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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담력 (1장 19절~21절)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립보서 전체가 다 귀중한 말씀이지만 특히 본문 21절은 사도 바울의 위대한 신앙 간증입니다. 또한 신앙적인 인생 철학을 우리에게 말해 주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21절)." 얼마나 굉장한 말씀입니까? 이것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어서 많은 사람이 외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외어 두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하다, 죽어서 유익하다면 죽는 것도 결코 손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닌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용기와 담력입니다. 그런데 이 용기와 담력의 근거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좀 용기 있고 담력 있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할 때 대부분의 사람이 '돈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 때문에 더 비겁해지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돈에 얽매여 시시한 걱정이나 하며 사는 자신이 초라해 보입니다. 돈이 우리에게 용기를 줄 때가 있기는 합니다. 천하장사도 무일푼이면 무안색(無顔色)이라 합니다. 돈이 없으면 안색이 변합니다. 돈이 없을 때는 친구를 만나도 반갑지 않고 친척을 만나도 어깨다 축 늘어집니다. 신학대학 학생들이 처음 졸업할 때에는 다 용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몸을 바쳐 평생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하나님께 눈물로 약속하고 서원하며 안수 받고 시골로 내려갑니다. 가서 한 3년 지내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워집니다. 끼니 걱정을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고생을 한 3년하고 나면 절로 어깨가 축 늘어집니다. 용기도 없어집니다. 이처럼 경제라는 것이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은 못됩니다. 진정 중요한 용기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식입니다. 요즘 말로 학벌입니다. 어떤 사람은 엄연히 대학을 나왔는데도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 통 말을 하지 않습니다. 거듭 물으면 "나오나마나 한 데 나왔습니다"하고 시큰둥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까? 소위 3류 대학에서 1등 하는 것이 일류 대학에서 꼴찌하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소의 꼬리가 되기보다 닭의 머리가 되는 게 낫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몸담은 직장, 내가 다니는 학교, 내가 처한 환경에서 최선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제가 미국서 공부할 때 동네 공원에 가끔 나가 나무그늘 아래서 책을 읽곤 했습니다. 그러다 그곳에 있는 수위 한 분과 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이곳에 수위로 있은 지 40년이 됩니다. 이 공원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곳 관리 책임자가 왔다갔다해 봐야 아무 것도 모르고요. 내가 제일입니다." 얼마나 떳떳합니까? 이것은 일종의 지식으로부터 오는 용기입니다. 그러나 용기의 근거는 결코 학벌이나 지식에 있지 않습니다. 돈이나 명예나 지위에서 용기가 비롯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모든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도덕적인 용기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또 한 단 더 높은 궁극적인 용기가 오늘의 본문에 세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담력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첫째가 생사의 문제요, 둘째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문제요, 셋째가 소망에 따라 사는 부끄럽지 아니한 생입니다. 그러니까 죽고 사는 문제를 초월할 때에 용기가 생기고, 하나님의 뜻을 알 때에 담력이 생기며, 소망을 따라 부끄럽지 않게 살 때에 참 용기가 생깁니다. 이 원칙에 따라 사는 사람은 무슨 일을 당해도 담대할수 있습니다.
