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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맡은 청지기(베드로전서 4장 1절~11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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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맡은 청지기(베드로전서 411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암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저는 아침마다 라인홀트 니버의 기도문을 한 번씩 읽어보거나 외어봅니다. '하나님이시여, 고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고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냉정함을 주옵소서! 그리고 고칠 수 없는 것과 고칠 수 있는 것을 식별할 지혜를 주옵소서!' 이것은 제 기도의 제목인 동시에 항상 응답을 듣고 싶은 기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해야 할 것이요, 고치라 하시는 일은 어려움이라도 무릅쓰고 고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용기를 구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마다하시는 일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참고 기다릴 수 있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그대로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하여 냉정을 구합니다. 뿐만 아니라 고쳐야 할 것, 고치지 말아야 할 것, 할 수 있는 일, 할 수 없는 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 마다하시는 일을 구별할 수 있도록 지혜를 구합니다. 용기와 냉정과 지혜를 주시옵소서!-----참으로 귀한 기도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기도 제목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기됨의 현주소를 알아야 합니다. 능력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과 경륜을 밝히 알아야 합니다. 더욱이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나를 부르시는 부름의 의미,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며 무엇을 하라 하시는지,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울러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세 가지 차원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 '지나간 때'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물건에 대해서는 아주 잊고 생각도 않듯이 잃어버린 일도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버려야 합니다. 잃은 것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것처럼 미련한 일도 없습니다. 잃어버린 일을 이제 와서 고치고, 이제 와서 다시 어찌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 지나간 일입니다.

지나간 때의 일입니다. 이제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것을 심었든 나쁜 것을 심었든, 이런 일을 했든 저런 일을 했든, 지나간 일은 이제 하나님께 맡길 뿐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어떠한 심판이나 징계가 오든지, 어떠한 평판이 오든지, 이제는 받아들이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것을 다시 보상하려고, 만회하려고, 혹은 변명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난 일은 다만 하나님께 맡기고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지나간 때의 일은 지나간 일로 족합니다.

둘째, 앞에 있는 것-----다가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 직고하리라'라고 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까지 몇 해를 살아오셨습니까? 사회학자의 말에 따르면 35세 이후부터는 더 기대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35세 정도면 이제 사람의 운명이 거의 다 정해진 상태요,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청운(靑雲)의 꿈도 옛말이 되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내리막길로 들어섭니다. 더구나 오륙십 줄에 들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제는 순간순간 결론을 내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마감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927절을 봅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우리 앞에 죽음이 있습니다. 아주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30대든 60대든 머지않아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심판 받을 것입니다. 벌거벗은 것 같이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다 하나님 앞에 직고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육체의 남은 때'를 말씀합니다. 우리는 심판 날을 바라보면서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갑니다. 그것은 심판 때까지 우리에게 남겨진 유예기간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나 아직 '현재'라고 하는 그 짧은 기간이 내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은 시간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이제까지 꽤 많은 시험을 치러 왔을 것입니다. 초등학교로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험이 있습니까? 저도 지금까지 무던히도 많은 시험을 치러왔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인가 하면 또 다른 시험, 더 큰 시험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마지막 시험을 볼 때에는 '이제 다시는 시험 보는 일이 없겠지'하고 시험을 치렀던 것이 생각납니다. 시험 친 것도 친 것이지만 감독도 많이 해보았습니다.

20년 동안 시험 감독을 해왔는데 바로 며칠 전에도 학기말 시험을 감독했습니다. 가만히 시험치는 모습을 보면, 열심히 답안작성을 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더러는 연필만 굴리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축도 있습니다. 그런 학생들을 보면서 저는 생각합니다. '저 학생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마 몇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 좀 열심히 할 것을. 적어도 어제 밤에만은 책을 한 번 뒤적여보는 건데……'하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불성실함을 하얗게 빈 시험 답안지를 앞에 놓은 그제야 후회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울어도 안달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답답한 학생입니다. 둘째는 '시험 치른 뒤에 빵점 나올 것이 뻔한데 부끄러워서 어쩌나' 하고 부끄럼 당할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성적표 들고 집에 들어가서 식구들한테 창피 당하고 동네 친구들한테 경멸 당할 것을 걱정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다 소용없습니다. 문제는 지금 내 앞에 있는 50, 이 시간을 얼마나 성실하게 시험에 임하느냐입니다. 얼마나 진실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느냐, 이것이 남은 과제입니다.

