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말의 시금석
요7:10-18
(2014/12/7)
[그러나 예수의 형제들이 명절을 지키러 올라간 뒤에, 예수께서도 아무도 모르게 올라가셨다. 명절에 유대 사람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물었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소?" 무리 가운데서는 예수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더러는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더러는 무리를 미혹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예수에 대하여 드러내 놓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명절이 중간에 접어들었을 즈음에,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셨다. 유대 사람들이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런 학식을 갖추었을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알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만,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그 사람 속에는 불의가 없다."]
• 말은 신뢰의 토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인 오늘은 대설입니다. 가난한 옛 농부들의 마음이 스산해지는 때입니다. 늦가을에 거둬들인 벼 가운데 몇 섬은 팔고, 세금 내고, 땅 주인에게 도지賭地 내고, 제사에 쓸 것 여퉈두고, 이듬해 봄에 씨앗으로 쓸 것 떼어놓고 나면 남는 것이 얼마 없었습니다. "엄부렁하던 것이 이제는 남는 것이 아주 없다." 좀 쓸쓸하지요? 그래도 농부들은 다가오는 봄을 내다보며 마음을 다잡곤 했습니다. 낮이 점점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세상 또한 그러합니다. 저 차가운 베링해에 수장된 이들을 생각하면 화가 납니다. 큰 사고가 나면 그때만 여론이 들끓고, 정치인들이 긴장할 뿐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은 일이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은 우리가 지겹도록 들어온 말입니다.
말 잘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진실한 말을 듣기 어렵습니다. 이게 우리의 비극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곧이곧대로 듣질 않습니다. 이면의 동기를 먼저 헤아립니다. 그가 어느 입장에 서서 말하는 사람인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나와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불신이라는 음습한 기운이 우리 사이를 떠돌고 있습니다. 말에 대한 신뢰는 한 사회의 토대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 토대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말을 다시 세워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라고 선언합니다.
요한은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매우 신비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이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격언이 있습니다만, 인간은 말로 세상을 창조합니다. 매를 맞고 싶거든 길거리에 나가서 아무에게나 욕을 해보십시오.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웃는 낯을 보고 싶거든 사람들을 환대하고 칭찬의 말을 해보십시오. 말로써 천냥 빚 갚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말은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말은 남을 설득하는 말, 화려한 말이 아니라 진실한 말입니다. 진실한 말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을 통해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 바람 부는 대로
본문 말씀은 "그러나 예수의 형제들이 명절을 지키러 올라간 뒤에, 예수께서는 아무도 모르게 올라가셨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구절에 담긴 긴장감을 느끼려면 이런 서술이 나온 맥락을 살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키는 삼대 순례절기 가운데 하나인 초막절이 다가왔을 때 형제들이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형님께서 세상에 몸을 드러내실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형님은 여기에서 떠나 유대로 가셔서, 거기에 있는 형님의 제자들도 형님이 하는 일을 보게 하십시오.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숨어서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형님이 이런 일을 하는 바에는,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십시오."(7:3-4)
이 구절에는 몇 가지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의 사역에 대해 그렇게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과, 유대 땅에도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형제들이 한 가지 오해한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사역이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고, 귀신을 내쫓고, 사람들에게 정겹게 다가선 것은, 결국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갈릴리라는 변방에 머물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이라는 중심 무대로 진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면서 이번 명절에는 올라가지 않겠노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길을 떠난 후 예수님은 여느 순례자들과 마찬가지로 명절을 지키기 위해 혼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거느린 사람도, 두드러진 표식도 없었습니다. 들뜬 사람들의 행렬 속에서 홀로 침묵하고 계신 예수의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명절에 유대 사람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소?" '그 사람'이라는 호칭 속에 이미 예수에 대한 유대 사람들의 판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가 사람들을 미혹하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서 있는 자리에 따라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립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드러내놓고 자기 생각을 밝히지 못합니다. 성전체제나 공회가 그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약자들은 흔히 강자들의 의중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침묵할 때가 많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일 겁니다. 약자의 슬픔과 비애는 늘 자기 검열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언제나 기득권자들의 눈치를 보며 삽니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기존 체제에 순응하며 늘 부림을 당하며 사는 이들을 일러 '항민恒民'이라 했습니다. 항상 항恒에 백성 민民 자를 결합시킨 조어입니다. 그들은 강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에 익숙합니다. 오랫동안 눈치를 보며 살아왔기에 지배자의 눈으로 자신을 감시하고 처벌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강자들의 시선을 자기화하여 자기보다 약한 이들을 감시하거나 무시하기도 합니다. 이게 보통 대중의 속성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그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기까지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합니다.
• 본질에 속한 말
명절이 중간에 접어들었을 때 예수님은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셨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놀라서 말합니다. "이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런 학식을 갖추었을까?"(15) 낯설지 않은 반응입니다. 체계적인 학교 교육을 받지도 않은 사람이 뭔가 본질을 꿰뚫는 말을 할 때 사람들의 대체적인 반응은 놀람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지식은 배움을 통해 계승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학식이 있다고 하는 이들이 온갖 개념과 범주를 가지고 복잡하게 설명하는 일을, 어떤 사람은 그냥 한 마디로 꿰뚫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직관적 지혜가 발달한 사람들 이 있습니다. <어머니 학교>는 시인 이정록이 어머니 말씀을 받아 적듯 하여 엮은 시집입니다. 그 가운데 나오는 '주전자 꼭지처럼'이라는 시를 들어보십시오.
