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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영광(요 8:51~59)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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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영광(8:5159)

 

앞장에 이어 계속해서 유대인들과 예수님이 변론하는 장면입니다. 이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시지만, 유대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언어가 서로 다르다거나 방언을 해서 통하지 않는다면 그런대로 이해되지만, 마음이 닫혀서 통하지 못하므로 예수님의 괴로움은 더욱 심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미쳤거나 귀신들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8 : 51)고 대단히 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말을 지키면 죽지 않는다는 이 말을 유대인들은 꼭 알아들었어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아마, 오늘 우리들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다니면 복받고, 모든 일이 잘되고, 마귀 시험에 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만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정말 믿는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영원한 죽음을 보지 않는다고 하는 귀한 진리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비약을 해서 말하자면, 이런 말씀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이 감화하셔서 우리 마음 문을 열어 주셔야 하고, 또한 객관적으로는 마음 문을 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는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말들이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먼 이야기로만 들린다면 죽음, 부활에 대한 이해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죽음을 당하면, 그 때서야 비로소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뭔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생사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은 성경을 아무리 많이 보고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진리를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건적 계기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면, 건강할 때는 몸조심하라든지, 건강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귓전에서 흘려 버립니다. 그러나, 일단 앓아 눕게 되면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피부로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비슷한 이야기로, 학생을 가진 부모들은 누구나가 아이들이 공부 잘하기를 원합니다.

일구월심 공부에만 신경을 쓰므로 성적이 떨어지면 심한 경우에는 "나가 죽으라"고까지 악담을 합니다. 그러나, 일단 건강을 잃고 앓아 누우면, "공부는 못해도 좋으니 제발 건강만 해다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건강에 대한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아파서 드러눕는 계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와 같이, 중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떤 계기가 마련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내가 앉아서 명상하거나 노력한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어느 순간에 계기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성숙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진리를 이해하는 데는 단계가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수준에 알맞게 하나님이 가르쳐 주십니다. 가끔 한꺼번에 신구약 성경을 다 알겠다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냥 읽을 수는 있지만 뜻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미가 급한 사람이라도 기다릴 만큼은 기다려야지 조급하게 하다보면 오히려 잘못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드시 성장의 수준이 있으므로 어느 단계에 가서야 알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역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만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당시의 유대 사람들은 문자대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진리를 문자대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깊은 진리는 언제나 단계가 있고 말속에 또 말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옛말이나 속담도 문자대로 이해해서는 도저히 그 뜻이 통하지 않는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죽음이라는 말에서 육체적인 죽음만을 생각했습니다. 죽음을 오직 하나의 뜻만으로 생각하는 그들의 수준은 아주 유치했습니다. 죽음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죽는다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날마다 죽노라, 나로서 죽고 이제 그리스도로 산다, 율법 안에 죽고 은혜 안에서 산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십자가와 함께 죽었다" 등 이 말들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한다면, 어떻게 이해될 수 있습니까? 유대인들은 듣는 그대로 문자로만 해석해서 아브라함도 죽었고 선지자도 다 죽었는데, 당신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 아무래도 미쳤는가 보다고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말에는 넓은 뜻과 높은 뜻과 깊은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청년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체험해 보겠다고 십자가에 자기 몸을 매어 달고 못을 박고서 몇 시간 동안 견디어 보았답니다. 물론, 보통사람이 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을 했습니다만, 그것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통을 알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그 고통, 아픔은 우리들의 이해 밖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원래 죄로 인해서 불의한 세상에 대해 둔해질 대로 둔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보시는 입장은 차마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죄악 투성이로 넘쳐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이 보는 세상과 의인이 보는 세상이 다르기 때문에 외형적인 비슷한 경험을 한다 해도 그 아픔은 비교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죽음이나 생명을 상징화해서 더 깊게, 더 넓게 이해할 줄 아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죽음은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생물학적인 죽음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호흡이 끊어지면 죽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숨이 끊어져도 대개 조금은 더 살아 있습니다. 숨이 끊긴 후 조금 있다가 심장이 멈추고, 그리고 맥이 끊어지며 차차 몸이 싸늘하게 식어집니다. 이제 죽었구나 하고 장례 준비하는데, 간혹 다시 살아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태가 완전히 죽은 것인가에 대해 논란이 많습니다. 호흡이 끊어진 때냐, 심장이 멈추었을 때냐 하고 서로 주장합니다만, 한편에서는 뇌의 파장이 정지된 시간이 죽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정지되어도 뇌의 파장이 살아 있으면 다시 살아날 확률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사 상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우라고 합니다. 심한 사람은 호흡 이 끊어진 지 사흘 후에도 살아나서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상은 생리학적인 죽음을 말한 것입니다.