잘못된 일은 지난날로 족합니다. 후회할 것도, 절망할 것도 없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학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 전도사님이 어린이들한테 한가지 문제를 냈다고 합니다. "후회와 회개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그때 한 어린이가 선뜻 대답하기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넘긴 뒤에 뉘우치고 후회했으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뒤에 회개했습니다" 하더랍니다. 얼마나 지혜롭고 훌륭한 대답입니까?

가룟 유다는 지난날의 잘못된 것을 후회했습니다. 후회하고, 스스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제 힘으로 해결해보겠다고 애쓰다가 절망하고 스스로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 엄청난 실수를 범했습니다마는 크게 회개하고 그 문제를 예수님께로 가져왔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다시 사랑을 고백하고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회개와 후회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후회는 절망으로 끝나지만 회개는 구원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 이 마지막 기회가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을 종말론적 기회라 하고, 그 시기에 사는 삶을 종말론적 윤리라고 합니다. 이 기회를 잘 살아가는 것이 지혜요, 믿음입니다. 모든 윤리, 모든 가치가 종말론적으로 묶여질 때에 비로소 행동화되고, 순수해지고, 능력을 생산하게 됩니다.

지난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엄청난 은혜를 입었습니다. 또 앞에는 주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요단강 건너 약소의 땅,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현재를 살아갑니다. 짧은 기간이요 그 짧은 것도 얼마나 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시간을 살아가지만, 그러나 불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시간적 거리상의 문제일 뿐, 다가오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조금도 의심할 여지없는 앞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종말론적으로 주어진 마지막 기회와 이 가능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7절 말씀을 보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고 합니다. 더 이상 몽롱하게 지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방탕하고 술 취해서 살아온 의미 없는 생은 지난날로 족하니 이제는 정신차리고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남은 생을 살아야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식탁을 시중들고, 하인을 감독합니다. 주인대신 재산을 관리하기도 합니다. 주인에게서 받은 바 그 권한을 행사하며 상당한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그가 누리고 있는 것은 전부 주인의 것입니다.

젊은이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유행어를 들어보면 재미있는 말이 많습니다. 그중 '착각은 자유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착각에는 커트라인이 없다나요?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내 것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남의 물건을 빌려다가 오래 쓰고 나면 내 물건인 줄 착각합니다. 돌려줄 때가 되면 아쉬운 생각마저 듭니다. 본래 내 것이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내 것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재산도 명예도 권력도 생명도 시간도 실은 내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맡아서 관리하다보니까 어느새 내것인줄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그것이 내 것이었습니까? 또 언제까지 내 것입니까?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이라면 과연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내 손에 쥐어져 잇는 저금통장이 내 것입니까? 이 집이 내 것입니까? 다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청지기의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겠습니다. 시간도 지위도 하나님의 것이요, 만신창이가 된 이 인격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게 잠시 맡겨졌던 것뿐입니다.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당초 주님의 것이요, 주님께 돌아갈 것이요, 어느 순간에든 주님께서 결산하실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처럼 주님이 종들을 오라 하여 그간의 일을 결산하게 될 것입니다. 진실을 묻고 대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맡겨진 은혜를 다시 한번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무자격한 내게 특별히 주신 은혜들을 헤아려봅시다. 시간과 재능과 소유가 다같이 귀중한 사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은혜의 은혜됨을 알아야 하고, 청지기라는 자기 위치를 분명히 하고 생활에 적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다른 청지기, 혹은 다른 사활들과 협력하여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청지기의 본분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시간에 주시는 교훈은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간에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어느 한두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구나 그러해야 합니다.

바로 어제 장례를 치른 우리 교우가 한 분 있습니다. 그는 세상 떠나기 직전에 몹시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얼중얼 기도 끝에 "아멘" 하고는 그때부터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는 것입니다. 그가 평화로운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 유가족의 이야기를 전해들으니 제게도 은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마지막 시간에 무슨 말을 할 것입니까? 마지막 시간은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기도 없이 행한 일도 많고, 기도 없이 말한 것도 많았지만 그래도 이제 기도하여야 합니다. 남은 시간은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내야 하겠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고 하나님의 뜻을 똑바로 준행 하여야 하기 때문에 기도 밖의 길을 가지 말 것이고 기도로 응답 받은 길 밖의 길은 한발자국도 내디뎌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먼저 이루어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노벨상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할까 합니다. 1833년 스웨덴에서 노벨이라는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화학자요 발명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게 됩니다. 33세에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그후 3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조간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노벨을 깜짝 놀랐습니다. 기사 내용인즉슨 알프레드 노벨이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기자가 동명 이인(同名異人)을 잘못 알고 "노벨이 죽었다"하니까 그 노벨인 줄 알고 당장 '노벨 사망하다' 하고 기사를 실었던 것입니다.

