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들아, 주님을 기뻐하여라 시97:1-12 (2014/11/16) [주님께서 다스리시니, 온 땅아, 뛸 듯이 기뻐하여라. 많은 섬들아, 즐거워하여라.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러쌌다. 정의와 공평이 그 왕좌의 기초다. 불이 그 앞에서 나와서 에워싼 대적을 불사른다. 그의 번개가 세상을 번쩍번쩍 비추면, 땅이 보고서 두려워 떤다. 산들은 주님 앞에서, 온 땅의 주님 앞에서, 초처럼 녹아버린다. 하늘은 그의 의로우심을 선포하고, 만백성은 그의 영광을 본다. 조각된 신상을 섬기는 자는 누구나 수치를 당할 것이며, 헛된 우상을 자랑하는 자들도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모든 신들아, 주님 앞에 엎드려라. 주님, 주님이 공의로우심을 시온이 듣고 즐거워하며, 유다의 딸들이 기뻐 외칩니다. 주님, 주님은 온 땅을 다스리는 가장 높으신 분이시고, 어느 산들보다 더 높으신 분이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악을 미워하여라. 주님은 그의 성도를 지켜 주시며, 악인들의 손에서 건져주신다. 빛은 의인에게 비치며,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는 즐거움이 샘처럼 솟을 것이다. 의인들아, 주님을 기뻐하여라.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감사를 드려라.] •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다스리시니, 온 땅아, 뛸 듯이 기뻐하여라. 많은 섬들아, 즐거워하여라"(1)라는 부름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도무지 기뻐할 일, 즐거워할 일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수능 시험을 앞두고 압박감을 못 견딘 한 학생이 목숨을 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은 다가오는 겨울이 암담하기만 합니다. 전월세 부담이 커져서 도무지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운 이들이 많습니다. 거리로 내몰린 이들의 시름이 더욱 깊어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거라는 낙관적 전망이라도 있어야 힘차게 살아갈 텐데, 삶이 갈수록 척박해질 거라는 데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욕망은 커지고 있는데, 그것을 실현한 방도는 보이질 않는 형국입니다. 이렇게 암담할 때일수록 다른 삶을 상상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소설가 임레 케르테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담은 소설 <운명>에서 강제 수용소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감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세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영원히 잠을 잘 수 있게 해주는 자살입니다. 작가는 최소한 단 한번이라도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거라고 말합니다. 둘째는 탈출입니다. 하지만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다시 잡혀온 사람들은 '만세! 내가 다시 왔다'라고 쓴 표지판을 목에 건 채 사람들 앞에게 조리돌림을 당하다가 교수형에 처해지곤 했습니다. 셋째는 가능성이 가장 적은 방법이었는데 작가는 이것을 자기에게 적용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 가운데 있는 상상력을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수 생활을 하면서도 상상은 자유였던 것입니다. 삽질과 곡괭이질을 바삐 하면서도 상상의 나래를 펼쳐 그 현장에 없는 것처럼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대개 집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지내는 날을 상상하면 마음에 느긋함이 찾아왔습니다. 이른 기상, 학교, 불쾌감, 맛없는 점심식사 등 좋지 않은 날도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 상상의 힘이 고단한 강제 수용소의 삶을 버티게 해주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폭압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주님은 제국이 만들어 사람들에게 주입한 세계관, 즉 강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을 뒤집으셨습니다. 약한 자들이 서로를 긍휼히 여기고, 강한 자가 약한 자들을 기쁨으로 섬기는 세상의 꿈을 이 세상에 가져오셨다는 말입니다. 그 꿈은 약한 듯 보여도 약하지 않습니다. 옛 사람도 '부드럽고 약한 것이 딱딱하고 강한 것을 이기게 마련이다'(柔弱勝剛强, 노자36장), '하늘 아래 가장 여린 것이 하늘 아래 가장 단단한 것을 부린다'(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 노자43장)고 말했습니다. 무기나 힘으로 사람을 억압하거나 형벌로 다스리려고 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사랑과 온유함으로 사람을 보살피는 이들은 임의로 부는 성령을 닮은 사람입니다. 새로운 세상은 그런 이들을 통해 열립니다. 지금 우리 현실은 홍수 이전의 세계를 닮았다 해도 우리는 '주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인은 온 땅과 섬들을 향해 '뛸듯이 기뻐하라'고,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이 땅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11:1)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다스리심을 확고히 믿고 기뻐할 때 살아갈 힘이 생깁니다. • 정의와 공평 시인은 하나님의 위엄을 시각적으로 묘사합니다.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러쌌다." 이것은 하나님의 실체 혹은 모습은 인간의 오성으로 파악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명백합니다. 