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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아름다운 손 -막6:1-6

by 【고동엽】 2022. 7. 6.
아름다운 손
막6:1-6
(2014/11/9)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서 고향에 가시니, 제자들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어서,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 예수께서는 다만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 주신 것 밖에는, 거기서는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 흙투성이 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입동 절기가 되었습니다. 옛날 시골에서는 이맘때 해야 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김장은 물론이고 겨우살이 준비에 바빴습니다. 장다리무와 고구마를 얼지 않게 간수하는 일로부터, 방고래 구두질(방고래에 모인 재를 구둣대로 쑤시어 내는 일), 바람벽 맥질, 창호문 바르기, 쥐구멍 막기, 수숫대로 외양간 둘러주기, 겨울을 날 수 있는 땔감 마련하기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노동이 거의 사라져 우리는 겨울을 겨울답게 살아내지 못합니다. 계절의 은총을 누리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이 계절은 또 만물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때입니다. 만물귀근萬物歸根이라지요? 나뭇잎은 땅에 떨어져 흙을 기름지게 하고, 회귀성 어종들은 모천으로 돌아가 알을 낳고 자신의 몸을 물결 위에 내려놓습니다. 철새들도 먼 곳으로 날아갑니다. 이런 때이기에 '돌아오라'는 주님의 부름이 더욱 크게 들려옵니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행장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버릴 것을 버려야 길을 떠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떠남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세상에 팔렸던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 영혼이 주님과 더 깊이 접속될 수 있기를 빕니다.

지난 목요일, 교회의 겨울나기를 위해 일차 김장을 했습니다. 봉사자들은 그 전전날 밭에 가서 배추와 무와 갓을 뽑고 그것을 차에 실어 옮겨왔습니다. 수요일 오후에는 배추를 절이고 무를 다듬느라 애를 많이 썼습니다. 주방에 내려가 보니까 아름다운 원로 선교회의 어르신 몇 분이 오셔서 배추를 다듬고 계셨습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이 연약한 분들이었지만 교회 공동체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꺼워하셨습니다. 그분들의 손이 참 거룩해 보였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기는 이들을 통해 든든히 세워져갑니다. <전라도닷컴>이라는 잡지의 2014년 10월호 특집 제목은 '손을 만났다'였습니다. 사진작가가 여러 해 동안 남녘땅의 시장과 들판을 두루 다니면서 찍은 노인들의 손 사진 수십 장이 게재되어 있었습니다. 풀물이 들고, 거칠고, 구부러지고, 흙투성이 손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 손 사진을 바라보며 저는 아버지의 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사진에 붙인 기자의 짧은 글이 제 가슴을 울렸습니다.

"지금 막 흙무더기를 끌어다 뿌리 위에 다독거리고 난 손은 흙투성이다. 거짓말투성이, 욕심투성이, 허영투성이가 아니다. '투성이'라는 말에 '흙'이 얹어졌을 때 그 말은 거룩해진다."
"거침없이 내미는 주고자운 손(주고싶은 손). '놈(남)이 되로 주문 말로 갚어야 핀해.' 그런 마음을 가진 손. 엄니들은 늘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 계절의 편지 같은 고추 호박 단감 대추 곶감."
"내 입보다 놈의 입부터 챙겨 줌서 그라고 찌대고 사는 것이 사람이여."
"손 닿는 자리마다 푸릇푸릇 살려내는 '살림꾼'의 손. 아직 먼 것 같은 봄날을 앞당기는 '봄똥'처럼 그 모든 '아직'을 끌어당겨온 손." -배추밭
"숟가락만 들고 끼여들면 '한 식구' 되는 장터의 밥상. '숟가락만 갖고 와. 혼차 묵으문 뭔 맛이여.' 지나온 삶의 굽이굽이가 고스란히 새겨진 그 손에 담아 전하는 인정. 모두를 내 식구처럼 귀히 대접하는 둥근 밥자리." -장터 풍경

정말 아름다운 손은 마디조차 없는 곱디고운 손이 아니라 노동의 시간이 배어있는 손임을 가슴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가 살아온 내력과 그가 살아갈 미래가 보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석多夕 선생님은 '얼굴'을 '얼의 골짜기'라고 말씀하셨던 것일 겁니다. 얼굴뿐이겠습니까? 손처럼 정직하게 그 존재를 말해주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조금 엉뚱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이번 주간 예수님의 손을 묵상의 실마리로 삼아 보았습니다.

• '그 손'
갈릴리 호숫가 마을을 넘나들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이들을 고쳐주시던 예수님이 어느 날 고향 나사렛에 가셨습니다. 제자들도 동행했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은 다 놀랐습니다. 마가는 그들이 보인 반응을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1)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2)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3)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
마을 사람들은 예수를 '이 사람'(this man)이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이런 호칭을 통해 우리는 예수를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정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메시지가 그들에게 준 충격 못지않게 그들을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그 지혜의 말을 전하는 이가 '예수'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기들이 '여보게'라고 부르곤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의 입에서 지혜와 생명의 말씀이 나온다는 사실이 그저 낯설기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 나타난 기적도 그들을 당황시켰습니다. 어떻게 '그 손'(ho tekton)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 '그 손'이라는 단어가 참 중요합니다. 고향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된 예수는 망치를 들고 일하는 목수입니다. 그는 '손'으로 인식되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십자가에서 못 박힌 주님의 손만 알았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느라 손에 못이 박인 주님의 손은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노동자였습니다. 그것도 육체노동자였습니다. 주님이 고통 받는 민중의 현실에 깊이 관심을 가지셨던 것은 자신도 그 쓰라린 삶의 경험을 하셨기 때문일 겁니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Petita Plata) 성당은 위대한 건축가 가우디의 필생의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성당의 전면을 사람들은 '탄생의 파사드(façade)'라고 부릅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의 탄생 전후 이야기가 돌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유난히 제 시선을 끌었던 것은 망치를 들고 일하는 요셉의 모습이었습니다. 무심히 보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일하는 노동자의 모습이 교회에 새겨진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것이 요셉이라 해도 말입니다. 가우디는 일하는 이들의 아름다움과 노동의 가치를 그렇게 강조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예수의 손을 가리켜 '그 손'이라 말합니다. 예수님은 꽤 알려진 노동자였음에 틀림없습니다. 땀 흘리는 자리에서 바라보아야 세상이 제대로 보입니다. 책상머리에서 공부만 한 이들은 세상을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의 비유를 보더라도 주님은 민중들의 삶의 자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 호수에 배를 띄우고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 가족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여인들의 건강한 노동을 예로 들곤 하셨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머리로 배운 관념이 아니라 삶으로 체득한 진리입니다.

