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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이 사람의 감사(누가복음 17장 11절~19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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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감사(누가복음 1711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공산주의 국가나 혹은 공산주의 체제 하에 있었던 나라들을 방문 해보면 그들에게서 똑같이 느껴지는 강한 인상이 있습니다. 첫째, 경제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주 가난합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배가 불러 남겼을 때에 지나가던 사람이 당장에 들어와서 그 남겨진 음식을 먹어치우는 모습도 저는 보았습니다. 그만큼 배고프고 가난합니다. 둘째, 얼굴에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유치원 아이들도 노래한답시고 바락바락 악을 씁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그것은 노래가 아니라 악을 쓰는 것입니다. 셋째, 거짓말을 잘합니다. 나하고 둘이 얘기할 때에는 이렇게 말하다가 누구 다른 사람이 오면 저렇게 말하고, 공동적으로 모인 자리에서는 또 다르게 말을 합니다. 심지어는 국가적으로도 거짓말을 잘합니다. 거리에 전시용 가게가 많아요. 가게에 물건을 진열해놓고 불도 켜놓았지만 아무도 출입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물건을 팔지도 사지도 않아요. 그저 길거리에 전시만 해놓았을 따름입니다. 이것은 국가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없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감사하다는 말이고, 또 하나는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감사니 사랑이니 하는 개념이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해줘도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한마디를 듣기가 어렵습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 나라의 제도가 혁명과 투쟁으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내기를 해도 '모내기 투쟁', 벼를 벨 때에도 '벼베기 작전'이라고 합디다. 도대체 투쟁이니 작전이니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싸움입니다. 모든 것을 싸움과 투쟁으로 보는 것입니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매인 체제에서는 모든 것이 싸움입니다. 생존경쟁, 약육강식, 적자생존…… 모든 것을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무엇 하나 싸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싸움과 혁명과 파업과 쟁취, 이런 것을 통해서 얻어진 일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가끔 시위할 때에 보면 사람들이 머리띠에다가 '투쟁' '쟁취'라고들 썼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아, 이 사람들 참 잘못한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얼마의 돈을 더 얻고, 얼마의 이득을 가지는지 모르나 인간성에 있어서는 엄청난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몇푼 더 얻어봐야 고마워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점점 마음만 황폐해집니다.

쟁취해서 얻은 일에는 행복도 감사도 없습니다. 또다시 불평입니다.

또다른 원망으로 이어집니다. 인간성에 입는 손해와 손실은 엄청난 것입니다.

감사가 행복을 낳는 것입니다. 감사가 있어야 행복합니다. 월리엄 로우라고 하는 영국의 종교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족과 행복을 가장 빨리 찾는 비결은 범사에 감사하는 데 있다"---결국은 감사함으로만 행복한 것입니다. 많이 가졌다, 적게 가졌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감사하다는 감격이 그 속에 있을 때에 그만큼만 행복한 것입니다. 그 때에만 은혜가 은혜 되고, 행복이 행복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옛날에는 행복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난날은 좋았는데 오늘은 불행하다'라는 생각에서 평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오늘입니다. 믿음과 겸손,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만 감사가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어떤 형편에서도 감사가 없고, 감사가 없기에 끝까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것 때문이요, 저것 때문이요…… 이렇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감사합니다. 감사의 체질, 감사의 성품, 감사의 인격이 되고야 감사가 있습니다. 사람 자체가 감사적 인간이 되지 못하면 어떤 경우에도 원망과 불평뿐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감사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생전에 1,300개 이상의 발명특허를 얻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가 만들어놓은 것을 우리가 많이 쓰고 있습니다. 활동사진기, 축음기, 무선 전신기 등, 그의 발명품은 온 인류에게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에디슨은 어렸을 때에 저능아 취급을 받았습니다. 정규적인 학교에서도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그 어머니는 그를 위로하고 그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또 그는 젊은날에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할 것은 내가 귀머거리가 됨으로써 연구에 몰두할 때에 잡음이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귀머거리가 되는 것은 답답하지만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잡음이 들리지 않고 어떠한 소음과도 관계가 없이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이여, 귀머거리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에디슨은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그는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귀머거리가 됨으로써 얻은 것만 생각했습니다. 내게 어떤 불행이 닥쳤든, 병들었든 가난하든 실패를 했든, 그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얻게 되는 것, 얻은 것, 그 소중한 것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베토벤을 생각해보세요. 음악가로서 귀가 멀었다면 볼일 다 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는 귀머거리가 되어서도 작곡을 합니다. 가장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곡들이 바로 귀머거리가 된 다음에 작곡한 것들입니다. 그는 악보로써 음악을 들었습니다. 귀로들은 게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 치명적으로 불행한 여건 가운데서 그는 오히려 하늘의 음악을 땅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그런고로 인간의 인간됨이란 얼마나 감사하느냐에 있습니다. 사람의 믿음이 어느 정도냐, 인격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은 어느 경우, 어느 정도, 어느 지경에까지 참으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인가, 감사의 깊은 원리를 얼마나 터득하고 사는 사람인가로 가름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사람은 문둥병자인 한 사마리아사람입니다.

