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전팔기의 신앙 (잠언 24:13-22)
인류역사상 가장 탁월한 과학자를 들면 에디슨, 아인슈타인, 뉴튼, 갈릴레이, 퀴리부인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 대한 유모어가 우리나라와 연관해서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 다섯 사람이 한국에 이민을 와서 살았는데 세월이 지나 모두 백수건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디슨은 취직을 못했다고 합니다. 가는 곳마다 이력서 심사에서 떨어집니다. 초등학교 졸업밖에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면접만 보면 떨어집니다. 발명품도 많지만 특허심사할 때 학력 때문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백수가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수학은 잘 하는데 수능시험점수가 안나옵니다. 한 가지만 잘해서 안됩니다. 그래서 대학을 못 가서 백수가 되었습니다. 뉴튼은 아주 조직적인 두뇌를 가진 과학자인데 이 사람이 쓴 논문을 써 줄 대학교수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백수가 되었습니다. 갈릴레이는 입이 아주 날카로운 사람입니다. 하도 바른 말을 잘 하는 독설가로서 비판을 잘 하니까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백수가 되었습니다. 퀴리부인도 대단한 두뇌를 가진 여성과학자인데 아무리 취직을 하려고 해도 얼굴이 받쳐주지 못해서 안 된답니다. 성형수술을 해도 원판이 안되니까 다듬어봐도 안 되더랍니다. 그래서 이 다섯 사람이 모두 한국땅에서 백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때가 있다
칠전팔기란 말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칠전팔기란 한자 고사성어가 성경의 잠언에 있습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냥 격언으로 들으면 단순한 말입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난다는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명석하게 따지고 넘어가야 될 문제가 있습니다. 왜 의인이 일곱 번이나 넘어지는가? 사실인가? 넘어집니다. 여기 ‘의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살지라도 넘어집니다. 더 영적인 깊이 있는 말로 말하면 내가 안 넘어지면 하나님이 넘어뜨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안 넘어질 것 같이 방심하고 있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넘어뜨립니다. 사탄의 올무에 걸려 넘어지는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넘어뜨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넘어집니다.
잠언 3장에서 “모든 만물이 때가 있고 기한이 있는데 넘어질 때가 있고 일어날 때가 있고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고 말을 합니다. 의인이냐, 악인이냐가 아니라 다 넘어진다고 했습니다. 공산당은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한다’라고 주장합니다. 동기와 과정과 본질을 묻지 않습니다. 결과를 가지고 방법을 정당화해 버립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는 삼백만명이 몰살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묻지 않습니다. 오늘의 결과를 가지고 삼백만명의 그 처참한 죽음에 대해서 국가의 법이 따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공산당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넘어지든 일어나든 넘어졌으니까 문제가 되고 일어났으니까 문제가 안된다 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따지고 나옵니다.
도덕성의 중요성
첫째는 도덕성의 문제입니다. 넘어지더라도 덕이 되는 사람이 있고 일어나도 부덕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넘어지든 일어나든 덕이 따라야 됩니다. 도덕성이 따라야 됩니다. 넘어져도 덕이 없고 일어나도 덕이 없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새로 자신을 가다듬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넘어졌다는 것을 문제시하거나 일어났다는 것을 문제시하는 분이 아닙니다. 넘어지든 일어나든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덕입니다. 근덕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교회론을 이야기하면서 결론이 “모든 일을 행하되 덕을 세우기를 힘쓰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과가 좋다고 해서 덕을 무시해 버리면 안됩니다. 부덕했던 그것을 정리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원인이 원인의 문제를 따지는 것입니다. 즉 원인의 문제를 청산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원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은 본인이 청산을 해야 됩니다. 옆에서 지도해주고 권면해 주는 것은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잘못된 원인은 내가 청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수들을 교도소에 가둔다고 다 좋은 사람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위가 국가의 법에 위배되는 것은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교도소에 수감이 됩니다. 교도소에 수감이 되어 자기 잘못을 정말 청산하고, 각성하고 나오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되는데 아무리 잡아넣어도 그 안에서 더 악심을 품고 더 완악한 상태로 나오는 사람은 더 나빠지는 것입니다. 교도소에 집어넣는 것은 네가 반성하고 새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반성이 안됩니다. 스승이 가르치고 또 우리가 설교를 들으면서 내 자신을 돌아보고 하는 이 역할은 우리에게 있지만 내 안에 있는 약점이나 내 안에 있는 문제에 대해서 그것을 청산하는 것은 본인이 하는 것입니다. 본인이 안 하면 아무도 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넘어져도 일어나도 결과를 가지고 방법을 정당화하는 공산주의 논리는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동기와 과정에서 도덕성이 성립되어야 합니다. 넘어진 원인을 고쳐야 됩니다. 청산해야 됩니다. 안 그러면 계속 넘어집니다.
제가 잘 아는 한 분을 만났는데 아주 놀랍게 외모가 변했습니다. 상당히 몸도 날씬해지고 모든 면에 좋아졌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변합니까?”하니까 의사에게 가서 검진을 받았는데 평소에 몰랐던 결과에 대해서 의사가 당부를 했던가 봅니다. ‘당신은 지금 최소한 일년 안에 10㎏을 빼야 된다, 당신 몸을 이대로 지탱하다가 앞으로 큰 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1년 안에 10㎏을 빼고 그 상태를 유지하도록 해라’ 그 경고를 받고 이 사람이 다이어트를 한 것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원인을 알았으면 그 원인을 제거해야 됩니다. 원인을 알면 거기에 대해서 대비를 해야 됩니다.
