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예수님과 어린이(누가복음 18장 15절~17절)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사람들의 정신적 지도자인 랍비들의 교훈 중에 자녀교육에서 빼놓지 않고 꼽는 여섯 가지 덕목(德目)이 있습니다. 그들이 늘 생각하고 가르치기에 힘쓰는 덕목입니다.
첫째, 공부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점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부족한 마음으로 계속 공부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참으로 바른 지식인가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하여야 합니다. 둘째, 환자를 방문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의 불행한 사람을 찾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손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마음이 덕이 된다는 말입니다. 집집마다 담장을 높이 쌓아놓고 통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다면 대단히 불행한 일입니다. 대문이 열려 있는 집,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할 것 없이 집안에 사람들이 시끌시끌해야 덕이 있는 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손님 대접하느라고 분주해야 덕이 있는 집입니다. 제아무리 크고 좋은 집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집이면 볼 것이 없습니다. 넷째, 기도와 경건입니다. 기도를 통한 경건의 생활이 덕입니다. 심리적으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 관계 안에서 살고, 물질과의 관계 안에서 바쁘게 살아가지만 그럴수록 시간을 정하여 하나님 앞에서야 하겠습니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가를 스스로 묻는 경건의 생활, 자기 모습을 살펴볼 줄 아는 것이 곧 덕입니다. 다섯째는 율법으로 자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자녀를 가르치되 율법으로 가르치는 것,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이 덕입니다. 마지막으로 여섯째는 사람의 장점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말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남의 단점, 어두운 면만을 생각하고 들추는 사람은 부덕한 사람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남의 단점과 허물은 보지 않습니다. 좋은 점만 보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가정에서는 자녀를 위하는 마음이 대단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자녀 사랑을 다시 한번 비판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정말로 자녀를 사랑하고 있는지 숙고해볼 것입니다. 가끔 자녀 문제로 상담하러 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결같이 자녀 사랑 그 자체에 대해 문제가 있음을 느낍니다. 자신은 분명히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그런 사랑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을 몇 가지로 분석해보겠습니다.
먼저, 생리학적 사랑(biological love)이 있습니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종족번식의 본능, 혈연에 따른 사랑입니다. 동물도 제 새끼는 사랑하는 법입니다. 단순한 모성애입니다. 제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옹졸한 사랑이요, 생리적인 사랑이요, 동물적인 사랑입니다. 자랑할만한 것이 못됩니다. 둘째는, 인도주의적 사랑(humanistic love)입니다. 도덕적인 사랑입니다. 자녀들을 애완동물이나 관상용 화초 대하듯 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인격적으로 대합니다. 교육적으로는 일견 바람직한 입장입니다. 그러나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셋째는, 사회적인 사랑(socialogical love)입니다. 우리가 의식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중요합니다. 이 세계를 이끌어갈 사람이다, 이 나라의 지도자이다, 가문을 이을 자다 - 이런 말투에 담겨 있는 사랑입니다. 옛부터 스파르타 교육이나 국수주의 사상에서 논하여지는 사랑입니다. 자녀를 국가나 가문의 소유물이나 생산 도구쯤으로 생각합니다. 희생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요즘도 부지중에 이러한 사회학적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잘못된 것은 자기중심적인 사랑(self-center-ed love)입니다. 내 가문이나 명예 따위를 앞세웁니다. 자기성취욕을 전이(轉移)시키려 합니다. 이를테면 아버지가 의과대학 시험을 여러 번 치르고도 들어가지 못했다 하여, 자기 자녀에게 적성, 취미와는 상관없이 의사가 되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못 다한 소원을 네가 이루어라! 내가 못 다한 욕망을 네가 성취하여야 한다" -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자식을 이렇게 괴롭힙니다.
고스란히 희생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못살겠다고 합니다. 공연히 낳아 가지고 이 고생을 시킨다고 불평합니다.
누구를 위한 희생이냐, 누구를 위한 공부냐고 묻습니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많은 가정 문제가 여기서 발생합니다.
사랑인 줄 알고 있는 그 사랑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모릅니다.