어미 아비가 되면 손발 시리고
가슴이 솥바닥처럼 끄슬리는 거여.
하느님도 수족 저림에 걸렸을 거다.
숯 씹은 돼지처럼 속이 시커멓게 탔을 거다.
목마른 세상에 주전자 꼭지를 물리는 사람.
마른 싹눈에 주전자 꼭지처럼 절하는 사람.
주전자는 꼭지가 그중 아름답지
새 부리 미운 거 본 적 있냐?
주전자 꼭지 얼어붙지 않게 졸졸졸 노래해라.
아무 때나 부르르 뚜껑 열어젖힌 채
새싹 위에다 끓는 물 내쏟지 말고.
이 시에서 어미 아비의 마음은 하나님의 수족 저림과 연결되고, 목마른 세상과 그 속에서 희망을 만드는 이들이 눈부시게 결합되고 있습니다. 희망은 주전자 꼭지처럼 졸졸졸 흘러나오는 법이니 결과를 얻기 위해 조급해 하지 말라는 교훈도 있습니다. 이 시에는 관념적인 단어나 표현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삶의 진실을 가슴 뜨겁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세상의 어떤 설교보다도, 인간학에 대한 어떤 논문보다도 더 세차게 우리 가슴을 두드립니다. 배워서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삶을 통해 체득한 지혜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전문가들은 자기들끼리만 통용되는 언어와 문법의 규칙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따라 말하지 않는 사람은 무지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종교적인 언어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거룩의 세계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때로는 물이 흐르듯 유장하고, 때로는 폭포처럼 힘차게 쏟아지는 말씀에 사람들은 놀랐던 것 같습니다. 개념과 논리로 오염되지 않은 말, 본질을 향해 곧장 돌진하는 그 말씀은 낯설지만 거역할 수 없는 매혹이었을 겁니다. 말씀의 그런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 자기 불화가 없는 삶
예수께서 하신 말씀 속에 답이 있습니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16) 자기 부정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라면 차마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보냄을 받은 자'로 소개합니다. 주님은 당신이 이 세상에 내려온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6:38). 보내신 분의 뜻은 명백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 혹은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6:39)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10:10b)
분명한 소명의식을 가진 이는 상황이 힘들다고 투덜거리지 않습니다. 울면서라도 희망의 씨를 뿌립니다. 결실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가능성이나 손익을 계산한 후에 어떤 일에 착수하는 사람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에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사람입니다. 영혼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이들은 다 그랬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윤똑똑이들이 보기에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그저 명령받은 바를 수행하는 것이 그의 일입니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있지만 씨앗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확신이 있어야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진실한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의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아니면 마음대로 하는 말인지를 알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눈과 귀가 어두운 저도 어떤 말을 들으면 그 말이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립니다. 의도를 숨긴 말을 들을 때면 속에서 경계심이 발동됩니다. 부드럽지만 그 속에 칼을 숨긴 말도 있고, 구구절절 옳은 말 같지만 결국에는 자기 이익을 위해 발설된 말도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일쑤 말씀-사건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참된 말씀은 그 떨어진 자리에서 변화의 사건을 일으킨다는 뜻일 겁니다. 속에 심겨진 말씀이 발아하는 때가 언제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생명의 말씀은 반드시 결실을 맺는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땅을 적시고, 싹이 돋아 열매를 맺게 하고,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거리를 주고 나서야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사55:10-11).
주님은 다시금 발설된 말이 하늘에서 온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시금석 하나를 우리에게 제시해주셨습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이들의 말은 믿을 게 못됩니다.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의 말은 믿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구분이 좀 모호할 때가 많다는 게 문제입니다. 교묘한 말로 사람들을 호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모든 게 불확실한 세상에 살다가 지친 이들은 뭔가 확고하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끌리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사유하는 주체가 되기보다는 누군가가 이끌어주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말끝마다 '주여', '할렐루야', '아멘'을 달고 살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종교 상인들에게 잘 속아 넘어갑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면 보입니다.
남의 말을 판단하는 데만 집중할 것 없습니다. 먼저 우리 말이 진실한가를 물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말하기 전에 세 황금 문을 지나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나의 말은 진실한가? 나의 말은 꼭 필요한 말인가? 나의 말은 친절한가? 이런 질문 앞에 설 때 우리 말은 점점 예수의 말을 닮게 됩니다. 살리는 말, 북돋는 말이 되살아나야 우리 사회도 새로워질 것입니다.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던 주님은 지금 진실한 말씀으로 우리 곁에 다가오고 계십니다. 그 말씀을 공손히 모실 때 우리는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 이 땅에서 구현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등 록 날 짜2014년 12월 07일 11시 57분 3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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