인간으로 말하면 가장 불행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의 은혜로 이제 병에서 고침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문둥병자 열 명이 다 고침을 받았는데 이 한 사람만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하고 다른 아홉 명은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가만히 보면 예수님께서 좀 섭섭한 듯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7, 8)"----정말 가슴이 찡한 말씀입니다. 그 아홉은 어디 갔느냐---어디 갔을 것 같습니까? 이에 대해서 열 가지로 추리해놓은 것이 있는데 재미있어서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진짜로 나았는지 확인해봐야겠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온 몸에 걸린 병이 나았다고 했지만 정말 나았나, 병원에 가서 확인해봐야겠다, 해서 병원으로 진찰하러 갔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나았다고 하지만 재발할는지도 몰라'하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재발 안 하는 병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고쳤다고 해도 결국은 그럭저럭 다 죽습니다. 그렇게 미루어 생각하면 재발 안 하는 병이 없어요. 그런데 고침 받은 이 시간에 '재발하면 어떡하나, 며칠이나 있어야 다 나을까, 후유증이 생기면 어떡하나'하고 의심을 합니다. 그러고 보면 고마울 것이 없어집니다. 이 사람들, 아무래도 그랬던 것 같아요. '주님께 천천히 감사를 드려야지'했다는 것입니다. 이 더럽고 냄새나는 옷, 이 얼굴, 이대로 가서야 되겠나 해서 목욕하고, 옷도 깨끗하게 입고, 예물도 사서 들고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렇게 갔다가는 못 돌아옵니다. '이제 생각해보니 내 병은 나병이 아니었는지도 몰라. 그것은 오진이었을 거야'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다 나은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나은 것일지도 몰라. 이게 뿌리깊은 피부병인데 겉은 좀 나은 것 같아도 속은 그대로일는지도 모르지'했다는 것입니다. 이러면 감사할 수가 없지요. 또 이런 생각이 들면 '우선 제사장에게 먼저 가서 보여야겠다. 그래서 신분을 보장받아야겠다'했을 것입니다. 이 역시 감사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나를 위해서 특별히 애써준 것도 없잖아? 그런데 뭘 감사하라는 것인가'하는 생각입니다. 이것, 말되는 얘기입니다. 문둥병자들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딱 한마디 하셨습니다. 상처를 만져 주기를 했나, 요샛말로 안수를 해줬나, 안찰을 해줬나, 약을 줬나, 돈을 줬나, 뭐 달리 애써준 게 없는데 뭘 감사하라는 말인가? 말씀 한마디하신 것밖에는 없는데----그래서 감사하지 못하고 말았는지도 모릅니다. '랍비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뭐 예수님만 하는 일이 아닐 텐데'하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나는 이미 회복되고 있었는지도 몰라. 자연히 나을 때가 됐으니 나았을 거야'하는 생각도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저들 아홉은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만이 감사를 하는데, 이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감사부터 하겠다'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물 없어도 되고 예의 갖출 것도 없습니다.

먼저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가서 꿇어 엎디어서 "감사합니다"라는 말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 보면, 자기의 몸이 다 나은 것을 본 이 문둥병자가 제사장에게 가던 도중에 되돌아와서 감사를 드립니다. 나았다는 것을 알고 나았다는 사실을 의식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깨달음의 감사가 있습니다. 사실 감사란 깨달음에 있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어요. 은혜 안에 살고, 은혜 안에 죽어도 모릅니다.

아는 사람, 나은 것을 알고, 나은 것을 보고, 깊이 깨닫는 그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즉시 감사해야 됩니다. 깨닫는 즉시 감사부터, 모든 것보다 최우선으로 감사부터 해야 됩니다. 그래야 내가 인간이고, 그래야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느냐---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사람은 아주 단순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달리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그럴까, 주변사람들은 어떨까---그것, 생각 안 했어요. 우선 돌아가서 감사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조금만 생각을 달리했다면 감사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병이 나았습니다마는 그간의 그 많은 고통, 그 억울했던 시간들, 그 지난날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가령 그가 나이 오십이라고 상상을 해봅시다. 그 좋은 젊은 날은 다 문둥병으로 보냈어요. 사랑하는 사람도 잃었고, 가족도 잃었고, 직업도 잃었고, 공부도 하지 못했고, 기술도 없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았다고 해서 무엇을 감사하라는 것입니까? 감사할 것이 없지 않아요?