또한, 조금 차원을 달리한 생리적 죽음을 말하면, 사람은 날 때부터 죽기 시작하는 거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점점 자라다가 여자는 24, 남자는 26세가 되면 이 때부터 늙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 때부터 육체적으로 죽어 가는 것입니다. 건강하던 사람들도 40세가 지나면, 신체 각 부서에서 적신호가 오고 종합 진찰들을 하느라고 병원 출입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마치 새 자동차가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면 보링을 해야 하듯이 사람도 늙으면 이래저래 부속도 바꿔끼고 고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숨이 넘어가야 죽은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한 기간동안 계속 죽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죽음은 이성적인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철학적인 죽음, 정신적인 죽음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로 식물인간을 들 수 있는데, 정말 무서운 병입니다. 필자는 식물인간이 된 지 6년된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의 아들인데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환자들만 모아 수용하는 병원이 있는데, 고무호스로 입에다 영양을 넣어 주고 계속 살리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크리스마스 때나 부활절날 그 환자를 집으로 운반해 와서 눕혀 놓고 다같이 둘러앉아서 한 식구로 생각하며 식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 식물인간은 산 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생리적으로 보면, 몸은 살았지만 정신적으로는 죽은 사람입니다. 또 가끔 임종을 지키다가 겪게 되는 일인데, 이미 의식은 없고 영혼은 떠났는데 몸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을 봅니다. 이 상태는 무감각, 무의식으로 정신적 차원에서는 벌써 죽은 것입니다. 또한 차원을 달리해서, 말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오늘 유대인들과 같은 이 사람들도 정신적으로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 나아가서 도덕적으로 감각이 무딘 사람, 즉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셋째로, 영적인 죽음, 신학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죽어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없어져 버린 상태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따먹자마자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눈이 밝아지면서 부끄러워지고 하나님이 두려워져서 그들은 숨었습니다. 이것은 반갑던 하나님이 무서운 하나님으로, 사랑의 하나님이 두려운 하나님으로 관계가 끊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는 그 시간부터 벌써 영적으로는 죽었고 그저 육체만 남은 것입니다. 창세기 6:3에 보면 "그들이 육체가 되느니라", 즉 육체만 남고 영은 죽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홍수 때 모든 사람들을 쓸어버린 것도 산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 시체를 쓸어버린 것에 불과합니다.

바로 왕도 완악하고 강팍한 사람으로서 이미 사형 선고받은 사람입니다. 다만, 육체만 남았을 뿐 하나님의 세계에서 영적인 차원으로 보면 벌써 죽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도 역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육체적인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죽은 것일 뿐 참된 의미에서 끝이 아님을 알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보고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평화롭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나사로야" 예수께서 보시는 안목으로는, 걸어다니는 시체도 있고 무덤 속에 있는 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적인 삶과 죽음에 대해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었느냐 살았느냐, 도덕적으로 죽었느냐 살았느냐, 이성적으로 혹은 철학적으로 죽었느냐 살았느냐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 내용입니다.

