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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의 비결을 배우는 사람(4장 10절~13절)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오늘 본문 가운데에 '일체의 비결'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체의 비결을 깨달은, 신앙적으로 아주 달관한 세계관을 가지고 산사람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먼저 빌립보서의 기록 목적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빌립보서는 감사장(感謝狀)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위문금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자기네 교회의 목사를 파송했습니다. 한겨울 동안 감옥 가까이 있으면서 바울 선생에게 사식도 넣어 드리고 여러 가지 불편한 것을 도와드리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랑이 너무나 고마워서 이렇게 감사 편지를 쓰게 됩니다.
그런데 모든 말이 다 그렇지만 이 감사하다는 말은 특히 조심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하고 한 번만 말하면 될 것을 거듭거듭 되풀이한다면 어딘지 모르게 무엇을 더 바라는 것 같은 인상을 주게 됩니다. 이를테면 여러분이 누구한테서 선물을 받았을 때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작년에 주신 것도 고맙고 금년에 주신 것도 고맙습니다."하고 지나치게 인사를 하면 마치 "그러니까 내년에도 주세요"하는 말로 들리기 십상입니다. 똑같은 말이라도 이렇게 다르고 저렇게 다릅니다. 그래서 친절도 지나치면 속박이 됩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옛날과 달리 요즘은 인권 문제가 대두되는 사회라, 이런 것들이 더욱 문제된다고 합니다.
60년대, 제가 미국 유학 갔을 때의 일입니다. 학교 식당에서 여덟 명씩 둥글게 앉아 식사를 하는데, 여학생 한 명이 오면 먹다가도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남학생들이 모두 일어나서 의자를 양보해 주고 밀어 주고, 그 여학생이 앉은 다음에야 우리도 자리에 앉습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이쪽에 교수가 있든 없든,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에는 그처럼 여자를 끔찍이 우대했습니다. 그 때문에 가장 곤란한 것은 운전대를 잡았는데도 여자가 타게 되면 얼른 내려서 문을 열어 주고, 또 닫아 주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문을 열어 주는 것까지는 곧잘 하는데 탄 다음에 닫아 주는 것을 깜빡 잊고 운전석에 앉는 실수를 여러 번 했습니다. 잊어 버리고 문을 안 닫으면 그 나라 여자들은 제가 다시 내려서 닫아 줄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아이구, 한국에서 태어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여튼 타기 전에 열어 줘야지요, 탄 다음에 닫아 줘야지요, 목적지에 닿으면 또 내려서 열어 줘야지요…… 그렇게 깍듯이 예의 차리고 사는 나라였는데 70년대에 가보니 그런 풍속이 반쯤 없어졌습니다. 요즘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요. 까닭인즉슨 여자들이 '내가 무슨 어린아이인가?'하고 필요 없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썩 잘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친절도 어느 정도이지, 지나치면 여자를 애완동물 취급하는 것처럼 되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친절을 표현해야 되는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이 말이 마치 무엇을 더 달라는 말로 들리지 않을까 걱정을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공부하게 될4장 17절에서는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라고 못을 박습니다. 아무튼 사도 바울은 무척 센스가 빨랐던 것 같습니다. 감옥 속에 갇혀 있는 그 험한 상황에서도 남 생각하기를 잊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자존심 상하거나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는 자상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처럼 민감한 의식, 이것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어떤 마음으로 비쳐질까, 내가 하는 말이 어떻게 들려질까, 내 행동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하는 것들에 대해서 적지 않이 신경 쓸 필요가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내 편에서 도와주면 그만이다'하는 마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것이 저 사람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말함으로 더 달라는 이야기가 되지는 않을까 적어도 여기까지 상대방에 대하여 신경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중에 세 가지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첫째, 10절에 나오는 기회에 대한 칭찬입니다. 전에도 너희가 나를 도울 생각은 있었으나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 그 기회를 얻었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기회가 필요합니다. 기회가 닿지 않으면 아무리 공들인 일이라 해도 효과가 없습니다. 물론 공부하는 기회, 돈 버는 기회, 기도하는 기회 등 모든 기회에는 반드시 '시간'이라고 하는 플러스 알파가 관계됩니다. 그러나 특별히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봉사의 기회'입니다. 내가 달라는 것이 아니라 주면서 봉사 하겠다는 데 무엇이 잘못이냐고 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는 것이야말로 많이 생각한 후에 실천해야 할 문제입니다. 어떻게 주어야 할지, 무슨 말과 함께 주어야 할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봉사는 특히 적절한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봉사하기에 가장 적절한 기회입니까? 먼저, 주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의 기회가 됩니다. 주는 사람의 마음이좋을 대에 주어야 합니다. 내게 기쁜 마음이 넘칠 때에 봉사를 해야지, 이 기회가 지나고 나면 봉사가 마치 적선이나 동정, 마지못해 하는 의무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는 사람의 마음에 봉사의 기회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여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이를테면 물질로 봉사하고 싶은데 돈이 없다면 되겠습니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싶은데 내게 지식이 없다면 되겠습니까? 몸으로 봉사하고 싶은데 건강이 없다면 되겠습니까? 아무리 누구를 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해도 내가 감기에 걸려 쿨룩쿨룩하는데 어디 가서 어떻게 봉사를 하겠습니까? 오히려 병문안 갔다가 환자한테 폐만 끼치고 돌아오겠지요. 이처럼 봉사하고 싶은마음은 굴뚝같으나 내 형편이 봉사하지 못할 처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는 자의 여건에 기회가 있어야 합니다. 때에 다라서 재물도 있어야 하고, 지혜도 있어야 하고, 건강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적절한 봉사의 기회란 받는 자 입장에서도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받는 사람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 7:6)" 하셨습니다. 지금 마음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한테 봉사하다가는 오히려 주고도 뺨맞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받는 사람의 마음, 이것이 아주 중요한 기회가 됩니다.