전혀 자녀 사랑이 아닙니다. 이는 형태를 달리한 자기사랑일 뿐입니다. 자녀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이나 천부적인 재능은 염두에 두지도 않은 무모함이요 무책임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그리스도인 된 사랑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 18:5)" - 너의 자녀이지만 내 이름으로 영접하면 나를 영접한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자녀 사랑이 없는 것도 문제요, 자녀를 과잉보호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자녀사랑의 질(質)에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사랑을 하고 있느냐를 다시 한번 깊이 자문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두 가지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는, 자녀 사랑의 근본적 동기에 대하여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내가 자녀를 왜 사랑하는가, 그 사랑의 첫 동기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녀사랑에 신령한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지혜 있는 사랑을 하여야 합니다.
'지혜 있는 사랑'이라고 하니 저의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어머니의 저를 향한 사랑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모든 어머니들이 다 그렇겠습니다만, 10년동안 기도해서 게다가 마흔한 살에 저를 낳으셨으니 그 사랑이 오죽했겠습니까? 극진하고 특별한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그러나 지혜롭지 못한 점이 있었습니다. 너무 귀하게 키운다고 하여 모든 음식을 따끈따끈하게 데워서 먹였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저는 아직까지도 찬 음식을 못 먹습니다. 외국에서 공부할 때의 일입니다. 식사시간에는 꼭꼭 찬 우유가 나오는데, 먹을 수도 없고 먹지 않을 수도 없고 해서 곤욕을 치렀었습니다. 우유를 빼놓고는 마땅히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결혼주례를 하였던 청년 부부가 아기를 가졌습니다. 제 경험을 생각해서 한마디 조언해주었습니다. "앞으로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입니까? 모유를 먹일 거요, 우유를 먹일 거요?" "직장 때문에 우유를 먹일 작정이에요." "그렇다면 찬 우유 먹는 습관을 들이세요." 제 말을 듣고서 우유를 차게 먹이려 했더니 시어머니가 큰일난다고 하더랍니다.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해가면서 먹였다더군요. 그렇게 길들였더니 자라서 찬 우유 더운 우유를 가리지 않고 잘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편합니까? 사랑은 좋은 것이로되 지혜롭지 못한 사랑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지혜롭지 못한 사랑은 오히려 사람을 그르치게 됩니다.
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무릇 부모님들은 사랑을 공부하십시다.
무엇이 진정한 사랑인지, 어떤 마음 어떤 말로 자녀를 교육해야 하는지를 겸손하게 되새겨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는 부모들이 어린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린아이들을 왜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까?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눅 18:15)" - 자녀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나게 하고, 그 음성을 듣게 하기 위함입니다. 머리라도 한번, 손이라도 한번 만져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분이 계시다' - 예수님을 경험하게 하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여러분, 부모의 교육은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임시적인 것입니다. 눈깜짝할 사이에 자녀는 부모의 곁을 떠나버립니다. 부모도 자녀를 떠나야 합니다. 부모의 교육은 절대적인 것일 수 없습니다. 임시적인 것입니다. 한 분이십니다. 영원한 스승은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자녀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보다 더 귀한 교육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와 만져주시기를 원한 부모들은 자녀에게 '저분 같은 사람이 되거라!'하는 소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녀에게 예수님이 축복해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교육이 있는 것입니다.
가장 평범하고 기초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교육철학의 사조에는 헬라적인 것과 히브리적인 것이 있습니다.
'헬라적'이라는 것은 이성에, '히브리적'이라는 것은 신앙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헬라적인 교육은 합리적이라는 이론으로 자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반면 히브리적인 교육은 순종과 제자도(弟子道)를 제일 먼저 가르칩니다. 동양적인 방법에도 이와 일맥이 상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아버지로부터 '소금섬을 물로 끓이라 하면 끓여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순종 뒤에 배우는 것입니다. 순종이 가능하려면 절대적인 권위가 전제되어야 하고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스스로 판단해서 먹고 살고 합니까? "아이들에게 물어보겠다"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물어보긴 무엇을 물어봅니까? 물을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일전에 미국에 사는 교포 가족을 만났습니다. 부인이 말하기를 아이들은 미국에서 살자 하고 남편은 한국에 나오겠다고 서로 고집이랍니다. 미국에 간 지 3년째라는데, 그 부인은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걱정이라고 합디다. 저에게 도움을 청하기에 "아이가 몇 살이나 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이 미국과 한국의 어디에 살아야 옳은지 제대로 판단할 수 있습니까?" "못하지요." "당연하지요. 부모된 사람도 판단하기 어려운 것을 아이들이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내 아들, 내 딸아, 가자! 이러면 끝나는 것입니다. 복잡할 것이 없어요." 이렇게 이야기하였더니 "간단한 것을 가지고 고민하였군요"하며 돌아갔습니다. 정말 간단합니다.