우리가 뉴스를 들으면서 아주 감격했던 일이 있습니다. 바로 조창호씨의 일입니다. 그가 대학생이었을 때에 전쟁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소위로 임관되어 군대에 갔는데 전쟁 포로가 되어 북한에 끌려가 사십여 년 동안 갖은 고생을 다 합니다.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도망쳤지만 설상가상으로 병까지 얻어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북한 강제노동수용소에서 5개월 동안 고생을 하다가 정말 구사일생으로 도망을 쳐서 살았기 때문에 그 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잘 압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망치다가 붙들려서 그대로 매맞아 죽는 것을 내 눈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조창호씨의 수용소에서 도망친 이야기가 구구절절이 내 가슴을 저리게 했습니다. , 이렇게 도망을 해서 왔습니다. 이제 감사할 수 있습니까? 이 사람 나이가 얼마입니까? 그 많은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억울하고 분하지요. 다른 사람들이 잘사는 모습을 볼 때에 분통이 터지지요. 안 그렇겠습니까? 그런데 무엇을 감사하라는 말입니까? 과거---이것, 문제입니다. 억울하게 다 허송세월로 보내버린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눈물뿐이지, 감사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 이 문둥병 환자더러 이제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배운 게 있습니까, 벌어놓은 돈이 있습니까? 그뿐입니까? 병은 나았다고 하지만 그것을 누가 믿어줍니까? 솔직히 생각해보세요. 누가 이 사람하고 결혼을 해주겠습니까? 요새도 문제입니다만 문둥병 환자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는 깨끗합니다. 문둥병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의사가 확증을 해줘도 이런 아이들은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앉아 공부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 미감아(未感兒)는 어두운 가운데 일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하물며 문둥병으로 한평생을 산 사람이 이제 깨끗해졌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가정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사랑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받아주는 직장이 있겠습니까? 또다시 거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를 생각하면 암담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감사한다는 말입니까? 생각하면 감사할 게 없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문둥병자는 단순한 마음,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감사를 드립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래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요즈음 수학능력시험이라는 것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합니다.

아무튼 시험을 봤어요. 합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축하합니다"하면 "감사합니다"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난감합니다. 대학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을는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젊은 사람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나보고 다시 젊은사람이 되라고 한다면 그러지 않겠습니다. 젊은 것, 하나도 반갑지 않아요.

내가 낫지요. 왜냐하면 젊으면 앞으로 이 험악한 세상을 한참 오래 살아야 하니까요"---참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장로님 한 분을 아는데 그 분 따님이 나이 사십이 넘도록 시집을 못 갔습니다. 아버지는 늘상 "딸 시집가는 것만 보고 죽어도 한이 없겠다"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딸이 결혼을 했어요. 제가 결혼 주례를 섰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습니다. "장로님,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겠네요." 그랬더니 이 장로님 말씀이 "저 아이가 아기를 나을 수 있을까?" 합니다. 보세요. 끝도 없습니다. 감사란 즉각적이고 종말론적이어야 합니다. 과거 생각 미래 생각 다 하고 들면 언제 가야 감사하겠습니까? 이 아홉 사람의 문둥병자가 어디론가 가버린 이유가 있습니다. 한 사람만이 돌아왔어요.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주셨고, 하나님께서 내게 이 능력을 나타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는데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해주시고 저렇게 해주세요,하며 소원을 다 구합니다. "잠 잘자게 해주세요. 아멘" 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면 이 아이는 꼭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른답니다. 엄마가 물었습니다. ", 너는 기도한 다음에 왜 노래하고 춤을 추니?" 아이는 대답합니다. "엄마, 하나님께 너무 슬픈 얘기만 많이 해서 죄송해 그래요.

하나님을 좀 기쁘게 해드리려고요." 아이가 어른보다 훨씬 낫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그것이 감사입니다. 여러분, 오늘 감사절날은 제발 무엇을 좀 주세요,라는 말은 좀 보류합시다. 무엇을 그렇게 달라는 것이 많습니까? 이래가지고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니 문둥병자가 와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한 사람만이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구나,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보세요. 감사하지 않는 것처럼 무서운 죄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감사를 모르는 자를 벌하는 법이 세워지지 않은 것은 감사할 줄 모르는 자는 하나님께서 직접 벌하시기 때문이다." 여러분, 알아서 하세요. 감사를 안 드린다고 벌하는 법률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직접 벌하십니다. 진정한 감사야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한 문둥병자, 이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돌아와서 주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하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진정 가슴 뜨겁게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러한 감사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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