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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로써 알리라(마태복음 7장 15절~23절)
거짓 선지자들과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사람마다 저마다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행복을 추구하는 길이 서로 다르고, 또 행복이 무엇인지 규정된 바가 없기에 자기가 원하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고, 어쩌면 불행만이 닥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의 요인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일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인가 할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할 때에는 바쁘다, 힘들다, 피곤하다 하지만 세상에 할 일이 없다는 것처럼 괴로운 것은 없습니다. 병들 때, 혹은 퇴직할 때, 늙었을 때에 이런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둘째는 바램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인가 저 미래는 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절망합니다. 사람은 현재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미래지향적인 약속을 받고, 보다 더 밝은 미래를 바라보는 소망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사랑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얼핏 사랑 받는 것이 중요하게 생각됩니다마는 사실은 이보다 더 절실한 것이 사랑의 대상입니다. 내 마음과 정성을 다 바쳐 사랑할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됩니다. 사랑할 것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이야기입니다. 넷째는 믿을 것이 있어야 합니다. 뭐니뭐니해도 믿음의 대상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믿어볼 것이 없다는 사람은 벌써 죽은 사람입니다. 참으로 확실한 믿음의 대상을 지니고 '나는 이것을 믿노라'하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얼마나 상식적인 이야기입니까? 간단한 이치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그러나 이 간단한 이치를 거스르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불한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한당이 무엇입니까? 땀을 흘리지 않는 무리들입니다. 수고하지 않고 거두겠답니다. 이는 도박꾼의 마음이요, 강도의 마음입니다.
땀흘려 거두어야 하건만 땀흘림 없이 얻고 누리겠다고, 행복하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여러분, 거짓을 심고 안정을 바란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직 진실이 있고야 안정이 있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거짓은 거짓으로, 불의는 불의로 나타나는데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거짓과 위선과 불충을 심고서는 아름다운 것들, 안정된 것들, 평안함을 기대합니다. 이미 그 기대 자체가 병들고 잘못되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는 회의주의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뭇가지에서 진리라는 열매를 찾고 있다." 여러분, 허무와 회의주의 속에서 어떻게 진리의 열매가 맺히겠습니까? 바로 이런 기대가 사람을 절망과 더 무서운 불의로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마당 한구석에 감나무가 한 그루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감나무 옆에는 전봇대가 있습니다. 전봇대는 높이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그대로 있거나 아니면 점점 썩고 약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감나무는 키는 작아도 봄에는 푸르게 잎이 돋고 가을이면 빨갛게 감이 열립니다. 감나무와 전봇대--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은 반드시 자라게 되어 있고, 운명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열매에 대해서 우리는 진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이 사십이 넘었으면 자기 얼굴 표정에 책임을 지라'---마음이 항상 울적하고, 분함과 한과 우울함에 맺혀 살았다면 사십이 넘어서는 분명 얼굴 표정이 다릅니다. 실제로 저는 그런 것을 많이 봅니다. 젊은 사람들은 분명히 예쁜 사람과 안 예쁜 사람이 있어요. 부모가 그렇게 낳아주었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나이가 좀 들면 다 비슷비슷해요. 예뻐도 그저 그렇고, 외모는 별것 아닙니다. 그런데 다른 게 하나 있어요. 얼굴빛이 다릅니다. 한 사람은 얼굴이 썩었고, 한 사람은 얼굴에 빛이 있어요. 그것도 열매입니다. 또 '오십이 넘었거든 주변 환경에 책임을 지라'고 합니다. 주변사람들이 나를 왜 이렇게 괴롭힐까, 나한테 왜 이렇게 불친절할까--이것이 열매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내가 나이 오십이 되도록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이런 대우를 받는 것입니다. 누구를 탓하지 마세요. 이것이 심은 대로 거두는 이치 앞에 겸손하고 진실한 사람의 자기인식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분명하고 강하게 말씀합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18절)"---이것은 자연의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이기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좋은 열매를 맺고자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좋은 나무가 되고자 해야 합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종자로부터 비롯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뿌리는 비유를 생각해보세요. 좋은 씨앗이 뿌려져야 그로부터 좋은 나무가 있고, 좋은 나무가 되고야 좋은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열매를 보면서, 이 결과를 보면서 저 봄에 뿌려진 씨앗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진실해야 합니다. 심는 것은 선택이요, 자유입니다. 그러나 추수하는 것은 심판이요, 보상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악을 심었으나 웬만하면 악을 거두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하지만 악을 꼭 거두고 맙니다. 이것은 심판입니다. 좋은 씨앗을 뿌렸는데 나는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심판도 은혜도 다 같은 맥락입니다. 문제는 악한 열매를 심었기 때문에 악한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무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 겉으로 나타난 것보다 속에 있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관심이 더 있어야 합니다. 완성은 양에 있지 않고 질에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이지 얼마를 소유했느냐에 있는 게 아닙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라'--얼마나 평범하고 엄연한 진리입니까? '진실하라'-그래야 진실의 열매가 있습니다.