또 중요한 것은 필요(need)입니다. 지금 무엇을 필요로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이 필요한 사람에게 물질을, 위로가 필요한사람에게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사실 위로라는 것은 말없이 곁에 서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위로한답시고 남 속도 모르면서 이러쿵저러쿵 해보아야 다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욥도 친구들이 찾아와서 무슨 죄를 지었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 충고할 때에 기분이 상했던 모양입니다. 드디어는 "입 좀 다물어라. 너희가 하는 소리는 나도 할 수 있다"고까지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상대방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말로 하는 위로가 필요한지, 함께 있어 주는 위로가 필요한지, 아니면 돈이 필요한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필요는 끊임없이 바뀝니다. 오늘은 돈이 필요하고, 내일은 친구가 필요하고, 또 그 다음에는 사랑이 필요하고…… 이처럼 자꾸 변하는 것이 필요입니다. 그러므로 봉사를 하려면 상대방의 필요가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정확하게 간파해야 합니다.
건강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있고, 허약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주어야 할 것이 있고, 젊은 사람에게 주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 필요에 적중해야 합니다. 주려고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기회가 잘 맞아야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그는 감옥에 있습니다. 도움 주기에 꼭 적절한 시간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위로가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하고, 물질이 필요합니다. 당장 춥고 배고프고 어려운 이 때 도와주지 않으면 언제 도와주겠습니까?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저는 여행 다닐 때 무엇이든지 들고 다니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그런데 제주도 같은 곳에 가면 돌아올 대에 과일이니 뭐니 잔뜩 넣어 줍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냥 놔두고 올 수도 없고 아주 난처합니다. 주는 사람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이렇게 되면 실패한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주는 사람에게 더욱 지혜가 필요합니다.
상황을 잘 판단하고 기회를 적절히 이용할 수 있는 지혜 말입니다.
우리는 "내가 주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10절)"라고 말하는 사도 바울의 세심한 배려와 용의주도함을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너희가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다'고 바울이 저들 입장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너희들이 항상 나를 돕고 싶은 마음이 있고 또 옛날에 실제로 도와준 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음에 공부하겠지만 바울이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이들은 많은 전도금을 모아 전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바울 선생님을 돕겠다고 약속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그만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어이쿠, 바울 선생님이 떠나실 때 우리가 계속 돕기로 약속했었는데 그 동안 돕지 못했구나'하고 미안한 마음에 급히 서둘러서 좀 많은 돈을 모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기 교회 목사를 통해 이것을 보냅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니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할 말도 많았을 것입니다. "계속 돕겠다더니 멍청하게 잊고 있다가 이제 감옥에 갇혔다고 하니 생각이 났느냐?" 하고 그 동안 무심했던 빌립보 교인들을 책망할 수도 있습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조차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고 합니다. 눈에 늘 보여야 도울 마음도 생기는 것이지 멀리 헤어져 있으니까 까맣게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전화 왕래가 있는 것도, 편지왕래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럴 수 밖에요. 이렇게 잊고 있다가 이제야 생각이 났으니 사도 바울로서는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그야말로 덕 있는 사람의 말입니다. 기독교적인 인격이 여기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의 마음먹은 것까지 다 안다고 합니다. 저 사람이 틀림없이 나쁜 마음을 먹었을 것이라고 함부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남의 마음을 다 압니까? 바울의 입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는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는 방법이 보통 사람들과 다릅니다. 생각은 있었는데 기회가 없었다고 빌립보 교인들의 마음을 높고 선하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상대방의 마음을 나쁘게 보지 맙시다. 상대방의 마음을 나쁘게 깎고 격하시켜서 평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을 봅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 하시지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저들이 어디 깨어서 기도했습니까? 또 졸고, 또 쓰러지고, 잠시도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이럴 때 무엇이라 해야 합니까? "지금이 어떤 시간인데 깨어 있지 못하느냐!" "이 멍청한 사람들아, 내일 아침 십자가를 지는데도 졸음이 오느냐?"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 이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이 얼마나 고마운 평가입니까?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중심을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 21:15)" '내가 비록 세번이나 당신을 모른다고 했지만, 졸기는 했지만, 마음으로는 사랑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우리들의 본문으로 돌아옵시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가혹한 평가를 내리지 않고 오히려 후하게 생각해 줍니다. "너희들이 돕고 싶은 생각은 많았으나 내가 하도 여기저기 정처 없이 돌아다니니까 너희한테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내가 감옥에 갇혔으니 비로소 너희들이 나를 도울 기회를 찾았구나." 이처럼 너그럽게 이해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입니다. '생각은 하였으나' 이 말은 관대한 이해를 넘어선 칭찬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회를 잘 포착해서 적절한 때에 도움을 주니 고맙다고 오히려 인사를 합니다.