시인은 은유적인 언어를 통해 주님의 다스리심의 요체를 드러냅니다. "정의와 공평이 그 왕좌의 기초다." '구름과 흑암' 그리고 '정의와 공평'이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정의라는 말은 인간의 허물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옳으심을 말하고, 공평은 엄중한 심판을 이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참회하는 이들을 따뜻하게 감싸고 용서하시는 분이시지만, 잘못은 준엄하게 꾸짖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우리에게 살아갈 힘이 됩니다. 선하게 살다가 어려움을 겪는 이들은 감싸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대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이들에게는 분명한 심판이 있습니다. 눈앞의 현실이 암담하다 해도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위엄있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불이 그 앞에서 나와서 에워싼 대적을 불사른다. 그의 번개가 세상을 번쩍번쩍 비추면, 땅이 보고서 두려워 떤다."(3-4) 3절에서는 '불'과 '번개'가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시인은 고대 가나안과 메소포타미아 종교에서 사용되던 신에 대한 표상을 그대로 끌어다 쓰고 있습니다. 대적을 무찌르고 여러 신들과 우주의 왕으로 등극하는 신의 모습은 일쑤 불과 번개를 동반하곤 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는 '구름을 모으는 자' 혹은 '손에 번개를 들고 있는 자'입니다. 번개처럼 강력한 무기가 없습니다. 히브리 시인도 번개를 하나님의 도구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에서 '불'과 '번개'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시인은 주님 앞에서 산과 온 땅이 초처럼 녹아버린다고 노래합니다. 우리는 대기 중에 있는 음전하가 지상에 있는 양전하를 향해 떨어져 내릴 때 번개가 친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개가 치는 날이면 괜히 두려워집니다. 고대인들이 느낀 공포는 이보다 훨씬 더 컸을 겁니다. 5절에서는 '산들'과 '온 땅'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습니다. 단순한 자연물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지만 산들은 인간 세상에서 우뚝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지위고하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제 아무리 높은 산이라 해도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초처럼 녹아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사람들을 깔보고, 함부로 대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 이들은 하나님의 화난 얼굴 앞에 서야 합니다. 선거 때면 납작 엎드렸다가 선거가 끝나면 노골적으로 국민들을 무시하면서도, 필요하면 언제나 국민의 뜻이라는 말장난 뒤로 숨어버리는 정치인들, 섬기는 이의 본분을 저버리고 특권을 누리는 데만 발밭은 종교인들은 특히 엄중한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 기쁨과 즐거움 6절은 4절의 변주입니다. "하늘은 그의 의로우심을 선포하고, 만백성은 그의 영광을 본다". 장엄한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관념이나 추상이 아닌 현실로 체험할 때, 하나님의 위엄 앞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탄 앞에 절을 하고 얻은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은 어느 날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고통 받고 있는 이웃들은 아랑곳없이 홀로 자족하며 만족하는 사람들, 욕망의 바벨탑을 쌓고 있는 이들은 어느 날 자기들이 신기루를 좇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분주함 속에서는 볼 수 없는 생의 진실이 있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 속에 불안을 주입하려 합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시대이기에 '돈'이 아주 오만한 자세로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 있습니다. 돈을 따라다니다 보면 우리 마음은 황폐해지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공중의 새를 보아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마6:26, 28) 하고 권고하셨습니다. '보아라' 혹은 '살펴보아라'는 깊이 묵상하고 성찰해보라는 말입니다. 당장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발걸음을 조금 늦추고 그동안 눈길조차 주지 않던 것을 좀 자세히 바라보십시오. 숲을 찾아도 좋겠고, 가까운 공원을 걸어도 좋겠습니다. 그도 어려우면 자연 다큐멘터리나 우주의 신비에 대한 영상이라도 보십시오. 먹고 사는 일과 무관한 일을 위해 시간을 내보십시오. 세계의 아름다움에 집중할 수 있을 때 우리 속에 있는 불안의 인력은 줄어듭니다. 이어령 선생님의 책을 읽다가 참 공감이 되는 말씀과 만났습니다.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던 뉴턴을 잘 아시지요? 그를 두고 이어령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뉴턴은 떨어지는 사과만 봤지, 사과가 무슨 힘이 있어서 거기까지 올라갔는지를 설명하지 못했습니다."(<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 포이에마, p.26) 세상에는 높이 있는 사과를 떨어지게 만드는 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작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면서 하늘 높이 자라 열매를 맺게 하는 생명력은 중력보다도 큽니다." 바로 그것이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일상의 번잡함에서 잠시 물러나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고,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을 마음을 다해 바라볼 때 우리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던 중력은 줄어들고 은총의 가벼움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런 은총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밑바닥으로 자꾸만 끌어내리는 것들을 시인은 '조각된 신상' 혹은 '헛된 우상'(7)이라고 말합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는 수치를 당할 것이고, 그것을 자랑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상은 '있는 듯 보이지만 실체가 없는 것', 곧 '헛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돈도 명예도 권세도 이데올로기도 출세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대중 문화계의 스타들을 우상으로 섬깁니다. 