그러면 첫째로 생사의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죽고 사는 것 이상의 중요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그러나 살기 위해서, 한마디로 죽지 않으려고 벌벌 떤다면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가끔 병원에 가서 임종이 가까운 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개중에는 죽음에 대한 준비가 다 되어 있어서 아무 걱정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오셔서 감사합니다. 하늘나라에 가서만 납시다."준비를 마치고 시간만 기다리는 그분은 얼마나 명랑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와 반면, 안 죽을 궁리만 하는 환자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안 죽을까요?" 의사를 붙잡고 사정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물어보고, 심지어 하나님께 기도해서 조금만 더 살게 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죽음에 대한 문제는 깨끗이 정리하고 아무 때에 죽어도 좋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를테면 김일성처럼 겁이 나서 비행기도 못 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행기가 추락할까봐 김일성은 기차만 타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문제를 떼어버리고 그 문제를 다 처리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용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죽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살고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많이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죽기도 하고 명예를 위해 죽기도 합니다. 또 의와 진리를 위해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특별히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고 사는 문제를 뛰어넘어, 더 높은 가치의 생의 의미를 알고 사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살아도 죽어도 그만이요 주님만 영화롭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야말로 복된 사람이요 참 용기를 지닌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기도의 응답을 믿는 것이 용기의 근거입니다. 본문 19절에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소"하고 실로 신비하고 깊은 말씀을 합니다. 먼저 구원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구원은 좀 특별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이란 무엇이냐고 물을 때에는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 구원받고 천당 가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대개 구원을 세 가지 개념으로 나누어 말하는데, 먼저가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오는 것을 뜻하고 다음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매일매일 당하는 많은 시험에서 구원받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12년 간 혈루증 앓는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할 때, 이것은 천당 간다는 것이 아니요 병에서 나음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개념은 감옥에서 나오는 것을 가리킵니다. 앞장에서 생각해 본 것과 같이 그가 감옥에 있음으로 해서친위대 안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도 바울을 사랑한 나머지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 바울과 경쟁을 벌이던 사람들도 질투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보며 하나님의 뜻은 참 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옥에 갇힌 것 때문에 오히려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을 보면서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 감옥에서 나가게 하실 것이다"하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처럼 오묘하니 분명히 감옥에서 나가 이 모든 것을 간증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날이 있게 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너희 간구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런 일이 이루어질 것을 분명히 내다보면서 고마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마닐라에서 지금 막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김포 비행장에 오후 6시 30분에 내렸는데 수요예배 시간 7시 30분까지는 한 시간의 여유밖에 없었습니다. 차를 몰고 오는데 길이 꽉 막혀 버렸습니다. 그래 차안에서 교회로 전화를 걸어 늦어도 7시 45분까지는 갈 것이니 찬송가를 열심히 부르고 있으라 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과연 그때까지 도착할까 은근히 걱정도 되었지만 많은 분이 기도하고 있으니 시간 내에 갈 수 있으리라는 평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되어서 지금 여러분 앞에 선 것입니다. 19절에 '성령의 도우심'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친위대 고관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이 사람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를 감옥에서 한번은 나오게 해 줄 수 있지 않을까고 바울은 생각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친위대의 고관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분명히 나를 이 감옥에서 나가게 할 것이다, 또 너희들의 기도와 성령의 감동으로 내가 이 감옥에서 구원받을 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사실로 그는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감옥에서 나와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밖에도 사방을 두루 다니며 복음 전파를 하다가 두 번째로 갇혀서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본문에 나타난 장면은 첫 번째 갇혔을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믿고 성령의 역사를 믿는 것이 담력의 근거가 됩니다.
항상 나만 감동시키는 하나님이 아니요 원수의 마음도 감동시키고 내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오며한 섭리가 성도들이 기도와 함께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더 높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큰 능력을 아는 것입니다. 바울로서는 이곳에서 나가는 것이 좋으면 나가게 하시고 죽는 것이 좋으면 죽게 해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장에서 '내가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는 말을 하는데 그때로서는 '하나님께서 나더러 감옥에서 죽으라시는구나'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가를 늘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세상일을 너무 걱정합니다. 그래서 신문이나 TV를 볼때마다 "아이구 이것 큰일났구나"하고 놀라기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위탁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또 나를 위해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되어지는 일들은 모두 기도의 응답이니 너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습니다. 좀더 나아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께서 필요하신 대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닫힌 문을 열어 주기도 하시고 잘못된 길을 고쳐 주기도 하십니다. 멀리간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도 하십니다. 혹시 잘못된 자녀가 있습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언젠가는 성령의 역사와 우리의기도가 함께 해서 반드시 주님의 뜻이 선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선교적 차원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완성하실 것이라고 믿는 사람 이렇게 하나님의 경륜을 믿고 사는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 큰 뜻 안에 내가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일이 잠깐 잘못되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움은 왜 생기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여기에 있는데 내가 그것을 거역하고 반대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큰 뜻 안에 지금 내가 참예하고 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을 때 그는 담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소망을 따라 사는 부끄럽지 않은 생이 용기의 근거입니다.