두 가지 자세
본문에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17절에 “네 원수가 넘어질 때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인 감정은 원수가 넘어지면 얼마나 통쾌합니까? 네게 감정이 안 좋은 사람이 넘어지면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그러나 오늘 말씀은 굉장히 교훈적인 메시지가 있습니다. 원수가 넘어질 때 기뻐하지 말아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원수가 넘어질 때 기뻐하는 기쁨은 내 마음을 점점 굳어지게 만듭니다. 여러분이 순수한 즐거움을 가져야 마음이 부드러워지지 원수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통쾌한 것은 생리적으로는 무엇인가 좋아질지 몰라도 우리의 영적 상태는 굳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가 넘어지거든 불쌍히 여겨주고 기도해주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또 19절을 보면 정 반대입니다.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악한 자가 잘 될 때 부러워하지 말라, 이것도 우리가 얼마나 한계를 못 지킵니까? 예수야 믿든 말든 성공한 사람을 보면 얼마나 부러운지 솔직하게 로또복권에 당첨된 사람을 부러워 안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악인이 잘 될 때 부러워하지 말라는 이것도 참 어렵습니다. 신앙을 떠나서 남이 잘 되는게 얼마나 부럽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하느냐? 그 안에 메시지가 있습니다. 남이 잘 될 때 부러워하는 것은 잘못은 아니지만 자꾸 그런 감정을 가지면 욕심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습관화하지 말아야 됩니다. 오히려 내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희망을 가지고 비전을 가지고 내 자신을 한번 가다듬는 비전의 사람으로 계기를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욕심으로 살아가야 하는게 아니라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야 됩니다.
악인이 넘어질 때 불쌍히 여기고 기도해 주라고 했습니다. 악인이 잘될 때 내가 꿈을 가지고 노력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가는 자세를 가다듬으라는 말입니다. 칠전팔기는 이 자세가 바로 된 사람이라야 가능합니다. 아무나 칠전팔기가 안됩니다. 한번 넘어지고 끝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세가 틀렸기 때문입니다. 자세가 틀린 사람은 한번만에 끝나는 사람이 많고 조금 덜한 사람은 두 번쯤은 일어납니다. 조금 덜한 사람은 세 번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끝까지 못 일어나는 것은 자세가 틀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살면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날 줄 압니다. 여기 ‘일곱 번’이라는 말은 횟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곱 번 넘어진다는 말은 히브리적 개념에서는 ‘몇 번이 넘어질지라도’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넘어짐은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이 몇 번이나 넘어질지라도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넘어지는 것을 보면 악인이 형통한 그것을 보고 넘어지기도 하고, 악인이 잘못되는 그것을 보고도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넘어짐에 대한 교훈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악인이 넘어졌다고 내가 기뻐하고 살면 나도 넘어집니다. 악인이 형통한 것을 내가 자꾸 부러워하고 살면 거기서 나도 또 넘어집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내가 비전을 가지고 노력하고 불쌍히 여기면서 기도해주는 자세로 돌아가야 나도 안 넘어진다는 말입니다.
실패는 극복되어야
미국의 전설적인 홈런타자 베이브 루스는 그의 선수생활 가운데 714개를 쳤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깨어지지 않는 기록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스트라익 아웃을 1330회, 714개의 이 홈런을 때리기 위해서 1330번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스트라익 아웃만 당한 것입니다. 그 외의 것은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스트라익 아웃을 당하면 선수가 비참해집니다. 스트라익 아웃을 당하고 걸어 들어가는 선수는 얼마나 처량한지 모릅니다. 그 처량한 수치스러운 모습을 1330번 겪고 나서 714개의 홈런 영광이 왔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살이가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긴장하고 몸부림치지 마십시오. 의인도 일곱 번 넘어진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일어나지 못하는게 문제입니다. 넘어지십시오. 일어나면 됩니다. 십자가를 졌다고 절망이 아닙니다. 부활의 아침이 우리 앞에 있으면 십자가의 절망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우리 주변에 넘어진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내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벌써 안수받은 지 30년이 다 되었습니다. 목사된 지 30년이 되고 나니까 이제는 교단 안에서 피할 수 없는 중진이 되고 어른의 입장에서 몸이 조심스러워진다는 것입니다. 목회의 고비가 없었던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목회의 고비가 다 있습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다 위기가 있습니다. 괴로워서 잠을 못 자는 그런 고통의 시간들이 목회자마다 다 있습니다. 고목의 속이 썩은 것처럼 목회자에게 그런 상처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인들도 상처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고비를 넘어서지 못하는 목회자들이 있고 고비를 넘어선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고비를 넘어선 목회자들은 그 나름대로 자리를 지키는데 그 고비를 넘지 못하는 분들은 지금 대단히 어려운 자리에 있습니다. 도와주어도 불능인 자리에 빠진 분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넘어지는 것은 모든 인생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어나야 합니다. 의인은 넘어져도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일어나는 그 자세가 중요합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만하고 있으면 못 일어납니다. 악인의 넘어짐을 통쾌하게 생각하고 있으면 못 일어납니다. 우리의 자세가 발라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철부지 제자들을 주님은 참아주셨습니다.
맺는 말
한 교회에서 전도사 시절부터 38년을 시무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우연히 만나 식사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옆의 한 분이 “목사님, 한 교회에서 38년 대단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그 목사님이 하는 말, “내가 이렇게 지루한데 교인들은 얼마나 지루했겠나?”라고 합니다. 본인도 지겹다고 합니다. 내가 떠나 주어야 교회 안에 새 바람이 불겠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자기를 보고 참아준다고 얼마나 속이 썩었겠나 라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목사도 교인보고 속 썩고, 교인도 목사 때문에 속 썩잖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극복하면 됩니다. 우리 모두가 그 지혜를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넘어져서 애처로운 순간은 잠시라도 다시 일어난 그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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