또 어떤 이들은 자기들이 줄을 대고 있는 권력자를 우상으로 섬깁니다. 좋아하고 즐기는 것은 괜찮지만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1933년 베를린의 라디오 방송 설교에서 추종자들의 우상이나 거짓 신이 되기를 거부하고 단호히 선을 긋지 않는 자는 분명 잘못된 길로 이끄는 지도자이며 그런 지도자를 동경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물론 그가 염두하고 있었던 것은 히틀러였습니다. 자신을 과도하게 섬기도록 하는 이들도 우상이 되기 쉽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이 사실을 명심해야 지치지 않고 고통 속에서도 생을 경축할 수 있습니다. • 빛의 파종 주님이 다스리시는 세계에 대해 말한 시인은 이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권고합니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여라. 주님은 그의 성도를 지켜 주시며, 악인들의 손에서 건져주신다."(10) 악을 미워하라는 말이 매우 강력합니다. '악인을 미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악과 악인을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며칠 전 한 지인이 제게 아주 진지하게 세상에는 정말 '악인'이 존재하는 것 같다면서 기독교 신앙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고통에 대해 공감할 줄도 모르고, 생명에 대해 냉소하는 사람들, 자기와 생각이나 지향이 다른 이들을 마구 모욕하고 공격하는 이들 때문에 적잖게 속이 상한 듯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처음부터 악인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시점부터 어긋난 길로 접어들었고, 그 어긋남이 습성이 되고 만 것일 뿐입니다. 악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을 존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파괴하려는 이들입니다. 평화로운 삶이 불가능하도록 세상을 자꾸만 조각내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개인일 수도 있고 조직일 수도 있고 국가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들까지도 사랑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직 그럴 정도로 품이 넓지 못합니다. 그런 이들을 보면 속상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잘못을 잘못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과의 싸움에만 골몰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의 따뜻한 연대를 만들어가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탈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탐욕과 폭력의 난바다 한 복판에 나눔과 돌봄과 평화의 섬, 우정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자는 말입니다. 악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악을 미워할 때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말합니다. 주님께서 성도들을 지켜주신다고. 악인들의 손에서 건져주신다고. 이 말씀에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정말 그럴까?' 자꾸만 복잡하게 계산하지 말고 단순하게 믿을 때 우리 속에 힘이 생깁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고,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이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마음 깊이 체험했기에 시인은 이렇게 단호하고도 확고하게 권고합니다. "빛은 의인에게 비치며,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는 즐거움이 샘처럼 솟을 것이다. 의인들아, 주님을 기뻐하여라.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감사를 드려라."(11-12) '빛은 의인에게 비친다'는 말은 '의인에게 빛이 심겨진다'는 뜻으로도 새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 때 우리 속에 빛이 파종됩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그 빛은 기쁨이고 즐거움입니다.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한 이들을 기쁨과 감사의 세계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삶은 여전히 힘겹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날마다 한숨과 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두 발로 대지를 딛고 일어나 뚜벅뚜벅 길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걸어가는 발자국마다 정의와 공평이 깃들어야 합니다.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함으로 우정과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갈 용기를 내십시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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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4년 11월 16일 12시 05분 33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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