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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울려 퍼진 노래 -계5:6-14

by 【고동엽】 2022. 7. 6.
하늘에 울려 퍼진 노래
계5:6-14
(2014/11/23)

[나는 또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가운데 어린 양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것과 같았습니다. 그에게는 뿔 일곱과 눈 일곱이 있었는데, 그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그 어린 양이 나와서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그 두루마리를 받았습니다. 그가 그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을 때에,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가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히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어린양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향은 곧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그들은 이런 말로 새로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은 죽임을 당하시고,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가 되게 하시고,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 나는 또 그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를 보고, 그들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수천 수만이었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권세와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또 그들 가운데 있는 만물이, 이런 말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께서는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영원무궁 하도록 받으십시오." 그러자 네 생물은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서 경배하였습니다.]

• 예수는 우리의 왕이신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로서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빌라도는 자기 앞에 끌려온 예수님께 힐문하듯 물었습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요?" 주님은 대답은 간결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였소"(막15:2). 그 후에는 굳게 입을 다무셨습니다. 마가는 주님이 군인들에게 조롱을 당하시던 모습을 보도합니다. 병사들은 예수님을 총독 공관으로 끌어가서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운 뒤 "유대인의 왕 만세!" 하면서 저마다 인사를 했습니다. 갈대로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고, 무릎을 꿇어 경배했습니다. 주님은 조롱받는 왕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슬픔과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무죄한 사람을 어찌 이리 다룰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인간의 무지와 오만과 증오는 유구합니다.

그런데 문득 마치 내 가슴을 관류하듯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에서 주님이 저런 대접을 받고 계신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부르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예수 우리 왕이여 이곳에 오셔서 보좌로 주여 임하사 영광을 받아주소서 주님을 찬양하오니 주님을 찬양하오니 왕이신 예수여 오셔서 좌정하사 다스리소서". 주님은 우리 삶 속에서 정말 왕 대접을 받고 계십니까? 입으로는 왕이라 하면서도 하인처럼 부려먹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부인에 이르지 못했고, 십자가는 더더군다나 지기 싫어합니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하고 찬송가를 부르지만 우리는 정반대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희롱하던 빌라도의 군인들과 우리의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참회하는 마음으로 말씀 앞에 엎드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어린 양
요한계시록 4장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천상의 예배 광경을 보여줍니다. 하늘에는 보좌에 앉으신 분이 계시고, 그 주위로 스물네 장로와 앞뒤에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이 도열하여 서서 밤낮 없이 주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5장에 이르러 4장에서는 소개되지 않았던 한 존재가 등장합니다. 죽임을 당한 것과 같은 어린 양입니다. 우리는 요한공동체가 주님을 지칭하기 위해 '어린 양'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앞을 지나가고 있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요1:36). 유목민으로 살았던 히브리인들은 메시야를 표상하기 위해서 양의 이미지를 사용할 때가 많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제2이사야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는 메시야적 존재를 이렇게 표상하고 있습니다.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53:7)

하나님의 보좌 옆에 있는 어린 양은 몸에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미움과 폭력에 의해 찢기고 상처 입은 어린 양이 하늘 한 복판에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속합니다. 그는 무기력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연약함과 상처입음이 세상을 구원합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상처와 아픔은 어린 양의 상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니, 주님은 그것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히2:18)라고 말했습니다. 브레넌 매닝은 같은 사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역사의 골짜기 위에 구름처럼 드리워 있는 마음의 고통 가운데서 예수께서 이해하지 못하실 고통은 없다. 예수님은 당신의 존재 안에서 모든 이별과 상실, 슬픔으로 갈기갈기 찢겨진 마음, 시대의 통로마다 흘러 다니는 모든 애도의 흐느낌을 느끼신다."(<사자와 어린양>, 복있는사람, p.192-3)

세상의 고통에 무감각하거나 무관심한 이들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상처와 아픔을 당신의 고통으로 여기십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위엄 있는 심판자이기도 하십니다. 요한은 어린 양에게는 뿔 일곱과 눈 일곱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뿔이란 히브리 성서에서 충만한 힘이나 왕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곧잘 동원되는 은유입니다. 일곱 눈은 세상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린 양은 위엄과 지혜로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이것을 구상적인 언어로 받아들여서 괴생물체를 상상하지 마십시오. 어린 양으로 표상되고 있는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고통에 민감하신 분인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분이십니다.

