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은혜의 불빛 앞에 서다 -빌4:10-13

by 【고동엽】 2022. 7. 6.
은혜의 불빛 앞에 서다
빌4:10-13
(2014/11/2, 추수감사절)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지금 다시 일어난 것을 보고,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사실, 여러분은 나를 항상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나타낼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차마 감사한다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추수감사주일을 앞두고 참 심란한 한 주를 보냈습니다. 감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데, 차마 '감사합니다' 하고 고백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감사한 일이 왜 없겠습니까? 개인적으로든 우리 공동체적으로든 우리는 참 많은 은혜를 입고 살았습니다. 톺아보면 그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나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마 감사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가슴이 무너져 내린 이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로 세월호 참사가 난지 200일이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날을 이미 잊고 있지만, 그 날 이후 마치 세상에서 유배된 것처럼 죽음과 슬픔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을 생각하면 차마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지난 4월에도 소개한 적이 있는 시입니다만 박노해 시인의 <감사한 죄>가 자꾸만 떠오릅니다. "새벽녘 팔순의 어머니가 흐느끼신다"는 구절로 시작되는 이 시는, 어머니가 감내해온 인고의 세월을 보여줍니다. 어머니는 젊어서 홀몸이 되어 온갖 노동을 하며 다섯 자녀를 키워내셨습니다. 낯선 서울 땅에 올라와 노점상을 하며 이리저리 쫓겨다니고, 여자 몸으로 공사판을 뛰어다니며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자식들이 환경에 좌절하지 않고 바르게 자라준 것이 늘 고마웠습니다. 큰아들과 막내는 성직자로 하나님께 바쳤고, 시인 내외는 민주 운동가로 나라에 바치고, 어머니는 감사기도를 바치며 살아왔습니다. 리어카 노점상을 하다 잡혀온 당신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준 단속반원들, 몸 약한 당신을 많이 배려해준 공사판 십장들, 또 끊이지 않고 이어진 파출부 일자리를 생각할 때 감사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눈도 귀도 어두워진 어머니가 새벽기도 중에 나직이 흐느끼십니다. 나이 팔십이 되고 보니 당신의 숨은 죄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단속반에 끌려가 벌금을 물고
일거리를 못 얻어 힘없이 돌아설 때도
민주화 운동 하던 다른 어머니 아들딸들은
정권 교체가 돼서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어도
사형을 받고도 몸 성히 살아서 돌아온
불쌍하고도 장한 내 새끼 하면서
나는 바보처럼 감사기도만 바치고 살아왔구나
나는 감사한 죄를 짓고 살아왔구나
 
아, '감사한 죄'라는 말 앞에서 숨죽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여기는 이의 마음이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에게는 우리 말고 다른 자녀들도 많습니다. 그 자녀들이 겪는 아픔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이 미어집니다. 그런데 한 부모의 자식들인 우리는 별일 없이 사는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어떨까요? 시인의 어머니는 그 하나님의 마음과 깊이 접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아프심이 고스란히 느껴져 흐느끼는 겁니다. 그 어머니는 슬픔의 강을 타고 흐르고 흘러 마침내 하나님의 마음에 당도하신 것 아닐까요? 팔순의 노인은 남이야 어찌되든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마음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죄가 되는지를 이렇게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 주인이 누구인가를 깊이 아는 마음
그러면 세상에 슬픔이 있는 한 감사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우울증에 빠지고 말 겁니다. 진정한 감사를 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번 주간에 김현승 시인의 <감사하는 마음>을 여러 번 되풀이 해 읽었습니다. 시인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다수운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노래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언제나 은혜의 불빛 앞에 있다'고도 노래합니다. 농부들이 기쁨으로 거두는 땀의 단들보다도, 파도를 헤치고 돌아온 저녁 항구의 배들보다도, 산위에서 내려다보는 주택가의 포근한 불빛보다도 더욱 풍성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받았기에/누렸기에/배불렀기에/감사하지 않는다"는 대목은 하박국의 이런 노래를 연상시킵니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합3:17-18). 시의 마지막 연을 읽으며 저는 무릎을 치며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 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내가 누구인가를 그리고主人이 누구인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주인이 누구인지를 깊이 아는 이만이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답니다. 감사는 앎에서 나옵니다. 돈을 내고 배워서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확연대오廓然大悟, 곧 깨달음입니다. 나의 작음을 알고, 그분의 크심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감사의 뿌리입니다. 몇 해 째 제 마음에 저릿하게 다가오는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나의 달려갈 길 다가도록/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나도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살다보면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일들을 많이 겪습니다. 절망과 좌절의 늪 속에 빠져들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오늘 아침에 어느 지인이 SNS에 쓴 글을 읽었습니다. 세계적인 성악가인 호세 카레라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절정기인 40대 초반에 백혈병에 걸렸습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그는 하나님께 절박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살려주시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말입니다. 힘겨운 화학치료를 견뎌야 했지만 그는 결국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재산을 다 정리해서 백혈병 재단을 만들고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고통과 시련을 통해 그는 재물과 명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고,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곡을 호세 카레라스가 부르는 장면을 상상해보았습니다. 절로 은혜가 되었습니다.