11절에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6절을 봅시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항상 스스로 족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 - 없어도 비굴하지 않고, 있다고 교만하지 않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믿음으로 살고, 사랑하며 살 줄 아는, 그런 자족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이것은 늘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끝없는 욕심을 가지고있는 한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배우들이 마음대로 울고 마음대로 웃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하고, 호탕하게 웃기도 합니다. 저는 어떻게 그처럼 울고 웃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지 늘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마침 연예인들을 만날 기회가 있어서 한번 물어 보았습니다. 저들이 대답하기를, 자기 일생 중에서 가장 슬펐던 때를 집중적으로 생각하면 눈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또 자기 평생에 가장 기뻤던 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 그런지 항상 불행했던 시절만 생각하면서 침울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나름대로 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더 어려웠던 때를 생각하고, 또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족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이런 마음을 터득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에는 같은 말이지만 '일체의 비결(secret)을 배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해도 그만이요 부해도 그만이다, 배불러도 그만이요 배고파도 그만이다, 나는 풍부와 궁핍에 대처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모든 일에 만족할 수 있는 비법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는 역시 만족의 비결이 필요합니다. 행복이란 스스로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가 잠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었습니다. 깨워도 자고, 일으켜 세워도 잡니다. 아침에 먼저 일어나서 밥을 지어야 하는데도 부인은 예사로 남편보다 늦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웃에 사는 어느 부인이 불면증에 걸려서 입원을 하더랍니다.
이것을 보고 이 남편은 '불면증보다는 잠 많은 편이 차라리 낫구나'하고 생각을 고쳐먹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어느 쪽으로든 자기 나름대로 오늘의 문제를 스스로 족하게 여길 줄 아는 비법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가끔 보면 자녀가 공부 못한다고 불평하는 부모님들이 있는데, 이런 부모님들은 정신박약아들이 수용되어 있는 고아원에 가서 하루만 봉사하고 오면 다시는 그런 불평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족의 비결을 얻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는 원망하고 불평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넘치는 축복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일체의 비결을 얻을 수 있습니까? 바울이 암시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물질적 현상보다 언제나 의미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양적으로 보지 말고 질적으로 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보다 신령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세속적으로 풍부한 것보다 영적으로 풍부한 것이 더 중요합니다. 현세적인 것보다 미래적인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이렇다 저렇다 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받을 축복이 더 큰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나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얼마나 고생하느냐,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하느냐 생각하지 말고, 내가 지금 수고하는 것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한테 어떤 유익이 있을까 하는 쪽으로 생각을 돌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새로운 행복과 만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서 내 수고, 내 희생, 내 순교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 어떤 일에든지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1절과 12절에서 '배웠노라'고 합니다. 자족하기도 배우고 비결도 배웠습니다. 배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역시 배우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립니다. 공부에는 일정한 코스가 있습니다. 과정이 있습니다. 국민학교 학생한테 당장 대학교 교과서를 읽으라고 한다면 한글로 되어 있으니까 겨우겨우 읽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뜻을 알 수는 없습니다. 공부란 부득불 유치원, 초등학교로 시작해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이렇게 단계적으로 밟아 가야 깨닫게 되는 것이지, 건너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거룩한 능력을 힘입어서 일체의 비결을 터득하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커리큘럼과 그 코스를 잘 밟아 나가야 합니다. 불평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시간표대로 차례차례 공부해야 합니다. 이제 방금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을 놓고 생각해 봅시다. 처음에는 물질에 대한 생각을 바로잡아줍니다, 그 다음에는 사랑에 대한 것, 가정에 대한 것, 혹은 명예에 대한 것을 하나씩 하나씩 정리해 줍니다. 이렇게 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일체의 비결을 배우게 해주는 것입니다.
일체의 비결을 다 배운 후에 사도 바울이 할 수 있는 마지막 고백은 무엇입니까? 4장 13절을 봅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누가 제게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물으면 저는 서슴없이 이 말씀을 듭니다. 일체의 비결을 배우고 나니까, 또 자족하기를 배우고 나니까 이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권력은 승리를 통해서 얻어집니다. 재력은 수고와 땀을 통해 얻어지고, 지력은 훈련을 통해 얻어집니다. 그러나 마음의 힘은, 그 덕성은 많은 시련을 통하여 얻어집니다. 말씀을 배우고 성령의 감화를 받고, 그리고 실천하고 수고하면서 사도 바울과 같은 능력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나는 약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강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능력 주시면 내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위대한 사도로 거침없이 동서양을 넘나들면서 복음의 사자로 꿋꿋이 역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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