아이들에게 물을 내용이 따로 있지 무엇을 물어보는 것입니까? 모름지기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강한 연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노벨상을 받은 사람의 30퍼센트가 이스라엘사람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뛰어난 것은 전승을 지켜나가기 때문입니다. "전승이다, 어른들의 말씀이다"하면 판단은 끝납니다. 먼저 순종하고 뒤에 가서 깨닫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술을 많이 하여 패가망신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술로 패가망신했으니 너는 술을 입에 대지도 말거라!" "아버지의 말을 어떻게 믿어요? 내가 먹어보아야 패가망신하는지 안 하는지 알지요!" 이러면 악순환이 끝나지를 않습니다. 실수의 역사가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적어도 아버지가 경험한 실수를 아들은 겪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다니 이것이 망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어른들의 교훈을 순종하는 덕을 가르치지 못했다면 교육은 끝난 것입니다. 순종이 없는 가정은 다된 가정입니다.
순종은 어려서부터 배워야 합니다. 제자도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이 별것이 아닙니다. 먼저 음식에 대한 훈련입니다. 균형 있게 먹여야 합니다. 먹을 것과 먹지 않을 것 유익한 것과 무익한 것을 가릴 줄 알게 해야 합니다. 자녀의 입맛은 어머니가 만듭니다. 절제와 자제를 가르치고 감사함으로 먹을 줄 알게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사람의 식단은 네 종류를 넘지 않습니다. 식단을 짜는 권한은 어머니에게 있습니다. 오늘은 생선, 내일은 고기, 모레는 채소를 위주로 식단을 짜서 음식을 만들어놓으면, 자녀들은 군말 없이 먹어야 합니다. 먹되 감사함으로 먹어야 합니다. 단 한끼라도 불평하면 그날은 온전히 굶게 됩니다. 이렇게들 훈련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사람들은 어느 나라의 음식이든 잘 먹고 잘 소화시킵니다.
우리나라사람들은 대체로 외국 나가서 음식 때문에 고생을 합니다. 잘 키운답시고 입맛을 까다롭게 만들어놓았습니다. 어머니의 죄가 큽니다. 편식과 포식과 원망은 금물입니다. 항상 감사함으로 먹어야 합니다. 저는 아버지가 엄한 까닭에 매를 많이 맞고 자랐습니다. 어쩌다 밥투정을 했다 하면 그날은 하루종일 굶습니다. 창고에 갇혀서 못나옵니다. "상에 오른 것은 다 먹어라" -이것은 철칙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찬 것 빼고는 아무 음식이나 잘 먹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입맛이 문제가 아니라 소화가 안돼서 음식을 못 먹는다고 합니다. 체질이 잘못 길들여져서 그런 것입니다. 모름지기 먹는 일부터 철저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바로 먹여야 합니다.
또한 좋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는 대로되어집니다. 어린아이들이 '엄마'라는 말 한마디를 배우기 위해서는 '엄마'라는 단어를 무려 500번 이상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요즈음은 소나 닭을 칠 때에도 외양간이나 닭장에 음악을 틀어줍니다. 같은 값이면 경음악보다 클래식이 더 좋다고 합니다. 클래식을 들려주면 우유를 더 많이 낸다고 합니다. 음악보다 더 좋은 것은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입니다. 물소리를 녹음하여 들려주면 마음이 고요해져서 우유를 많이 내고 알도 잘 낳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호텔에 가보니 물소리를 내느라고 인공폭포를 만들어놓았습디다. 좋은 음악이지요. 요즈음 아이들은 에어로빅 한답시고 이상한 음악, 로큰롤 따위만 듣습니다. 엉덩이 흔든다고 좋다 재미있다 하고 박수치지 마세요. 무엇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그따위 속되고 시끌벅적한 소리를 들으면서 무슨 사색이 자라겠습니까? 결코 바람직한 인간으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좋은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부드럽고 친절한 말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찬송을 들어야 합니다.