요한은 그 어린 양이 나와서,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 두루마리에는 안팎으로 글이 적혀 있고, 일곱 인을 찍어 봉하여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적힌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볼 수 있는 이는 하늘에도 없고 땅 위에도 없고 땅 아래에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그 때문에 슬피 울었습니다. 하지만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이 보좌에 앉으신 분의 손에서 그 두루마리를 받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요17:21)고 말씀하신 분이 아니라면 누가 두루마리를 받고 그 봉인을 뗄 수 있단 말입니까?

어린 양이 그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을 때에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가 거문고와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어린 양 앞에 엎드렸습니다. 요한은 그 향이 성도들의 기도라고 설명합니다. 히브리의 한 시인은 일찍이 "내 기도를 주님께 드리는 분향으로 받아 주시고, 손을 위로 들고서 드리는 기도는 저녁 제물로 받아주십시오"(시141:2) 하고 간구했습니다. 요한은 바로 이 대목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땅에서 올라가는 기도는 어떤 것들이었을까요? 엄혹한 시기를 살아가는 이들의 탄식과, 박해받는 이들의 신음소리, 그리고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아니었을까요? 힘으로 누르고, 억압하여 빼앗고, 함부로 무시하는 이들로부터 구해달라는 기도가 아니었을까요?

• 천상에서 울리는 찬양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닙니다.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가 부른 새로운 노래를 유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노래는 죽임을 당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구원하여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나라가 되게 하시고,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나라'와 '제사장'이라는 표현은 출애굽에 나오는 시내산 계약의 핵심어입니다. 계시록은 지금 출애굽의 언어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비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택하시어 당신의 꿈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고전1:28).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가 노래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들은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요한은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새로운 노래'라고 일컫습니다. '새로움'은 요한계시록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계시록은 언제나 옛 세계가 끝나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격변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격변기는 고통의 때입니다. 특히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이들은 많은 박해를 받는 때입니다. 옛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세계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계14:12). 성도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내다보며 이 땅의 인력에 저항해야 합니다. 폭력과 지배를 넘어 사랑과 섬김을 선택해야 합니다. 믿음은 결단입니다. 땅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가지 않기 위해 주님의 은총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울려난 노래는 또 다른 노래를 부릅니다. 수많은 천사들이 죽임 당한 어린 양을 찬미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권세와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12)

마치 물결이 번져가듯이 어린 양을 향한 찬양이 천사들의 합창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어린 양이 권세, 부, 지혜, 힘, 존귀, 영광,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어린 양에게 귀속되는 가치가 일곱 가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7이 완전수라는 것은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어린 양은 하나님과 같으신 분입니다. 천사들의 노래가 채 스러지기도 전에 피조물의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께서는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영원무궁 하도록 받으십시오"(13b) 하고 노래합니다. 저는 삶이 권태롭다고 느낄 때면 요한계시록 5장의 이 광경을 머리에 그리곤 합니다. 우주의 중심에서부터 번져 나오는 구원과 해방에 대한 찬가가 차츰차츰 온 땅으로 번져가는 모습을 그리다보면 어떤 희열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 '아멘'을 이끌어내는 삶
오늘의 본문에서 놀라운 대목은 온갖 피조물의 찬양 소리에 네 생물이 '아멘'으로 응답하는 장면입니다(13). 하늘과 땅이 이렇게 교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하늘의 아멘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요? 주전 8세기의 예언자인 호세아도 하늘과 땅의 이런 아름다운 조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내가 응답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기름에 응답하고, 이 먹거리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할 것이다."(호3:21-22)

저는 이 대목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삶이란 불통의 세상을 소통의 세상으로 되돌리는 것, 적대하던 이들이 서로를 따뜻하게 환대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파커 파머는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일, 불의에 대항하는 일, 슬픈 자를 위로하는 일, 전쟁을 끝내는 일과 같은 것"이야말로 우리가 부름을 받은 위대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일을 두고 실적을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결과에만 집착하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랫동안 평화를 위해 일해 온 어떤 분은 자기가 낙심하지 않고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얼마나 실적을 올리고 있는지 자문한 적이 한 번도 없고, 내가 신실한지 여부만 물어왔다."(파커 파머, <일과 창조의 영성>, 아바서원, p.140, 141)

주님은 우리를 생명의 바람, 평화의 물결이 되라고 부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가시적 현존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드러낼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을 우리 왕으로 모시고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하나하나가 하늘의 '아멘'을 이끌어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4년 11월 23일 12시 08분 5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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