자, 보세요. 마음은 씨앗입니다. 말은 열매입니다. 뜻은 나무요, 행위는 열매입니다. 인격은 나무요, 공인된 것이나 평판은 그 열매입니다. 나쁜 열매를 맺었으면 그것을 인정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우연은 없습니다. 환경이나 분위기를 탓하지 맙시다. 이것은 성경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세상을 원망할 것 없습니다. 환경과 조건은 양의 문제이지 근본적인 씨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물론 바꾸어지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비바람이 치고, 가뭄이 들고, 장마가 지고, 거름이 잘못되고, 또 어떻게 됐다고 해서 콩이 팥으로 되는 것을 봤습니까? 콩은 콩입니다. 많이 맺고 적게 맺는 것은 별문제입니다. 콩이 다른 것으로 변화하지는 않습니다. 환경이 씨를 바꾸지는 못한다--이것이 오늘의 성경이 주는 교훈입니다, 간혹 부부 싸움하다가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남편이 어느 사이에 그만 악마같이 변해서 아내에게 폭력을 쓰고, 폭언을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당신이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하는 아내의 비판에 남편은 이런 변명을 합니다. "나는 본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너하고 사는 동안에 이렇게 됐다. 다 너 때문이다" 이것, 말 되는 얘기입니까, 안 되는 얘기입니까? 말이 이상합니다. 가만히 보면 경건한 가정에서 깨끗하게 자란 사람은 배운 바가 없어서 욕을 못합니다. 그저 "그게 아닌데, 그게 아닌데……"라고 합니다. 그 이상은 나쁜 말을 배우지 못했거든요. 그러나 가정에서 못된 것을 배우고 보고자란 사람은 입만 열었다 하면 흉한 말이 막 나옵니다. 그 욕설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래서 흔히들 '실패는 사생아'라고 말합니다. 보세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떤 환경이라 하더라도, 지구가 두 동강이 나더라도 질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환경 탓으로 돌리지 마세요. 그것이 오늘의 성경이요, 오늘의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그가 무엇을 받고, 무엇을 들었느냐 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간혹 우리는 무의식 속에서 말할 때가 있습니다. 심리학자는 무의식도 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잠꼬대도 조심하세요. 그것도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꿈도 회개하세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그런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까?「모택동 어록집」에 보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는 꿈을 꿔도 공산주의에 대해서 꿈을 꾸어라. 반동적인 것을 꿈꾸었다면 자아비판을 하라." 뭘 알고 하는 소리입니다. 여러분, 잠자리에 들기 전에 조심하세요. 아무 것이나 보고, 허투루 텔레비전보고 그러지 마세요. 이상한 것만 보니까 밤새껏 이상한 꿈만 꾸지 않아요? 또 그것이 생활 속에 나타나고, 어느 사이에 마음이 황폐해지고 거칠어집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의식의 세계, 사상의 세계, 행위의 세계까지 다 열매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런고로 소중한 것, 귀한 것을 심어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고야 좋은 열매를 기대할 것이니까 말입니다.
2차 대전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아주 젊은 청년 하나가 총탄을 맞고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에게 군목이 말을 합니다.
"이제 당신은 죽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 대신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드리지요. 무엇이라고 쓸까요?" 청년은 "어머니께는 제가 기쁘게 죽었다고 그렇게 써주세요."라고 대답합니다. 또 이런 말을 합니다. "지금 교회학교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어렸을 적, 나에게 성경을 가르쳐준 분이지요. 그 분께는 제가 그리스도인으로 죽었다고 써주세요." 그리고 눈을 감았습니다. 군목은 그대로 청년의 어머니에게, 선생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으로부터 회답이 왔습니다. "편지를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사실 교회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별로 열매가 없고 지겨워서 한 달 전에 사표를 냈는데 오늘 이 편지를 받아보고 내가 한 일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되기에 다시 교회학교 선생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에 철없이 들었던 한마디가 마음속에 심기어져서 전쟁터에서 죽은 청년의 생명을 인도했습니다. 심는다는 것---좋은 씨앗을 심어야 좋은 나무가 된다는 이 원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굳이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몸부림치지 마세요. 선하게 사느니, 선행을 하느니, 봉사를 하느니…… 다 하잘것없는 일입니다. 좋은 나무만 되면 언제라도 좋은 열매는 맺게 되어 있고, 또 그럴 기회는 오는 것입니다.
예컨대 성경으로 돌아가서 보십시다.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좋은 일 선한 일을 한다고 애를 썼습니까? 그러나 결국은 위선자가 되고, 외식주의자가 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버리는 사람들이 됐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왜요? 악한 나무였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름대로는 가르치느라고 떠들어보았으나 결국은 거짓, 그것 외에는 거둘 것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16절)"---그런고로 열매로 그 나무를 알라 하심입니다. 열매의 진실을 인정하고, 다시 한번 회개하고, 원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보세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요 15:5)"---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심입니다. 그런고로 갈라디아서 6장의 말씀대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거두기 때문입니다. 좋은 나무가 되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열매는 뒤에 따라올 것입니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말했습니다. "I think, therefore I a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인생관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도 "나는 생각함으로 존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충만하고, 그 말씀에 감동 감격하고, 그것이 내 의지가 되기에,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가을의 메시지를 들어보세요. 내 지식, 내 의지, 내 성품, 내 고집…… 그것으로부터 맺힌 열매가 무엇입니까? 다시 한번 생각을 가다듬읍시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슴을 열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은혜 안에 있을 때, 말씀과 성령이 우리 안에 충만할 때에 알게 모르게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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