를 했습니다. 제발 일주일 동안만이라도 결심하여 무사하게 지내 주면 큰상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용하게도 참으며 아버지의 부탁을 잘 실행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래, 참 착하다. 일주일 동안 정말 무사했구나"하시며 약속대로 후하게 상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그렇게 착한 아이가 그 동안은 왜 그 모양이었느냐"고 한마디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벌떡 일어나더니 "아버지는 하나님을 닮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과거를 기억하시지 않는데 아버지는 어째서 또다시 과거를 기억하게 만드십니까?"라고 대들었답니다.
여러분, 용서했으면 지난날의 잘못을 기억하지 않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억나게 해도 안 됩니다. 지난날의 아픈 과거를 다시 기억하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우리들은 흔히 화해한다면서 그 당시 누가 잘했고 못했는가를 재탕하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싸우는 일들을 흔히 봅니다.
누가 잘했든 못했든 이제 와서 무슨 상관입니까? 용서하겠으면 지난날의 모든 것을 백지로 돌려야 합니다. 성경은 과거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찾아가시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이 때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지난날 너에게 조심하라고 주의하지 않았느냐. 깨어 기도하라고 그렇게도 일렀건만 게으름을 피며 잠만 자더니 결국 이 모양이 되었구나"라고 책망을 하셨다고 가정해 보면 사건은 어떻게 전개되었겠습니까? 아마도 베드로는 "주님, 그렇습니다. 저는 구제 불능한 자입니다"라고 말하며 제자의 길을 사양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추궁하거나 묻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합니다" "그럼, 내 양을 먹이라" 이것뿐입니다. 여기서 은총의 승리를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당한 고통의 미래적 의미를 알고 종말론적인 의미를 바로 아는 역사 의식을 가졌다면 큰 용기의 사람, 큰 감격의 사람, 큰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고, 나아가서 큰 용서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승리는 선으로 악을 갚는 것이요,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는 것이며, 진실로 불의를 이기는 것입니다. 여기에 영광이 있고 평화가 있으며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의 일과(마가복음 1:35-39) (0) | 2024.03.19 |
---|---|
인간성 상실의 위기(히브리서 3장 7절~14절) (0) | 2024.03.19 |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사도행전 1장 4절~8절) (0) | 2024.03.19 |
온유한 자의 권세(시편 37편 1절~11절) (0) | 2024.03.19 |
예수님과 어린이(누가복음 18장 15절~17절) (0)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