• 감옥에서 기뻐하다
바울 사도는 참으로 위대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본다면 결코 행복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 그의 삶은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따돌림 당하고, 쫓기고, 매 맞고, 비난받고, 죽음의 위협에 노출된 채 살았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전15:31)라는 그의 고백은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생을 비극으로 규정짓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함으로 자기 삶을 돌아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15:10)

자기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일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감사함으로 돌아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곳이 로마였는지 가이사랴였는지 에베소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앞날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함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을 것입니다. 외로운 자기 처지를 깊이 공감하고 지지해주는 이가 필요한 순간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정서적 지원과 더불어 꼭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곤 했습니다. 이 교회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중에 세운 것인데, 유럽에 세워진 첫 번째 교회였습니다(행16:11-15 참조). 그는 이런저런 소요사태에 휘말려 빌립보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은 복음의 빚진 자의 심정으로 기꺼이 바울의 후원자 노릇을 했습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자기의 형편을 알리고, 그들이 보내 준 사랑의 선물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그들을 신앙의 바른 길로 인도하기기 위해 기록한 서신입니다.

사람들은 빌립보서 4장에 나오는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13)라는 구절에 밑줄을 칩니다. '할 수 있다'라는 말에 사람들은 크게 반응합니다. 번영의 복음을 가르치는 이들이 늘 인용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사는 게 팍팍하고, 불확실함이 증대되는 세상에서 '할 수 있다'는 말을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붙들고 싶어합니다. '넌 못 해'라는 말보다는 '넌 할 수 있어'라는 말에 감격합니다. 하지만 앞의 구절을 빌립보서의 맥락에서 살펴보면 조금 뜻이 달라집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일어난 것을 보고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였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들은 늘 바울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그것을 표현할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바울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기꺼이 후원자가 될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받은 도움에 대해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바울은 자칫하면 그것이 빌립보 교인들을 오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의 감사 인사를 오해하여 행여 그들 속에 시혜를 베푸는 자의 우월의식이 생긴다면 그보다 위험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행 혹은 자선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근사한 존재로 치장하는 도구가 되는 순간 선행이나 자선은 오히려 영혼의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자선 행위를 숨겨두어라"(마6:3b-4a) 하고 교훈하셨던 것입니다.

•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우다
바울은 자기가 그들에게 감사하는 것은 궁핍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어떻게 보면 오만하게 보일 정도로 당당하게 말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11-12)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바울의 이 말은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현실에 무조건 순응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늘 불만족 속에 사는 까닭은 마음속에 만족의 기준치를 정해놓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기준이 늘 가변적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욕망은 '이제는 됐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 또 다른 욕망이 떠오르게 마련입니다. 욕망은 카프카의 소설 <성>처럼 아무리 다가가도 늘 그만치 물러서곤 합니다. 그렇기에 욕망에 바탕을 둔 삶은 진정한 의미의 만족이 없습니다.

바울이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의지적인 노력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저절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자꾸만 뭘 먹어도 헛헛증을 느끼는 이들이 있습니다. 위胃가 비었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에 안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된 이들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육체의 욕망, 눈의 욕망,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요일2:16)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수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늘 비장하거나 금욕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혼자만의 기쁨이 아니라 더불어 누리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잇대어 있는 이들은 삶을 선물로 받아들입니다. 좋은 일만 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만나도 그 속에 숨겨진 선물을 찾아내기 위해 애씁니다. 아니, 그것을 선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바울이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본래적인 것과 비본래적인 것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편리함에 길들여진 몸과 마음이 얼마나 외적 조건에 좌지우지 되는지를 잘 압니다. 더우면 덥다고, 추우면 춥다고 법석을 떱니다. 어지간한 거리는 차를 타고 가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깁니다. 조금만 불편해도 불평을 토해냅니다. 편리함과 안락함에 중독된 이들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이미 길들여진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켜 '길손과 나그네'라고 말했습니다(히11:13). 그들은 하늘의 고향을 찾는 이들입니다. 하늘 고향을 찾는 이들은 자기 욕망 위에 집을 짓지 않습니다. 자기 삶을 누군가를 위한 선물로 내줍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4:13)는 구절은 '그도 할 수 있고, 너도 할 수 있으니, 나도 할 수 있다' 류의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류의 사고에서 강조되는 것은 자기 강화의 욕망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것은 정반대입니다. 너를 위해 나를 내주는 삶 말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가 아니겠습니까?

김현승 시인의 시구대로 감사하는 마음은 나를 아는 마음이고,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하지만, 우리를 더 멋진 삶으로 불러주신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고통받는 이들의 삶의 자리에 초대해주신 주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의 두레박을 깊이 내려 은총의 샘물을 길어내는 사랑의 승리자들이 되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14년 11월 02일 11시 55분 17초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