• 살리는 손
그런데 예수님의 손은 노동하는 손을 거쳐 살리는 손이 됩니다. 중국의 작가였던 루쉰은 장학생이 되어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작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본 영상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중국인들을 처형하는 장면이었는데, 둘러선 중국 사람들이 아무런 분노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는 만세를 부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고 육신의 병보다 정신의 병을 먼저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주님도 밑바닥 생활을 해보셨기에 세상에 가득 찬 아픔을 아셨고, 그 아픔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꿈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주님은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열병환자를 붙잡아 일으키고, 나환자의 몸에 손을 대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꼭 손을 대야만 능력을 발휘하실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굳이 그들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겪어온 쓰라린 세월에 대한 이해요 공감의 표시였습니다.

손처럼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신체 부위가 또 있을까요? 우리는 친교의 표시로 악수를 하고, 약속의 표시로 손가락을 겁니다. 공감과 이해의 표시로 상실감 속에 있는 이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헤어질 때는 손을 흔듭니다. 주님은 혐오감을 일으키는 존재로 여겨져 외면당하고, 버림받고, 심지어는 자신을 부정한 존재로 선언해야 했던 이들과 스스럼없이 접촉하십니다. 율법은 그런 이들과 접촉하면 부정하게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꺼리는 마음보다는 그들을 회복시키고 싶은 주님의 사랑이 더 컸습니다. 강은교 시인의 <당신의 손>이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당신의 손이 길을 만지니
누워 있는 길이 일어서는 길이 되네.
당신의 슬픔이 살을 만지니
머뭇대는 슬픔의 살이 달리는 기쁨의 살이 되네.
아, 당신이 죽음을 만지니
천지에 일어서는 뿌리들의 뼈.
(강은교, '당신의 손' 중)

설명하지 않아도 가슴 가득 감동이 찾아옵니다. 지금 우리 손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손길이 닿는 곳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우리 손은 거둬들이고 움켜쥐는 일에만 익숙해진 것은 아닙니까? 거절하고 밀어내는 일에만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일으켜 세우고, 북돋고, 따스하게 보듬어 안아야 합니다.

주님의 그 따뜻한 손길을 경험하고도 고향 사람들의 마음은 열리지 않습니다. 완고하기 이를 데 없는 그들의 편견 혹은 고정관념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이의 성공을 시샘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성취를 흠집 내려 합니다. 미성숙한 영혼의 특색입니다. 함께 기뻐하고 사심 없이 경축해 줄 수만 있어도 우리 영혼은 성장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대할 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지 못합니다. 편견 없이 바라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문제는 나의 견해가 편견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편견임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에게 열린 자세로 다가가겠다는 결의입니다. 지금 나는 이렇게 보고 있지만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 인식은 깊어집니다. 물이 늘 흐르던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우리의 사고는 일정한 패턴에 따라 작동합니다. 우리 사고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낯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를 개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예수를 바라보았습니다. 마리아의 아들,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의 형, 우리도 아는 그의 누이들, 목수. 인간은 '사이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를 알기 위해 그들을 아는 일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예수를 다 알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편견의 세계를 교란하고 있는 예수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낯선 존재는 위험한 인물로 취급되었습니다. 마가는 고향 사람들이 예수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고향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다고 전합니다.

• 손을 보자고 하실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예언자의 운명에 대해 말합니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친척, 그리고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목을 묵상하다가 저는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나사렛 사람들을 비웃을 수 없습니다. 지금 주님이 가장 소외되고 있는 곳이 교회가 아닐까요?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예수의 삶을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를 길이라 말하면서 예수가 걸은 길을 걷지 않습니다. 예수를 진리라 말하면서도 예수 아닌 다른 것들을 삶의 중심으로 삼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몸이라 일컬어지는 교회에서 배척받고 계십니다. 주님이 '그 손'으로 보살피셨던 이들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화려한 예배당, 안락한 시설이 제공될수록 주님이 머무실 자리는 줄어듭니다. 종교성은 넘치지만 참 신앙은 부족합니다. 값싼 은총에 탐닉하는 이들은 많지만 제자로 살기 위해 대가를 치르려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자기의 비루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려는 이들은 많지만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주님은 지금, 당신의 손과 발이 되어줄 이들을 찾고 계십니다. 누워있는 길을 일어서는 길로 바꾸는 손길, 머뭇거리는 슬픔의 살을 기쁨의 살로 바꾸어내는 손길 말입니다. 먼데 있는 이들을 돕기 어렵거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의 슬픔이라도 어루만지십시오. 그들의 짐을 나누어 지기 위해 몸을 낮추십시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은 우리의 손을 보자고 하실 것입니다. 그 손이 부끄럽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우리 손을 살리는 손으로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손이 아름답게 변화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4년 11월 09일 11시 58분 3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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