버젓이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노벨한테는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이너마이트의 왕 죽다,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 죽다' 라고 되어 있는 기사 내용었습니다. 그 기사를 보는 순간 노벨은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내가 살아 있기에 망정이지 정말로 죽는다면 이 기사가 사실이 되지 않겠는가, 오늘이라도 내가 죽으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노벨은 마음속으로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으로 모은 전 재산을 이제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자기 것을 다 내놓고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공헌한 사람에게 그것을 나누어주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제도가 바로 노벨상 제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오늘 세상을 떠난다면 무엇으로 결론을 맞으며, 어떻게 평가될 것 같습니까? 혹 인색한 사람, 말썽 많은 사람, trouble maker로 평가되지는 않겠습니까? 그러한 평가를 받는다면 얼마나 부끄럽고 비참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마지막 기회에는 열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제발 이제는 미워하지 맙시다. 이제는 사랑의 사람으로 달라져봅시다.

마지막 한순간이라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합시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 이제 남 원망 말고 오직 사랑으로 남은 시간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옛날에 어느 돈 많은 할아버지가 노비를 많이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그해 섣달 그믐날 그 노비들을 다 해방시켜주겠다고 노비들 앞에서 공언(公言)했습니다. 노비들은 굉장히 기뻐하며 손꼽아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노비로서의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내일이면 꿈에 그리던 자유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창 기쁨에 들떠 있는 노비들에게 주인은 짚단 하나씩을 나누어주면서 그것으로 밤새 새끼를 꼬라는 것이었습니다.

게으른 노비들은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부려먹고도 이제 고작 하루 남았는데 그게 아까워서 끝까지 부려먹겠다고? 원 세상에, 이리도 고약한 할아버지가 또 있을까?' 그들은 되는대로 짚은 한 움큼씩 잡고 굵직굵직하게 새끼를 꼬았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렇게나 내던져놓고 잠들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또 한쪽 사람들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이제 하루밖에 안 남았으니 기왕 하는 것 끝까지 잘해주고 나가자.' 그들은 밤새도록 곱고 가늘게 새끼를 꼬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주인은 광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리고 노비들한테 말했습니다. "여기에 쌓여 있는 엽전을 어제 각자 꼬아놓은 새끼줄에 끼워라. 끼울 수 있는 만큼 끼워서 가지고 가거라." , 노비들 사이에 희비가 엇갈립니다. 새끼를 아무렇게나 굵게 꼰 사람들은 끄트머리에 겨우 몇 개, 그것도 간신히 매달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하루까지 충성한다고 곱고 가늘게 꼰 사람들은 거기에 엽전을 끼고끼고 해서 바리바리 실어 가지고 나갔다는 이야기입니다.

, 마지막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하겠습니까? 하루 남은 거 술이나 실컷 퍼마시다 말까요? 그 동안 못해본 일, 참고하지 않은 방탕한 유희에 흠뻑 젖어볼까요? 아닙니다. 마지막 시간은 그렇게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진실하게 가장 선하게, 서로 대접하고 봉사하기를 원망 없이 해야 합니다. 비록 조금 전까지는 남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도 이제 남은 것은 원망이 없어야 합니다. 말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제발 이제는 덕 있는 말을 합시다. 가시 돋친 말은 발라내고, 이 남은 시간에만은 누가 들어도 은혜 될 말을 합시다. 내가 지금 죽더라도 조금 전에 한 말이 아름답고 귀하고 덕스러운 말로 남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동안 받기만 했습니까? 이제부터 주기만 하는 사람이 됩시다. 이 종말론적 기회에서만큼은 최선을 다하여 선을 베풀고 덕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우리가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가 다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결국 내 말이 나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덕스러운 생으로, 사랑의 사람으로 나머지 시간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맡은 청지기 됨에 대하여 다시 한번 확인해둡시다. 나의 나됨을 알고 은혜를 알고 나의 현주소를 알아야 합니다.

미운 이야기는 접어둡시다. 지난 일을 더는 후회하지 맙시다.

기도로 나를 이기고,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고, 감사로 원망을 이기며, 말씀으로 방종함을 이깁시다. 그리고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사랑, 봉사, 베푸는 생으로 나머지 기회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주님의 놀라운 은혜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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