나아가 좋은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좋은 본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의 아들은 교회를 안나갑니다. 참 훌륭한 심성을 가졌는데, 나이가 들어서까지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다. 출석하던 교회에 분쟁이 생겼을 때, 장로님들이 모여서 남의 흉을 보고 헐뜯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충격이 되어서 일생동안 예수를 안 믿습니다. 집안에서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남 칭찬하는 이야기, 남 존경하는 이야기, 경건한 이야기를 꽃피우시기 바랍니다. 남 흉보고 원망하는 이야기, 한숨을 푹푹 쉬어가면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자녀교육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부부간에 다정하게 살고 집안이 화목하면 자녀교육은 이미 된 것입니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을 보여야 합니다. 보는 대로 닮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새벽기도회에 처음 나오시는 분이 계셔서 한번 인사를 드렸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것이 피곤하지 않습니까?" "아니예요. 참 좋습니다." 아침 일찍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찬송을 틀어놓고 성경을 읽을 수 있어서 참 좋다고 합니다. 또 아이들에게도 아침 일찍 일어나는 본을 보이니 권위가 선다는 것입니다. 늦잠을 잘 때에는 세수도 못하고 쫓겨나는 등 체통이 말이 아니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버릇하고부터는 집안 분위기도 좋아지고 여유가 있어서 좋다는 것입니다. 본을 보여야 합니다.
도대체 우리는 내 자녀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다시 한번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고려장(高麗葬)이라고 하는 풍습이 있던 그 옛날에 한 아들이 나이 많은 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내버리러 간 것입니다. 늙은 아버지를 내려놓고 막 돌아서는데, 따라갔던 어린 아들이 말합니다. "아버지, 저 지게 가지고 가야지요." "왜?" "다음에 아버지 내버릴 때에도 필요하잖아요." 어린아들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아들은 내버리려 했던 늙은 아버지를 다시 지게에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효도를 가르치는 방법이 달리 없습니다. 효도하는 본을 보이면 됩니다. 효도하라는 말은 많이 들어왔는데 정작 효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으면 어떻게 효도를 합니까? 부모를 구박하면서 자녀가 잘되기를 바랍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본을 보여야 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구제할 때에 자녀들에게 시킨다고 합니다. 자녀들로 하여 곧 좋은 것을 보게 하고 좋은 일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거지가 집에 찾아왔을 때에 아버지 어머니는 안에 있고 아이들에게 시켜보십시오. 선한 일을 경험하게 하고 선행에서 오는 마음의 기쁨을 경험하게 해주십시오. 적어도 1년에 몇 차례는 고아원을 방문해야 합니다. 갈 때마다 아이들과 함께 가서 봉사의 기쁨, 용서에서 오는 희열, 사랑에서 오는 용기, 희생에서 오는 영광, 인내에서 오는 능력을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머리로만 가르치려 하니 말만 무성합니다. 좀더 히브리적으로, 경험함으로써 가르치십시다.
순종을 배우게 하려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과 지혜로는 부족합니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그리스도를 닮게 하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양육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유명한 교육가 페스탈로찌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동상을 제막하게 되었습니다. 인자한 모습을 한 페스탈로찌가 허리를 굽혀 어린아이를 내려다보고, 그 어린아이는 페스탈로찌를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페스탈로찌의 모습이 아니다. 그는 자기를 닮으라고 한 적이 없다. 그리스도를 닮으라고 하였다." 의논한 끝에 동상을 고쳤다고 합니다. 페스탈로찌의 모습은 그냥 놔두고, 페스탈로찌를 올려다보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더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고친 것입니다. 나를 닮으라고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으라고 하면 만사 형통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대통령 취임을 할 때에 낡아빠진 조그만 성경책을 들고나와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주신 이 성경책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주신 성경책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는 그리 놀랄 것이 없습니다만, 그 어머니가 계모였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링컨이 14세되던 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웠습니다. 그 어머니, 비록 계모였지만 말씀과 사랑으로 가르쳤기에 오늘날 위대한 한 인물이 있게 된 것입니다.
동리에 찾아오신 예수, 그에게 보이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 저분처럼 되게 해달라고 같이 우러러보는 데에 된 교육이 있습니다. 참된 가정, 참된 자녀사랑이 이런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 하십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사도행전 1장 4절~8절) (0) | 2024.03.19 |
---|---|
온유한 자의 권세(시편 37편 1절~11절) (0) | 2024.03.19 |
아름다운 면류관(잠언 1장 1절~9절) (0) | 2024.03.19 |
이 사람의 감사(누가복음 17장 11절~19절) (0) | 2024.03.19 |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베드로후서 3장 14절~18절) (0)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