육체적인 죽음이란, 최종적 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가는 출발입니다. 바울의 논법을 빌리면, 그는 사람의 인격을 다음과 같이 보았습니다. 사람의 몸은 성전 뜰과 같고, 혼은 성소, 영은 지성소와 같은 것으로 성전이 성전될 수 있는 것은 지성소 때문이요 그 안에 법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성소 없는 성전 뜰은 운동장과 같은 것으로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의 주인은 영적인 생명으로, 이것이 중심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이란, 영원히 사는 생명의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이 기독교적인 죽음에 대한 생각입니다.

예수께서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 유대인들은 육체적인 죽음만을 생각하고, 아브라함도 선지자도 죽었는데 당신이 아브라함보다 더 크냐고 어리석은 질문을 합니다(8:53).

본문에서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이 질문에 분명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이나 선지자는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분명히 나사로는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이 땅에서 나사로의 육체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엘리야도 요셉도 스데반도 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답답하게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서는, 마침내 예수님을 미쳤다, 귀신들렸다고 말해버리는 것입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자에게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 때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은, 6장에서 본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은 내게로 올 것이라"는 말씀처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알아들을 것이요, 아버지께서 주시지 아니한 자는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 본문은 뜻이 깊은 내용으로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 된 말씀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8:56).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나의 때, 즉 지금 내가 복음 전하는 그와 같은 시간을 그리워하다가 보고 기뻐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멀리서 예수를 예표적으로 상징적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생애에 나타난 사건들입니다. 종합하면, 창세기 12:3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되, "땅 위에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아브라함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이 구원받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날을 바라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복된 사람입니다. 또한 창세기 15:6에 보면,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즉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구원 얻게 될 것을 예표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로, 창세기 17:17에 보면 아브라함은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나이 백 세에 아들을 낳는다고 하니 웃을 만도 한 일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그 소리를 듣고 웃었습니다. 이 때 천사가 "왜 웃느냐"고 사라에게 말하자, 그녀는 웃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나, 천사는 "웃었느니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만일에 천사가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아들을 준다고 말했는데 네가 웃는 것을 보니 믿음이 없구나. 아들 준다는 것을 취소한다"고 했다면 어찌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천사는 "웃었느니라", "네가 너의 나약함을 생각하고 웃었는데 이해한다. 내년에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은웃음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가정에 기쁨을 주신 것입니다. 바로 주리라고 하던 이삭을 근 25년만에 아브라함이 백 세 되던 해에 주셔서 받았는데, 바로 그것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사건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브라함은 이 날을 보고 기뻐했느니라" 하셨는데, 얼마나 깊은 말씀입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생애에 결정적인 시간입니다. 그는 순종하여 모리아산에 가서 바쳤고, 여기에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모리아산에서 칼을 들어 치려는 바로 그 순간에 "그만 둬라. 이제 네 아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줄을 알았노라"고 말씀하시며, 대신 준비해 놓았던 염소를 잡아서 죽이게 하셨습니다. 이제 이삭을 데리고 내려옵니다. 이삭은 살았습니까, 죽은 것입니까? 이것을 히브리 저자는 말하기를, 이삭은 벌써 죽었고, 지금 데리고 오는 이삭은 부활로서 십자가와 부활이란 말입니다.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잡아 제사를 지내는 그 시간에 이미 이삭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순간 말리시지 않았다면 죽었음은 당연하므로, 이미 정신적으로 심령적으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완전히 아들을 바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아들을 내어주신 것으로 이것은 부활에 대한 예표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크게 축복하시어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라"(22:18)고 말씀하셨습니다. 씨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브라함은 멀리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만민이 구원받게 될 것을 바라고 기뻐하는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교만하고 무지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진리를 알아듣기에는 거리가 너무 먼 곳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생명의 깊은 진리를 구약의 선지자와 아브라함을 통해서 설명하셨지만, 그들은 네(예수)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8:57) 어리석은 질문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아 나기 전에 내가 있었느니라"(8:58)고 그들이 알아듣든 말든 진리를 말씀하셨고, 결국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죽고 날마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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