20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소망은 있는데 그 소망을 따라 살지 못할 때에 부끄럽습니다. 소망이 무엇입니까? 학생들의 세계에서 보더라도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학자가 되겠다는 소망은 있으나 공부를 안 하면 부끄럽습니다. 고3학생들이 대학입시를 치르게 될 즈음이면 부모님들이 새벽기도회에 많이 나오게 됩니다. 급하니까 합격시켜 줄 것을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느 진실하고 겸손한 교인이 말하더군요. "내 아들 입학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녀석 그 동안 너무 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들어가게 해달라고만 기도하니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소망이 있으면 거기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소망은 엄청나고 현실은 엉망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소망에 합당한 생활이 따라가야 합니다. 저는 신학대학생들에게 자주 당부를 합니다. 앞으로 목사가 되었을 때에 지난 일을 돌아보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요. 신학생 때부터 새벽기도회와 모든 예배 순서에 빠지지 않고 참석을 해야 나중에 목사가 되어 교인들에게 시간 잘 지키라고 할 때에 부끄럽지 않습니다. 자신은 시간을 지켜 살지 않았고 생활이 엉망이었으면서 교인들을 보고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자신부터가 좋은 교인이 되는 훈련을 해 둬야 훌륭한 목사가 됩니다. 높은 이상을 세웠다면 거기에 100%까지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가까이 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부끄럽다는 것은 공로나 업적이 없어서 부끄럽다는 뜻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못했을 때 부끄러운 것을 말합니다. 능력이 없어서 못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에 부끄러움이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대할 때도 부끄럽고 그 일을 생각해도 부끄러운 것입니다.
간혹 임종을 앞에 둔 분들이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며 몹시 부끄러워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이토록 부끄러울 줄 알았다면 지난날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합니다. 아니할 말을 한 것, 많은 사람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든 것, 신앙에 손해를 입힌 것, 그 얼마나 부끄러운지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살아 왔을까.' 이젠 때가 늦어 돌이켜 바로잡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시간이 있고 건강하다면 지금이라도 바로 살아보겠는데 여의치 않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앞에는 여러 가지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궁극적인 소망은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가서 영원한 축복을 함께 누리는 그 종말론적 소망입니다. 그 소망을 생각하며 지금부터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 14절에서 말합니다.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저는 이 말씀을 장례식에 가서 자주 전합니다. "이제 먼저 한 사람이 갔습니다. 아버지가 갔고, 어머니가 갔습니다. 그 후손들이 여기 남아 있는데 언젠가 또 갈 것이 아닙니까? 그때 거기 가서 그리스도 앞에 부끄러움 없는 아내, 부끄러움 없는 남편, 부끄러움 없는 아들딸들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분명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한다면 당연히 이 같은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소망을 따라 부끄럽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기야 주를 위해 감옥에 있다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 아닙니까? 그가 감옥에 있지 않고 밖에서 무슨 사업이나 딴 일을 한다고 하면 이렇게 실수할 수도 있고 저렇게 실수할 수도 있어 좀 부끄러운 일들이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옥에 있습니다. 이것과 비교해서 이야기할 것이 아닌 줄 알지만 제가 이북에서 공산당 치하에서 감옥에도 잠깐 가보고 매도 좀 맞아 보고했습니다. 열심히 복음 증거 하다가 매맞은 것은 아니지만 주일날 교회 갔다고 해서 맞은 것이니 조금은 비슷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교회 간 것이 말썽이 되어 유치장에도 가보고 광산에도 끌려가고 했습니다. 고생은 많았지만 그때 "야, 여기서 죽는다면 천당은 직행인데"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때야 장가도 들기 전이니 내가 죽는다 해서 과부될 사람도 없거든요. 그래서 정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바울은 사람을 보나 하나님을 대하나 자연을 보나 부끄러움이 없고 담대합니다. 그래서 죽든지 살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몸은 육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요 구체적인 생활을 뜻합니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든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 이 구체적인 모든 현실적인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와 정반대의 생활이 가끔 있어 문제입니다. 예수께 욕이 돌아가든 말든 내가 존귀하게 되어야겠다는 생각, 내 이름이 손해보면 안 되겠다는 이런 생각이 항상 문제입니다. 나야 어찌되었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높임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소원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다시 한번 21절의 말씀을 깊이 생각합시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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